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최대평야에 우뚝 선 압도적인 위용과 조망

예산 가야산 677m
충청도 최대평야에 우뚝 선 압도적인 위용과 조망

E-MTB로 저 山에 ❻
메리다 원트웬티 + 벨로스타 센터드라이브
MTB, 모터 달고 다시 산으로

예산과 서산 경계에 솟은 가야산(677m)은 대평야지대에서 홀로 우뚝 솟아 일대에서의 존재감이 탁월하다. 예로부터 이 산을 숭배해서 암자터만 100여개에 이르고 지금도 개심사, 일락사 같은 고찰이 남아 있으며 명찰 수덕사도 가깝다. 산줄기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나면서 사 방으로 흩어져 내린다. 북쪽으로는 순환 임도가 나 있고 통신시설 관리를 위한 도로를 따라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정상이 출입금지여서 사실상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통신탑 옆에서. 산 아래로 천수만 일대의 간척평야가 질펀하다

 

고작 677m의 높이로 위용이라니? 합천 가야산(1430m)이 아니라 예산 가야산은 산 아래에 서는 순간, 해발 수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웅자를 보여준다. 서쪽은 천수만 일대의 대간척 평야, 동쪽은 예당평야가 질펀한 충청도 제일의 대평야지대에 우뚝 솟아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평야지대 사람들은 일대를 내려다보며 웅장하게 솟은 산을 숭배해 왔다. 대전 계룡산(845m), 전주 모악산(794m)도 비슷한 입지인데, 특히 종교와 미신의 집결지가 된다. 가야산에는 100여개의 암자터가 전하고, 북쪽 자락의 개심사와 일락사는 아직도 명맥을 잇고 있다. 비구니 수행처로 유명한 수덕사가 자리한 덕숭산(495m)도 크게 보면 가야산의 한 자락이다. 

이제 대평야지대에 홀로 우뚝한 이 거창한 산을 한바퀴 돌아 정상까지 오를 것이다. 거리는 50km 정도.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매우 가파르고 고개를 몇 개나 넘어야 해서 배터리가 버텨줄지 조금 불안하긴 하다. 최대한 페달링 주행으로 배터리를 아끼며 가야산을 깊숙이 들여다볼 것이다. 

 

가야산 정상을 병풍으로 삼은 남연군묘에 오후 햇살이 비꼈다

 

정상 조금 아래에 있는 산불감시초소는 남쪽 조망이 발군이다. 자전거 앞바퀴 뒤의 덕숭산과 안장 뒤의 용봉산이 겹쳐지고 그 너머로 충남도청 신도시가 살짝 드러났다

 

 

제왕을 낸 천하 명당을 안은 산
내가 가야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페르트 도굴사건(1868년)’으로 알려진 남연군묘 때문이었다. 조선말의 풍운아 흥선대원군은 왕이 나올 천하명당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원래 자리에 있던 절을 불태우고 아버지 남연군묘를 이장했다. 대원군은 이장 후 아들을 얻었는데 명당 덕분인지 정세 때문인지 하여튼 그의 둘째아들 이재황은 고종으로 즉위한다. 하지만 자식은 왕이 되었지만 나라는 바닥으로 추락해 결국은 일본에 합병당하는 치욕을 겪고 만다. 남연군묘 역시 도굴사건을 겪었으니 명당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산이 알을 품는 듯한 산자락에 남연군묘는 아직도 남아 있는데, 오늘 그 옆을 지날 것이다. 

출발지는 산 서쪽의 서산시 해미읍성으로 잡았다. 서해안고속도로에서 접근이 쉽고 시계방향으로 산을 일주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어서다. 해미읍성은 마을을 둘러싼 전형적인 조선시대 읍성(邑城)으로 성벽이 낮고 단조로워 방어능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삼국시대의 산성보다 오히려 전투시설로는 후퇴한 구조다. 이즈음 복잡한 설계와 높은 성벽으로 방어력을 극대화한 일본성과는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안은 텅 비고 성벽만 남은 읍성은 이제 허망하게 펄럭이는 깃발을 꽂고 관광명소가 됐다. 이곳은 산 너머 남연군묘와도 관련이 있는데, 1866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공격한 병인양요 이후 대원군은 천주교를 박해해 여기서도 수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이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이었으니, 조선말의 격동기에 가야산은 본의 아니게 평지풍파를 지켜본 무대 겸 증인이 되었다. 

해미읍성에서 황락천을 따라 일락사 방면으로 향한다. 거대한 철탑을 인 정상이 저편으로 아득하고, 사방으로 흘러내리고 중첩되는 산줄기는 거산(巨山)의 풍모다. 역시 산은 측량기로 잰 수치로만 말하지 않는다.
황락저수지 끝단에서 왼쪽으로 펜션지대를 지나면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휴일인데도 인적이 끊긴 적막강산. 길은 북쪽 사면을 돌고 돌아 용현자연휴양림으로 내려선다. 휴양림이 가까워서야 울긋푸릇 원색으로 차려입은 등산객들을 만난다. 휴양림 주변의 용현계곡은 600m급 산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고 규모감도 있다. 그만큼 산이 깊고 숲이 짙다. 
  

일락사 방면에서 임도로 들어서면 산길에는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용현자연휴양림 방면으로 가야 한다

 

대치리에서 올려다본 가야산 정상부. 오른쪽 안부를 통해 지그재그로 오른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본 모습. 아득히 보이는 두 줄기 물은 천수만의 부남호와 간월호다

 

 

‘백제의 미소길’ 따라 천하명당 터로 
휴양림에서 남연군묘까지는 ‘백제의 미소길’이라는 트레킹 코스로 등산객이 간간이 보인다. 급경사 오르막을 별로 힘들지 않게 쑥쑥 올라가자 마주오던 중년여성이 눈이 휘둥그레져 바라본다. 그렇다고 “이거 전기자전거예요”라고 실토하면 오히려 실망을 줄테니 그저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만 건넨다. 

퉁퉁고개(300m)를 넘으면 남연군묘까지 3.5km의 다운힐이다. 풍성한 숲과 둔중한 산록, 갓 절정을 넘겨 강렬함을 탈색하고 살짝 부드러워진 단풍… 이런 길을 달릴 때 나는 일종의 황홀감을 맛본다. 

낮고 긴 산줄기 최후의 자락에 높직이 올라선 남연군묘가 주능선을 병풍삼아 오후 햇살에 눈부시다. 서울근교에 산재한 조선조 왕릉들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나지막한 구릉지에 있는데 남연군묘는 입지는 비슷하지만 뒤편으로 거대한 산줄기가 맥동치는 것이 다르다. 명당의 기운을 믿지는 않지만 주변 풍광이 웅장하면서도 아늑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것은 특별하다. 무덤 뒤편으로 마치 용트림처럼 길게 이어진 산줄기도 특이하다. 옛사람들은 산줄기를 따라 기(氣)가 흐른다고 보았으니 그런 형국론으로 보자면 명당의 조건에 딱 부합하긴 한다. 

이제 덕산온천을 거쳐 산의 남쪽을 돌아 대치리에서 정상으로 향할 것이다. 대치리까지 주행거리는 29km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산길을 한참 달렸고 고개도 몇 개를 넘어 배터리를 장담할 수 없다. 다행히 배터리는 70% 이상 남았으나 가야산 정상까지 고도차 600m 이상의 가파른 업힐이 기다리니 장담은 어렵다. 일단 부딪히고 보는 거다.  

여기는 정상, 배터리는 50% 이상!   
엄청난 업힐이다. 대치리 마을을 벗어나자 길은 지그재그를 그리면서 가팔라지기 시작하는데 대부분 10% 이상의 아찔한 경사도다. 어시스트 강도 2단, 기어는 최저단으로 꾸준히 오르는 수밖에 없다. 70%를 웃돌던 배터리는 어느새 50% 대로 떨어졌다.   
 
정상과 원효봉(605m) 사이 안부에 있는 헬기장(450m)에 도착한다. 기대한 대로 대단한 조망이다. 대평야에 홀로 높게 솟았으니 사방의 모든 산들이 눈 아래로 보이고 들판은 끝간데 없이 펼쳐진다. 이제 정상은 지척, 배터리 걱정은 버려도 되겠다.   

정상에는 통신탑이 즐비하게 모여 있어 출입할 수 없고, 통신탑 사이에 있는 ‘원효봉중계소’라는 표지석이 사실상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지점이다. 정상보다 10m 정도 낮을까. 등산객을 위한 표지석과 전망대는 통신탑 북쪽에 따로 있다. 이윤기 이사가 있었다면 굳이 ‘멜바, 끌바’를 해서라도 가자고 했겠지만 혼자서 20kg 전기자전거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저 멀리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햇살이 기울고 있다. 2단으로 겹쳐 보이는 바다는 천수만의 간월호와 부남호이고, 맨 뒤의 기다란 육지는 안면도나 몽산포 즈음일 것이다. 정상이라곤 하지만 통신탑에 가려 조망이 막혀 조금 아래에 있는 암봉에 오른다. 이번에는 동쪽의 예당평야가 질펀하고, 충남도청이 들어선 홍성의 신도시가 용봉산 줄기 너머로 고개를 내민다. 원효봉 너머 덕숭산은 거대한 삼각 실루엣을 드리운다. 저 산자락에 얽혀 있을 비구니들의 숱한 사연들이 안쓰럽다. 우리나라의 산과 봉우리 이름은 대부분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 많은데 산사의 승려가 이름을 붙였기 때문일 것이다. 전국에 원효봉 의상봉이 얼마나 많으며 비로봉은 또 어떤가. 산이 거기 있는 한 불교는 명맥을 잇겠지만 도시의 시대에 휴양지로 남는 것도 생존의 방식이겠다.      

 

정상 남쪽의 암봉에서 바라본 산불감시 초소와 원효봉(605m). 그 너머는 삽교읍 방면의 예당평야다

 

은행나무 고목과 낙엽이 짙게 깔려 고즈넉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윤봉길 생가

 

 

남쪽 자락에 남은 윤봉길 의사의 흔적 
업힐에 30분 이상 걸렸던 길을 5, 6분만에 허무하게 내려섰다. 다시 덕산온천 방면으로 달려 윤봉길 의사 생가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출발지인 해미읍성은 대치리에서 45번 국도를 따라 11km 가면 된다. 

가야산 동쪽에는 결과적으로 조선을 망친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인연지라면, 남쪽에는 망한 나라를 살리기 위해 생명을 바친 윤봉길 의사의 터다. 산이 끝나고 들판이 시작되는 대치천 변에 의사의 생가가 있다. 은행나무 고목은 더 이상 짙을 수 없을 만큼 샛노란 잎사귀를 떨구고, 평온한 대지는 고요에 잠겨 있다. 

어떤 명목이든 자신의 생명을 바친다는 것은 궁극의 거룩함이다. 그것이 나라와 민족이라는 대의명분이라면 더욱 더. 의사는 단순히 분노에 사로잡혀 폭탄을 투척한 열사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뜻을 세워 농촌 계몽운동을 했고 야학을 열어 무지를 깨우치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최후에는 목숨을 바쳐 행동했다. 

중국이 일본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저항의 동력을 잃어갈 때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 한국인의 저력과 정신을 만방에 알렸다. 당시 중국 국민군을 이끌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할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탄식했다. 

겨우 25세의 약관 청년이 해낸 기개 앞에 머리를 숙이며 그가 나고 자랐던 뜰을 조용히 산책한다. 덕분에 나는 이 작은 자유와 풍요라도 누리고 있는 것 아닌가. 가야산 정상을 촛불처럼 밝히던 마지막 햇살은 기어이 땅거미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오후 햇살이 낙옆 위에 동그라미 두 개를 빚어냈다

 

 

여정
해미읍성을 기준으로 이번에 소개한 여정을 순환코스로 잡으면 총 50km가 된다. 코스를 줄여 윤봉길 의사 생가나 덕산온천을 기점으로 잡아 가야산 정상과 남연군묘 정도만 다녀와도 될 것이다. 길 찾기가 어렵지 않고 도로 구간도 다소 있어서 수도권에서도 당일 코스로 충분하다. 숙식 업소는 해미읍성이나 덕산온천에 많이 있다.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