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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자전거여행마야부인은 왜 누드였을까? 마드리드 미술관 감동산책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 북아프리카까지 
마야부인은 왜 누드였을까? 마드리드 미술관 감동산책


오랫동안의 꿈이던 스페인 땅에 벨로스타 전기자전거와 함께 도착했다. 스페인은 그냥 유럽의 한 국가가 아니다. 한반도 두 배반의 넓은 국토는 지형과 풍속, 민족까지 다양하고, 이슬람 문화의 영향도 짙게 스며 있다. 첫발을 내디딘 수도 마드리드는 예술의 향기로 감미롭다. 말로만 듣던 세기의 명화를 눈앞에서 만나는 감격에 시간을 잊었다  
 

마요르 광장. 1619년 펠리페 3세에 의해 조성되었으니 역사가 깊다. 9개의 아치문을 통해 마드리드 어느 방향으로나 갈 수 있다

 

 

스페인 (Kingdom of Spain)
주요 국가 지표
◢ 면적  51만㎢(남한의 5배)
◢ 수도  마드리드
◢ 인구  약 4800만명
◢ 공용어  에스파냐어, 카탈루냐어, 바스크어
◢ 종교  인구의 95%가 로만 카톨릭
◢ 통화  유로화
◢ 시차  KST보다 8시간 늦음
◢ 전압  우리와 같은 220V

 

스페인의 상징 소

 

 

연재를 시작하며…

매혹의 땅, 그리고 오랜 꿈 스페인을 향하여 
독자 여러분, 지면을 통해 다시 만나 기쁩니다.
지난번 러시아와 북유럽, 발트3국 여행기로 여러분과 소통한지 벌써 2년이 흘렀군요. 이번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품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모로코를 다녀왔습니다.


스페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나라. 
유럽 사람들조차도 ‘살고 싶은 곳’ 인기투표에서 단연 1등을 차지한 나라.
이 나라는 유럽의 어디보다 우리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과거 오랜 기간 이민족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전통을 이어온 기질, 문화, 정치, 음식 면에서 비슷하죠. 여행길에서 만난 스페인 여자들이 “한국남성은 매력적이다”란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달콤한 이 말에 즐거웠죠! 실제로 한국남성과 결혼한 여성도 많음을 현지 교민에게서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옆 나라 포르투갈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 예로 이 나라의 전통민요 파두(Pado)는 기다림의 고통을 노래한 것으로 우리 한(恨)의 정서와 맥을 같이합니다. 한때 해양강대국으로 세계를 주름 잡았지만 지금은 변방국가로 전락한 이유를 알아보려고 여기저기 다녀보았죠. ‘부자는 망해도 3대 간다’고 아직 고색창연한 유적과 전통이 곳곳에 널려 볼거리가 풍성했습니다.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꿈에도 그리던 검은 대륙에 두 바퀴 궤적을 남겼습니다. 아프리카는 제가 젊은 시절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땀 흘려 일한 곳이기도 하지요. 이븐 바투타(Ibn Battutah, 1304~1368)가 그 옛날, 30여 년에 걸쳐 10만km, 40여 나라를 여행한, 그의 생가를 찾느라 탕헤르의 카쓰바 뒷골목에서 땀 깨나 흘렸습니다.
만약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여행하며 먹고 살기’을 택하겠지요. 


여행, 태어나 한곳에서 평생을 산 사람과 온 세상을 누빈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시간(수명)은 어쩔 수 없지만 공간은 우리 의지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이 가능합니다. 저는 공간의 확장이 바로 여행이라고 유년시절부터 누구의 도움 없이 간파했죠. 여행을 많이 하면 그만큼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고, 언젠가 삶이 끝나는 날 후회 없이 떠나야 한다는 것이 저의 ‘여행지론’이기도 합니다. 

다른 넓은 공간으로 스피디하게 이동한다는 것- 그것은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줍니다. 저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처럼 가급적 많은 체험을 하려고 움직이고 또 움직였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이번 여행은 PAS(Pedaling Assist System) 전기 자전거를 이용했습니다. 갈등과 망설임이 있었지만 이제는 거부할 수 없는 물결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저는10살 때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자전거 생활 57년’ 만에 육신의 힘에 타 동력을 빌어 전진했던 것이지요. 그것은 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의 전환만큼이나 대변화였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말이죠.

‘여행의 즐거움은 속도에 반비례한다’고 했나요! 그러나 전기자전거의 속도가 주는 여유로움은 볼거리 많고 가볼 곳 많은 이번 여행길에서 축지법(縮地法)이었습니다. 이 도술(!) 때문에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더 많은 것이 가슴으로 들어왔습니다.
자~ 이제 안장위에서 본 여행담 보따리를 풀어 놓을까요!

 

자전거도로 표시

 

“조선의 추위는 혹독해 일본과는 비교도 안된다. 추운 날씨에 손발이 동상에 걸려  아침 미사를 올릴 때 병사들의 행동이 부자유스럽다. 많은 병사들이 굶주림과 추위 질병 등으로 불쌍하기 그지없다. 본국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식량을 보내주지만 모든 병사들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일본군 수중에 들어오기도 전에 ‘꼬라이’ 인들에게 빼앗기기가 다반사다. 그들은 지형에 밝아 식량을 지고 가는 낌새만 보이면 벌떼처럼 나타나 빼앗아 달아났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서양인 최초로 조선 땅을 밟은 사람이다. 이름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1551~1611). 직업은 스페인 예수회 선교본부 신부로 젊은 나이로 일본에 파송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 마흔둘의 나이로 제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 세례명 아우구스티누스) 휘하 군종신부로 조선에 왔다. 그때가 1593년 12월 27일. 난파선으로 제주도에 표착해 <하멜 표류기>를 남긴 네덜란드 선원 헨드릭 하멜보다 60년이나 앞섰다. 


세스페데스는 1년여 진해 일대에 머물며 왜병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영세를 베풀었다. 16세기 유럽과 동아시아간의 접촉의 문을 연 사람들은, 제해권을 쥐고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한 예수교회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세스페데스’를 만나고부터
몇 년 전 졸저 <재팬 로드>를 쓰며 이 사실을 알고는 언젠가 세스페데스의 고향 스페인(그는 톨레도에서 태어나 마드리드에서 성장했다)에 가서 그의 흔적을 더듬어보고 싶었다.
첫 번째 이유는 우리 땅을 밟은 최초의 스페인 사람이란 역사적 의미 때문이다. 또한 임진왜란을 전쟁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시각으로 기록한 것도 신빙성이 높다.


육전(陸戰)에 대해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꼬라이 병사들은 견고한 가죽으로 만든 가슴받이를 두르고 머리에는 철모를 쓰고 있었다. 훌륭한 무사들로서 왕에 대한 충절이 넘쳐흘러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우다 죽었다.” 이것은 아마 초기의 부산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는 과정인 것 같다. 

해전에 대해서는 “꼬라이 인들은 강력하고 거대한 배를 타고 다니며 일본으로부터 오는 배를 족족 섬멸하였다. 바다에 관한한 일본인보다 더 훌륭한 장비와 재능을 가졌다.”라고 쓰고 있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으로 연전연승에 관한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세스페데스는 모두 4번의 보고서를 본국 선교본부에 보낸 기록이 남아있다.

두 번째 이유는 비록 침략군의 종군신부로 왔지만 조선인들에게도 선행을 많이 했다는 사실이다. 도요토미의 무모함을 간파했기 때문일까. 별 의미 없는 침략 전쟁과 조선에서 참상을 목격한 그는 일본에 돌아가서도 조선인 포로들에게 영세를 주며 노예로 팔려 나가는 것을 막았다. 당시 노예상인들은 대부분 포르투갈 인들이었다. 나가사키에서 선교회의를 열어 이들이 조선인을 매매하면 파문하고 벌금을 물리도록 하는 등 포로 구호활동에 힘썼다. 

  ‘역사를 알고 여행을 하면 인생을 두 배로 산다’고 한다. 상상의 나래를 펴고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 그 시간들은 실제 여행보다 더 흥분되고 가슴 뛴다. 역사·지리·인물·전쟁·사건·풍물·음악·미술·문학·영화 등 모든 것이 준비 자료다. ‘여행은 온몸으로 떠나는 독서’란 말처럼 여행과 독서는 내 인생을 지탱해주는 두 키워드이기도 하다. 여기에 ‘여행기 쓰기’도 추가하고 싶다.  


그 다양성이 부럽다!
이베리아 반도는 대서양과 지중해에 에워싸인 사람의 주먹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주먹’ 안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가 자리 잡고, 팔목으로 이어지는 끝 부분에 동서로 늘어선 것이 피레네 산맥이다. 

이 험준한 산들이 지금은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과 거에는 천연장벽 역할을 했다. 반도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을 가르는 좁은 바다, 지브롤터 해협에 면해 있다. 스페인은 유럽과 아프리카, 지중해와 대서양이 교차하는 ‘세계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의 두 배 반 정도 되는 이 나라는 지역적으로 극과 극을 달릴 만큼 판이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나의 일천한 경험으로는 북미 대륙에 못지않은 다양성이었다. 변화무쌍한 이 땅이 한마디로 부러웠다.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무어시대의 영광을 보여준다

 

남부는 아직도 아랍의 전설이 남아
안달루시아라 불리는 이 지역은 여름에 비가 적고 몹시 덥고 건조하다. 거의 북아프리카 수준이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올리브와 포도 나무가 끝 간 데 없이 늘어서 있다. 여기에 아랍인들의 걸작 알함브라 궁전이 그 옛날 흘러간 영화의 덧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궁을 거닐며 MP3에서 흘러나오는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감미로운 기타 연주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솔로 바이커의 긴장을 풀어주는 단비였다.    반전! 열정적인 ‘스페니쉬의 영혼’이라 일컫는 플라멩코가 생겨난 그야말로 정열의 땅, 역시 이곳이다.
아직도 아랍의 색채가 농후하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대회교 사원)는 예수와 마호메트가 공존하는 세계에 하나뿐인 관용의 전당이다. 


‘고도방 가죽’이란 질긴 가죽(말 엉덩이 부분)의 대명사이다. 과거 이 지역은 아랍인들이 말을 많이 키워 질 좋은 말가죽으로 명성이 높았다. ‘코르도바 가죽’이 일본에 건너가서는 ‘고도방 가죽’으로 굴절된 것이다. 
  


중부는 정치와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
비가 많고 녹색 목장지대와 그사이를 흐르는 시내가 있다. 반도 중심에 위치한 방대한 카스티야 지방은 스페인의 정치와 예술, 문화의 중심지이다. 불후의 화가 엘 그레코가 사랑한 도시 톨레도가 있고, 수도 마드리드를 품고 있다. 우리가 즐겨 먹는 카스테라는 ‘카스티야의 전통식품’이었다. 이것 역시 ‘고도방’과 같은 전철을 밟아 우리에게 왔다.  

‘고도방과 카스테라.’ 1549년 스페인, 포르투갈로부터 예수교를 비롯 총포, 화약,빵-포르투갈에서는 ‘팡(pao)’, 스페인은 '빤(pan)' 등 신문물이 일본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들은 환호하며 즉각 모방 작업에 들어갔다. 

일본은 막부시대에 쇄국정책을 표방했지만 엄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교세가 커지자 위기를 느낀 막부는 ‘기리시탄(예수교인)’을 탄압했다. 그 대신 선교를 안 하는 네덜란드를 향해 문을 열기 시작했다. 1641년 동인도회사(East India Trading Co. Ltd. 본사는 암스테르담)의 나가사키 지점을 허가해 세상(서구) 돌아가는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말이 회사지 조약권, 독점적 무역권을 가진 다국적기업으로 사실상 국가 조직이나 다름없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참패하고, 네덜란드가 ‘대항해시대’를 주도하며 급부상하자 이를 재빨리 간파한 것이다. 당시 란가쿠(蘭學, 네덜란드를 연구하는 학문)를 모르면 식자층이 아니었다. 나가사키의 명소 ‘하우스텐보스’는 그것의 산물이다.
이후 네덜란드가 영국과의 해상권 다툼에서 밀려나자 이번에는 영국을 연구하는 풍조가 불길처럼 일어났다. 얼마 후 독일(당시 프로이센)이 강대해지자 또 독일을 향한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런 ‘무서운 변신’의 나라다.


이 대목에서 오로지 병든 공룡, 중국만 바라보던 조선과는 대비가 된다. 모화사상과 당쟁에만 매몰되었을 뿐 리더에게 앞날을 내다보는 통찰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20세기 초는 약육강식의 시대, 일본에게 잡아먹힌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허나 우리는 아직까지도 일본에 대한 미움만 증폭하고 있을 뿐 왜 당했는지 ‘어떻게 해야 또 안 잡혀 먹히는지’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외국 여행을 할 때마다 ‘우리는 뭐가 모자라 그들 발아래 35년간 모진 종살이를 했는지’ 알고 싶다. 이런 가슴앓이는 나의 ‘습관성 고질병’이자 바퀴를 돌리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돈키호테의 흔적을 찾아 카스티야 라만차 지방으로 향했다. 돈키호테가 적장(敵將)으로 착각해 돌진했던 그때 그 풍차들이 황량한 대지 위에 우뚝 솟아 400년 만에 동방에서 달려온 ‘한국의 돈키호테(?)’를 반겨주었다. 바뀐 것이 있다면 로시난테가 벨로스타 맥스로!


북부의 숨 막히는 절경 속으로
북부는 바스크와 갈리시아 지방으로 대표되며 험준한 산악지형이다.
우리 강원도 지방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령(嶺), 봉(峰), 치(峙)가 많다. 긴 것은 업힐만 15km가 넘는 산도 있다. 센터드라이브의 도움 없는 ‘맨 자전거’였다면 여러 날 노숙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대서양과 단애(斷崖)로 만나는 이 지역은 숨 막히는 절승이 많다. 거기서 만난 구석기시대의 알타미라 동굴 천장에 그려진 소. “아… 바로 이것이었네!” 작은 탄성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오래전 그저 책에서만 보고 들은 사실이 눈앞에 펼쳐져있다. 동굴을 나오며 오랜 숙제를 끝낸 듯 홀가분했다. 아득한 옛날부터 스페인과 소는 불가분의 관계란 생각이 들었다.

브라질 출신의 소설가 빠울로 꼬엘료는 인생의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험준한 북부를 횡단하는 산티아고 순례길 약 800km를 걸으며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나는 역시 글을 써야겠다”며 <연금술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나도 여행기를 쓰고 있지만 족탈불급이다….
 

아르간수엘라 다리 위에서 만난 매력적인 스페인 아가씨

 

 

여행의 IN-OUT, 마드리드
마드리드는 스페인 내륙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동서남북 어디로나 이동하기 편하다. 그래서 수도가 되었나보다. 이번 여행길은 마드리드를 출발점이자 종점으로 정했다. 즉, 마드리드로 입국해 어떤 형태로든 이베리아 대륙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바르셀로나를 IN-OUT으로 정한다. 서 유럽 쪽에서 오는 경우가 그러한데, 나는 제반 문제를 고려해보니 역시 ‘중원’을 택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섰다.

요즘 스페인이 시끄럽다. 카탈루냐(바르셀로나) 독립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다. 중세 시대 스페인은 카스티야, 아라곤, 갈리시아, 레온 등 여러 기독교 봉건국가들이 난립해 있었다. 이들은 하나의 목적 즉, 서로 연합하여 8세기 초 무슬림들에게 정복된 영토를 되찾자는 탈환운동(Reconquista, 레콘키스타)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들 간에는 인종, 문화, 역사는 물론 언어마저 달라 한 지붕 아래 살기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통합의 결정적인 계기는 1479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1세와 북동부 카탈루냐를 주축으로 하는 아라곤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의 혼인이었다. 세기의 정략결혼으로 스페인은 공동 군주의 지배하에 놓였다. 불안한 결혼생활은 ‘왕위 계승전쟁’을 벌이는 등 우여곡절이 계속되었다. 

그나마 잘나가던 국세(國勢)는 영국의 해적 드레이크에게 무적함대가 패하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또다시 트라팔가 해전에서, 비록 프랑스와 연합했지만 영국의 넬슨에 무참히 깨지고 만다. 결정적으로 19세기말 미국과의 전쟁에서 또 참패해 쪽박마저 깨졌다. 쿠바와 필리핀을 미국에 내주고는 하향길로 내달았다.
  그러던 중 2차 세계대전 직전 ‘스페인 내전’으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 프랑코 장군에 의해 지역 갈등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36년의 독재정권은 프랑코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고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 입헌군주제가 부활했다. 그 후 민주화가 진행되어오던 중 최근의 ‘카탈루냐 독립사태’로 발전한 것이다. 마치 유고슬라비아가 강력한 통치자 티토가 죽자 치열한 전쟁 끝에 6개의 독립국가로 쪼개졌듯이. 


문제는 배터리 수송이번 여행길에 동반자가 되어줄 애마는 벨로스타 맥스드라이브 350W. 27.5인치 휠셋의 하드테일로 무게는 23kg.
무게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기자전거로 해외여행은 큰 난관이 하나 버티고 있다.  다름 아닌 배터리 수송. 배를 이용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일반 여객기는 폭발의 위험성 때문에 리튬 배터리는 절대로 가지고 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특수 포장한 배터리(36V-20A, 3.5kg)를 화물기에 실어 보내야만 한다. 유럽까지 약 일주일 소요된다. 그래서 출발 열흘 전쯤에 마드리드에 한인 민박집(주소, Calle Embajadores 76 1-A, Madrid. Spain)을 물색해 카톡으로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다음에 화물기에 실어 보내 도착 확인 후, 나는 대한항공 915편에 몸을 실었다. 

운송료는 배터리 값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비싸다. 이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시장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배터리를 현지에서 구입(임대)할 수 있는지, 여행을 마치고 되팔수 있는지 등이다. 필자가 사용한 배터리는 현재 상기 민박집에 보관중이다. 필요로 하는 독자가 있다면 연락 바란다.
바하라스 국제공항은 마드리드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가는 방법은 가격에 따라 경유편과 직항편으로 나눌 수 있다. 자전거와 함께 간다면 좀 비싸더라도 직항편이 훨씬 유리하다. 중간에 비행기가 바뀌면 환적으로 인해 파손의 우려가 커진다. 헌데 직항편은 대한항공 한 노선뿐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하라스 공항은 인천공항을 생각하면 무척 낡고 협소했다. 또한 여기저기서 공사 중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버사이즈 카고를 운반하는 컨베이어 벨트가 없어 조바심이 일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전거가 일반 짐과 뒤섞여 나왔다. 

 

마드리드의 자전거 교통경찰

 

시에서 운영하는 공용 전기자전거

 

마드리드 시내에 있는 스페인 광장. 청동상은 돈키호테와 시종 산초

 

 

아니 이런 일이… 그러나 긍정 모드로!
입국심사나 세관검사는 별로 까다롭지 않고 관리들의 표정도 호의적이었다. 나 역시 간단한 스페인어 “올라(Hola, 안녕하세요?)”와 “무차스 그라시아스(Muchas Gracias, 고맙습니다)”를 구사하니 그들도 밝은 미소를 지었다.
민박집 주인장이 공항에 나와 주어 별 어려움 없이 숙소에 도착했다. 자전거 걱정이 되어 바로 조립부터 했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뒷바퀴가 돌지 않는다. “아니, 이런!” 천으로 만든 운반가방(세미 하드케이스)이 좁은 화물칸에서 15시간 눌려서 왔다면 뻔한 노릇 아닌가. 1인 1개 수하물 원칙에 따라 운반가방 안에 패니어 등 이것저것 채워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불운을 곱씹기보다 “프레임이나 포크가 온전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라는 긍정모드로 마음을 바꾸고 스페인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근처 자전거숍을 찾아 나섰다.  내가 묵은 숙소 엠바하도레스 지역은 마드리드의 부도심으로 상점이나 생활 편의점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다행히도 숍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브레이크 디스크는 한번 중심이 틀어지면 바로잡기 어렵다. 마침 재고가 있어 신품으로 교체하니 바퀴 회전이 원상으로 돌아왔다.
외국에서 자전거 수리를 맡길 경우 우리와 달리 부품비 얼마 공임 얼마 이런 식으로 청구된다. 서구인다운 합리적인 방식인데 노동(기술)에 대한 자부심으로도 생각해본다. 



마드리드에서는 전기자전거가 제격
자, 이제 자전거도 고쳤으니 테스트 겸 시차 적응을 위해 마드리드 시내 주유(走遊)에 나섰다. 내가 터득한 가장 빠른 시차 적응 법은 도착 다음날 여기저기 최저 50km 이상을 타고 돌아다녀, 낮잠 대신 몸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다.

마드리드는 벌써 전기자전거가 공용 자전거로 자리 잡았다. 시내 자전거도로 체계도 전기자전거를 위해 전용차선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 여기엔 자전거는 최저 시속 30km란 규정이 있다. 그러니 전기자전거가 제격이다. 물론 속도 규정만 지킨다면 어느 자전거도 무방하다.

전용차선이란 도로 중앙 즉, 편도 3차선의 경우 2차선이 자전거 전용이다(요즘 서울에도 맨 우측 차선이 자전거와 혼용되는 도로가 만들어 지고 있다). 물론 자동차도 다닐 수 있지만 뒤에서 경적을 울리거나 위협적인 행동을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자전거는 도로 갓길이나 인도에서는 주행 금지다. 

사실 나는 두려웠다.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 한가운데로 나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도와 갓길을 번갈아 타다가 몇 번이나 교통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한번은 “우리나라와 체계가 달라 두렵다!” 했더니만 경찰은 “우리 법을 지키세요. 차들이 당신을 보호해 줄 겁니다”라는 친절한 설명에 자신이 생겨 차로 한복판에 나가 달릴 수 있었다. 

일단 전용차선에 들어서니 다리에 절로 힘이 들어갔고, 센터드라이브의 5단계 중 2단, 3단을 반복하니 속도는 가볍게 40km까지 올라갔다. 지금까지 26인치 휠을 사용했는데 이번 맥스드라이브 27.5인치는 같은 파워로 시속 5km 정도는 더 나가는 듯 했다. 속도가 이쯤 되자 차와 함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교통 흐름에 끼어들어갔다. 
마드리드는 업다운이 심하지 않고 운전자 또한 호의적이어서 어디서나 자전거 타기는 무리가 없었다.

 

솔 광장의 명물 소귀나무를 잡고 있는 곰 상은 마드리드의 상징이다

 

과거 왕실 정원이었던 레티로 공원의 인공호수. 프라도 미술관 뒤편에 있다

 

 

‘솔 광장’에서 ‘솔로’로
우선 그랑 비아(Gran Via) 거리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마드리드의 중심거리로 20세기 초에 도시구획을 정비할 때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벤치마킹’ 했다고 한다.
1.5km 대로에 명품 숍, 호텔, 고급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있다. 길이 끝날 즈음 아담한 공원에 두 사람의 기마상이 눈에 들어왔다. 가볼 것도 없이 로시난테를 타고 있는 돈키호테와 종자(從者) 산초였다.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na)으로 세르반테스 사후 300주년을 기념해 세운 상이다. 그는 아직도 부동의 국민작가 대우를 받고 있다. 참고로 ‘스페인 광장’은 스페인 웬만한 도시에는 한곳 이상 꼭 있다.
스페인 광장을 떠나 왕궁(Palacio Real)을 향해 가다보면 ‘푸에르타 델 솔’이라 불리는 솔 광장(Puerta del Sol, ‘태양의 문’이란 뜻)이 먼저 나오고 다음이 마요르 광장(Plaza Mayor)이다. 스페인 하면 ‘강열한 태양’을 떠올리는데 여기가 진원지일지도 모른다. 광장은 중세 때 축제도 벌리고 왕가의 의식, 혹은 종교재판을 열어 마녀 화형식을 하는 등 사회생활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마요르 광장과 더불어 솔 광장은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첫발을 내딛는 장소로 마드리드의 심장이라 불린다. 마드리드를 상징하는 거대한 곰 상이 서있고, 스페인 각지로 뻗어나가는 도로의 기점을 알리는 0km 포인트가 있다. ‘증명사진’의 장소로 유명해 여기서 독사진 찍기는 쉽지 않다.

나는 어느 나라를 가나 여정을 처음 시작할 때는 가장 상징적인 곳을 찾는 습관이 있다. 장도에 앞서 경건한 마음으로 안전과 무사귀국을 염원하기 위해서다. 태극기와 스페인 기를 자전거에 부착하고는 ‘나 혼자만의 발대 세리모니’를 마치고 인근 카페에 들어갔다. 시원한 세르베사(cerveza, 생맥주) 한잔에 타파스(작은 접시에 담아주는 일종의 애피타이저)와 하몽(돼지 뒷다리 훈제한 것) 몇 조각으로 조촐한 발대식을 마쳤다.
 

만자나레스 강을 따라 조성된 마드리드 시민들의 휴식처. 자전거도로는 물론 6개의 공원이 있다. 다리 디자인이 독특해 여러번 왔다갔다 해보았다

 

벨라스케스의 대표작, 시녀들. 가로 318cm 세로 276cm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 유럽이 아니다’
마드리드는 유럽의 여느 수도에 비해 역사가 짧다. 펠리페 2세가 1561년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겼으니 450년 남짓. 그래서 볼거리가 많은 편은 아니다. 전국 산지사방에 골고루 흩어져 있다는 말이니, 한마디로 스페인을 제대로 알려면 지방 이동을 많이 해야 한다. 장거리 이동은 기차보다 버스가 낫다. 자전거를 분해해 홑겹 포장을 한 다음 플랫폼을 찾아 오르내리는 수고보다 버스터미널에서 바로 버스 짐칸에 싣는 편이 유리하다는 말이다.

우선 마드리드에서 집중적으로 시간을 써야할 곳은 미술관 두 곳이다. 프라도 미술관과 소피아 미술관. 두 미술관은 메인 역인 아토차 역(Estacion de Atocha)을 중심으로 서로 멀지 않다. 특히 소피아 미술관은 내가 묵었던 엠바하도레스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였다.

 

프라도 미술관 앞에 벨라스케스가 화구를 들고 앉아 있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고전주의 건물로 후안 비에누에바가 설계했다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곳은 파리의 루브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와 함께 세계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렘브란트나 루벤스, 고흐 등 유럽 대가들의 작품은 유럽 어느 나라 주요미술관에 가면 다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고야(Goya), 벨라스케스(Vellazquez), 무리요(Murillo) 등의 걸작들은 오직 프라도에서만 볼 수 있다. 그것이 꼭 프라도를 들러야할 이유다.

왜 스페인 화가들은 고립되어 있었을까.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 유럽이 아니다’는 말은 과거 서구 정복자들에게 회자되었다. 미지의 땅이란 뜻도 있고 ‘아프리카 수준’이라는 경멸적 의미도 숨어 있다.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여타의 유럽 국가들은 산업혁명 등으로 일찍이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유독 스페인은 봉건의식의 타성에 젖어 헤어나지 못했다. 또한 근 800년이란 긴긴 세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 그 ‘물’이 쉽게 빠지지 않은 것도 주요인이다. 그리고 보니 미술과 문학을 제외하면 철학이나 의학 등 이공분야에서 스페인은 세계사에 별로 기여한 바가 없다.

 20세기 들어와서 전기, 전자의 발전으로 ‘피레네 장벽’은 무너지고, 또 불세출의 천재화가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가 등장하면서 스페인 미술의 위상이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미술관 앞에서 떠올린 말죽거리
프라도 미술관의 컬렉션은 12세기에서 19세기 사이의 순수 스페인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원래는 왕궁의 부속 박물관이었으나 페르디난드 7세와 이사벨라 왕비의 수집품이 합쳐지면서 본격적인 미술관으로 발돋움 했다. 1785년 카를로스 3세의 지시로 당대의 건축가 후안 데 비예누에바가 설계했다.

프라도란 초원(草原)이란 뜻이다. 당시는 이 일대가 목장지대로 한적한 외곽지역이었다. 상전벽해 ― 과거, 말죽거리가 지금은 금싸라기 땅 양재동이 된 것을 생각하며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엔 ‘왕립 회화 및 조각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출발했다. 1868년 지금의 국립미술관으로 변신했다. 현재 100개의 전시실에 1300점이 전시되고 있으며 8600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위대한 스페인의 화가들의 경우 화가별로 따로 전시실을 만들어 놓았다.
 


스페인 최초의 누드화?
나는 평소 관심이 많았던 고야 전시실을 먼저 찾아들었다. 프라도에는 고야의 작품이 100점이 넘는다. 하지만 문제작 마야 시리즈(?)의 <옷을 벗은 마야(The Naked Maja), 스페인어로는 ‘마하’라고 읽음>와 <옷을 입은 마야(The Clothed Maja)>가 유명세를 떨친다. 누드화 화가와 모델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종교재판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 모델이 된 여인은 누구인가? 알바공작의 부인 카에타나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의 관계는 어디까지인가? 당시 이 스캔들로 마드리드 사교계는 떠들썩했다. 신화에서만이 허용되는 여체의 은밀한 부분을 현실의 여인에게서 그려냈다. 엄격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 일어날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이들의 관계를 방증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고야가 그린 알바공작부인의 기립 전신 초상화인데 그녀의 손가락이 땅바닥에 쓰인 글씨 ‘나에게는 고야뿐(Solo Goya)’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 손을 확대해보면 중지에 ‘ALBA’ 검지에 ‘GOYA’라고 쓰인 반지를 끼고 있다.
고야는 종교재판의 심문에서도 끝까지 모델의 신상을 밝히지 않았다. 그저 ‘마야’라고만 말할 뿐(마야란 스페인 말로 ‘끼 있는 여인’ 정도의 뜻이다).


어쨌든 ‘옷을 벗은 마하’는 종교재판에서 외설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어두운 창고에서 100년을 잠자고 있다가 빛을 보았다. 그곳이 바로 당시의 실력자 마뉴엘 고도이의 저택이었기 때문에 그의 정부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옷을 밉은 마야.’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한 알바공작이 언제 화실을 덥칠지 몰라 옷을 입은 그림을 그려두었다고 함

 

옷을 벗은 마야.’ 중년의 고야는 이 부인을 열렬히 짝사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가로 190cm 세로 97cm

 

문제의 알바공작부인 손가락

 

고야의 '1808년 5월 3일.’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인간의 잔인함과 동시에 용기를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사투르누스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농사의 신이다. 이렇게 잔인하고 역겨운 그림은 처음이다. 가로 83cm 세로 146cm

 

 

고야, 그는 누구인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sisco de Goya, 1746~1828)는 아라곤 지방의 사라고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미술에 두각을 나타내 불과 17세의 나이로 마드리드 국립 미술 아카데미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3년 후 다시 응시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상심한 젊은 고야는 이탈리아 피렌체로 건너가 파르마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귀국한다. 출세욕은 남달라 각고의 노력 끝에 43세에 카를로스 4세의 전속 화가가 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궁정화가가 된 것이다. 왕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려 생활은 윤택해졌다. 그러나 그리고 싶은 그림을 못 그려 갈등이 계속되던 중 중병(매독 혹은 수은 중독설)을 앓고는 그 후유증으로 청력을 상실하고 만다. 

이무렵 관능미 넘치는 문제의 알바공작부인을 만났다. 부적절한 관계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자, 공작부인이 먼저 관계청산을 선언하는데 고야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상심했다. 노욕을 불태울, 이룰 수 없는 사랑, 더 애절했던 모양이다. 이후 작풍마저 바뀔 정도로 상처는 평생 그를 따라 다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림이 사라지고 역겹고 공포감을 자아내는 검은 톤의 ‘어두운 그림’이 주종을 이루었다.


최고의 노이즈 마케팅?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은밀한 남녀관계 특히 불륜 엿보는 것은 ‘좋은 안주거리’가 된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전세계에서, 나를 포함하여 프라도 미술관에 기를 쓰고 오는 이유도 이런 호기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수년 전, 서유럽기행 중에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브람스 기념관을 찾아간 기억을 떠올렸다. 그곳에 가면 의문이 풀릴까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요하네스 브람스와 미모의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과의 관계. 음악가의 사랑 중 ‘그들의 관계는 어디까지였을까’로 세인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며 아직도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다. 브람스는 총각이었고 클라라는 과수댁이었으니 불륜은 아니었다.  아이를 일곱이나 둔 14년 연상이자 스승 슈만의 아내 ―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브람스는 그녀를 뜨겁게 사랑했다. 

젊고 장래가 촉망되던 브람스에게 뭇 여성들이 프러포즈해왔으나 다 물리치고, 클라라와 40여년 800통이 넘는 연서를 교환했다. 클라라가 몸져눕자 브람스는 <네개의 엄숙한 노래>를 작곡해 그녀에게 바쳤다. 얼마 후 클라라가 세상을 뜨자,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뒤를 따라갔다. 64세의 독신으로.


소피아 미술관(Museo Reina Sofia)
스페인이 자랑하는 주옥같은 현대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마드리드에 왔다면 프라도와 함께 한번은 들러볼만한 곳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고풍스런 병원 건물을 개조해 1986년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의 성가를 올린 세 거장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와 살바도르 달리(Salbadore Dali, 1904~1989) 그리고 후안 미로이다. 피카소의 작품은 종종 보아왔지만 달리는 처음이라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올랐다. 마침 내가 간 시간은 무료입장이 허용되었다. 문화 강국임을 자부하는 스페인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항상 사람이 붐빈다. 1937년 작품

 

소피아 미술관. 현재의 왕비 이름에서 따왔다. 18세기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에 최신식 통유리 엘리베이터가 현대미술관임을 말해준다.파리의 뽕삐두 센터를 연상케한다

 

 

“조국이 민주화 되는 날 내 그림을 보내시오”
뭐니 해도 이곳의 아이콘격인 작품은 피카소의 <게르니카, 776×349cm>이다. 작품도 크지만 넓은 홀 같은 전시실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지방에 있는 인구 1만5000명 정도의 작은 도시.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4월 26일 오후, 콘돌이라 불리는 독일의 정예 전투기편대가 나타나 기총소사를 하며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무방비의 마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하며 25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는 초토화 되었다.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프랑코장군 요청에 히틀러가 즉각 화답한 것이다. 자기에게 반기를 드는 바스크 지역에 대한 경고이자 뒤에는 든든한 후원자 히틀러가 있다는 과시용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묻혀 버릴 수도 있었지만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의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본이 뉴욕 UN본부에 걸려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흑백으로 그렸다. 작품은 역사, 이야기, 전설, 비극, 은유 등 수많은 얘깃거리를 함축시켜놓고 있다. 죽은 아이를 안고 우는 어머니, 쓰러진 사람들, 황소, 말, 불타는 건물, 하늘을 보며 두 팔을 들고 절규하는 사람. 여러 요소들이 나란히 배치되는 식으로 구성됐다. 한 손에 부러진 칼을 든 채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도 있다. 그러나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꽃은 피어났다. 이런 식의 산만한 구성은 혼란스러웠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만든 작가만이 알 것이다. 아니 그도 모를 수 있다. 

이 그림은 193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스페인관 벽화로 세상에 첫선을 보여 이목을 끌었다. 1942년 파리의 작업실에 들이 닥친 나치 장교가 <게르니카>를 보고는 “당신이 그렸소?”하고 물었다. 이에 피카소는 “아니오, 당신들이 그렸소!”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3년 피카소는 죽으면서 “고국에 민주정치가 부활되는 날 <게르니카>를 스페인 땅에 보내라”는 유언을 남겼다. 1975년 독재자 프랑코가 죽자 비로소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었던 이 작품은 고국 땅을 밟았다.

 

달리의 '위대한 자위행위자.' 여인의 얼굴과 말의 몸통을 결합시켜 인간의 성욕을 나타내고 있다. 1929년 작품

 

 

프로이트에게서 영감 얻은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을 이렇게도 그릴 수 있구나!”
달리의 작품 앞에서 과거 그의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 전율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식욕이 배고프던 대학시절, 정신과 의사 출신의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정신분석학 입문>이나 <꿈의 해석> 따위를 탐독할 때였다. 두 사람의 연관성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했는데 최근에야 달리가 프로이트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했다.  
1904년 태어난 달리는 어렸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막무가내였다.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청년시절 돌출 행동으로 마드리드 국립 미술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시간이 지나도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이다.


뛰어난 화가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더 잘 보도록 해 준다. 화가는 ‘제3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재적 재능이 예술적 광기로 표출되는 예술가들이 존재한다. 이 광기가 지나치면 미치광이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인자했던 어머니와 형의 죽음, 자신을 향한 부친의 집착증 등은 우울증과 망상증을 불러와 무의식 속에서 그를  괴롭혔다. 성욕과 여성 편력 역시 그의 정신세계를 차지하는 큰 난관이었다. 달리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정신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를 흠모했다. 그는 인간의 성적 충동과 억압을 모든 인간행동의 주요인으로 보았다. 프로이트가 정의한 ‘리비도’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에도 크게 공감했다. 

오매불망하던 프로이트를 달리는 런던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나의 추측으로는 자신의 고통을 상담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짧은 인터뷰 순간에도 달리는 능숙한 솜씨로 프로이트의 초상을 스케치 했고 후에 펜과 잉크로 초상화를 완성했다. 존경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아내이자 전속모델, 갈라
비상식적이고 요상한 수수께끼 같은 그림으로 화가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고백해야할 무언가를 불안하게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그 불안감이 우리로 하여금 각자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고민과 번뇌, 상실과 두려움을 마주하게 만든다.

그의 ‘쉬르 레알리즘(Sur-Realism)’ 작품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지만 그 안에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타고 온갖 갈등이 난무하는 현대인의 삶을 표현한다. 이런 의미에서 달리의 작품은 나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작품의 묘미다.

프로이트 다음으로 그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10년 연상의 아내였다. 유부녀였던 슬라브계 갈라(Gala, 원래 이름은 엘레나 디아코노바)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다. 그때 달리의 나이 스물다섯. 시인 남편과 이혼한 갈라는 평생 달리의 반려가 된다. 아내이자 뮤즈였던 갈라에 대한 세인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하지만 오늘의 달리를 만든 예술성의 원천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만년에 명성과 부도 이루고 85세까지 살았으니 그런대로 수(壽)를 누렸지만 ‘죽어서는 불행’했다. 다름 아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 것이다.

 

달리의 ‘기억의 영원한 지속’

 

달리의 ‘창가에 서있는 소녀.’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들어가기 전인 1925년 작품

 

달리가 스케치한 그의 멘토, 프로이트

 

달리와 마르티네스. 바람둥이들이여, 사후 생각을 하시라!

 

 

영면(永眠)을 방해받은 사람들
작년에 아벨 마르티네스란 60세 여성이 나타나 자신이 달리의 생물학적 딸이라고 주장하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950년대 중반, 달리의 포트 리가트(Port Ligat) 집에 자신의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할 때 관계를 맺어 태어났다고 했다. 후사가 없는 부친에게 내가 유일한 상속자이니 현재 스페인 정부가 소유하는 달리의 작품들의 반환인도를 요구했다. 금액으로 환산한다면 계산해 볼 것도 없이 천문학적이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스페인 법원이다. 카탈루냐 고등법원이 “친자관계를 확인할 단서가 부족하니 시신에서 DNA를 채취하라”라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근자에 이런 쇼킹한 뉴스를 처음 접했다.
2017년 7월, 상속자 딸(?)을 비롯 여러 사람이 입회한 가운데 스페인 북부 피게레스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1톤이 넘는 육중한 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후 28년 만이다. 이 광경을 지켜본 문화부 장관 멘데스 드 비고는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라며 통탄했다. 3개월이 지난 최근, 달리 재단은 시료 채취 분석 검사 결과를 발표했다.


“마르티네스가 달리의 친생자가 아님이 판명되었다. 이제 이 황당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리고 마르티네스는 발굴 비용 등 제반 손해를 배상하라.”
스페인 사람들은 확실히 다혈질이다. 그러니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좀 시간이 지난 일이기는 한데, 한 가지 비슷한 사례가 더 있다.


프라도에서 만났던, 200여 년 전에 고야와 염문을 뿌렸던, 알바공작 부인. 그 가문의 후손들이 조상의 명예 회복을 위해 그녀의 관을 파내 뚜껑을 열고야 말았다. 고야의 <옷을 벗은 마야>가 조상인지 아닌지를. 그때가 1945년이었으니 지금처럼 법의학의 유전자 감식 기술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도 유골의 형태와 그림 속 체형을 비교해 진위여부를 밝혀내려 했으니 말이다. 150여년이 흘렀으니 육탈(肉脫)은 물론 백골도 진토 되어 아무 소득 없이 조상만 욕보이고 뚜껑을 닫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
협찬  벨로스타, 참좋은여행,  포메라 스포츠,  IL인터내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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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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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mon 2018-01-06 03:08:38

    지금까지 본 많은 자전거 여행기 중에서 최고 수준인것 같습니다. 건강하시길 빕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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