안양천, 산업화의 역사와 흘러왔다

한국의 강둑길52-안양천(의왕·군포·안양·광명·서울)

안양천, 산업화의 역사와 흘러왔다

 

안양천은 의왕 백운산 자락을 출발할 때만 해도 맑은 내 청계(淸溪)다. 백리도 못되는 이 짧은 강은 산업화의 시대를 몸으로 지켜내면서 만신창이가 되었다. 불국토(佛國土)의 이름이라 안양(安養)이라 했다는데 검은 시궁창의 속살엔 냄새가 진동했었다. 모두들 살만해 지자 냇물의 빛깔을 되돌리려 안간힘을 쓴 덕택에 맑은 물의 자신감이 비친다. 허나 하동(河童)이 뛰어 들기는 무리다. 강바닥 물때까지 걷히기엔 이 물줄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도시의 강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부딪히게 한다. 마주치는 그대들이 반가울 겨를이 없는 마른 강이 되고 만다
여름이어도 강물에 뛰어들 수가 없다. 그저 따로 물놀이를 하는 수밖에

 

 

 ‌기술·용품협찬 : 태능한성바이크(02-971-7206)
 ‌자 전 거 협 찬 : 알톤 전기자전거 스트롤

 

▶  안양천  2시간 소요(쉬엄쉬엄 4시간),   의왕 고천 - 서울 강서(36km)

 

▶ 안양천(유로연장 32.21km, 유역면적 286㎢. 한강 제1지류)
- 국가하천 : 안양시 안양동 경부본선철교~한강 합류점(서울 강서구 염창동)
- 지방하천 : 경기 의왕시 왕곡동~안양천 국가하천 기점
- 발원지 : 의왕시 왕곡동 백운산 북서사면. 최장발원지-골사그네 마을 지지대고개 부근
- 한강의 제2지류 학의천, 수암천, 삼성천, 목감천 등 10개, 제3지류 8개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안양천의 최장발원지는 지지대(遲遲臺) 고개다. 비운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행(陵幸)을 마치고 돌아가던 정조대왕이 발걸음을 차마 떼어놓을 수 없어 지체했다는 효심의 언덕이다. 광교산에서 수리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반대편에는 황구지천이 시발한다. 자연부락으로 보면 골사그네 마을에서 안양천 따라가기를 시작하지만 백리도 못되는 짧은 냇물이다.

 

의왕시는 대숲을 만들어 삭막한 주변 풍경의 차단을 시도했다(의왕 고천)

 

안양천, 첫 물길 찾기도 어렵다
1번 국도가 갈라놓고, 의왕IC가 길을 혼돈스럽게 해 냇물은 초입을 찾기도 어렵다. 갈대류가 기세등등하여 물은 보이지도 않지만 자전거길은 희미한 싱글트랙이다. 피리를 만들지도 못할 정도로 가는 대나무 숲을 조성해 을씨년스런 주변을 차단한 의왕시의 노력은 가상하다.
오불조불 붙어 있는 다리는 몇 백 미터 간격으로 열병(閱兵)자세로 서있다.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1번 국도변엔 포도원사거리라는 이름만이 이 자리가 한 때 포도밭이었음을 증명한다. 수원 하면 딸기였고, 안양 하면 포도였던 시절이 있었다. 도로가 우리네 삶의 공간과 시간의 이격거리를 좁힐수록 포도와 딸기는 원심력 방향으로 멀어져 자리를 잡았다.
1997년 외환위기 전에는 ‘경안운하계획’이라는 것도 있었다. 한강↔안양천↔반월천↔시화호↔대부도를 잇는 물길 계획이었다. 지금이야 운하의 ‘운’자만 들어도 기겁을 하는 형국이니 말도 꺼내기 어렵겠지만 사실 군포시 당정동에서 대야미동 쪽으로 물길만 터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플랜이었다.

 

 

산업화의 살아있는 박물관, 안양천변 공장들
안양천을 중심으로 늘어서 있던 공장의 이름은 이 나라 산업화의 이정표가 된 기업이었다. 고려합섬, 유한양행, 농심, 금성전선, 동양나이론, 한국제지, 삼덕제지, 유유산업, 금성방직, 노루표 페인트, 동아유리 등등 가리봉동 일대 구로공단까지 이르면 이 나라 경공업의 완결편을 이룬다. 더러는 떠나거나, 이름을 바꾸고, 여전히 남아 있기도 하다. 팽창하는 서울을 따라 공장도 안양의 포도밭을 점령하면서 남진한 결과다. 공장의 진화에서 보폭을 따라가지 못한 축은 아직도 눈치꾸러기를 면하지 못하면서도 냇가에 스크럼을 짜고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안양천은 초기 산업화의 무대답게 오염으로 악명이 높았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와 물고기가 살 수 없는 폐수의 침전이 유백색 물길 속에서 수초처럼 흔들렸었다. 생태문학으로 분류되는 이 오염을 한 시인은 이렇게 한탄하면서도 희망을 그렸다.
 

 

빨갛게 충혈된 ppm의 경고등 아래/ 스모그의 안개가 육교를 지우고/ 다리 건너 마을 숲을 지울 때면/ 심한 구토증세를 일으키며/ 안양천은 몸 져 눕는다./(중략) 정체불명의 검은 옷자락을 찢고/ 기억의 저편에서 일어서는 빌딩/ 아침 태양빛을 가르며(중략)/ 어디서 날아 왔을까/ 황조롱이 찌르러기 떼가 물속을 쪼고 있다/(여명옥의 ‘안양천’ 중에서)

 

 

이제 안양천은 돌고기, 모래무지, 몰개, 버들치가 살고, 쇠오리, 흰목물떼새, 넓적부리, 원앙이 헤엄치는 물이 되었다. 자정능력을 상실한 검은 강물에 대한 반성으로 ‘안양천살리기 10개년 종합계획’에 모두가 힘을 모은 결과다.

 

 

시흥군 안양읍 시절이 그립다
자칫 머리를 부딪힐 듯 낮은 1.7m짜리 다리 아래를 허리 굽혀 지나가야 하는 곳도 여러 군데다. 덕천교에 이르면  청계산과 백운산 서북사면 물을 데려오는 학의천이 합류한다. 관악산과 삼성산을 중심으로 하트모양을 그리면서 안양천과 한강, 양재천과 학의천을 잇는 환상(環狀) 자전거코스가 완성되는 지점이다. 
내가 안양으로 이주한 1960년대 후반으로 돌아간다. 시흥군 안양읍 시절이다. 안양이 자라는 터는 시흥이 내몰린 터다. 지금의 박달동도 시흥군 서면 박달리에서 편입한 것이다.


1981년 광명시가 시흥군 서면에서 떨어져 나간다. 금천은 시흥이라는 이름만 껴안고 서울시민의 자리를 지킨다. 옛날부터 시흥을 알거나 조금만 지리에 눈 밝은 사람이라면 “시흥시에 시흥이 없다”는 것에 의아해 할 것이다. 1988년까지 시흥군청이 안양에 더부살이를 하긴 했지만 1973년에 시로 승격한 노른자위 안양과 문패를 갈아단 광명이 빠진 시흥군은 외곽 산쪽으로 붙은 과천면, 의왕읍, 군포읍만 남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그 형세가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과 서파키스탄(파키스탄)으로 갈라진 것과 흡사하다고 했을까. 잘나가던 때의 시흥군은 북으로는 영등포읍과 동작구 일대인 북면, 서울대와 금천구 일대인 동면, 광명시 일대인 서면, 군포시 일대의 남면, 안산시가 된 반월출장소까지 관할했다. 안양시가 된 서이면, 의왕면, 과천면은 물론 서울교대가 있는 서초구까지 신동면이었으니 넓기도 넓었다. 사실 지금의 시흥시는 억지로 이름을 붙잡다 보니 인천 앞바다의 짠물이 드나드는 소래 일대를 시흥이라고 고집하게 된 어색한 이름이 되고 말았다. 무엇 때문에 서울의 위성도시이면서도 서울에 너무 가까워 특급열차조차 서지 않는 안양을 토박이 김대규 시인은 애달파 했을까. 고향이라 그랬을 것이다.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친구야 / 놀러 오려거든/ 삼등객차를  /타고오렴(후략)

 

안양천의 시작은 수풀더미 속 작은 물길에서부터다(의왕 고천)
공장과 주거가 뒤섞인 표정, 안양천의 본질을 설명해 주는 구도다(군포 당정)
안양역에서 찍은 한국제지 근로자들의 지붕위 시위. 시위는 역시 ‘보여 주겠다’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 이제는 공장도 이전하고 아파트가 들어섰다(조용연 자료사진, 1995)
할머니가 손녀를 보는 눈은 사랑이 철철 넘친다. “두벌 자식이 더 없이 귀하다”는 어른들 말씀이 틀리지 않는다(안양 비산)

 


상전벽해,  평촌 신도시
학의천이 관통하는 동안양의 벌판은 이름마저 ‘평촌들’이었다. 지금은 아파트단지와 안양의 신도시로서 중심역할을 하지만 멀리 귀인동 자연부락을 빼면 꽤나 넓은 들판이었다. 천정부지로 뛰는 집값을 잡기 위해 1989년 분당·평촌·산본·중동 4대 신도시 개발이 선포되자, 밀려나는 토박이들의 시위는 심지어 똥장군까지 동원한 결사저항으로 이어졌다. 이때 동원되었던 시위방어(진압이라고 결코 할 수 없는)에서 경찰기동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화염병이나 돌이 아니었다. 성난 농민들이 얇은 비닐에 인분을 넣어 주둥이를 대강 막고 던져대는 이른바 ‘똥탄’이었다.
발효가 제대로 된, 이 신병기의 역습에 피폭된 대원들은 혼비백산했다. 땀과 범벅이 된 대나무 소재의 방석복 위에 터진 화학탄(?)의 위력 때문에 버스에 오를 수가 없었다. 화염병보다 무서운 ‘똥탄과의 전쟁’ 속에 신도시는 번듯한 모습으로 구획정리를 했고, 노태우정권의 최대 과제인 집값은 고삐가 잡혔다.


1번 국도와 나란히 삼막천과 삼성천의 물길이 내려온다. 정조의 능행 참배라는 효심이 만든 또 하나의 작품이 만안교(경기도유형문화재38호)다. 능행차시에 만드는 다리는 행차 때마다 임시다리(舟橋)를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동원된 백성의 신역이 보통 고된 것이 아니어서 아예 돌다리로 영구히 놓아 이름도 ‘만백성이 편안하라’고 만안교(萬安橋)라 한 것이다. 1980년 국도 확장으로 옛 위치에서 뒤로 옮기긴 했지만 여전히 무지개 모양 홍예(虹霓)양식 석교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77년 물난리의 기억도 희미해져
안양천이 물줄기를 크게 꺾을 즈음에 안양대교가 나타난다. 사람들은 무심하게 다리 밑 그늘과 바람에 더디게 가는 여름 한나절을 억지로 떠나보내고 있다. 또 기억 한토막이다. 안양토박이들의 기억을 결코 떠날 수 없는 사건은 77년 물난리다. 40년이나 지나도 기억이 생생한 그야말로 난리였다. 1925년 한반도를 강타한 ‘을축년 대홍수’는 사흘 동안 한강, 임진강 유역에 650㎜라는 기록적인 폭우로 가뜩이나 가난한 식민지의 삶을 헤집어 놓았다.
1977년 7월 8일 금요일 저녁부터 안양, 정확하게 말하자면 관악산 남쪽, 광교산 북쪽, 수리산 동쪽의 옴폭한 들판 안양에 하늘구멍이 뚫렸다. 나중의 기록이지만 저녁 4시간반 동안 430㎜의 비가 퍼부었다. 숫자는 가물거리지만 언론은 평당 몇 양동이의 물을 쏟아 부은 셈이라고 놀라워했다. 안양 병목  안에 있던 담배촌(수리산성지성당 근처)은 산사태로 아예 마을이 사라져 버려 12가구 49명이 세상을 떠났다. 통신과 교통은 마비되고, 대농 안양공장의 방직용 원면 제품이 침수되고, 한국병유리의 용광로가 멈춰버렸다.


만조에 걸린 안양천 물길이 막히자 하수가 역류하고 맨홀 뚜껑도 열렸다. 서로 의지하며 허리띠를 묶은 채 탁류를 헤치고 퇴근하던 공원들이 맨홀에 빨려 들어가 죽기도 했다. 곳곳에 고압전선에 감전해 죽는 사람(6명)도 속출했다. 루핑집(루핑이라는 기름종이로 지붕을 이은 집)에 세 들어 살던 나는 그 다음날 아침 물바다가 된 박달시장 골목을 보고 기겁을 했다. 떠내려 온 문짝위에 고양이는 살아있고, 물에 뜬 시신이 전주 옆에 걸려 있었다. 무시무시한 물폭탄이었다. 이때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안양대교 북단 교각 상판이 V자로 주저앉았다. 다리 옆을 지나다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 했다. 소방대원들이 로프를 타고 물속에 들어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물살도 거셌다. 다리 위에서 늘어뜨린 로프에 뭔가 매달려 있었다. 사람의 손목이었다. 허리 아래가 진흙더미에 묻힌 시신이 더 이상 떠내려가지 말라고 인양작업을 위해 우선 매달아 놓은 것이었다. 사진이라도 있었다면 해외토픽 감이다. 100여명의 사망자와 서민주택이 천만원도 못되던 시절 1000억원의 피해를 낸 안양 물난리의 잔인한 기억이다.

 

안양천에 합류하는 학의천. 청계사, 백운호수에서 흘러내린 물이다(안양 비산)
정오의 안양대교 아래에서 쉬는 노인들. 나이는 주인을 주저앉히고, 청춘은 무지개로 지나가 버렸다(안양 안양2)
강변으로 덧댄 도로는 훌륭한 그늘을 선사하는 양산이다(안양 박달)
연을 띄우는 할아버지, 적당한 바람이 없으면 연 꼬리는 삶은 낙지다리보다 더 처진다(안양 비산)
헬기에서 촬영한 1995년의 안양천. 자전거길이 개발되기 전 시흥대교 근처(조용연 자료사진)
아예 웃통을 벗고 달리는 청춘이 부럽고도 딱하다(안양 석수)

 

 

안양유원지에 들어선 ‘안양예술공원’
안양대교 언저리에서 삼성천과 삼막천의 물이 합해진다. 삼성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골짜기가 오래도록 수도권시민의 사랑을 받아온 안양유원지다. 오늘날 ‘안양예술공원’이다. 초입의 포도밭은 서울에서도 시내버스만 타면 닿을 수 있어 청춘들의 단골 데이트 코스였다. 두더지를 잡거나 인형 맞추기 사격장의 코르크 탄이 애간장을 녹이며 돈만 먹어 대던 것도 옛일이다.


들머리에 ‘김중업박물관’이 손짓한다. ‘유유산업’이 있던 자리다. 유유산업하면 몰라도 극장의 막간 광고에 등장하는 활성비타민 ‘비나폴로’는 남자의 근육 위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의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한국 현대건축의 1세대인 김중업의 일생이 이 골짜기에 남게 된 것도 바로 유유산업의 본관 건물을 그가 설계했기 때문이다. 안양예술문화재단이 이 건물과 경내에 잠들어 있던 안양사의 절터를 복원하고 다시 김중업을 주인으로 맞아 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일제 때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했고, 프랑스의 세계적 건축의 거장 르꼬르뷔지에에게 사사받은 한국 현대건축의 스승이다. 김중업을 몰라도 그가 설계한 청계천변의 그 유명한 3·1로 빌딩은 당시 동양최고의 고충이었다. 그가 꼼꼼한 글씨로 “건축은 인간에의 찬가입니다. 인간이 빚어 놓은 엄청난 손짓이며, 또한 귀한 싸인입니다.”라고 쓴 건축에 대한 정의가 가슴을 울린다. 자신이 설계한 건물에 자기의 일생을 들여놓고 떠난 이야 말로 얼마나 행복한 영생이며, 부활인가. 일부러라도 한국건축사의 한 장(章)과 여백을 둘러보는 일이야말로 백리도 못되는 안양천 여정에 윤기를 더할 것이다.

 

 

남서울역이 될 뻔한  광명역
박달동을 지나 충훈부부터는 자연하천의 모습을 지닌 채 기아대교까지 이어진다. 인구밀도로 봐도 좀 한적한 곳이다. 오랫동안 시민들의 배설물을 처리하거나 둘 데가 마땅찮은 자재들을 적치하는 장소로 버려져 있던 곳이다. 박카스 병을 만들던 동아유리, 알록달록 노루표페인트가 강 건너편 공장의 전부였고, 근교도시형 채소농사를 위한 비닐하우스의 행렬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 기아산업까지 이어졌었다. 당초 남서울역으로 계획된 KTX역을 기어이 광명역으로 만든 자존심이 광명역사의 그 웅장한 철골구조만큼이나 단단했다. 관악산 아래에 바위터널을 뚫어가며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를 건설해 강남의 여객수요까지 20분 만에 잡아끌려고 했으나, 수서발 SRT의 개통으로 생각만큼 대박을 터트려주지는 못할 듯하다.


광명시 소하동은 여전히 ‘소하리’라는 이름으로 토박이들에게는 불린다. 길 위에 굴러가는 탈 것의 역사를 제대로 간직한 곳이기에 소하리는 각별하다. 기아산업은 작명에서도 보기 드문 성공작이다. 기아는 영어의 gear를 음역했다는 것이 유력한 기원이지만, ‘아시아의 떠오르는 별’이라 의역해도 무방하다. 기아(起亞)는 기아(飢餓)나 기아(棄兒)를 연상케 해 찝찝하다는 소수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멋진 이름이다. 삼천리자전거의 전신이 바로 기아산업의 출발선이다. K-360 삼륜차를 지나 현대자동차그룹의 차남 반열까지 올라섰기에 두 바퀴, 세 바퀴, 네 바퀴를 두루 거쳐 고희(古稀)의 연륜을 자랑할 만한 훈장이다. 

 

자연하천의 모습을 가장 근사하게 지닌 구간, 충훈부 앞이다(안양 박달)

 

가리봉 벌집시대와 가산디지털단지
시흥대교를 지나간다. 위세 떨치던 시흥의 한 꼭지다. 안양천 강둑을 사이에 두고, 자전거길과 서부간선도로는 서로 쳐다볼 수는 없지만 전혀 다른 풍경이다. 서부간선도로의 정체는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악명 높다. 언제나 코를 꿴 채 끌려가듯 앞차의 범퍼를 따라 갈 수밖에 없다.  자전거의 위력은 그런 길옆에서 한껏 드러난다. 
이제 금천구청역으로 바뀐 경부선 옛 시흥역을 지나면 독산동 일대부터 구로공단이 나타난다. 1977년 ‘수출한국 1억달러 돌파’의 산실인 구로공단은 그저 숙명처럼 고향 부모님과 남동생 뒷바라지를 하던 이 땅의 누이들이 ‘공순이’라는 이름으로 살던 눈물겨운 현장이다. 어떡하든 살아가야 하는 절박한 시대에 인권과 노동의 순수한 가치는 뒤로 밀리고 10월 유신과 5공화국의 그림자가 어둡게 구로를 덮었다.
00어패럴 라벨이 붙은 봉제공장의 미싱이 밤낮없이 돌아가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을 눈물 흘리며 읽던 소녀가 소설가로 탄생한 무대도 구로공단이다. 야학이 불을 밝히고, 노동문학이 태어났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의 무대도, 영화 <박하사탕>의 영호가 충북선 철교위에서 “나 돌아갈래!”를 절규하던 목적지도 구로공단이다.
공중변소 앞에서 아침마다 싸움질하던 가리봉동 벌집과 쪽방촌은 이제 조선족의 거주지로 새롭게 태어났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1세대의 후손들이 우리에겐 어색한 뚱베이풍(東北風)의 조선족 음식을 내놓고, 처음엔 거슬리지만 중독성이 강한 양꼬치를 구워대는 연기 속에서 한국과 중국이 다시 만나는 가리봉의 밤풍경이 펼쳐진다.
이제 구로공단은 한국의 실리콘벨리로 변했다. 이름도 서울디지털단지가 되고, 가리봉이란 가난한 외투를 벗고 가산디지털역으로 1호선 전철역 이름도 바뀌었다.


어느새 구로역이다. 내 기억 저편에 밀가루 공장 광고판이 유독 떠오른다. ‘부러운표 밀가루’다. 불보살을 연상시키는, 가부좌를 튼 할아버지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CJ 제일제당 영등포공장의 전신인 동립산업은 미국의 차관으로 들여온 소맥과 원당을 정제해서 밀가루와 설탕을 만들고, 건빵도 생산하여 군납했다. 보릿고개의 귀한 식재였다. 그런데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 의문은 밀가루 광고라면 ‘부드러운’이어야지 어째서 ‘부러운’표 밀가루인가?  못 먹어 부황이 드는 얼굴로 사는 서민은 뽀얀 밀가루가 부럽기도 했겠다. 이제는 근대문화유산이 된 동립산업의 소맥 사일로(silo)는 살만한 시대가 되면서 건너편 강변에 들어선 백구의 향연장, 고척스카이돔 야구장의 은회색과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살만한 세상이다. 벌써 염창교 건너 한강이다. 경제는 오래도록 어두웠고, 되는 장사가 없다 해도 휴일 두 바퀴의 외출로 강둑길은 붐빈다.

 

때론 규칙을 어기고라도 물가로 난 길로 들어선다. 거긴 속도에 내몰리지 않아도 되니까(양천 목동)
자전거는 오지 말라는 강둑길 그늘, 그래도 그 길로 가고 싶다. 사람만큼 느린 보폭으로, 속도로부터 해방되고 싶다(금천 가산)
;물병이 찢어질 정도로 부딪힌 자전거. 합의도 없이 가려는 사람을 붙잡는 힘으로 보아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다(구로 구로1)
안양천이 한강에 몸을 맡기는 자리, 사람이 너무 많다. 나도 한 사람 보탰구나(영등포 양화)
무도 수련을 위해 체력을 키우고 있는 젊은이들. “급소공격이 무예의 정점”이라고 붉은 옷 사범이 말했다(구로 구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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