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강둑길 55 미호천(음성·진천·청주·세종)

충청 동북의 미호천(음성·진천·청주·세종)

한국의 강둑길 55  미호천(음성·진천·청주·세종)
충청 동북의 가장 큰 강, 아름다운 미호천

효심의 전설에서 출발한 ‘생거진천’의 풍요도 사실은 미호천 덕분이다. 미호천의 주 하천이 바로 지명으로 남은 ‘진천’이다. 산도 그 고을을 지키는 주산을 ‘진산’이라 하지 않던가. 천년을 견뎌온 농다리의 생명력이 이 땅 농심(農心)의 든든한 다리가 되어 주리라. 미호평야라 불리는 ‘오창들’의 동쪽이 청주고, 남쪽이 K-뷰티의 신도시 오송이다. 조치원을 거쳐 세종시로 흘러들어 금강물을 넉넉하게 하는 미호천은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강(江)이다
글 조용연(여행작가)
기술·용품 협찬 : 태능한성바이크(02-977-7710 수요일 휴무)
 

 


미호천(유로연장 89.2km, 유역면적 1,855.35㎢ (금강 수계 제1지류하천)
- 국가하천 : 청주시 북이면(보강천 합류점)~세종시 연기면(금강 합류점)
- 지방하천 :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미호천 국가하천 기점(보강천 합류점)
- 발원지 및 최장발원지 : 음성군 삼성면 망이산(454m) 남쪽 사면
   * 음성읍 감우리 보현산(482m) 서북사면이 최장발원지라는 주장도 있음
  - 미호천의 지류 : 금강 제2지류 21개(백곡천, 초평천, 보강천, 무심천, 병천천, 조천, 월하천 등), 제3지류 29개(국촌천 등), 제4지류 4개(행화천 등)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강이 어디서부터 발원 하는가’ 하는 그 흔한 논쟁은 미호천도 마찬가지다. 강의 길이나 발원지는 인공위성에서 지구를 내려다보기 이전과 이후의 개념이 대립한다. 목측과 실측의 충돌은 쉽게 기록을 갈아치우지 못한다. 혼란스러워 공공의 발표를 존중하지만 미심쩍기는 여전하다. 

미호천의 최장발원이 안성 죽산과 경계를 이루는 마이산의 남사면이라는 공인(公認)에 음성읍 보현산 서북사면이 6.4km 더 길다는 주장이 맞선다. 마이산만 해도 그렇다. 어떤 지도는 망이산으로 적고 있다. 망이산성이 근처에 있는 것으로 보아 맞을 듯도 싶고, 아마도 한자는 오랑캐를 지켜본다는 뜻의 망이(望夷)가 맞지 않을까.
삼성면 덕정저수지에서부터 미호천을 더듬어 나간다. 돌아올 길을 생각하면서 오랜만에 접이식 미니벨로와 동행한다. 

다국적 시골소읍 음성 삼성, 대소
삼성면 소재지는 아시아 각국의 식료품을 파는 슈퍼마켓, 간체자로 선전하는 휴대전화 개통, 외국근로자들과 함께하는 축구대회 광고까지 낯선 풍경이다. 다문화의 일상이 공존한다. 이러한 인문지리적 설정은 이미 우리 농촌에까지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음성과 진천의 경우는 수도권 인구 억제정책과 인구절벽으로 가고 있는 현실이 유발해낸 상황이다. 경기도가 규제로 묶여있는 동안 인접 충청북도의 북쪽은 반사이익을 보았다. 음성군이 1700개가 넘는 기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저 남도의 작은 시군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 방글라데시 출신이지만 한국사람 보다 더 능숙하게 우리말로 너스레를 떠는 연예인 방대한(Khan Mohammad Asaduzzman)은 친근하다. 비빔밥이란 노래까지 취입하고, 이제 귀화해 지방행사까지 뛰는 가수이자 영화배우로 그를 키워준 것도 전국노래자랑과 다문화 근로자의 고향 음성이다.

중부고속도로와 제천-평택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만해도 음성의 서북쪽은 오지나 다름없었다. 고추나 담배농사를 짓던 마을이 포도를 심고, 인삼을 키웠다. 논두렁 밭두렁으로 작은 규모의 공장들이 엉덩이를 들이밀고 자릴 잡은 지도 한참 된 얘기다.

 

안성 죽산과 경계를 이루는 마이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인 덕정저수지가 출발점이다(음성 삼성)

 

다문화가 자연스러운 삼성시외버스터미널, 스쿠터를 타고 있는 방글라데시 청년은 기계절단공이라 했다. 그 환한 표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음성 삼성)

 

소읍에서 벌어지는 국제축구대회, 아시아를 하나로, 함께 가자는 몸짓이다(음성 삼성)

 

대소 같은 면소재지에 은행이 들어오고, 아파트가 서게 된 힘은 역시 경제, 새마을의 힘이다(음성 대소)

 

길손을 잡아끌며 음식을 같이 먹자는 인심, 진천의 인심은 오래 기억에 남으리라(진천 이월)

 

 

새로 둥지를 튼 대한체육회선수촌, 진천시대 개막
북진천IC가 가까운 이월면에 대한체육회 선수촌이 2017년 9월 문을 열었다. 너무나 귀에 익숙한 ‘태능선수촌’ 시대 51년을 마감한 새 출발이다. 2004년 이전계획이 확정된 뒤 13년만의 결실이다. 태능선수촌의 5배(140만5797㎡, 약 42만5000평)에다 최신 시설까지 갖췄으니 스포츠 중흥의 금빛을 꿈꾸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선수촌 ‘진천시대’는 새 과제도 안겨준다. 스포츠 의·과학을 완벽하게 수행해낼 우수한 의료진과 연구의 부대환경을 제대로 갖추는 일이 우선이다. 문자 그대로 하드웨어는 이만하면 됐으니 소프트웨어가 문제다. ‘언제까지 엘리트체육에만 의존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 해답을 주어야 한다. 생활체육 속에서, 즐기는 스포츠 속에서 진정한 스포츠맨을 배출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도 결코 가볍지 않다.
젊은이들이 음성에서 진천으로 들어서면서 광혜원과 이월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은 것은 고교 2학년 국어책에 실린 시 한 편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때문이다.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하략)

 
시인 고은은 이미 저 유명한 시 <문의마을에 가서>에서 읊었던 생과 사의 갈림, 초월의 세계 그 이미지의 연작 대상을 진천의 북쪽 마을에서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를 읽고 광혜원, 이월마을에 가서 자작나무 숲을 찾는다면 허탕 칠 게 뻔하다. 시인은 “허구가 궁극의 현실이다”라고 상상의 자작나무 숲을 말했으니까. 

누가 밀지도 않았는데 영문도 모르게 이끌려 든 숲, 왜 거기를 골랐을까.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스키타이의 말을 달리고 싶다는 시인, 역시 그가 사랑한 차령산맥의 한 자락 칠현산 남쪽 기슭에 드넓다는 뜻을 품고 있는 ‘광혜원’과 초극의 이미지가 묻어나는 ‘이월’이란 마을을 시에 차용한 것은 아닐까.
시인 백석이 그의 시 ‘백화(白樺)’에서 “북녘의 고향, 온통 모든 것이 자작나무다” 라고 말한 자작나무의 한자말이 백화(白樺)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고전 ‘타향살이’만큼이나 애창하는 ‘키타쿠니노 하루(北國の春)’의 첫 소절 ‘시라카바 아오조라(白樺 靑空)’에 등장하는 게 바로 자작나무숲이다. 이 가을이 지나면 차가운 자작나무의 하얀 살이 더 새하얗게 빛나겠지.

그건 그렇고 1939년 아버지의 채근에 내키지 않는 맞선을 보러 소·대한 추위에도 두 번이나 진천에 왔었다는 백석의 후일담은 어찌되었을까. 그때 이미 백석은 청진동에서 자야와 동거하고 있었다는데….

 

오천길과 합류하면서 옛 경찰동료들과 악수를 나누었다(청주 북이)

 

 

생거진천의 푸근한 인심
대동여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던 미호천이란 이름이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 처음 등장한다. 음성 대소면 미곡리와 삼호리에서 한 자씩을 따서 지었다는 말이 유력하다.
대소를 벗어나 들판을 달린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자유가 강둑위의 여유를 선사한다. 미잠리 초입에서 함께 마을길에 풀을 깎고 있는 촌로들을 만난다. 그들은 “부역중”이라고 했다.   부역(賦役)은 국가가 무상으로 노동력을 갹출하는 것이다. 이제 누구도 강제하지 않지만 마을길을 스스로 갈무리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는 말이다. 제집 앞 눈도 구청더러 치워 달라는 도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공동체 삶의 규약이 여기엔 살아 있다. 부역(賦役)은 국가의 반역에 동조한다는 부역(附逆)과 발음이 같아 무거운 의미를 함께 끌고 다닌다. 

미잠리 마을회관 앞에서 자전거를 멈췄다. 누군가 마당에 차려진 상차림에 같이 앉자고 했다. “돼지고기 삶은 것 해서 막걸리라도 한잔 하시쥬.” 돼지고기만 겉절이에 싸서 먹는다. 부녀회장 댁에서 돼지 한 마리를 희사해서 오늘 잡은 것이라고 했다. 아예 점심까지 얻어먹는다. 낯선 길손에게 음식을 권하는, 오랜만에 만나는 인정이다. 종편의 아슬아슬한 ‘한 끼 줍쇼’가 아니다. 올해 환갑이라는 이장 송관섭 씨는 자신이 이 동네서 거의 막내라고 했다. 2년 전 귀향을 해서 이장 일을 보고 있노라고 했다. 오랫동안 출향을 했다가 만년에 돌아오는 것이야말로 귀촌이고, 귀향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다 거친 세파와의 씨름에서 한풀 꺾이고 농촌에서 찾은 새 삶은 귀촌이 아니다. 농촌으로 이주하는 정농(定農)이자 정촌(定村)이다. 

이 마을 미잠리가 어디쯤 되는지 묻자, 진천읍 30리, 이월 10리, 덕산 10리라 했다. 아하, 덕산 하면 막걸리 아닌가. 부산 금정산 막걸리와 함께 일본의 사케 전문가들이 블라인드 테스팅으로 맛을 꼽았다는 ‘덕산 막걸리’, 맛의 평가는 깔끔하고 묵직하다는 것. 묵직한 맛은 혀의 어디서 무게를 잴까, 또 어떻게 전달할까. 90년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는 양조장의 옛 모습이 1929년 대홍수로 이전한 그대로라 했다. 백두산의 전나무를 압록강 제재소에서 켰다는 목재는 시공의 세월을 뛰어 넘어 다가온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일부러 국도를 벗어나서라도 들러보시라. 막걸리 맛뿐만 아니라, 세월의 무게까지도 눈에 담고 온다면 또 다른 맛이 있을 것이다.
 

상습수해지역을 벗어났다는 기쁜 표지석(음성 삼성)

 

덕산막걸리를 만드는 세왕주조 간판, 1929년 시작했으니 올해 여든아홉이 된 노포다(조용연자료사진, 진천 덕산)

 

미호천 모래도 금모래였을 터이나 어쩐지 우중충하다. 다 사람 탓이다(진천 초평)

 

자전거와 전동 탈것이 함께 강둑길로 나올 수 있다는 걸 보여 준다(청주 북이)

 

진천들판은 ‘생거진천’이 우연히 생겨난 말이 아님을 말해준다(진천읍)

 

 

천년을 살아온 농다리, 생거진천
잘 손질되어 있던 상류와 달리, 미잠교를 지나면서부터 강둑길은 이어지다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들판길로 둘러가야 하는 구간이 늘어날수록 인내심을 발휘해야한다. 관청은 의붓자식처럼 강둑을 내버려두었다. 여러 해 강둑길 가시덤불을 헤쳐 가는 이유도 언젠가 그 길이 사람에게 온전히 돌아오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백곡천이 미호천과 합류하는 지점은 어림해도 진천읍내를 한참 내려와서다. 담배꽃이 핀 강변 마른 밭에는 분홍색이 지천이다. 담배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다. 니코틴의 유혹처럼 붉은 입술을 한 연분홍에 코끝을 한 번 대어보고 이내 농다리에 이른다. 중부고속도로를 지나가다 간판으로 만나는 다리여서 이정표 구실을 한다. 산꼭대기에 새겨놓은 ‘생거진천’은 고속도로 위에서 정체의 꼬리가 꼬리를  물 때 다시 중얼거려 보는 진천의 브랜드다.

억지 브랜드도 만드는 판이니 ‘생거진천쌀’이 ‘대왕님표 여주쌀’ 만큼이나 차지고 맛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생거진천(生居鎭川)’은 ‘사거용인(死居龍仁)’과 동반해야 전설이 선명해진다. 진천과 용인의 두 양반이 같은 날 죽었는데 용인 김생원이 염라대왕 재판 결과 잘못 불려와 다시 환생하려 했으나 이미 시신을 화장을 해 하는 수없이 진천 황진사의 몸에 실려 환생했다는 것, 두 집 아들들이 서로 제 아비라 싸우다가 관아쟁송이 붙었는데 내려진 명 판결이 “살아서는 진천에서, 죽어서는 용인에서 모시라.”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언제인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조에 축조했다는 농다리는 동양 최고(最古)라 한다. 100여m 28개 수문 중 4개가 쓸려 내려가고 93.6m, 24개가 남아있으니 오랜 세월 숱한 홍수에도 떠내려가지 않는 공법이 무엇일까. 오로지 돌만 이용해 물고기 비늘 같은 방식으로 서로 맞물려 힘을 지탱하도록 쌓았다는 선조의 지혜에 감탄할 뿐이다. 다리 건너 산언덕을 오르면 붕어낚시의 전설 ‘초평지’다. 미호천의 최장발원지를 음성 보현산이라고 주장하는 물줄기(초평천)가 맹동 수박밭을 거쳐 흘러들어온 거대한 저수지다. 

넓은 평야를 주로 지나는 미호천이 유일하게 협곡을 이루며 사행하는 감입곡류의 비경이 농다리 아래 10km 구간에 숨어 있다. 그러나 버려진 강둑길은 쓰레기 썩어가는 냄새가 장악하고 있다. 자전거나 타고가야 알 수 있는 진실이다. 그나마 희미하게 나 있던 길도 사라지고 우회하지 않을 수 없다. 평산리로 돌아 충청북도학생수련원까지 강의 속살을 볼 수가 없다. 문백으로 가는 길목에서 충북대천문대 방향으로 돌아 미호천을 건널 때야 잠깐 얼굴을 보인다. 

급류가 굽이치는 힘은 반대편에 작게나마 금모래 밭을 만들고 지나간다. 힘을 잃은 물 탓일까. 금모래 위로 펄이 쌓여있는 몰골은 차라리 눈을 감고 지나가고 싶다. 다시 산언덕을 오르는 길에 밤이 후두둑~ 떨어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밤은 풀 섶에 땅 위에 둥지를 튼다. 벌써 강둑길에서 맞는 몇 번째 가을인가. 떨어진 밤은 쉬어가라 붙잡는다. 불룩해지는 주머니와 가방, 멀쩡한 밤 껍질을 벗기면 문신처럼 칭칭 감은 검은 띠, 썩어가는 궤적이다. 

오도독~ 깨어 무는 속살 속 동굴에서 더 뽀얀 몸매를 움츠리며 굴러 떨어지는 건 밤벌레다. 침입자를 ‘재수 없다!’ 원망할 것이다. 멀쩡한 것들의 배신, 정신을 똑 바로 차려도 알 수 없는 저 암갈색 장벽속의 땅굴, 차라리 밖으로 굴을 뚫은 밤벌레가 모는 갱차는 끝없이 버럭을 실어내 오기라도 하지. 저 뽀얀 저 놈, 유백의 밤동산을 시커멓게 죽어 뭉그러질 때까지 파먹는 저 놈, 저도 살아야하는 이유가 있다 하겠지만 나는 동조할 수 없다. 자릴 털고 다시 안장에 오른다. 하루를 마감해야하는 증평IC 입구다.
 

농다리 천년의 비밀에는 선조의 지혜가 담겨있다(진천 초평)

 

이런저런 얘길 나누며 가는 뒷모습이 편안하다. 지방경찰청장과 파출소 직원이라는 고정관념으로는 쉽게 그릴 수 없는 그림이다. 자전거로 하나 된 따뜻함이다(청주 북이)

 

오천자전거길, 전용로는 속도를 전제로 설계된다. 그 길에선 그저 달릴 뿐이다(청주 오창)

 

선글라스를 낀 멋쟁이 베트남 할머니는 우리말을 한마디도 못했다. 딸네 집에 다니러 왔나보다(세종 연서)

 

 

음성·괴산·증평의 물을 보강하는 보강천
다시 한 주일이 흐른 일요일, 옛 경찰동료와 합세한다. 흡사 보강천이 음성·괴산·증평의 물을 모두 모아 힘을 보태듯 합류한다. 박재진 충북지방경찰청장과 직원 두 명이다. 미호천 여정에 그를 굳이 떠올린 것은 그가 연기경찰서장(현 세종경찰서)을 할 당시 나눈 몇 마디 대화 때문이다. 

 “박 서장, 자전거를 좀 타 보는 게 어떠신가?”
“청장님, 사실 저는 자전거를 못 배웠습니다.” 나는 할 말을 잊었다. 오래도록 잊고 있던 대화였다. 그가 자전거 마니아가 되어 나타난 것은 내가 퇴직하고 난 한 참 후였다. 강둑길 연작이 끝나기 전, 관내를 떠날 수 없는 그와 꼭 한번 동행하고 싶었던 미호천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그는 계룡산 서편 신원사 사하촌에서 태어난 사람답게 여유로워져 있었다. 

오랫동안 꿈꾸던, 두런두런 얘기하면서 가는 강둑길의 동행은 따뜻했다. 지금 경찰이 하는 고민에서부터 세상사는 이야기로 얼레는 무수히 감기고 풀렸다. 내안에 죽어있던 치안의 신경이 살아나는 듯 얘기는 윤기를 더해갔다. “손바닥만 한 동네에서 언론사만 무려 15개나 되니까요.”  무심천이 합류하는 까치내 작천교를 지날 때, 벌판 건너 청주 도심을 가리키며 힘든 일상을 말했다. 오창들은 넓다. 바로 미호평야다. 오창 같이 숨어 있던 지명들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은 순전히 고속도로 나들목이거나 휴게소 이름 때문이다. 고속도로위 차들이 줄줄이 꼬리를 무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때, 우리는 낯선 땅이름들을 하나씩 되뇌게 된다. 산을 뚫고 지나가는 터널, 강을 건너는 다리, 쪽잠을 자고 가라는 졸음쉼터까지 저마다 이름을 불러보며 산하와 친숙해 진다.

 

마지막 코스모스의 환송을 받는다. 가을이 깊어졌다(청주 북이)

 


K-뷰티 발전소, 바이오 오송 
옥산휴게소 근처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보내고 나면 이내 오송이다. 조치원에도 치이고, 오창에도 눌리던 오송이 떠오른 것은 순전히 KTX 덕이다. 오송에 역이 만들어진 것은 청주의 관문이기 때문이다. 호남선 KTX까지 분기하게 되면서 국도로 말하자면 ‘신 천안삼거리’가 오송에 만들어진 셈이다. 오송첨단의료복합단지가 들어서고, 올해로 3회째를 맞는 오송화장품뷰티산업엑스포는 열기를 더해간다.
올해 9월 15일 하루, 코리아 뷰티의 현주소를 보기 위해 KTX 오송역을 이용한 2만8000명 승객은 기록적 숫자다.
 

세종특별자치시로 가는 물길, 모래도 숨다
KTX 오송분기점을 지나면 개방감을 자랑하는 강둑길이 세종시 연동면 초입까지 시원하게 펼쳐진다. 강폭은 넓어지고 떠내려 와 뿌리박은 버드나무와 제 수명을 다하고 일찌감치 동면에 들어간 갈대숲까지 미호천도 속살을 만만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수줍듯이 숨어 있는 자연하천의 모습은 인구 50만으로 설계된 세종특별자치시에 더없이 소중한 여백이다. 

저 멀리 앞서가는 자전거 하나, 뒷모습을 봐도 할머니다. 지나가는 우리를 보자 장난기 있게 따라 붙는다. 그리고 환하게 웃을 뿐 말이 없다. 아무래도 이상해 불러 세웠다. 선글라스를 썼다.   “할머니, 어디 사세요?”
“베트남! 베트남!” 외마디를 반복했다. 더 이상 말을 시켜도 웃을 뿐이다.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강둑에서 반찬거리가 될 만한 풀을 뜯어 한 바구니 달고 있었다. 아마도 이 땅으로 시집 온 딸네 집에 다니러 왔거나, 잠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때 이 지역 사람들이 자조하듯 연기될지도 모른다며 끌탕하던 행정수도는 ‘연기군’에서 시작해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임시 문패를 거쳐 ‘세종특별자치시’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으로 지금도 날로 ‘성업중’이다.  

 

메기매운탕을 끓이며 미호천 여정을 마무리 한다. 따뜻한 동행이었다(세종 연동)

 

 

참고 자료
1. 한국의 발견, 충청북도 음성-진천, 뿌리깊은나무, 1989
2. 미호천 발원지 답사기, 이용수, <하천과 문화> 2010. 11
3. 진천 덕산양조장과 술 익는 마을, 이광표의 근대를 걷다.
4. <깊은 곳>, 고은과의 대담집, 김형수, 아시아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안성, 한국학중앙연구원
6.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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