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제국 건설한 칭기즈칸의 나라, 자원부국을 꿈꾸다

바람과 전설과 초원의 나라, 몽골
세계제국 건설한 칭기즈칸의 나라, 자원부국을 꿈꾸다

초원에 비가 내리면 길찾기가 최고의 난관이다. 아예 길이 없거나 너무 많아서 어디로 가야 할지 혼란스러운데 이럴 때는 기계를 믿어야 한다. 
최후의 라이딩 코스는 길이 험해 자전거를 두고 말을 탄다. 하지만 높직한 말등에 올라 균형을 잡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경치를 볼 여유조차 없고 말에서 내리면 ‘입(口)’ 빼고 전신이 다 쑤신다. 말 타기가 이처럼 어려웠던가 

  여행 개요                                  
  * 기  간 : 2017년 8월 2~14일(12박13일 간 라이딩과 여행 병행)
  * 지  역 : 몽골 중부지역(초원지역 라이딩과 일대 명소 관광)
  * 참가자 : ‘Tour de World’ 동호회 회원(일부 초대 회원 포함)
  * 숙  식 : 게르 캠프 숙박과 텐트 이용한 야영. 게르 캠프식(食)과 야전 취사
  * 기  타 : 초원코스(포장, 비포장)와 산악코스 라이딩(8일간 총 553km). 주요 명승지 관광

 

테렐지 국립공원에 있는 칭기즈칸 동상. 높이가 40m에 이르고 내부를 통해 말의 갈기 위로 올라갈 수 있다

 

 

day7  바트알지 ~ 브럭
         초원길이고 거리도 짧아 일단은 마음을 편안히 하며 여유를 부려본다
오늘(8월 8일)은 여행 6일차이다. ‘바트알지(Batulzii)’를 출발해서 ‘오르혼 江’을 따라서 ‘브럭(Buurug)’까지 가는 길이다. 오르혼 강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노라면 몽골 최대의 폭포  ‘울랑초트갈랑 폭포’를 만날 수 있다. 울랑초트갈랑 폭포 상·하류로 형성된 완전한 초원지대 55km만 가면 되는 매우 여유로운 일정이 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텐트 문을 여니 어젯밤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야영지 바로 아래에 있는 바트알지 마을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지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연기는 자욱하게 낀 아침 안개와 함께 마을 전체를 덮고 있어 더욱 평화롭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이곳 바트알지부터는 어제까지 보아왔던 초원지대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 푸른 초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산에 드문드문 침엽수가 자라고 있다. 푸른 초원과 조화를 잘 이루어 더욱 평온한 분위를 만들어준다. 

오늘 가야 하는 코스는 몽골에 와서 라이딩을 하면서 지나온 다른 코스들과 거리만으로 비교해볼 때는 절반 밖에 되지 않아 완전히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그래서 지난 밤 동안 내린 비로 잔뜩 물기를 머금은 야영 장비를 충분히 말린 다음 여유롭게 느지막이 출발하기로 한다. 야영 장비를 말리는 동안 차를 마시면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마을 어린이 서너 명이 우리 동네(?)로 구경을 왔다. 

건조 중에 있는 텐트가 신기한지 이리저리 살펴본다. 이곳 아이들의 눈에는 저 자그맣고 보잘 것 없는 좁은 공간에서 밤새 내렸던 그 많은 비를 어떻게 피하고 잠이나 제대로 잤는지가 많이 궁금하다는 눈치다. 피차간에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손’과 ‘표정’을 포함한 몸이 하는 말은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어느 정도는 통하게 마련 아니던가.

길이 없다?! 
야영 장비가 다 마르자, 짐을 꾸려 지원 팀에 인계하고 자전거 팀은 페달을 밟으며 야영지를 출발한다. 마을을 벗어나 오늘의 목적지인 브럭(Buurug) 사람 가는 길로 접어든다. 브럭마을로 가는 기존의 길이 며칠 동안 내린 비로 인해 완전히 끊겨버렸단다. 자동차는 물론이거니와 자전거도 이동이 불가하다고 주유소 직원이 알려준다. 다른 길을 찾아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오늘은 처음 출발부터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혼란스럽기만 한 하루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출발부터 매끄럽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출발하면서 매끄럽지 못한 것이 다행일까? 자전거 팀은 어렵더라도 어떻게 갈 수 있지만, 차량이 포함된 지원 팀의 이동이 문제다. 일단은 지원 팀과 함께 이동하기로 하고 다른 코스를 정해 그 방향으로 한참을 달려본다. 한동안 달리노라니 중간에 가던 길을 되돌아오는 차량과 길에 멈춰선 채 정비 중인 차량들을 만나고 나서야 우리가 가려는 코스로는 도저히 이동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원정대장을 비롯한 책임자들이 방금 전해들은 사람들의 말을 참고해서 지도를 놓고 이동방안에 대해서 의견을 나눈다. 의논할 때 모두가 참여하면 결론이 늦어지거나 결론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머지는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결정되는 사항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자전거 팀과 지원 팀이 분리되어 각기 다른 경로를 따라서 중간 집결지(점심식사장소)인 ‘울랑초트갈랑 폭포’까지 이동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초원에서는 무조건 돕는다 
이제부터는 통신도 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맨 앞에서 이동하는 향도를 믿고 따라가야 하며, 전체 라이딩 팀은 조별(組別)은 물론이고 개인 간의 간격도 좁히고 대형도 철저히 유지해야만 한다. 간격이 떨어질 경우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 

향도는 본대보다 훨씬 멀찌막이 앞서 가면서 뒤에서 따라오는 본대가 고생을 덜 할 수 있는 경로를 찾느라 경황이 없다. 뒤에서 가는 사람들은 향도가 지정해서 인도해주는 방향을 따라서 그냥 부지런히 간격 벌어지지 않게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미안한 얘기지만 뒤에서 가는 사람들은 향도보다 약간은 여유를 가져도 된다.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데 우리 자전거 팀이 가는 방향 중간 중간에 같은 방향으로 가는 차들이 물웅덩이에 빠지고 설상가상으로 차량의 하부(下部)가 바위에 걸려 꼼짝달싹도 못하고 있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한다. 우리 지원차량도 우리와 함께 이동하기로 결정했다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전체 일정에 큰 변화가 생기고 엉망이 될 것이 뻔하다. 이곳 초원에서는 저런 일이 허다하게 발생할 뿐만 아니라, 노면이 고르지 못하고 험해서 고장이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워낙 땅이 넓은 나라이다 보니 고속도로 주변이나 큰 도시가 아니면 정비소를 찾기가 쉽지 않다. 

지금 지나고 있는 이곳은 국립공원 속에 있고 마을을 찾기도 쉽지 않은 곳이라서 더욱 그렇다. 그러다 보니 몽골의 운전사들은 자신이 운전하는 장비를 직접 정비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출 수밖에 없고, 지나가는 다른 차량으로부터도 지원을 받는 게 보통이다. 몽골 사람들은 이런 끝없는 초원 한가운데서 어려움에 처할 경우 서로 도와주는 것에 매우 헌신적이다. 자기 자신도 얼마든지 그런 경우가 발생할 수 있으니까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고장 난 차량을 함께 정비하는 동안 서로는 이런저런 정보를 교환도 하니 그들은 그렇게 급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느긋해 보인다.

본대와 떨어지고 만 일행 
중간 중간 휴식도 취하고 사진도 찍으며 한참을 달리다보니 어쩌다가 일행 중 두 명이 본대로부터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두 명이 함께 떨어진 것이 아니고 한 사람씩 따로따로 떨어진 것이다.
몽골에 도착해 라이딩을 시작한 이후 제일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전화 통화가 되지 않으니 연락할 방법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두 사람의 능력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행히 두 사람은 수많은 라이딩 경험과 연륜(나이?)이 있어서 어떤 수단을 강구하더라도 중간집결지까지 찾아서 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다행이다 싶다. 

두 사람이 분리된 상황에서 나머지만이라도 제대로 방향을 잡고 가려고 힘을 모은다. 오늘 하루 가야 할 길이 짧다고 야영장비를 말리며 여유를 부린 것이 후회가 된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분위기도 좋지 않다 보니 개인별로 휴대한 식수도 빠른 속도로 계속 줄어든다. 게다가 화산활동으로 생긴 화산암들이 여기저기 깔려있어 가는 길을 더욱 더디고 무겁게 한다. 

그런 길을 한참을 또 달리는데, 기쁜 조짐이 있는 것 같다. 저 멀리에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오전 내내 달려온 길은 주변에 ‘게르’가 별로 없고 말과 양도 많지 않은 것을 보니 유목민이 아닌 일반 민간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저 사람들이 유목민이 아니라면 울랑초트갈랑 폭포에 온 관광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궁금한 나머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에 페달을 밟는 속도가 빨라지고, 그들과 점점 가까워지니 더욱 확신이 생긴다. 이곳에 있는 폭포에 관광을 온 사람들이다. 우리가 방향을 제대로 잡고 중간 집결지인 폭포까지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중간집결지에서 지원 팀과 이상 없이 합류해 큰 걱정은 덜었는데, 이제는 본대와 분리된 나머지 두 명과의 합류가 문제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안타깝다.    

오전에 지나온 오르혼 江을 따라 쭉 절벽과 계곡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동료들이 분리된 상황이고 초원 중간에 난 길을 따라 라이딩 하느라고 그것들에 대한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중간집결지인 이곳 오르혼(울랑초트칼랑)폭포에 도착하고 나서야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이 폭포는 몽골에서 제일 크다고 하며, 화산지대에다 지진활동으로 인해 생긴 갈라진 틈으로 계곡이 생기고 물이 흐르면서 형성된 거대한 절경은 몽골인들의 최고 휴양 명소 중 하나라고 한다.
‘판단이 어려우면 기기를 믿어라!’ 
사진도 찍고 휴대한 간식을 나눠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두 명이 폭포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본대와 분리되었던 동료다. 너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오늘 오전 라이딩은 비로 인해 길이 고르지 못해 힘들었고, 동료들 간에 분리되고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해 더욱 힘든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충분히 쉬어가야지….

오전과 마찬가지로 오후에 가야하는 길도 식별이 잘 되지 않고 명확하지 않아 GPS만 믿고 가야하기는 매한가지다. 오전에 향도를 했던 동료가 너무 고생을 많이 했기에 오후에는 향도를 교체하기로 한다. 초원에서의 라이딩은 불어난 물로 인해 있던 길이 없어져서도 탈이 나기도 하지만, 길이 너무 많이 생겨서 탈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수많은 라이딩 경험에서 오는 직감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은 GPS뿐이다. 

오전에 동료가 분리되어 어려움을 겪은 다음이다 보니, 가는 길이 조금만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 생기면 “이 방향이 맞다, 저 방향이 맞는 것 같다”라고 너나 할 것 없이 의견을 내놓는다. 이러면 또 혼란이 생기고 대원들 간에 서먹서먹해지기 쉽다. 모두가 처음 오는 곳 아닌가? 향도와 GPS를 믿고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잘못된 길로 가더라도 함께 잘못되어야 한다. 오전에 좋은 경험을 했기에 행동은 무조건 같이 하기로 한다.
엄청난 업힐을 힘겹게 올라 고개 정상부분에 도착했는데도 영 자신이 생기지 않아 고민에 빠진다. 공군 조종사로부터 전해들은 얘기가 있는데, 과학의 발달로 어떠한 기상조건에서도 전천후 비행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어려운 비행이 야간비행이고, 그 중에서도 해상에서의 야간비행이라고 한다. 야간에 해상비행을 하다보면 눈으로 보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착각할 때가 있다고 한다. 장비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비행훈련 과정에서 수도 없을 정도로 교육받는 것이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무조건 기기(機器)를 믿고 행동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오늘 향도를 맡은 사람은 그간 수많은 국내·외 라이딩 경험을 갖고 있다. 향도는 GPS장비를 믿고 줄기차게 밀고나간다. 오로지 GPS가 가르키는 방향대로 길이 없는 곳의 하천을 건너고 산도 넘으면서 전진하느라 힘든 라이딩이 된다.    

이럴 때는 술이 최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수록 유목민들의 게르가 보이기 시작하고 길이 이어지자 다들 조아렸던 마음을 놓는다. 이젠 전진해야 할 방향과 길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생기는데 점차 피로가 쌓이고 속도가 자꾸 느려진다. 다행인 것은, 오늘은 게르에서 묵기로 되어있어 텐트를 칠 필요가 없고 온수로 지친 온몸의 피로를 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희망을 안고 페달을 밟아 나아가는데 저 멀리에 몇 동의 게르로 형성된 휴양시설이 보인다. 도착해보니 오늘 우리가 묵을 곳이 맞다. 그런데 벌써 와있으려니 생각한 지원 팀이 보이지 않는다. 지원 팀이 도착하지 않으면 가이드가 없어서 게르 촌에 들어갈 수가 없다. 1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지원 팀이 도착한다. 지원 팀은 통신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전거 팀이 올 것으로 판단되는 장소에서 기다리느라 늦었던 것이다.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계속 꼬이게 마련이다. 분위기가 안 좋아진다. 이런 때일수록 서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말을 줄이는 것이 상책이다. 기계가 돌아가면서 잡음이 생기고 뭔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싶으면 ‘오일(기름)’을 쳐주어야 한다. 오늘처럼 의사소통이 잘 안 되고 불편한 분위기가 되면 특수 목적의 또 다른 윤활유, 한잔의 ‘술’이 최고이다. 오늘 메뉴는 바비큐다. 오늘 육체적으로 고생한 사람, 마음으로 고생한 사람 모두 술과 함께 바비큐를 즐기면서 많은 대화를 나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텐데 서로 말들을 아끼고 이제껏 수고해준 사람들의 노고를 얘기하고 격려함으로써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역시 술(맥주 + 보드카)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다.

어떻게 갈 것인가, 결론 없는 난상토론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내일부터 이틀 동안은 이곳 ‘브럭 게르 촌’을 출발해서 꽤나 높은 산을 넘어 ‘나이망 호수’까지 가는 편도 30km의 왕복 라이딩이 계획되어 있다. 그런데, 이곳 게르촌의 주인과 나이망 호수로부터 도보로 넘어온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요 며칠 사이에 생각보다 많은 비가 와서 자전거로는 도저히 고개를 넘을 수 없다고 한다. 걸어서 넘어가든지 말을 타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의견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산악자전거에 자신이 있는 몇몇 사람과 산길의 상태를 모르는 사람들은 내일 이동해야 할 거리가 30km 정도이면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니 둘러메고 가더라도 자전거를 타고 가자고 주장한다. 또 일부는 이번 자전거 라이딩이 끝나고 난 뒤 여행의 후반부에 승마 체험이 있으니 말을 타고 넘어가자고 한다. 또 다른 일부는 대부분 말을 타본 경험이 아예 없기 때문에 걸어서 가자고 주장하기도 하는가 하면, 아예 이틀 간 이곳에 더 머무르면서 주변 초원지대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쉬겠다는 의견도 나왔다. 

난감한 상황이 생긴 것이다. 몽골에 오기 전에 몽골로 자전거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비로 인해 7일 간의 라이딩 계획 중에서 하루 반밖에 타지 못했다고 들었다. 우리는 첫날 조금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들에 비하면 그래도 몽골 초원에서의 라이딩을 충분히 즐긴 셈이다. 내일부터 이틀간의 일정에 대해 많은 시간동안 의견을 나누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투어대장이 오늘 제시된 모든 의견을 바탕으로 밤새 고민을 한 다음 내일 아침에 결정을 내리기로 하고 매듭을 짓는다. 내일 어떤 결정이 내리더라도 모두 따르기로 하고 결산회의는 자정이 넘어서야 끝이 난다. 오늘은 게르에서 묶으면서 샤워도 하고 바비큐로 맛난 저녁을 먹는 등 어느 곳보다 여건이 좋은 편안한 저녁이 되어야 하는데, 내일 일정이 확정되지 않아서 결코 편하게 쉴 수가 없을 것 같다.  

 

망망대해 같은 대초원에서 길 찾기는 쉽지 않다. 경험과 감각, GPS를 총동원한다

 

앞장 선 향도를 믿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흩어지면 안된다

 

거친 돌길에 지원차의 고생이 대단하다

 

몽골 최대라는 오르혼(울랑초트칼랑) 폭포. 화산지대의 지진활동으로 갈라진 계곡을 쏟아져 내린다

 

 

day8   승마 체험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다

오늘부터 내일까지는(8월 9~10일) 라이딩의 마지막 여정으로 꽤나 높은 산을 넘어 가고 오는 일정이다. ‘브럭’에서 산을 넘어 ‘나이망호수(Naiman Lake)’까지 가는 편도 30km의 이 길은 평범한 비포장도로가 아니고 많은 구간이 돌과 바위로 이루어진, 이번 여행의 최고 난코스다. 편도 30km씩 왕복 60km를 넘어가고 다시 넘어와야 하는 길이다.

어제 밤늦게까지 나이망호수까지 가는 방법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데, 밤을 지낸 투어대장이 아침에 내린 최종결론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말을 타고 이틀에 걸쳐서 다녀오기로 한다. 할 얘기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다들 내려진 결정에 따르기로 한다. 

오늘부터 이틀에 걸쳐서 다녀 올 나이망 호수는 수세기 전 몽골 ‘항가이 산맥’의 화산폭발로 형성된 8개의 호수를 총칭해서 이르는 말인데, ‘탯줄로 연결된 여덟 개의 호수’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 호수들의 물은 화산지형의 특성으로 지하로 쉽게 스며들고, 지하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어 수위(水位)가 동일하다고 한다. 해발 2500m에 위치한 이 호수들은 차량으로는 접근이 불가해 자연 그대로 잘 보전되고 있어서 대자연의 삼림 속에서 캠핑과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 유명한 곳이라 외국 관광객도 꽤 많다고 한다.   

나이망 호수까지 사람을 태우고 갈 말과 짐을 싣고 이동할 야크를 준비하느라 출발이 많이 늦어졌다. 그래서 오늘은 중간에 있는 ‘휘스 호수(Huis Lake)’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하고, 내일은 최종 목적지 ‘시레트 호수’까지 갔다가 오늘 출발하는 ‘브럭’으로 복귀하기로 한다. 

마부와 야크 몰이꾼을 포함해서 거의 30명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의 대열이 형성되자, 바위와 물웅덩이 그리고 진흙탕으로 이루어진 길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한다. 마치 차마고도(茶馬古道)를 넘던 중국의 대상(隊商)들처럼 말이다. 일행 15명 중에서 말을 조금이라도 타본 사람은 4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수학여행 갔다가 사진을 찍기 위해 말등에 잠시 앉아본 것이 고작인 완전이 문외한이다. 몽골 여행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드넓은 초원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마부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말등에 올라본 사람들만이 말등이 얼마나 높은지, 말의 걸음걸이가 얼마나 빠른지를 안다. 그것도 서양말에 비해 체구가 작은 몽골 말일지라도….
산을 넘는 길은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었던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으로 온통 형성되어 있다. 요 며칠 사이에 내린 많은 비가 바위지대에서는 다 빠진 것 같지만 말을 타고 가는 길은 진흙탕과 물웅덩이로 변해있고 길옆에 있는 풀밭이라고 해도 푹푹 빠지기는 마찬가지여서 말을 타고도 이동하기가 만만치 않다. 이런 길을 자전거로 넘으려고 시도했다면 지나치게 용감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무모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비바람 속의 야영 
오늘의 목적지 휘스 호수에 도착한다. 여기까지 오면서 말 위에서 균형을 잡느라고 온갖 용을 쓰느라 허벅지를 포함해서 온몸이 다 아프다. 말을 타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줄은 처음 알게 되었다. 일행 중 두 명은 말에서 낙마해 진흙탕에 빠지는 바람에 모양이 우습게 되었지만 다치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휘스호수로 오는 동안의 주변은 이때까지 봐왔던 초원과 달리 매우 아름다웠지만, 말에서 떨어질까봐 신경을 쓰느라 경치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높은 지역에 8개의 호수가 어깨동무를 하고 큰 습지를 이루고 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그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몽골에 와서 나흘을 텐트치고 야영하는데 그때마다 날씨가 그렇게 좋지 않다. 오늘도 텐트를 치는데 또 비가 뿌린다. 호수 곁에 있는 게르를 빌려 비가 멎기를 한참을 기다린다. 비가 조금 잦아든 틈을 타서 텐트를 친다. 그래야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가 제법 오락가락하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가운데서도 지원 팀에서 용케 식사를 준비한 모양이다. 너무 고생이 많고 너무 고맙다. 다른 날은 저녁을 먹으면서 하루를 얘기하며 그 날의 일정을 결산하는 친목시간(?)을 같이 하는데, 오늘처럼 기상이 좋지 않으면 그럴 여유도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 일찍 텐트로 들어가고, 그래도 몇몇은 우의를 걸치고 피워놓은 모닥불 주위에 두런두런 둘러서서 하루를 되짚는 시간을 갖는다. 

오늘은 코스는 길지 않았지만 처음 타보는 승마체험으로 인해 다들 피곤하기도 하고 날씨도 고르지 못해서 더욱 빨리 텐트 안으로 들어갔기에 주변은 더욱 조용하다. 텐트 플라이와 풀밭에 떨어지는 빗소리로 미루어 제법 많은 비가 오고 있구나 싶었는데, 급기야 우박까지 내린다. 밤이 깊어갈수록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아서 바람막이를 입고 그 위에 우의까지 겹쳐 입고 자리에 눕는다. 주변의 산이 높고 깊어서 야생동물이 더러 있다고 하지만 게르와 인접한 곳에 텐트를 쳤기에 게르에서 기르는 개(몽골 방하르)가 있어서 안전하다고 한다. 이 개는 매우 사나워서 짐승들을 충분히 경고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부분의 짐승들과 대적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야간에 모닥불을 피워놓았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말에 안심하고 잠을 청한다.

안 아픈 데가 없다 
아침까지도 텐트를 때리며 내리는 빗방울 소리에 눈을 뜬다. 밤새 비와 바람과 싸우느라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와 보니 가까이 있는 산의 정상에는 밤새 눈이 쌓여있다. 몽골에 와서 눈을 보게 되다니… 그것도 8월에.

밤새 꾸준히 내리고 아직도 내리는 비로 인해 지원 팀에서 식사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한다. 잼을 바른 빵과 비스킷 몇 개가 개인별 텐트로 배달(?)되어 텐트 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대신한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날씨가 좋아지면 바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비를 맞으면서도 텐트를 걷고 짐을 꾸린다. 아침 일찍 서둘러 최종 목적지인 ‘시레트 호수’까지 갔다 오려던 계획도 간밤의 많은 비로 인해 도로사정이 더 나빠져 어제 출발했던 브럭으로 바로 복귀하기로 조정한다. 

비를 맞으면서 바로 출발하는데, 어제부터 내린 비로 인해 길이 훨씬 더 미끄러워졌고 물웅덩이도 더 많이 그리고 더 깊게 패여 길 상태가 더욱 좋지 않다. 다들 승마 실력이 어제보다 훨씬 향상되어 혼자서도 자유자재로 말을 다룬다. 생각했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려서야 브럭 게르촌에 안전하게 복귀할 수 있었다. 

브럭 게르 촌으로 넘어오는 도중에, 걷거나 말을 타고 나이망 호수 방향으로 트레킹을 하는 여러 외국인 팀을 만나 인사도 나눈다. 엄청난 짐을 휴대한 것으로 보아 정말 때 묻지 않은 호수 일대에서 며칠을 여유있게 보내고 올 모양이다. 그들이 보기엔 대규모 승마 팀이 이동하는 우리가 매우 신기하게 느껴지는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평소에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말(馬)을 이틀에 걸쳐서 거의 6시간 이상을 탔더니만 허리, 다리와 사타구니 등 몸 어느 한 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누구의 표현처럼 ‘입’만 빼고 다 아프다. 다들 최종 목적지로 잡았던 시레트 호수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거기까지 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들 얘기한다. 이 말 한마디에 투어대장을 비롯한 집행부와 지원 팀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렇게 해서 자전거 라이딩 일정은 모두 끝나고 내일부터는 보다 편안하고 여유 있는 여행을 즐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유도 부릴 겸 해서 밤늦게 별보기를 시도해보지만 몽골은 우리에게 결코 별이 쏟아지는 황홀감을 주지 않으려는지 구름이 하늘을 가린다. 몽골에 와서 쏟아지는 별을 보고 느낄 수 없어서 많이 아쉽지만 내일부터의 새로운 시간들에 대한 기대를 안고 또 하루를 정리한다.     

 

이런 길을 자전거로 가려고 했다니…. 하지만 승마도 보통 힘든 게 아니다

 

해발 2500m의 고지대에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신비의 나이망 호수

 

이런 돌길을 말을 타고 편히 지났지만 균형을 잡느라 경치를 볼 틈이 없다

 

휘스 호수 근처에서의 야영. 맑던 날씨가 점점 흐려져 밤에는 비바람이 몰아쳤다. 몽골에서 야영을 할 때는 언제나 비와 바람이 함께 했다

 

말들의 휴식. 작은 몽골말인데도 실제 안장에 오르면 말 등이 너무 높아 놀란다

 

라이딩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제는 편안한 관광 여정이 기다린다

 

 

day9 자전거 말고도 탈 것이 많고 볼 것도 참으로 많다

나이망 호수까지 가려던 계획이 말을 타고 가는 트레킹(승마체험)으로 수정됨에 따라 자전거 여행 후에 더 많은 곳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대표적인 것이 고비사막(엘승타스르하이:Elsentasarkhai)에서의 체험이다. 몽골 말로 ‘물이 없는 곳’ 이라는 뜻의 고비사막은 몽골과 중국 내몽골 지역에 펼쳐져 있는데 몽골 국토의 1/3이 고비사막에 속한다고 한다. 사막이라고 해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모래 언덕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규모가 큰 사막도 있지만 몇 백미터 크기 정도의 사막이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도 많다. 사막이라지만 생존 조건에 맞는 여러 종류의 식물은 물론, 야생낙타와 당나귀 등의 동물도 서식한다.

모래언덕이 형성된 곳에서는 ‘모래썰매 타기’를 즐길 수 있고 더 넓게 펼쳐진 평지에서는 ‘낙타타기 체험’도 할 수 있다. 먼저 모래썰매타기를 체험해본다. 모래썰매타기에 사용하는 썰매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썰매를 한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행 모두는 한국에서 눈썰매를 타본 경험이 있어서 모래썰매 타기에 큰 어려움 없이 금방 익숙해진다. 언덕의 경사도는 약 50% 정도로 가파르지만 길이가 그렇게 길지 않아 여러 번을 오르내리며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썰매타기를 즐긴다. 말 타기보다 훨씬 더 쉽게 재미를 느끼는 것 같다. 

썰매에 이어 낙타타기 체험도 해본다. 낙타의 등에는 독특한 ‘지방 혹’이 있는데 1개 있는 것은 단봉낙타, 2개의 혹이 있는 것은 쌍봉낙타라고 한다. 단봉낙타는 인도와 중동지방, 북아프리카가 원산지이고 쌍봉낙타는 중앙아시아에서 서식하며 몽골의 낙타도 모두 쌍봉낙타이다. 쌍봉낙타의 등에 있는 두 개의 지방 혹은 흡사 말안장처럼 생겨서 낙타타기 체험을 하기에 아주 편하고 좋다. 

일행 모두가 낙타를 타고 무한대로 펼쳐진 고비사막을 제법 먼 거리까지 체험해본다. 출발지로 돌아와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보니 낙타라는 동물이 사막에서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정말 잘 진화해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낙타의 발은 발가락이 2개이고 부드럽고 넓적해 모래사막에서 잘 빠지지 않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속눈썹은 2줄로 되어 있고 귀에 털이 나있을 뿐만 아니라 콧구멍도 자유자재로 닫을 수 있어서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도 살아가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낙타 등 위에서 사막을 체험하다 보면 주변의 초원지대까지 엄청 먼 곳까지 보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이제껏 초원에서 탔던 자전거보다 높이가 훨씬 높기 때문인가? 몽골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먼 곳까지 볼 수 있다고들 한다. 몽골 사람들의 눈이 좋은 것은 환경적 요소(넓은 시야, 푸른 초원)도 있지만 유목생활을 하다 보면 멀리 봐야할 필요성이 많은 생활방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삶의 전부나 다름없는 가축이 지금 어디에서 풀을 뜯고 있는지, 다른 집 가축들과 섞이지는 않는지 등을 매시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일상 자체가 멀리 보려는 연습이라고 한다. 

또 다른 요인으로, 광활한 평원에서의 생존과 관련 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평원과 초원에서는 어려움에 봉착할 경우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거나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래서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적보다 먼저 식별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 원거리에서 적의 접근을 식별한 뒤 공격할 방법이나 다른 대책(도망, 숨을 곳?)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물의 눈은 물론, 손 또는 발과 같은 모든 기관은 사용할수록 발달하며, 사용하지 않는 것은 퇴화하고 소멸되어 간다는 ‘라마르크(Chevalier de Lamarck)의 용불용설’을 증명하는 예(例)에 해당되는 경우가 아닐까?

 

모래썰매는 언덕이 가팔라도 안전해서 금방 익숙해진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쌍봉낙타를 타고 고비사막을 누볐다

 

 

day10  울란바토르 가는 길에 열차를 본다. 
            저 열차는 무엇을 싣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

사막 썰매타기와 낙타타기 체험을 끝으로 몽골 중부 지방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이제는 몽골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는 수도 울란바토르로 향한다. 가야 할 길도 280km나 된다(울란바토르는 인류 역사상 수도를 가장 많이 옮긴 몽골의 29번째 수도이다. 몽골은 유목문화 특성상 수도를 가장 많이 옮긴 나라로 기네스북에 올라있음).

한참을 달려 울란바토르에 가까워지는데 저 멀리 철길이 보이고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고 가이드가 전한다. 몽골에서 흔치 않은 풍경이란다.
 
몽골은 목축업이 주를 이루는 나라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는 세계 10대 자원부국으로 광물이 매우 풍부하다. 매장량 기준으로 석탄이 세계 4위, 구리가 세계 2위를 차지함은 물론 금, 철, 아연, 석유 등을 포함해서 매우 다양한 광물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몽골 전체 수출의 87% 이상을 광물이 차지하고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몽골의 인구가 300여만 명인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엄청난 자원의 개발과 수출을 위한 여건이 미흡하다는 점이다. 몽골에는 외국으로 직접 나갈 수 있는 항구가 없어(울란바토르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는 1700km 떨어진 중국의 톈진항), 수출품을 해외로 수송할 수 있는 방법은 전적으로 도로와 철도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도로는 주요 도로만 포장이 되어 있는데 도로망 자체도 매우 부족한 상태이다 보니 대규모 물동량을 수송하기 위한 몽골의 기간 교통망의 역할은 철도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몽골은 1938년부터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러시아(당시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49년 울란바토르에서 러시아 국경까지, 1955년 울란바토르에서 중국 국경까지 철도를 완공함으로써 남북으로 총 길이 1115km의 몽골횡단철도가 완성되었다. 몽골횡단철도 외에 소규모 지선을 포함하더라도 몽골 국토의 크기를 감안하면 극히 한정된 지역만 철도가 통하고 있는 실정이다. 몽골정부는 광물자원 개발을 촉진하고 대외시장 진출을 확대하기 위해 새로이 5600km의 철도 부설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출주도형 국가인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의 시장이자 인구 밀집지역인 유라시아 대륙과의 철도망 연결을 위해 많은 노력(TKR, TSR, TCR 등과의 연결)을 기울이고 있으나 북한과의 문제로 인해 실현 가능성을 예측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라는 천혜의 입지적 요건을 활용해 무역을 하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과거에 일어났던 수많은 전쟁이 대규모 하천이나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주요 항구나 도시를 확보하기 위한 경우가 많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세계 4대 문명 모두가 큰 강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대부분의 수도가 큰 강과 인접해있거나 해안을 끼고 있는 것을 보면 국가의 지리적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몽골도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내일부터는 울란바토르 일대에 있는 관광지를 중심으로 여유를 가지고 자유롭게 둘러볼 참이다. 몽골전통공연을 보면서 몽골초원의 맛을 더욱 진하게 느껴보고, 울란바토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테렐지 국립공원’에 가서 몽골의 또 다른 자연 환경도 느껴보고, 몽골의 살아있는 신화 ‘칭기즈칸 기마동상’(칭기즈칸이 금빛 채찍을 발견한 곳으로 알려진 곳에 세워진 높이 40m의 거대한 동상)도 둘러볼 예정이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의 말미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순직하신 ‘애국지사 이태준선생 기념공원’을 방문한다. 남다른 감회가 들지 싶다.

 

초원을 가르는 철길. 사방이 대륙으로 막힌 몽골에서 철도는 대외로 뻗어나갈 수 있는 통로다

 

쉽게 볼 수 없는 몽골의 열차

 

여정을 끝내고 출국 준비 완료

 

 

여행 후기를 마치면서…
몽골 사람들은 돌궐제국을 부흥시킨 ‘톤유크(Tonyuquq) 장군’의 비문에 적힌 문구 중에서 ‘성을 쌓는 자는 망할 것이요,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말을 즐겨 얘기하곤 한다.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오늘도 더 좋은 풀을 찾아서 초원 여기저기를 이동하고 있다. 후손들에게 짐승을 잘 키우기 위해서 싱싱한 풀을 찾아서 쉬지 말고 이동할 것을 주문하기 위해 했던 말일까? 당시는 유목민으로서의 자세를 강조한 말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오늘날의 입장에서 해석해보면 달리 볼 수도 있겠다. 

오히려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니 이를 경계해서 한 말일 수도 있겠다 싶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무한한 도전을 강조한 것이겠구나 생각하면 이는 비단 몽골 인들에게만 하고자 한 말이 아닐 수도 있지 싶다. 몽골을 여행하는 사람은 이 말 한 마디는 새겨볼만 하지 않을까 싶다.

작년 봄 800여km에 이르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올 봄에는 만년설로 덮인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산맥의 에베레스트산 언저리에 있는 높이 5400m의 ‘고쿄리’ 설산을 오르면서, 이번 여름에는 800여년 전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서 최강의 세계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의 초원을 자전거로 달리면서 서로 각각 다른 많은 것들을 느끼고 돌아왔다. 12박 13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수도 울란바토르를 기준으로 한 몽골 중부지역에서 극히 제한된 550여km를 자전거와 말(馬)로 여행하면서 느낀 것만으로 한반도의 7배 크기나 되는 몽골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었겠다 싶다. 

몽골의 깊은 맛을 이 광활한 몽골 땅 몇몇 곳을 둘러보고 얘기하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예의에도 맞지 않는다. 모래와 함께 세차게 불어오는 몽골의 맞바람과 눈을 시원하게 했던 초원이 그리워질 때가 다시 오지 싶다. 그때는 이번 여행 동안 달렸던 몽골 초원의 그 끝자락에서 나머지 부분을 더 이어 달리기 위해 그곳 몽골로 또 향할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좋은 눈(視力)으로 더 많은 것, 더 소중한 것들을 보고 가슴에 담아오고 싶다는 욕심을 내본다.

 

초원 언덕에 그려진 말과 자전거가 나란히

 

한 외국인 여행자의 세계일주지도. 한국이 빠지다니… 우리가 어떤 나라인지 모르는구먼

 

라이딩 중 지원차 그늘에서의 달콤한 휴식

 

“사랑해요! 몽골.” 일행을 도와준 지원팀 (www.mongolmate.com)이다

 

“산 사람은 먹어야지”

 

 

테무진, 칭기즈칸이 되어 최초의 세계제국을 만들다
삼국지에 유비·관우·장비가 의형제를 맺은 ‘도원결의(桃園結義)’가 있었다면 칭기즈칸과 몽골에는 ‘발주나 맹약’이 있다. 승승장구하던 칭기즈칸도 양아버지 ‘옹 칸’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일생일대의 고비를 맞기도 했다. 칭기즈칸은 위기를 맞아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다 온통 진흙뿐인 ‘발주나 호숫가’에 다다르게 되고, 이곳에서 19명의 동지들과 흙탕물을 마시며 몽골제국 정체성의 기초가 되는 ‘발주나 맹약’을 다지게 된다. 

맹약을 맺은 동지 중에는 동생 ‘카사르’ 한명을 제외하고는 친족은 물론 몽골족도 없었고 종교도 달랐다. 이들은 여기에서 맺은 맹약을 지켜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고 유목민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나의 민족을 재탄생시킨 것이다. 칭기즈칸은 주변의 믿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면서도 “내가 복수하겠다가 아닌, 모두 나의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맹약의 진정한 의미이며 세계제국으로의 성장에 밑거름이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전 세계를 호령하던 몽골군에 대해 얘기할 때 ‘무자비한 살육’이 세계를 지배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들 얘기하곤 한다. 맞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틀린 부분이 있기도 하다. 몽골에 관한 책들을 보면 ‘몽골인들은 저항하거나 공격하는 자(者)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지만, 패배한 자(者)라도 따르는 자들은 모두 형제로 받아들였다.’라는 기록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이런 관용의 자세, 포용의 문화가 있었기에 칭기즈칸이 몽골 초원의 강자가 되었고 몽골이 세계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바로 ‘관용, 포용의 자세’가 세계 정복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계를 제패한 몽골군대는 결코 몽골인만으로 구성된 군대가 아니라, 정복한 모든 나라의 군대와 군인이 모인 다민족 집합체의 연합군으로 발전, 강화되었다. 순수 몽골족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투를 하면 할수록 군대의 규모가 더 커지고 더 강한 군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을 공격할 때는 유럽과 아랍의 신기술을, 반대로 유럽을 공격할 때는 중국에서 획득한 또 다른 기술을 활용했다. 그들만의 고유한 전투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점령지에서 습득한 다양한 무기와 전법을 적극 수용해 전투력을 보강함으로써 기술적, 전술적 기습을 달성하곤 했다. 

이런 점들을 보면, 몽골이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세계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관용(寬容)의 자세’와 ‘포용(包容), 수용(受容)의 문화’를 꼽으며, 그 문화를 몽골제국에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은 제국의 창업자 칭기즈칸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테렐지 국립공원에 있는 높이 40m의 거대한 칭기즈칸 동상

 

 

애국지사 이태준 선생, 조국 독립에 온몸을 바치고 몽골에 인술(仁術)을 뿌리내리다
이태준 선생은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본관은 仁川) 세브란스의학교(현 연세대)를 졸업했다.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만든 ‘청년학우회’에 가입했으며 일제로부터 체포 위협을 느껴 1912년 중국 난징으로 망명해 ‘기독회 의원’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1914년 김규식 선생과 함께 비밀군관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울란바토르로 이동해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개설하고 독립운동의 연락거점으로 활용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운반하고 의열단 활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선생은 또한 인술을 베풀어 당시 몽골에 만연해 있던 질병을 퇴치해 몽골 사회로부터 ‘하늘이 내린 신의(神醫)’로 칭송받았으며, 몽골의 마지막 황제 ‘복트 칸’의 주치의로도 활약해 1919년 몽골 정부로부터 ‘에르데닌오치르’라는 최고훈장을 받았다. 선생은 1921년 일본군과 내통하고 있던 러시아 백군(白軍)에 의해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피살당하여 죽어서도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 땅 몽골 초원에 고이 잠들어 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순직한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했다. 울란바토르에는 독립 운동가이며 위대한 의사인 이태준 선생의 고귀한 삶을 기리기 위해 ‘이태준 기념공원’이 설립되어 있다. 

 

독립운동과 몽골 계몽운동을 한 이태준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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