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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상)-(담양 · 광주 · 나주)담양의 풍류, 극락으로 통하다

영산강(상)-(담양 · 광주 · 나주)
담양의 풍류, 극락으로 통하다


가마골을 떠난 물이 추월산 물그림자를 기어이 받아들여야 하는 풍광, 그 자리에 담양호가 앉아 있다. 영산강을 키 작다 할 일이 아니라 산협에 몸을 깊이 감추고 있는 근원까지 찾아내 보태야할 일이다. 담양이 전라북도 순창 땅 깊숙하게 발을 담그고 있는 것도 순전히 영산강 물줄기 때문이다. 담양이 음풍농월 가사문학의 무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소쇄원에 머무는 사계절도, 죽녹원의 대 바람 소리도 조선의 풍류와 맞닿아 있는 배경이다. 빛고을 무등산을 멀찌감치 돌아가며 영산강은 차별 없는 세상을 간구했으리라. 강마을 사람들은 저무는 가을 날 눈부시게 흔들리는 갈대꽃 언저리를 ‘극락강’이라 달리 부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자전거 협찬 : 알톤 스트롤 전기자전거
 ‌기술·용품 협찬 : 태능한성바이크(02-971-7206)
 
‌취재지원 : 이상기(전, 서울성동경찰서장)

 

영산강 또한 ‘저문 강’의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딱 맞다. 짧지만 참으로 긴 강이다

 

 

영산강(유로연장 129.50km, 유역면적 3467.83㎢) 
- 국가하천 : 전남 담양군 금성면 경계 ~ 전남 영암군 삼호면 영산강하구둑 외곽선
- 지방하천 : 전남 담양군 용면 담양호 방수로 ~ 담양 영산강(국가기점)
- 발원지 및 최장발원지 : 담양군 용면 용추봉 서사면
- 영산강의 지류 : 제1지류 39개(광주천, 황룡강, 지석천, 고막원천, 함평천, 영암천 등), 제2지류 82개
   (증심사천, 개천, 평림천, 화순천, 대호천 등), 제3지류 45개(북이천,쌍옥천 등), 제4지류 5개(정승천 등)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대나무의 사열을 받으면 내 허리도 곧게 펴야할 듯싶다. 이런 강둑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담양 봉산)

 

 

영산강 삼백오십리, 호남사람들은 그저 편안하게 ‘어머니의 강, 영산강’이라 부른다. 강의 길이를 말하는 자료마다 115.5km에서 149.6km까지 같은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추월산과 강천산 사이 골짜기에 담양호가 자릴 틀고 앉아 있다. 산맥의 큰 줄기로 보면  내장산 줄기는 정읍, 고창을 지나 영광 불갑산에 이르기까지 서해 바람을 몸으로 맞서고, 용추봉은 무등산 줄기로 이어져 월출산까지 내륙으로 달려 내려간다. 4대강 영산강 자전거길을 말할 때 그 시발이 담양호 아래다 보니 순창 가까이로 깊이 들어가 박힌 용추봉 아래 가마골을 까맣게 잊어버릴 뻔 했다.

 

담양호가 있어 영산강은 그나마 물줄기를 고르게 펼칠 수 있다. 멀리 추월산이 보인다(담양 용면)

 

경비행기가 막 이륙하려는 한가한 강변, 담양항공이다(담양 금성)

 

 

멀어진 물길, 영산강의 시작 가마골
추월산의 동쪽 천길 단애는 멀리 광주에서도 그 위용이 의연하게 보이니 담양호가 들어서기 전의 그 골짜기 풍광은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추월산 북사면에는 가인 김병로의 혼이 살아 있다. 가인이 누구던가.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법조인의 표상이다. 굳이 행정구역으로 따지자면 용치재 너머 순창 복흥 사람이지만 추월산의 정기를 받지 않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대법원가인연수원’이 멀고 먼 전라도 땅 깊은 산속에 법조인의 정신을 가다듬는 연수원을 앉힌 것은 법관으로서 ‘가인’의 올곧은 자세와 청렴을 본받겠다는 깊은 뜻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담양댐 인증센터, 보통 영산강 자전거여행의 시발점이라 가마골을 깜빡 잊기 쉽다. 사람이 많이 드나든 탓인가 문짝이 떨어져 있다(담양 용면)

 

영산강 굽이굽이는 많은 곳이 직강화 되었다. 4대강의 비난 속에서도 부족한 곳을 보완해 가는 노력이 고맙기 그지없다(나주 영산포)

 

 

죽녹원, 메타세쿼이아길, 관방제림, 나무가 먹여 살리는 담양
‘잘했어요’ 스탬프를 찍는 아이처럼 시발 인증센터 앞에서 영산강 여행을 시작한다. 메타세쿼이아길과 마주치는 학동교에 이르기까지 이십리 길은 가벼운 몸 풀기에 적합하다. 영산강의 기본 형상으로 보아 언덕을 오르고 내려야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을 성싶다.

이제 메타세쿼이아길은 담양의 상징이 되었다. 박정희 시대, 절체절명의 산림녹화를 위해 심었던 메타세쿼이아가 이렇게 효자노릇을 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중국 사천성에 자생하는 이 나무는 속성수다. 물삼나무(水杉)라고 중국어로 표기되는 이 나무는 고대 석탄기에도 번성해서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린다. 너무 빨리 자라 전깃줄과 부딪치고, 오히려 도시에선 위험해 가로수로 부적합하다고 베어내기까지 한 나무가 한적한 시골 담양에는 가로수로 50년을 넘게 자라 이국의 풍치를 만들어 낸 것이다. 옆에는 프로방스 마을까지 만들어 사계절 이 키다리 숲의 낭만을 상품화했다.

바로 관방제림으로 이어진다. 노목들이 제 각각의 기울기로 누워 자란 나무들이 있는 강둑 풍정은 남다르다.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담양부사 성이성(成以性)이 1648년(인조 26년)에 나무를 심은 게 시작이었다. 순전히 홍수로 넘치는 영산강 강둑을 보강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200년 뒤 역시 부사 황종림이 연인원 3만 명을 동원해 보강한 300년 노목 170그루다. 느티나무, 푸조나무, 팽나무, 개서어나무가 어우러진 2km는 관청이 치수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보여준다.

강 건너 죽녹원은 담양의 또 다른 아이콘이다. 원래 대나무가 자생하던 성인산은 2003년 5만평 규모의 대나무 정원으로 탄생했다. 대숲으로 들어가는 2.2km의 산책길은 다른 곳에서는 쉬이 만나기 어려운 사색을 선사한다. 대숲 길에는 저마다 이름이 있다. ‘사랑이 변치 않는 길’, ‘추억의 길’, ‘철학자의 길’ 등이 있어도 사람들은 ‘운수대통길’로 많이 간다하니 역시 신수가 펴야 사랑도, 추억도 있는 모양이다.

이래저래 담양은 나무가 만든 큰 그늘에서 도회의 삶에 지친 사람들을 상대로 넉넉한 삶을 일구어 가고 있는 셈이다. 여기다 담양의 떡갈비나 참나무돼지불고기 맛에 흠뻑 빠지다 보면 영산강을 토막내어 나주나 영산포 쯤에서 하룻밤 머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담양의 상징은 누가 뭐래도 선비의 나무 대나무다(담양 금성)

 

 

소쇄원, 면앙정 그리고 대숲
평일인데도 영산강 강둑은 장거리여행 차림으로 지나가는 자전거가 심심치 않다. 영산강 지천인 오례천 미항교를 건너려면 깊숙이 들어와야 한다. 지척에 면앙정이 있어도 들러 가기에 망설여진다. ‘겨울 해는 써먹을 것이 없다’는 말이 실감나듯 오후 2시도 채 되기 전인데 벌써 강가에 해가 기우는 듯하다. 그래도 ‘면앙정’이라는 이름은 고교시절 국어고전에서 살아 맴돈다. 조선 중기 송순(宋純)이 무등산 아래 동으로 뻗은 정기와 산천경개 풍류를 노래한 145구 필사본 가사 <면앙정가>의 무대다. 정철(鄭澈)의 <성산별곡>에 영향을 주고,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과 더불어 호남가사문학의 원류가 된 명작의 고향이다. 

소쇄원과 함께 후일 다시 호남원림 여행을 뚜벅 뚜벅 해야 할 여지를 남겨두고 지나간다. 소쇄원은 또 어떠한가. 담양군 남면에 자리 잡고 있으니 역시 무등산의 북사면이 흘러내린 곳이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된 조선정원의 아름다움을 원형으로 보전하고 있는 이곳 또한 슬픈 역사의 그늘 속에 세월의 이끼를 더해 왔다.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시대를 앞서가던 사림파 선비 조광조가 사약을 받자 충격을 받고 낙향한 소쇄옹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눈물로 지은 은둔의 정원이다. 선비의 나무라는 대나무가 방풍림 숲이 되어 고졸한 정자와 선비의 집을 지킨다. 선비는 댓잎 부딪는 소리에 헝클어진 마음을 다시 보듬고, 대숲을 드나드는 바람소리에 등지고 온 한양소식을 가끔은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죽녹원 앞 영산강은 늘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관방제림의 굽은 나무와 대비되는 젊은 메타세쿼이아의 직선, 그 단순미 또한 싱싱하다(담양읍)

 

극락강을 지나면 너무 스산해 여기가 광주시내인가 싶을 정도다(광주 서구)

 

 

빛고을을 에둘러 가며 무등을 다시 보다
영산강은 광주광역시로 접어들면서도 먼발치에서 무등산을 본다. 간간히 나타나는 강둑길 대숲을 벗어나도 무등산은 그냥 덤덤한 얼굴이다. 무등산 천왕봉은 1187m이다. 1000m가 넘는 산을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가 가까이 껴안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광주의 심장 금남로에서 무등산이 바로 보이고, 멀리 광산, 서구에서도 보이니 광주는 무등산을 낀 분지 형태다. 

산경표 상으로 봐도 호남정맥인 무등산은 산동으로는 섬진강이요, 산서로는 영산강이다. 광주 사람들에게 무등산은 만만하게 오를 수 있는 동네 뒷산만큼이나 친근한 산이다. 무등산은 산줄기와 골짜기가 뚜렷하지 않다. 완만한 흙산에다 너덜지대까지 거느린 편안한 산이다. 서울 북한산처럼 제대로 차려입고 올라가야 하거나, 선크림을 바른 듯한 인수봉을 쳐다만 보고 내려와야 하는 오만한 골산(骨山)이 아니다. 

서석대, 입석대와 광석대는 무등산의 3대 절경이다. 그 주상절리는 해금강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누구는 “왜 무등이냐”고 묻는 물음에 ‘무당산’, ‘무덤산’, ‘무정산’의 이두식 표현이 음운변천된 것이라고 학술적으로 답한다. 누구는 ‘어디에도 견줄 데 없는 빼어난 산’이라 무등이라 하지만 아무래도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푸근한 산’이란 해석에 한 표를 던진다. 어쩌면 무등산 수박마저 그 견줄 데 없는 맛과 크기에도 불구하고 검푸른 피부에 수박문양마저 드러내지 않는 겸손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닐까.

육산(肉山)인 무등은 틀림없이 보았을 것이다. 5.18 그날의 금남로, 그 피의 현장과 진실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그 갈등의 세월을 꾸짖기라도 하듯 말이 없다. 그저 묵언정진할 뿐이다.
 


부처의 이름 극락강, 서방정토는 어딘가
첨단대교를 지나면 광주의 활기가 느껴진다. 첨단이라는 이름이 주는 상쾌한 기분은 영산강 서편에 ‘광주첨단과학산업단지’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반듯반듯 바둑판처럼 들어선 규격의 사각건물은 세월이 지나도 첨단이라는 이름값을 위해 연구소의 등불을 켜고 있어야 할 것이다.

동림IC를 지나면 철길이 영산강을 건넌다. 광주선이다. 호남선과 경전선이 송정리를 경유하거나 기점으로 정하면서 광주도심은 철로의 사각에 놓였다. 광주가 커질수록 도심에서 출발해야하는 수요도 많아졌다.
송정리는 군화(軍貨) 수송 기능이 원래 더 컸었다. 1951년 미공병대가 우리 군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것이 상무대의 시작이다. 1962년 들어선 광주비행장의 군용물자 공급도 한몫했다. 이 광주선에 극락강역이 있다. 송정리역(현 광주송정역)과 광주역 사이에 유일한 역이다. 한때 단선철로에서 서로 비켜주던 KTX 열차의 교행이라는 이색적인 극락강역 풍경은 사라졌다. 광주송정역에서 KTX를 타고 내리는 승객을 위해 하루 30회 운행되는 셔틀열차를 타야하는 광주사람들이 사랑하는 중간역이 되었다.


극락강은 영산강과 다른 강이 아니다. 광주 서구 치평동과 서창동 사이의 7km 구간이다. 쉽게 말하자면 광주천과 황룡강이 영산강에 흘러드는 사이 짧은 구간을 그렇게 불렀다. 금강이 부여를 지나면서 백마강이 되듯이….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강이다. 하루 먹고사는 일이 큰일이었던 시절, 쌀과 보리 같은 곡식은 물론 ‘비아 무’ 같은 채소까지 풍부한 하남들판이 펼쳐지니 극락의 이름을 빌려와도 손색이 없다. 극락강은 대동여지도에 ‘칠천(漆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옻은 영생을 뜻하는 도료이니 극락과도 무관한 단어가 아니다. 광주 서구에 있었던 극락면의 잔해는 극락교, 극락평, 극락원까지 곳곳에 남아 있다. 일부 학부모들이 너무 특정 종교 냄새가 난다고 ‘교명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 사라질 뻔했던 극락초등학교는 동문들의 힘으로 85년 역사를 간신히 지켜낼 수 있었다.

풍영정에 이르면 한숨 고르고 가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자전거길이란 본시 앞으로 이어져 나가는 길에 골몰하기 마련이어서 강둑에서 가지는 여유를 놓치기가 딱 십상이다. 장성 백양사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오는 황룡강이 더해지면 영산강도 아이를 가진 아낙의 배처럼 더 넉넉해진다. 성경에서 말하는 요단강을 건너면 약속의 땅 가나안이 행복을 안겨주듯이 어쩌면 선인들이 극락강을 건너서 마주하는 무등의 품을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극락세계라고 염원했는지도 모른다. 해질녘 서석대와 입석대의 주상절리는 붉은 빛을 반사하는 석영의 반짝거림으로 부처의 이마위에서 더욱 빛날 것이다.


절실했던 영산강 정비, 치수는 나라의 기본
극락강을 뒤로하고 승촌보에 이르기까지는 드넓은 강바닥이 갈대 꽃밭이 되어 석양에 일렁인다. 하얀 꽃은 끝없는 춤으로 겨울로 가는 길목을 따뜻하게 해준다. 갈대꽃마저 져버리고 나면 이제 긴 겨울이다. 영산강하굿둑이 생기기 전에 바닷물의 영향권은 영산포에서도 25km를 더 거슬러 올라갔다고 하니 극락강 언저리까지 감조하천의 생태를 가졌던 것이다. 

사실 4대강 사업은 전국에 걸쳐 동시다발로 일어난 대규모 토목사업이라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영산강만은 저항이 덜했다. 이미 영산강은 부족한 수량으로 인해 오염이 심해져 어떤 형태로든 손을 봐야할 지경에 놓여 있었다. 오죽했으면 전남도지사가 반대를 무릅쓰고 영산강 정비사업을 지지했겠는가. 유달리 영산강은 직강화(直江化)를 많이 하며 치수에 공을 들였다. 도저히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는 모래섬 위에 승촌보가 들어섰다. 승촌보 뒤로 생겨난 우각호도 따지고 보면 샛강의 흔적이다. 모래섬에 캠핑장 등 광주, 나주, 화순 사람들의 새로운 위락지가 생겨났다.
영산강이 지석천과 합류하면서 이제 나주권이다.

 

이런 흙길 싱글트랙을 4대강에서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담양읍)

 

관방제림, 고목이 되어가는 역사의 그늘에 우리가 쉰다. 늙어도 쓸모 있는 나무가 부럽다(담양읍)

 

동행한 이상기 서장이 첨단대교에서 바톤을 넘겨받았다(광주 북구)

 

 

전라의 자존, 나주와 영산포, 홍어와 곰탕
강 건너편 나주는 자존심이 각별한 동네다. 무엇보다 전라도의 ‘라(羅)’자가 바로 나주에서 따온 것이니까. 고려 태조 왕건의 오씨부인(2대 혜종의 어머니) 고향이 나주이고, 택리지에는 “지형지세가 한양을 닮았다.”해서 “나주 읍성에 갔다 오면 한양에 갔다 온 것과 같다.”는 말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정3품 나주목사가 상주했던 행정의 중심도시 기능도 한양으로 가는 세곡, 조운의 발달을 바탕으로 한다. 결국 영산강 덕분이란 얘기다. 

서해바다가 만조가 되면 나주 치소 동문나루까지, 보통은 영산창 택촌마을이 해선(海船)의 종점이었다. 바닷물이 더 위로 광주근방까지 올라가서 바닷배가 닿고 내리는 포구 기능을 했더라면 나주의 운명은 오히려 훨씬 오그라들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나주는 금성관을 중심으로 곰탕거리에서 줄을 서서 입맛을 다시는 손님들로 북적인다. 나주5일장 장돌뱅이와 장꾼들에게 끓여 팔던 국밥 한 그릇이 나주만의 곰탕이 되었다. 밥과 고기를 썰어 넣고 서너 차례 토렴한 뚝배기 속 맑은 국물, 그 따스함은 뼛속을 우려내 고아 팔팔 끓여서 내놓는 여느 곰탕의 유백색 끈적거림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주는 이미 온 나라에 걸쳐 곰탕의 관형사로 다시 불린다. 

 

먼길을 달려온 젊은 어행자들이 나주대교에서 일단 하루를 접는다(나주 금천)

 

 

나주대교를 지나 영산포로 접어들어서도 강둑의 정비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다른 4대강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고맙다. 모자란 것은 그렇게 채워가는 것이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영산교 앞 옛 선창에는 30채가 넘는다는 홍어집 네온 불이 켜지면서 저녁이 흥청거린다. 그 옛날만은 못하더라도 여전히 영산포는 홍어의 이름으로 코가 뻥 뚫리도록 알싸하다. 흑산에서 영산포까지 여러 날 뱃길에서 해풍에 삭혀진 홍어살, 마대자루에 넣어 썩기 직전까지 간, 미끈거리는 살갗을 뚫고 나온 암모니아 가스, 신출내기에게는 허락하지 않는 홍어애탕의 맛을 형용하기란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간만에 만난 옛 동료들과 건네는 술잔이다. 이제 아무짝에 쓸모없는 신세가 된 초로(初老)들이 나누는, 2개나 달려있는 홍어 거시기 이야기가 질펀하게 흐른다. 우정과 헤어지면서 홍어집 마당에 돌을 옮겨다 새겨놓은 시 한편을 홍탁 기운에 흔들거리며 읽는다. 


그곳에 가면 그 남자가 있다(중략)/ 그리움이 발효된 삼합 한쌈을/ 싸목싸목 씹으면/ 언제라도 되돌아갈 탯자리의 고독이/ 눈, 코, 입, 목, 울대를 강타한다/ 괜스레 꺼이꺼이 울고 싶은 날/ 그곳에 가면/ 세상의 모든 울음을 제 날개에 삼켜버린 / 하늘 맑은 그 남자가 있다.
(전 숙, <영산홍가> 중에서)



별미다. 이만한 풍정, 감흥이라면 남도의 객창에서 하룻밤 머물러도 아까운 저녁은 아니리라. 
 

 

 

 

참고 자료
1. 소쇄원, 두산백과 2. 신 호남지4, 남도의 삶터와 강줄기, 영산강, 광주일보, 2017. 5. 16
3. 나무위키, 영산강, 무등산 4. 극락강역, 불교신문, 2017. 1.4. 이준엽 기자 5.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2012

 

 

 

 

 

 

 

 

 

 

 

 

 

조용연 편집위원  choyy@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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