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의 강 안성천, 평택들판을 적시다

한국의 강둑길53-안성천(안성 · 평택)

자존의 강 안성천, 평택들판을 적시다

안성이라는 이름은 ‘안성맞춤’이라는 명사로 우리 곁에 자리 잡았다. ‘조선 3대 시장’이라는 안성장의 자존이 안성에 ‘배타적’이라는 굴레를 씌운 것도 사실이다. 차령산맥이 맥을 죽인 언덕 삼죽에서 안성천은 출발한다. 이야기가 무성한 고장 안성을 거쳐 평원과 소택지가 주류라 산이 귀한 평택을 지나간다. 한강권역이라 그 휘하에 있다 해도, 한강과는 몸 한번 섞지 않는 오만한 강이다. ‘안성천 수계’라는 혼자만의 물길을 뽐내며, 국가하천인 황구지천, 오산천, 진위천의 물까지 모아서 아산만 방조제까지 뒷짐 지고 흐른다
글 조용연(여행작가)

 ‌기술·용품 협찬 : 태능한성바이크(02-977-7710 수 휴무)

 

‘미8군 평택시대’를 열며 당당히 강둑길을 라이더에게 내준 건 자신감이다. 옛날 같으면 ‘군사보호지역통행금지’가 정답이었을 것이다

 


▶ 안성천(유로연장 59.5km, 유역면적 1655.73㎢ (안성천 수계)
- 국가하천 : 안성시 공도읍(한천 합류점~아산만 방조제)
 - 지방하천 : 안성시 삼죽면 내강리~안성천 국가기점
 - 발원지 및 최장발원지 : 안성시 양성면 천주교 미리내 성지 뒤 갈미봉 북사면         
                                 ※ 진위천 발원지 언저리
 - ‌안성천수계 : 1지류 19개(한천, 청룡천. 입장천, 성환천, 진위천, 둔포천 등), 제2지류 43개(송전천, 오산천, 황구지천, 서정리천), 제3지류 32개(화산천, 수원천, 공세천, 궐리천, 원천리천 등), 제4지류 5개(광교천, 영덕천 등)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국가하천 치고 유독 안성천의 시발은 희미하다. 그도 그럴 것이 광주산맥이 북한 땅 철령에서 시작하여 서울의 동북방으로 내려오다 한강까지 건너 그 소임을 다하고 멸하는 꼬리에 용인과 안성이 있다. 게다가 태백산맥에서 분기하여 계방산, 치악산으로 뻗은 차령산맥도 여주 오갑산부터는 흐지부지하다 안성 서운산에서 다시 산맥의 의관을 갖추는 처지다. 그 중간은 다들 잔구성 산지이니 오래된 자존의 고읍 죽주(竹州)의 고개를 넘어도 고개인줄도 모르는 게 당연하다.

 

미군병사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캠프험프리스’의 강둑길은 한미우호의 또 다른 상징이 될 수도 있으리라

 

죽주의 삼형제 중 막내, 삼죽에서 출발하다
죽산(竹山)의 할아버지 함자인 죽주의 막내 삼죽에서 안성천의 여정을 시작한다. 땅이름의 속성으로 보아서도 대나무 죽자가 들어간 고장은 대개가 평야지대에 위치한다. 삼죽에서 안성읍내까지 안성천을 따라 가는 길은 1927년 개통된 비운의 철도 안성선이 지나가던 길이었다. 천안에서 장호원까지 19개 역 가운데 안성-장호원 구간 11개 역 41.4km가 ‘선로공출명령’에 따라 뜯겨져 나갔다. 태평양전쟁에서 벼랑으로 몰리고 있던 일제가 여염집 놋그릇까지 다 빼앗아 가던 1944년의 일이다.

‘그 해 여름’으로 표현되는 8·15 광복의 그날 무더위도 이랬으리라. 턱까지 차오르는 대지의 열기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강둑도 달구어져 있다.

이내 ‘동아방송예술대학’이 길목에 나타난다. 1995년 ‘동아방송전문대학’이 이 산골짜기에 첫 삽을 떴을 때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20년의 세월은 대한민국 최초의 방송전문고등교육기관이라는 자부심을 지닌 ‘디마’라는 애칭을 낯설지 않게 만들었다. 53만평의 부지에 5개 학부 16개 학과가 있으니 사막의 기적을 이뤄낸 ‘동아건설’의 배포답다. 그때만 해도 미디어의 위력이 이렇게까지 세상을 지배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할 때였다. 최원석 회장이 숱한 화제를 뿌리면서 겪은 방송 세계에 대한 선구안도 절대적 바탕이 되었으리라. 무거운 장비를 들고 캠퍼스를 뛰어다니는 학생들이 바로 무대 뒤의 사람들이 된다. 내신 수능등급만으로 전국 최상위에 속하니 “이게 무슨 전문대냐?”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안성맞춤’의 고장, 고읍 안성
삼죽에서 안성시내는 이십리 남짓하다. 여전히 읍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게 한산하다. 경기도에서도 늦게 시로 승격한 안성이 대구·전주와 더불어 전국 3대 시장에 들었다는 말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안성장에 가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안성장은 한양장보다 물목이 2가지가 더 있다.”고 할 정도였으니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안성장은 유기그릇과 가죽꽃신이 유명했다. 모두 사대부집 소요였다. 안성의 제기그릇이 작고도 아담해서 조선의 양반들이 ‘안성맞춤’이라 했다한다. 신관 사또가 올 때마다 그 또한 미리 주문(?)받은 유기그릇을 상납하기 위해 공출을 닦달했으니 중간착취는 오죽했으랴. 안성 사람들이 꾀를 내서 “빈대도 낯짝이 있지 이래도 턱없는 짓을 하겠냐.”며 미리 세워준 ‘영세불망공적비(永世不忘功績碑)’가 43개나 줄 지어 서있으니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안성사람들은 배타적’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배타는 바깥세력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기질이다. 이는 몽골군의 침공 때 저항했던 죽주산성 전투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일어선 고춧가루장군 홍계남으로 이어지는 뿌리 깊은 정신이다. 오죽했으면 일제 때도 불매운동으로 일본 점방이 결국 백기를 들었으랴. 하기야 장터가 크게 번성했으니 그 고을 사람들이 셈에 빠를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누군가 말했다. 당초 서운면 일대에 들어서기로 거의 계약단계까지 갔던 ‘자연농원’(에버랜드의 옛이름)이 몇몇 지주가 돈 몇 푼 더 받으려 고집부리는 바람에 용인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끌탕을 했다.

조선조 위대한 문사,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의 한 무대가 안성장이다. 남산딸깍발이 허생원이 변부자에게 1만 냥을 빌려 안성장에서 밤, 대추를 비롯한 제수용품을 사다 팔아 10배를 튀겨 부자가 된다. 요즘말로 매점매석을 한 ‘악질경제사범’이다. 그 돈으로 무인도에 들어가 도둑들과 3년간 농사를 지어 백만금을 벌어 50만금은 바다에 버리고 한양으로 와서 빌린 돈을 당당하게 갚았다. 변부자는 큰손 투자자였고, 허생원은 그나마 양식 있는 재테크의 귀재였던 것이다. 

안성이 ‘남사당놀이패’의 본고장이 된 것도 결국은 장터의 번성에 있다. 서운산 자락에 있는 청룡사에서 숙식을 하고 있던 남사당패가 1920년대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안성의 자랑이다.  전설적인 여장부 ‘바우데기’가 꼭두쇠가 되어 줄 타고 춤추는 전설적 기예는 민중놀이의 상징으로 맥을 잇고 있다. 바우덕이의 묘가 청룡사 가까이 자리 잡고 있으니 죽어서도 안성이 본향이다. 황해도가 무대인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의 인물들이 안성 땅까지 연을 맺는 것도 천민 광대들 삶의 바닥과 맥이 닿아 있다. 청룡사, 칠장사 같은 절집들이 이들을 ‘불목하니’라도 시켜 추운 겨울 얼어 죽지 않게 먹이고 재워준 것 또한 가없는 구휼의 흔적이다.

안성의 대로변은 벌써 하우스에서 자란 포도 가판대가 즐비하다. 1901년 귀화한 프랑스신부 안토니오가 가져온 마스캇 품종의 포도나무 세 그루가 안성을 포도의 고장으로 만들어 이 여름과 가을을 풍성하게 한다. 안성이 수도권 산업지역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징표는 인구의 7%가 넘는 외국인근로자가 함께 살고 있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안성시내 들머리에 ‘안성맞춤랜드’라는 안내판이 맞아준다. 시대의 흐름이라고는 하지만 안성맞춤이 그야말로 안성의 고유한 전통이자 자랑거리라면 ‘랜드’를 붙인 건 가벼워 보인다. ‘안성맞춤공원’이라고 하면 임팩트가 약한가? 

 

안성천의 최상류는 죽주 3형제의 막내 삼죽에서 시작한다(안성 삼죽)

 

‘디마’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동아방송예술대학교는 숲속의 보배다(안성 삼죽)

 

칸나 꽃이 반겨주는 강둑길(안성 보개)

 

안성천 둔치, 더위가 목을 조르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안성시내)

 

더위를 운동으로 이겨보려는 이들의 땀은 보약이다(안성시내)

 

 

한독목장과 안성팜랜드
안성 초입에서는 올해 혹독한 가뭄을 겪은 금광저수지의 물이 합류하고, 안성 시내를 벗어날 즈음 한천이 더해진다. 금광저수지가 평택호 수계와 연계하는 예산을 확보했다고 자축하는 플래카드가 펄럭거린다.
한천은 고삼저수지 쪽에서 내려오는 물이라 사실 안성천 상류보다도 수원이 더 풍부하다. 강둑길을 조금 벗어난 길, 공도읍에 있는 ‘안성팜랜드’로 핸들을 튼다. 여름날 물놀이 동산쯤으로 여겨지는 이 언덕의 내력은 눈물겹다. ‘한독목장’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경제발전을 위해 서독으로 차관을 구걸하다시피 떠난 박정희 대통령의 여정 속에 탄생했다. 뽀얀 서양아이들을 보면서 버짐꽃이 피고, 기계충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이 땅의 어린이들이 떠올랐다. “우리나라 아이들에게도 우유 한번 마음껏 먹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단다. 

그렇게 1969년 차관 50만 달러와 홀시타인 200마리로 시작한 목장이다. 지금껏 농협이 관리하고 있고, 농협과 관련한 연구·교육기관들이 이 구릉에 자리 잡게 된 내력이다. 1974년 통계로 안성에 116개의 목장이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원주택지의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대림동산’도 이제는 음식점과 숙박업소 천지로 변했다. 그 옛날의 고즈넉한 서정을 기대한다면 실망천만이다. 


 

자연미를 더한 곡선형 자전거길이 훨씬 더 편안하다(안성시내)

 

아이들이 자전거 핸들에서 손을 놓는 것은 독립의 1차 신호다(안성시내)

 

 

시인 고은이 떠난 안성, 그 아쉬움
공도읍 대림동산 근처에는 또 한 사람, 시인 고은의 흔적이 남아있다. 시인은 벌써 떠나고 없다. 중앙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이던 부인이 정년퇴직을 하고 고은의 안성시대는 막을 내렸다. 날아 갈까봐 놓지도 못하던 딸 이름을 차령으로 붙인 것도 미양벌판을 건너 바라다 보이는 차령산맥에서 따왔다. 

평생 민초의 삶과 애환을 시로 써온 시인에게 장길산과 남사당패 바우덕이의 무대 또한 차령산맥이니 너무나 자연스럽다. 시인이 떠나려 했을 때 안성이 붙잡았어야 했다. 파주·김포·철원 등도 시인을 모시려했으나 수원시의 열정에 광교산 자락으로 이주를 결정했다. 2013년의 일이다. 

해마다 겨울, 노벨문학상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그 영예가 대한민국에 돌아온다면 그건 ‘고은의 몫’이라고 기다리다 지친지도 오래다. 수원이 이러저러한 명분으로 모셨지만 노시인의 떠돌던 삶이 오래 안착한 곳도 안성이 아니던가. ‘살아있는 박물관’으로서 시인을 모실 연고가 있었던 안성은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안성에 대한 애착은 그의 고별시에 절절하다.

(전략) 안성 30년은 시의 30년 이었습니다/ 
상화의 교수 생활 30년은/ 
서울 시절의 강단 10년을 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상화는 명예교수이고/ 
나는 어제 그제 그대로/ 
그냥 시인입니다(중략) 
아기 자라나서/ 
해외의 학생 시절 마치고와 백호, 오십호 그림을 그립니다/ 
안성 30년 안성의 햇빛과 물/ 
안성의 바람/ 
안성의 더위와 추위/ 
우리 삶의 절정은 길었습니다/ 
날마다 절정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해설픈 시작을 위하여/ 
이 절정의 안성을 하직합니다/ 
안성이여 안녕/ 안성이여/ 
안성이여 안녕  (무제시편 ‘안성이여 안녕’ 중에서)
 

하지만 수원으로 모신 시인은 정작 편치 못한듯 하다. 광교저수지 근방의 원주민들이 상수원보호구역에 자신들은 수십 년을 규제로 묶여 있는데 시인의 거소만 특혜를 받고 있다고 ‘나가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수원시는 절차와 규정상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육당 최남선 등 1세대 문인들과도 교류한 그가 “50년 한국문단을 지켰으니 나는 ‘한국문화유산’이다.”라고 말하는 자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사실 안성을 떠나야했을 때 시인의 행선지는 군산이어야 했다. 그가 노벨문학상에 거론되는 근저는 누가 뭐래도 ‘만인보’다. 장장 25년에 걸쳐 4001편의 시, 30권의 시집으로 탄생한 인물한국사의 열정과 시혼에 있다. 그 무대의 상당수는 그의 고향 군산 이야기다. 

<미제방죽> <째보선창> < 나운리방앗간집> 이야기의 판권은 군산이 가진다. 더구나 군산은 근대문화유산의 살아있는 박물관 그 자체다. 거기에 고은 문학의 궤적과 문향이 더해진다면 더 없는 완결편이다. 군산은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그때 모셔가야 했다. 자연인으로서도 인생을 정리해야하는 시인에게 고향보다 더 좋은 영원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는가.

 

옛 안성선 철길 교각위에는 공원 공사가 한창이다. 이렇게라도 보호되니 얼마나 다행인가(안성 미양)

 

안성팜랜드, 독일 차관으로 시작한 한독목장의 현대식 문패다(안성 공도)

 

군문교에서 바라본 안성천 물길은 거의 제자리걸음이다(평택 원평 )

 

 

산이 귀한 평택, 구릉에 넘치는  활기
평택은 이름 그대로 평평한 들판이고, 소택지이다. 높다는 산이 진위면의 무봉산(208m) 정도 이니 말이다. 원주지역 방송 주파수가 잡힌다. 대전지역 방송이 잘 들리는 것도 멀리 보이는, 독립기념관 뒤 흑성산 중계소 가청권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송탄지역은 유선방송이 발달해 있다. 평지와 비행기로 인해서 지상파 장애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송탄과 합해진 평택은 두개 시의 통합으로 거대한 잠재력을 갖게 되었다. 삼성반도체 평택공장이 가동되고, 고덕국제도시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다 SRT의 분기점인 지제역은 간이역 수준을 단박에 뛰어 넘었다. 어떤 토박이는 이렇게 발전해 나가면 조만간 ‘평택 100만 인구 시대’가 오는 것 아니냐는 희망 섞인 전망을 하기도 한다.

꿀꿀이죽 구루마(수레)의 드럼통을 덜컹거리며 언덕을 오르던 쑥고개의 풍경도, 카키색 4각 종이봉지에 캔맥주와 우유, 치즈를 담아 퇴근하던 흑인 병사들의 발걸음도 사라졌다. 오키나와에서 한국배치를 위해 교육을 받는 미군들은 송탄에 가면 ‘가져와! 폴리스’를 주의하라고 말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도 있다. 미군업소를 포함하여 1000여개의 유흥업소가 흥청거리고, 양키물건을 경찰이 단속하던 시절의 뒷거래 이야기다.

세계최대 해외 미군기지가 된 팽성 K-6
평택 군문교를 지나면서부터는 아산방조제의 영향으로 물길은 유속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팽성대교에 이르면 북쪽 강둑길로 가야 하지만 이제 막 ‘용산시대’를 접고 평택으로 이사를 시작한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스’를 직접 보고 싶어 그대로 직진한다. 

강둑은 길고도 길다. 포크레인으로 깊이 판 도랑은 철조망 너머로 접근을 어렵게 하는 해자(垓子)가 되었다. 해무의 저쪽에 잠긴 미군막사에 이르기까지 아득한 지평이다. 여의도 면적의 5.5배(1467만7000㎡, 440여만평)에다 4만3천여 명이 거주할 공간(513개 건물)이니 미니 신도시가 하나 만들어진 셈이다. 기지 둘레가 18.5km이고, 노양리까지 강둑길 이정표만 해도 10km라고 표시하고 있다.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기지중 최대 규모다. 건설사의 부도 등으로 완공이 1년여 늦어졌다. 

미군기지의 한 가운데가 된 대추리는 한 때 기지이전을 반대하는 세력과 충돌로 100여개 중대가 넘는 기동경찰이 고전하던 현장이었다. 풍성한 가을걷이를 뜻하는 대추(大秋)리는 가을 들판 대신 든든한 국방의 지원군을 얻었다. 대추가 연상케 하는 ‘가을 대추’, 벼락 맞은 대추나무 ‘벽조목’이 제일 단단한 재질이라 하지 않는가. 4강의 눈치를 보며 살길을 찾아야 하는 숙명의 한반도에서 한·미상호방위의 보루가 더없이 견고하게 버티어 주길 바랄뿐이다.

 

소실점을 만들어낸 자전거길의 끝은 어디일까(평택 팽성)

 

평택호관광단지까지 나머지 구간은 이정표도 제대로 없다. 찌그러진 간판을 닮았다(평택 현덕)

 

드론을 날리는 아버지와 아들. 어른도 놀이가 필요한 키덜트다(평택 현덕)

 

 

아산호든 평택호든 아무래도 좋다
해는 이미 기울어 물비늘이 번쩍거렸다. 노양리에 아산호를 가로질러 313번 지방도를 연결하는 다리 공사가 한창이다. 새로 이사한 미군기지를 보기 위해 남쪽 강둑길을 택하긴 했지만 강둑이 끊어지는 아산 둔포·인주 방향으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아 간신히 사정해서 공사 중인 다리를 건넌다. 이내 강북 쪽 자전거길도 끊어진다. 수많은 자전거가 들판과 마을을 헤매면서 방조제까지 지나간 흔적이 조잡한 방향표시판에 남아 있다. 국민관광지개발이 추가로 진행되면 자전거길을 잇겠다고 안내한다. 

평택호예술공원 주변에는 숙박과 위락시설이 들어서 있다. 계두봉 아래 원조 평택호 관광지구는 광활한 아산호를 조망하기에 유리한 구릉지다. 아산방조제 밖으로는 서해대교가 가로 놓인 아래에  직선 도형의 평택항이 배치되어 있다. 다행히 수심이 깊어 평택국제여객터미널과 해군2함대사령부까지 들어와 있고, 포승공단까지 임해공단의 조건을 제대로 갖춘 터이니 평택이 자부심을 더 갖지 않을 수 없다.
평택호든 아산호든 아무래도 좋다. 이름하여 국민관광지라 하니 그에 걸맞게 서해의 장엄한 낙조와 함께 편안한 휴식을 주는 여백으로 우리 곁에 있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 자료
1. 한국의발견, 경기도 안성·평택, 뿌리깊은나무,1989
2. 평택시, 나무위키
3. 미8군 평택시대, 동아닷컴, 2017. 7. 12 기사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안성, 한국학중앙연구원
5. 땅이름 점의 미학, 오홍석, 부연사, 2008
6.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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