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경기도 최고봉

메리다 원트웬티 + 벨로스타 센터드라이브
MTB, 모터 달고 다시 산으로
가평·화천 화악산 1468m
겨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경기도 최고봉

그래도 수도권에 드는 가평에 있고 경기도 최고봉인데 화악산은 어디 강원도 최전방에 자리한 오지의 산처럼 느껴진다. 1468m의 헌칠한 높이에도 지명도가 낮은 것은 전방지대가 주는 폐쇄감 때문일까. 겨울이면 일기예보에서 혹한의 대명사로 간혹 등장해서 군 생활을 겪은 남성들은 애써 외면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정상에는 군부대가 자리해 임도를 따라 편하게 오르지만 제2봉인 중봉(1446m)으로 만족해야 한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입니다. 최전방 화악산과 대성산은 영하 20도를 밑도는 혹한입니다.”
겨울이 되면 일기예보에 가끔 등장하는 화악산과 대성산은 ‘최전방’이라는 수식어와 ‘가장 추운 곳’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남자들에게는 묘한 공포와 거부감을 준다. 게다가 6·25 격전지여서 봉우리와 능선마다 매몰되어 있을 숱한 죽음과 고통이 영기(靈氣)처럼 깃들어 현장에 가면 우울을 강요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난달 춘천 대룡산(899m)에서 북쪽 하늘을 온통 장악하고 있던 화악산의 웅자를 보고는, 간절하게 오르고 싶어졌다.     

전방이긴 하지만 살짝 2선으로 물러나 있는 화악산(華岳山, 1468m)은 철원과 화천 경계의 최전방에 자리한 대성산(1174m)보다 훨씬 더 높은, 경기도 최고봉이다. 보통 악(岳) 자가 들어가는 산은 산세가 험하고 암괴가 거칠게 드러나 있게 마련인데 화악산은 육산이면서도 사면이 가파른 험산이다. 화악산을 포함해 경기도의 다섯 악산(관악산, 운악산, 감악산, 송악산) 중에서도 가장 높다. 

10월초, 정상부를 물들인 단풍의 대향연
10월초의 기나긴 연휴 내내 여름처럼 더웠는데 가평을 거쳐 화악산이 가까워지면서 기온이 뚝뚝 떨어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들은 여전히 초록색이라 시각적으로는 단풍이 상징하는 가을마저 느끼기 어렵다. 그러나 창문으로 들이치는 서늘한 바람에 가을을 생략하고 겨울 세계로 들어서는 것만 같다. 마침 올가을 들어 기온이 가장 내려가긴 했지만 서울은 아침기온이 15도는 되었다. 자동차의 실외 온도계는 이미 10도 정도다. 7부 바지를 입고 온 이 이사의 지인이 걱정된다. 다행히 추위를 잊게 해줄 대안이 있을줄이야.  

“와! 단풍이다!”
어느 틈엔가 길가로 산줄기가 부쩍 높아지더니 모퉁이를 돌아나가자 화악산 정상 일대가 하늘을 찌를 듯 들이닥친다. 1000m 이상의 고지대는 온통 붉은 빛이다. 늦더위를 경험한 직후여서 단풍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감탄과 감격이 더하다. 정상부만 붉게 물든 고고한 봉우리는 이웃한 응봉(1436m)과 어울려 거창한 산악미를 보여준다. 중봉~화악산 능선이 둔중하다면 응봉은 원추형으로 오똑해 극적인 대비를 이뤄 산세와 규모감이 한층 과장된다. 

응봉은 화악산 주봉과는 실운현(1040m)을 사이에 두고 독립봉처럼 솟아 있지만 별도의 산이 아니라 화악산의 한 봉우리로 인식된다. 응봉 정상에도 군시설이 있어 등산객에게는 정상 남쪽의 중봉(1446m)이 화악산 정상 역할을 대신한다. 정상은 신선봉이라 하고, 이렇게 세 봉우리를 화악산 3봉이라고 하는데 중봉과 신선봉은 같은 능선에 겨우 800m 거리를 두고 있어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지리산 중봉, 덕유산 중봉 등 정상 곁의 어중간한 두 번째 봉우리는 항상 중봉(中峰)이다.   
 

강원양어장횟집 바로 옆에는 심심산골 같은 계곡이 흘러내린다
화악터널 방면으로 오르는 391번 지방도. 고지대는 단풍이 짙다
길에는 낙엽이 깔리고 단풍이 짙게 물든 실운현 근처의 비포장 구간
실운현 정상. 맞은편이 화악산 정상 방면이다
“어이쿠, 이건 무리야!” 거침없는 이윤기 이사도 안장에서 내리고 마는 돌길

 

 

여유있게 고도차 1100m 업힐 시작,  그런데 이런…
391번 지방도에서 정상과 응봉으로 가는 길은 실운현에서 시작되고, 진입로는 실운현 남북 모두에서 있다. 고개 아래를 뚫고 지나는 화악터널이 생기기 전에는 임도로 남은 이 길이 진짜 실운현 고갯길이었다. 원래 터널은 1980년대에 개통되었으나 안전문제로 1997년에 폐쇄되었다가 지금 터널은 2008년에 완공됐다. 터널 높이만도 해발 880m로 경기도에서 가장 높다.  

남쪽 골짜기에는 식사할 곳이 마땅치 않아 화악터널을 지나 화천으로 넘어가 삼일리 계곡가에 자리한 강원양어장횟집을 기점으로 잡기로 했다. 직접 양식한 송어 회와 매운탕으로 알려진 집이다. 높이는 해발 350m이니 중봉까지는 고도차 1100m를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뭔 걱정이랴. 전기 MTB인데.  
이제 목표는 화악산 정상. 배터리는 풀충전 상태이고 배까지 부르니 자신감, 기대감 충만이다. 방금 내려온 391번 지방도를 되올라간다. 높아질수록 짙어지는 단풍에 몽환경 속으로 들어서는 듯 일행은 감탄사를 연발한다. 모터가 페달링을 도와주니 여유있게 힘을 안배하며 즐기는 모처럼의 단풍놀이다.   

화악터널에 1.2km 못 미친 지점에서 도로를 벗어나 임도로 들어선다. 입구에는 빛바랜 ‘화악산 등산로’ 표지판이 서 있다. 그런데 이거 예상이 빗나가고 있다. 모든 임도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거친 돌길이 시작된 것이다. 실운현 정상까지 3.8km가 꼬박 돌길이어서 1시간 가까이 걸리고 말았다. 화악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이 길로 고개를 넘나다녔을텐데 걷는 사람이나 오르는 자동차나 대단한 고역이었을 것이다. 

돌길에서 시간이 지체되어 내처 응봉까지 오르려던 계획은 어쩌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올 때는 말갛게 고개를 내밀고 있던 정상부가 짙은 구름에 가리고 있다. 구름 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 올라가봐야 의미가 없는데…. 구름의 움직임이 다소 빠른 것을 보면 어쩌다 한순간 조망이 트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말의 기대를 안고 일단 화악산 방면으로 진입한다. 이제부터는 편안한 시멘트길이다. 과연, 진짜로 구름을 볼 수 있다는 실운현(實雲峴)이다. 
 

 

산허리에 구름이 걸려 어느새 길은 구름을 저 아래로 내려다본다. 경기도 최고봉다운 위용

 

 

발밑에서 서성이는 구름 
실운현에서 중봉 아래 임도종점까지는 3.6km. 길은 구불거리고 좁은데 간혹 자동차가 다녀 커브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구름은 피어났다 걷히기를 반복하지만 목전에 닥친 겨울을 알리는 단풍은 오를수록 짙어진다. 지금은 한가하게 구름과 단풍을 즐기지만 1951년 4월 이곳은 국군 6사단이 중공군 4개 사단의 총공세에 밀려 지휘라인이 와해되고 장병들은 공포에 질려 무질서하게 퇴각한 악몽의 현장이었다. 화악산 주릉을 따라 연합군 최후 방어선(캔자스선)이 설정되었지만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아군은 가평 근처까지 밀리고 말았다. 하지만 부대를 재편성한 6사단은 용문산에서 중공군을 격퇴하고 북진해 대성산 북방까지 확보했다. 당시의 전투를 기념하는 사창리전투 전적비가 화악산 북쪽 사창리에 남아있다. 

해발 1360m, 중봉 아래 임도종점에 도착했다. 정상을 차지한 군시설은 규모가 대단한데다 첨단 레이더가 즐비해서 마치 SF에 등장하는 외계인 기지 같다. 여기서 중봉까지는 등산 표지판 상으로는 200m. 하지만 실제는 300m 정도 되고 등산객이 거의 다니지 않는지 길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하고 험준하다. 그래봐야 고도차 80m 정도이니 금방이겠지 싶었다.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이 이사는 언제나처럼 자전거 한 대를 정상까지 메고 기세좋게 나섰다. 그래도 무거운 전기자전거여서 배터리는 분리해서 내가 멨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이건 ‘멜바’로도 도저히 불가능한 구간이란 걸 깨달았다. 로프를 잡고 바위를 올라야 하는 구간까지 있다. 하지만 이 불가능한 구간을 이 이사는 거뜬히 멜바로 돌파했다. 동행한 지인은 “이게 가능해?” 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이사의 ‘멜바 실력’은 내가 알기로도 국내 제일이다. 

 

고지대는 단풍이 절정이다. 오를수록 환상경이 펼쳐진다
 
중봉 정상까지는 험한 등산로를 올라야 한다. ‘멜바의 달인’ 이윤기 이사도 고역을 치른다
실질적인 화악산 정상 역할을 하는 중봉 정상. 구름에 시야가 막혔다

 

 

기온은 급강하, 구름은 걷히지 않고 
작은 나무데크 전망대로 꾸며진 중봉 정상은 완전히 구름 속이다. 바로 옆의 군부대도 일부만 보일 뿐이다. 새로 초소 공사를 하는 인부들이 한창 작업중이다.
고지대에서 구름까지 끼어 기온이 급강하한다. 체감으로 5, 6도 쯤일까. 행여나 구름이 걷히기를 기대하며 기다려보지만 라이딩을 않고 가만히 있으려니 추위 때문에 10분을 버티기 어렵다.  

실운현까지는 페달링이 필요없는 급전직하 다운힐이다. 순식간에 내려서긴 했지만 바람에 체온은 더 떨어졌다. 응봉을 오를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시간이 늦은데다 구름까지 걷히지 않아 바로 하산하기로 한다. 이번에는 왔던 길이 아니라 가평쪽 좋은 길로 내려가 화악터널을 다시 통과한다. 터널을 통과하면 나오는 화천쪽의 작은 약수터에 반달곰 상이 서 있다. 로드 동호인 사이에는 실운현을 올라 반달곰과 함께 ‘인증샷’을 찍는 것이 중급 업힐실력을 증명하는 상징이란다. 로드도 즐겨 타는 이 이사의 지인은 “자전거 타고 올라왔다고 해야지!” 하면서 곰과 함께 인증샷을 남긴다.

출발지인 강원양어장횟집까지는 5.5km의 도로 다운힐이다. 자동차 한 대 다니지 않는 길을 전세 낸 듯 질주하는 쾌감은 비할 데가 없지만 반장갑에 손가락이 곱을 정도로 춥다.
“아이고, 얼마나 힘드셨어요. 이 추위에 정상까지 자전거로 다녀오셨어요? 내일은 더 춥다는데….”
살가운 주인아저씨는 ‘추위’라는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입에 담는다. 일행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더운물과 따뜻한 커피로 한참 동안 몸을 녹였다. 

기어이 화악산에는 겨울이 당도하고 말았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지만 당장은 어렵다는, 막연한 기다림의 아픔이 살짝 가슴을 짓누른다. 겨울 화악산은, 자전거는 고사하고 등산이든 자동차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올해도 화악산의 동면은 이 땅 어느 산보다 길고 깊을 것이다. 
             

해발 1360m 임도 종점은 구름 위 천상의 세계다

 

 

여정
가평을 경유해서 접근하면 화악터널을 지나 사평리나 그 전의 강원양어장횟집(033-441-1034)을 기점으로 잡으면 적당하다. 코스를 줄이려면 실운현 정상이나 화악터널 양 끝에 있는 소공원에서 시작해도 된다. 실운현 정상까지는 자동차 출입이 가능하다. 취재팀 일정대로 하면 상승고도 1477m, 거리는 24.9km이며 중봉 등산까지 포함해 4시간은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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