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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하)-(나주 · 무안 · 영암 · 목포)홍어가 만든 물길, 호남의 가슴 속에 흐르는 강

홍어가 만든 물길, 호남의 가슴 속에 흐르는 강

영산강은 홍어가 만든 물길이다. 누천년을 두고 강물이야 흐르지 않았을까마는 ‘영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바로 흑산 앞바다에서도 홍어가 많이 잡히던 영산도가 홍어와 함께 옮겨 앉은 덕이다. 해풍과 밀물 따라 올라오는 뱃길 대엿새 만에 다다르는 언덕을 영산포라 이름 짓고, 홍어는 썩은 내 언저리까지 익는 절묘한 맛으로 코를 틔웠다. 한양으로 가는 세곡선과 동양척식의 수탈까지 ‘힘의 물류’가 도도히 흘러가던 저 강을 삼학도도 유달산도 그저 숨죽여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찌 홍탁 사발에 취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세월이었으랴

 

느러지전망대에서 건너다본 한반도 지형. 영산강 삼백오십리 중 최고의 경치다



영산강(하)  6시간 소요(쉬엄쉬엄 8시간)   나주 영산포 ~ 목포(66km)

 

 

영산강(유로연장 129.50km, 유역면적 3467.83㎢) 
- 국가하천 : 전남 담양군 금성면 경계 ~ 전남 영암군 삼호면 영산강 하구둑 외곽선
- 지방하천 : 전남 담양군 용면 담양호 방수로 ~ 담양 영산강(국가기점)
- 발원지 및 최장발원지 : 담양군 용면 용추봉 남사면
- 영산강의 지류 : 제1지류 39개(광주천, 황룡강, 지석천, 고막원천, 함평천, 영암천 등), 제2지류 82개
  (증   심사천, 개천, 평림천, 화순천, 대호천 등), 제3지류 45개(북이천, 쌍옥천 등), 제4지류 5개(정승천 등)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추운 날, 영산포 등대 앞에서 이제 남은 영산강 하류를 따라 내려갈 예정이다. 영산포 등대는 영산강이 해선(海船)까지 드나드는 너른 강줄기를 품고 있었다는 징표다. 우리나라 강에선 드문 등대다. 황포돛배가 아직 잠이 덜 깼다. 영산강이 막히기 전의 풍치를 재현해 관광객들이 기어이 타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영산포 명물이 되었다.


영산강 뱃노래, 알부자는 영산포에
영산포는 나주와 강을 사이에 두고 엇갈려 바라보고 있다. 오래 전 두 도시를 통합하면서 서로 키재기를 하다 ‘금성시’라는 이름을 갖기도 했지만 나주목사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나주시’로 환원되었다. ‘영산’이라는 판권을 오롯이 갖고 있는 소읍, 홍어의 주산지인 흑산도 앞 ‘영산도’가 왜구에 시달리다 못해 아예 홍어와 함께 이주해 정착한 포구라 ‘영산포’다. 

홍어가 만든 뱃길은 거머리 같은 일제 수탈의 물길이 되어버렸다. 식량수탈의 마름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전진기지가 영산포에 차려졌다. 동척(東拓)의 문서는 적벽돌에도 세월이 켜켜이 앉아 이제 빈티지 나는 커피숍 건물로 되살아났다. 게다(げた)짝과 지카타비(地下足袋)의 발자국이 상권을 장악하던 시절, 검은 판자로 둘러싼 다다미방 적산가옥의 잔해가 지금도 남아 있다. 영산포가 흥청거리던 시절 부자들의 돈다발은 부피를 가늠하기 어려웠고, 지금도 ‘알부자는 영산포에 다 있다’는 말은 유효하다. 이제는 폐역 되어 사라진 기차역 영산포는 호남선 상행열차를 기다리며 플랫폼에 서 있던 70년대 우리 누이의 구로공단 행 보따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배가 들어/ 멸치젓 향내에/ 읍내의 바람이 다디달 때/ 누님은 영산포를 떠나며 울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 늘 같이 흐르고/ 개나리꽃처럼 여윈 누님과 나는/ 청무우를 먹으며/ 강둑에 잡풀로 넘어지곤 했지/ 빈손의 설움 속에/ 어머니는 묻히시고/ 열여섯 나이로/ 토종개처럼 열심이던 누님은/ 호남선을 오르며 울었다/(후략) 
(나해철의 ‘영산포’ 에서)



강둑을 따라 내려가던 길은 영산포 장터를 만난다. 시골 장 한 구석에는 그렇게 갓 젖 떨어진 토종 강아지들이 천방지축 분주하다. 어느 집 마당으론가 팔려가길 기다리고 있다. 새끼를 여러 마리 낳는 것들의 운명은 그렇게 더 가혹하다. 안방 차지가 되어 재롱을 떨어 먹고 사는 놈도 있고, 마당에서 낯선 이를 “컹컹~” 겁주면서 밥값을 하고 사는 놈도 있다. 개 팔자도 ‘팔자소관’이다.
장터를 벗어나면 영산강에서 처음으로 장딴지에 힘을 주어야 한다. 백제시대 아비사와 아랑사의 슬픈 사연, 그 전설이 강가 단애(斷崖) 자연 문양에 담겨있는 ‘앙암바위’다. 56m 암벽에 있는 정자에 올라 영산강을 내려다본다. 겨울안개가 낮게 깔린 먼 배경 속 영산포는 유장하다 못해 쓸쓸하다.

 

앙암정으로 올라붙는 길은 제법 장딴지에 힘을 주어야 한다(나주 영강)

 

자전거길에 바짝 붙여 새 도로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호젓한 호사는 포기해야 할듯하다(무안 몽탄)

 

 

죽산보가 만드는 영산강 물 창고와 우각호
죽산보가 가까워지면서 강물의 엉덩이는 더 펑퍼짐해진다. 하굿둑으로 영산강이 막히자 바닷배는 더이상 올라오지 못했다. 다리가 놓이고 수많은 포구들도 사라졌다. 진혼나팔에 맞춰 불러보는 사라진 전우의 이름처럼 포구를 불러본다. 거진, 봉룡, 월봉, 풍영정, 서창, 벽진, 승촌, 시양, 광탄, 동구, 영산포, 구진포, 서촌, 다야, 사암, 석관정, 중천포, 고문진, 대굴포, 사포, 신설포, 북석포, 뒤구지, 식영정, 몽탄, 남해포, 매월포, 주룡포…. 

염색박물관까지 왔다 돌아가는 황포돛배, 그 기폭을 물들인 황토 빛은 민초의 색상이다. 황토를 물들인 옷이야말로 그냥 논밭두렁에 주저앉아도 표나지 않는 최고의 옷이었다. 옥양목은 엄두도 못내는 농투성이에게 광목천은 흙빛으로 물들어 간 고단함이었다.

영산강은 여느 4대강과 달리, 유역에 사는 사람들에겐 절실한 과제였다. 느려진 유속과 유역의 도시화로 인한 오염이 도를 넘었기에 ‘정비를 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자연풍경으로만 보면 멋이 있겠지만 유속을 막는 ‘굽이굽이’가 문제였다. ‘사행천’, ‘천정천’, ‘충적지’, ‘구릉지’,‘하곡’, ‘우각호’까지 지리책에 나오는 용어의 백화점이 영산강이다. 그만큼 홍수의 위험이 크고, 계절 별 유량 차이도 크다.

유난히 영산강은 하천의 직강화(直江化)가 많이 이루어졌다. 강둑이 반듯해지니 우각호가 군데군데 생겨났다. 주로 승촌보와 죽산보 사이다. 우각호(牛角湖)는 문자 그대로 막힌 물줄기가 만든, 소뿔처럼 휘어진 호수다. 죽산보에서 영산강 본류에 취해 사진 찍는데 빠지다보면 죽산보 전망대에서 바로 동쪽으로 보이는 4.5km의 거대한 우각호를 그냥 지나치기 쉽다.
 

영산포 홍어거리, 여전히 서른 곳 남직한 홍어집이 그 옛날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영산교는 나주와 영산포를 잇는 유일한 다리였다

 

앙암바위 정자에서 본 유장한 영산강, 아침 안개 속에 영산포가 아련하다(나주 영강)

 

죽산보 전망대에서 본 영산강. 풍광에 취해 바로 동쪽의 우각호를 놓칠 수 있다(나주 다시)

 

한적한 강변 절벽에 걸린 고구려. 알고 나면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나주 공산)

 

 

주몽으로 선명한 ‘나주영상테마파크’
죽산보를 떠난다. 인적도 드물어지고 강은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다가간다. 몽탄대교까지 70리 길이 영산강 경치에서 백미로 꼽힌다. 팔순이 되어서도 비강을 울리는 콧소리로 간장을 녹이는  송춘희의 <영산강 처녀>, 그 첫 소절 ‘영사~안^강~ 굽이도^는~’ 물굽이가 바로 이 구간을 말한다. 강물이 굽이치는 언덕에 성곽과 기와지붕이 눈길을 가로막는다. ‘나주영상테마파크’다.

차라리 드라마 <주몽> 촬영지라고 얘기해야 바로 와 닿을 것이다. 나주시 공산면이다. 35억원을 들여 14만㎡(4만3천평) 부지에 100여 채의 건물을 앉혀 옛 고구려성을 재현해 놓았다. 역사와 전설을 오가는 임금 주몽을 열연한 삼둥이 아빠 송일국을 인상 깊은 배우로 만들어 준 자리다. 전광렬, 한혜진, 이계인. 진희경 같은 뛰어난 배우들이 예혼을 불태우던 현장이다. 

원래는 ‘삼한지 테마파크’였다. <바람의 나라>, <태왕사신기>, <이 산>, <일지매>, <신의>, <달의 연인>, <쌍화점> 같은 드라마와 영화가 촬영된 곳이니 사극 마니아라면 로케 현장과 영상의 기억을 한 조각씩 맞춰볼 일이다. 특히, 영산강을 배경으로 세운 고구려궁과 태자궁의 치미가 어우러진 프레임은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만든다. 영산강 종주를 하루에 끝내거나, 자전거 시합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꼭 들렀다 가시라. 언덕길을 올라가는 수고가 아깝지 않다. 겨울인데도 전국에서 온 관광버스가 몇 대씩은 주차장을 채운다.
 


‘느러지 전망대’에서 보는 영산강 한반도
영산강이 제대로 한번 굽이치는 곳, 석관정 나루가 강 건너로 보인다. 지난해 여행했던 고막원천이 영산강과 합류하는 지점이다. 문평으로 올라가는 고막원천 곳곳을 파헤치는 공사현장에서 나온 엄청난 갯벌 층, 그 회청색 점토질 흙 처리로 몸살을 하고 있던 이유를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바다가 드나든 흔적이다. 나주 동강면과 함평을 잇는 동강교를 지나면 영산강이 다시 한 번 제대로 꿈틀거린다. ‘느러지 전망대’까지는 갈대밭이 오히려 영산강을 압도한다. 느러지 전망대는 한반도 형상을 영산강도 갖고 있다는 자랑이다. 한반도 모양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집착은 거의 말리기 힘든 애국심 수준이다. 그러니 한반도 지형만으로도 지자체들은 남는 장사가 되었다. 형상의 근사치야 영월이나 정선의 것에 훨씬 못 미치지만 이러한 강의 용틀임이 남도에도 있다는 자부이기도 하다. 

최근에 세운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강 건너 무안 몽탄면 이산리 풍경은 오히려 두루뭉술해서 편안하다. 나주시는 마을길을 거쳐야 하는 자전거길을 바로 산으로 올라붙을 수 있도록 새로 닦는 공사를 하고 있다. 영산강에서 또 한 번 다리 근육을 써야하는 마지막 산길이다.
 

‘나주영상테마파크,’ 삼둥이 아빠 송일국을 인상 깊은 배우로 만들어준 드라마 <주몽> 촬영지다, 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나주 공산)

 

느러지전망대가 있어 강 건너 무안 몽탄의 느러지 풍경이 제대로 조망된다. 모델은 무안이지만 나주관광의 효자다(나주 동강)

 

동강교 근처, 인적이 드문 날 강둑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모두가 반갑다(나주 동강)

 

몽탄대교를 건너 영산호에 접어든다. 겨울날은 맑아 영암 월출산과 멀리 해남 두륜산까지 보인다(무안 몽탄)

 

밋밋하던 들판 길에 숲이 나타나니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사람은 참 변덕스럽다(무안 일로)

 

 

몽탄대교, 영산호가 본격 시작되는 하구
느러지 전망대를 내려오면서 마음이 급해진 자전거길은 마을로 바로 나 있어 옛 몽탄나루터를 지나지 못한다. 한자로 써서 분위기가 죽었지만 우리말로 되돌리면 ‘꿈의 강(夢江)’을 건너야하는 ‘꿈여울(夢灘)’ 나루니 얼마나 예쁜 이름인가. 

동강에서 명산리로 건너야 하는 다리는 몽탄대교다. 700m가 넘는 제법 긴 다리다. 영산강의 몸피도 강 저편이 아득하리만치 불어나 영산호라고 하는 것이 더 제격이다. 거칠 것 없는 강 건너로 영암 월출산의 신묘한 봉우리가 펼쳐져 있다. 겨울 하늘 찬바람 탓일까 그 뒤로 멀리 해남 두륜산까지 배경이 되어 준다.
춥지만 잠시 머문다. 사실 월출산은 대단히 높은 산은 아니다. ‘등산화에 흙 한 점 안 묻히고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말도 허풍이 아니다. 높이가 809m라고 깔보았다간 큰 코 다친다. 거의 해발 0에서 올라가는 800m다. 강화도 마니산(470m)에 올라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500m도 안 되는 산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얼마나 대단하면 ‘아침 하늘에 불꽃처럼 기를 내뿜는 기세’(火昇朝天)라고 택리지가 말했을까. 온통 돌산이지만 원적외선을 방출하는 맥반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사자봉, 매봉, 천왕봉, 구정봉, 향로봉, 산봉우리는 저마다 이름도 있다. ‘금강산 한 덩어리가 떠내려 와 영암에 자리 잡았다’는 전설값을 하고도 남는다. 


해남의 명찰(名刹) 대흥사를 안고 있는 두륜산은 남쪽 바다의 바람과 내륙의 찬 기운을 동시에 막아 준다. 올라본 적 없는 두륜산의 기억은 영화 <서편제>를 촬영한 임권택 감독의 어눌한 후일담으로만 남아 있다. 눈 내리는 장면을 찍어야 했는데 애간장을 태우며 기다리던 눈이 촬영 전날 엄청나게 많이 내려 정말 기적 같은 행운이었다고 했다.

거의 활주로처럼 뻗어있는, 호젓한 이 자전거길의 행복도 이제 접어야할 듯하다. 강둑길에 바짝 붙여 도로 공사가 한창이라 흙먼지가 바람에 박자를 맞춰 춤춘다. 달리는 차들이야 외면한다 해도 ‘혼자 가는 길’을 꿈꾸는 건 날이 샜다. 

일로읍 복룡리 양두마을을 지난다. 뒷동산 너머가 그 유명한 ‘회산 백련지’다. 국내 최대라는 10만평 연꽃저수지다. 1955년에 고 정수동씨가 연뿌리 12주를 심고 꿈에 학을 12마리 보았단다. 이제 동양최대의 백련습지가 되었다. 불가의 상징인 연꽃을 부처님 앞에 바치는 것은 더러운 물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정화와 순결이란 의미 때문이다. 해마다 7~9월 여름 더위 속에서 활짝 피어나니 그때 이 강둑길을 지나가는 이는 꼭 들러서 마음을 씻고 갈 일이다.


품바의 고향,  무안 일로읍
무안은 목포의 위세에 눌려서인지 그다지 잘 알려진 고장은 아니었다. 무안 현경·망운을 중심으로 해제반도에서 재배되는 질 좋은 양파로 전국에 알려졌을 뿐이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무안국제공항 개항과 전남도청이 새로 옮겨 앉은 ‘남악지구’가 바로 무안군 일로읍이다.

일로는 ‘품바의 고향’이다. 품바는 한 많은 인생의 아픔을 풍자한 향토극이다. 역사적 연원은 신재효의 판소리 변강쇠가(가루지기타령)로 거슬러 올라간다. ‘품바’는 ‘입으로 뀌는 방귀소리’를 말한다. 이 저항의 소리는 한마디로 비트 장단과 사설이 어우러져 만드는 1인극의 완결판이다.

현대에 와서 무안 일로읍에 품바의 중시조가 들어섰다. 일제 말 목포항 부두노동자였다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수배된 천장근(본명 천팔만)이 무안에 걸인으로 숨어들었다. 문전박대 않는 무안의 인심에 먹고 살기 힘든 걸뱅이(걸인)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천사촌’을 이루고 ‘걸인회’를 조직했다. 적선하는 밥만 얻어먹었지 절대 도둑질하지 않는 규율도 엄격했다. 공짜 밥만 축내는 것이 아니라 밥 깡통을 두드려가며 잠시라도 웃겨주는 광대의 소임도 다했다. 해학과 풍자, 비판과 춤이 어우러진 저자거리 바닥 노래였다. ‘각설이’라는 말도 ‘깨달을 각(覺), 말씀 설(說), 다스릴 이(理)’라니. 심오한 뜻이 담긴 내력을 알면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천사촌도 ‘주민등록법’이 시행되면서 해체되었고, 걸인들도 산업화로 커져가는 도시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1982년 12월 초연된 ‘품바’(고 김시라 연출)를 보면서 울고 웃던 관객들 속에 나도 있었다. 연극 품바는 1대 정규수에서 시작하여 대를 이어 나가고 있다. 김시라도 정규수도 모두 무안 사람이다. 어릴 적에 보고 듣고 자란 ‘각설이’의 세상을 누구보다 잘 표현할 수 있는 배경을 가졌다. ‘한국품바예술인협회’는 400여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고, 전국의 1500명 품바는 오늘도 지방축제와 장터를 누빈다. 해학의 몸짓과 질펀하게 펼치는 입담은 양념이다. 꽃동네 최규동 할아버지의 연고로 2001년 만들어진 ‘음성품바축제’에 이르기까지 각설이는 여전히 진화 중이다.

 

영산강자전거길 풍경 가운데 자연미가 넘치는 몇 곳 중 하나다(나주 공산)

 

드물게 마을길이나 농로를 지나는 맛도 꽤나 괜찮다(나주 동강)

 

 

영산강하굿둑, 거부할 수 없던 소금기를 막다
주룡나루까지 호젓하게 오던 영산강둑은 바위산에 막힌다. 청호리 마을을 돌아 다시 강둑길로 올라선다. 강 건너는 영암 땅이다. 멀리 남악신도시가 보이고, 삼학도 그 너머로 유달산이다. 눈앞에서 보이는 길이 무려 10km가 넘는다. 

영산강하굿둑이 눈에 들어온다. 4.4km에 달하는 둑은 목포 앞 바다의 간조와 만조를 거부했다. 해마다 홍수를 달고 살던 영산강 일대의 논밭은 염해를 피할 수 있었고 대불방조제와 어울려 농토를 확장하고 산업단지가 될 땅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더 이상 나주는 해상문화권이 아니었다. 왜구를 방지하기 위해 설치했던 수군, 세곡을 걷던 영산창, 식량을 수탈하던 전진기지 영산포, 흑산 홍어의 뱃길 모두 역사에 반납했다.

전국적으로 ‘영산강’이란 이름을 가진 장어구이집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구진포(나주시 다시면)에서도 더 이상 장어가 잡히지 않는다. 그저 예닐곱 집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강 건너 대불방조제가 완공되어 공단(대불국가산업단지)이 생겨나, 원 바닥이 좁아 간척으로 조금조금 늘려가던 목포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하춘화가 부르는 <낭주골 처녀>에서 ‘용당리 나루터’로 떠난 그님이 타고 목포항으로 건너간 똑딱선 뱃길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굿둑에서 영산강 350리 여정은 끝났다. 그러나 영산강 없는 목포는 없다. 유달산과 삼학도 없는 목포가 없듯이…. 


‘오래된 목포’를 한 눈에 보기 위해서 노적봉 아래 ‘목포근대역사관’을 찾는다. 몸은 지쳐있어도 마음은 맑아진다. 적벽돌의 무게가 여전히 둔중하다. 일제가 한 세기도 훨씬 전인 1900년에 이 자리를 영사관 터로 잡고 건물을 지었다. 목포부 청사, 목포시청,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이 거쳐 간 이 터의 세월은 우리 근대사의 연대기다. 개항장 목포, 저항의 제일선, 외래문화의 창구, 대중문화의 요람으로서 목포를 말해주는 목포근대역사관은 제1관으로 모자라 발치 아래에 제2관까지 열어놓고 있다.

다시 목포 시내를 내려다보니 알겠다. ‘목포에는 바다가 없다’는 말뜻을. 고하도 검푸른 그림자가 성채처럼 목포를 안고 그 뒤로 겹겹이 산이다. 압해도가 북서쪽을, 율도, 장좌도, 달리도, 허사도가 남서쪽 바다를 가로 막고 ‘대불국가산업단지’가 된 영암 땅 삼호읍까지 오래된 개항장 목포를 막아주니 ‘목포에 바다가 없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래도 ‘목포는 항구다.’ 천혜의 항구다. 

 

멀리 영산강하굿둑이 보인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타관에서 맞는 비는 더 서글프다(목포시)

 

‘목포근대사박물관1.’ 1900년에 지은 옛 일본 영사관 건물이다. 이 자리는 옛 목포 도심을 식민의 눈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다(목포시)

 

 

참고 자료
1. 한국의 발견, 전라남도, 뿌리깊은나무, 1989 
2. 영산강 뱃길과 포구연구, 변남주, 민속원, 2012
3. 천년역사품은 호남의 한양, 나주, 최종필, 서울신문 2016. 8. 17 

4. 두산백과, 위키디피아 
5.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2012

 

 

 

 

 

 

 

 

 

 

 

 

조용연 편집위원  choyy@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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