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자, 독재자, 영웅…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프랑코의 무덤 앞에서

차백성의 인문탐사기행
반역자, 독재자, 영웅…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프랑코의 무덤 앞에서 

현지 적응을 위해 마드리드에 며칠 머물며 근교의 명소 세 곳을 찾았다. 영국보다 앞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구가했던 스페인 최전성기의 펠리페 2세가 세운 엘 에스코리알,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 프랑코가 권좌에 오른 후 조성한 ‘전몰자의 계곡’ 그리고 로마의 수도교가 2천년 이나 건재한 세고비아이다. 역사는 유물로 말하고, 역사적 인물들은 기념비적 유물을 남긴다    

 

세고비아 수도교 전망대에 앉아. 세운 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사용하고 있어 로마의 공학기술에 감탄하게 된다

 

 

내가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한 때는 5월 하순.
한낮 스페인의 태양은 벌써 머리위에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서울 출발이 늦어져 스페인 여행의 적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적기란 말은 어폐가 있을지 모른다. 국토면적이 넓은 만큼 다양한 기후대가 분포되어있기 때문이다.

 

베르사이유 궁전에 견주어도 손색없다는 엘 에스코리알 궁전 정면

 

 

기후대에 따른 여행 우선순위
스페인 남부에서 동부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지방은 여름에 기온이 높고 건조하여 자전거 여행엔 적합지 않다. 

세비야, 그라나다, 코르도바를 품고 있는 안달루시아 지방은 아프리카 사하라사막에서 불어오는 고온건조한 열풍으로 현지인도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이들에게 시에스타(siesta, 낮잠)는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다.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내륙지방은 연교차가 큰 대륙성기후를 나타낸다. 북부 빌바오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산악지방은 여름에도 선선한 편인 서안해양성기후가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스페인도 꽃피는 춘삼월에서 계절의 여왕 오월까지가 여행적기라 할 수 있다. 

마음이 바빠졌다. 늦었지만 가급적 빠른 시일 내 남부지방을 돌아보고 아프리카에 건너갔다 오기로 했다. 한 달은 족히 소요될 것이다. 그런 다음 한여름에 북부로 올라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 포르투갈로 넘어간다. 포르투를 거쳐 리스본까지, 북에서 남으로 포르투갈을 종단한 다음 리스본에서 이번 여행을 마무리 짓기로 대강의 계획을 세웠다. 주어진 여건에서 머리를 짜낸 최선의 시간계획서이다.
 

마드리드 근교 세 곳이란?
도착지 마드리드에서는 시차, 기후, 물 등의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여행기간이 한 달이 넘는다면 유럽의 경우 2, 3일 정도는 할애해야한다. 첫날은 마드리드 시내를 주유하며 보냈고 다음날은 근교의 가볼만한 세 곳을 선정해 공략하기로 했다. 마침 서로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과거 화려했던 시절의 유산 ‘엘 에스코리알’,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 ‘전몰자의 무덤(El Valle De Los Caidos)’ 그리고 고도(古都) ‘세고비아(Segovia)’이다. 

이곳은 우선 자전거로 가기에는 도로사정이 위험했다. 수도 근교이므로 갓길이 없는 국도에 차량이 넘쳐났다. 자전거 해외여행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사항이 바로 도로 안전문제이다. 갓길이 없는 일반국도라도 교통량이 적다면 달려봄직하다. 다음이 시간절약인데  자전거여행이라고 해서 전구간 자전거만 고수할 이유는 없다. 이베리아 반도도 작은 대륙이다. 변화가 없는 지루한 구간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여행의 효율성을 제고한다. 이런 나의 사정을 알아차린 민박집 주인은 자신의 자동차편을 이용해 마드리드 근교를 하루 만에 돌아보도록 선처를 베풀었다.

 

엘 에스코리알 궁전의 진수, 부속성당

 

성당 내부의 찬란한 벽화. 유럽의 어느 박물관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미술품, 조각품에 눈이 호강한다

 

칼레해전 상상도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 - 펠리페2세와 필리핀, 그리고 조선
마드리드를 떠나 한 시간 정도 달리니 조그마한 옛도시 엘 에스코리알에 닿았다. 도시 전체가 왕궁과 수도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은 도시에 어울리지 않게 과다라마 산맥 자락에 가로 206m, 세로 161m의 거대한 궁전이 버티고 있다. 어떻게 건물을 카메라에 담을까 머리를 굴려도 뷰파인더에 건물의 일부만이 들어온다. 

궁전하면 미려한 외관을 떠올리는데 이 건물은 거대한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는 스페인의 역대 왕과 가족이 묻혀있다. 우리의 종묘(宗廟) 같은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은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기쁨을 오래오래 기념하기 위해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는 1563년부터 1584년까지 무려 21년이나 공을 들여 완성했다. 국가재정이 바닥날 정도였다는데 강력한 군주 아니면 할 수 없는 대공사였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영제국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런 거대 제국을 먼저 건설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1516년 행운의 결혼으로 스페인을 인수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5세(1500~1558, 재위 1516~1556)였다. 바로 펠리페 2세의 부왕(父王)이다.
비록 물려받기는 했지만 펠리페 2세는 재위기간 스페인 역사상 가장 방대한 영토를 호령했다. 유럽은 네덜란드, 당시 도시국가였던 나폴리, 시실리아, 밀라노 등이고 신대륙에서는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아시아에서는 필리핀을 거느렸다. 

필리핀까지! 나에게는 필리핀이 스페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이 생소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일본과 미국 사이의 몰래 맺은 협정이 세상에 밝혀지며 또 한 번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을 절감하면서 알게
되었다. 

1521년 마젤란은 긴 항해 끝에 ‘필리핀 땅’을 발견했다. 그는 포르투갈의 항해사였지만 펠리페 2세의 후원으로 탐험에 나섰으니 국명을 그의 이름을 따 필리핀(펠리페의 땅)이라 짓고 스페인의 속국이 되었다.
세월은 흘러 1905년 7월, 도쿄에서 체결된 일본 수상 가쓰라와 미 육군 장관 태프트 사이에 맺은 협정(일명 ‘가쓰라 태프트 밀약’. 가쓰라와 태프트는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조건으로 일본에게 조선의 보호권을 인정)으로 미국에 넘어갈 때까지 긴 세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엇갈린 두 제국의 운명, 칼레해전
승승장구하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구가하던 펠리페 2세는 조그마한 섬나라, 영국의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의 해전에서 패하며 붕괴의 서막이 올랐다. 반대로 영국은 제해권을 휘어잡는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다.

한때 형부와 처제 사이였고, 언니인 메리 여왕이 죽자 펠리페 2세의 청혼을 받은 그녀는 “나는 이미 영국과 결혼했어요” 라며 거절 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펠리페 2세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을 줄은 그때는 당사자들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펠리페 2세는 1560년대부터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금과 은을 채굴해 국고수입의 주된 재원으로 충당했다. 이것을 노린 영국의 프란시스 드레이크라는 해적이 약탈해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쳤다. 더욱이 여왕은 그 해적에게 기사 작위까지 수여했다. 이 사실은 안 펠리페2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으나 평정을 잃지 않았다. 

결정적인 사건은 스페인이 지배하던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신교도의 반란이었다. 이때 영국이 반란군을 지원해 스페인 주둔군을 공격했던 것이다. 신·구교 간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종교 앞에 펠리페 2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전쟁을 결심하고 당시 최강의 함대 ― ‘무적함대’에게 출동을 명령한다.

1588년 5월, 무적함대(Spanish Armada)는 리스본 항을 출항했다. 1124문의 포를 전함 127척에 싣고, 수병 8천명, 보병 1만9천명을 동원했다. 살라미스 해전, 한산도 해전, 트라팔가르 해전과 더불어 세계4대 해전이라 일컫는 칼레해전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칼레(Calais) 앞바다에서 벌어졌다. 

이 싸움은 흔히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로 비유되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골리앗은 형편없는 약체였다. 거대한 무적함대의 갤리온(Galleon)선은 단거리에서 포격한 다음 쇠갈고리로 적선을 끌어당겨 백병전을 벌이는 전술이었다. 이 낡은 전술은 과거에는 잘 먹혀들어갔다. 영국은 이를 대비해 이미 사정거리가 긴 포와 방향을 쉽게 바꿀 수 있는 기동력 우수한 배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 드레이크의 ‘홈그라운드’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니 영국군은 물살이나 바람의 방향 등을 훤히 꿰고 있었다. 더욱이 무적함대는 리스본을 떠나 석 달이 넘는 항해에 수병들은 지치고 보급품도 바닥이 난 상태였다. 

결정타는 바람을 이용한 드레이크의 화공(火攻)이었다. 불은 바람이 있어야한다. 당시 드레이크가 삼국지의 적벽대전 편을 읽었을 리도 없을 터인데…. 아무튼 드레이크는 제갈양과 주유를 합친 해전 전술가였나 보다. 그는 낡고 작은 배 8척에 가연성 물질을 잔뜩 싣고 적진 깊숙이 침투, 모두 불바다를 만들어버리는 과감한 전술로 칼레해전은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전몰자의 계곡의 성당 전면

 

 

전몰자의 계곡(El Valle De Los Caidos) - 20세기 최대의 단일 기념물
가이드북에는 잘 안 나오지만, 스페인의 현대사를 알기위해서는 꼭 가봐야 할 곳이다. 엘  에스코리알에서 불과 10여km 떨어져 있어 이동이 용이했다. ‘로스 카이도스’란 전몰자란 뜻인데 스페인 내전(Spanish Civil War) 중 희생된 망자의 안식처가 있는 곳이다. 

해외 주둔 중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으로 권력을 잡은 프랑코가 1940년부터 짓기 시작해 1958년 완공했다. 음택(陰宅) 명당은 동서양 구분 없이 아늑함이 우선인 모양이다. 웅장한 과다라마 산세에 둘러싸여 중앙에서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린 형상이다.

가는 도중 5, 6km는 족히 떨어진 거리에서도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암산 위에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십자가는 인간의 오만함을 경계한 바벨탑의 연유를 떠올린다. 묘역에 도착해 성당을 먼저 찾았다.
설마 했지만, 바위산 안에 엄청나게 큰 성당이 자리 잡고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당, 수도원과 함께 조성된 이 묘역을 혹자는 “단일 기념물로는 20세기 최대”라고 평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암산을 폭파해 이 넓은 공간을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을까.  바위 안이라서 한기가 파고드는데 꼭 기온 때문만은 아니었다. 묘한 음기가 감도는 듯했다.    한참을 걸어가니 프랑코의 시신이 안치된 묘가 있다. 거기에서 천장까지는 45m. 바로 그 위 암반에 높이 125m, 가로 46m의 십자가를 세운 것이다. 

프랑코는 길이 300m의 이 건물을 완성하고는 교황청으로부터 성당의 지위를 추인받고자 했다. 그러나 바티칸 교황청은 이 요구를 거부했다. 그 어떤 성당도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보다 커서는 안된다’는 규율을 어겼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프랑코는 내부에 중간 문을 설치하여 성당의 길이를 40m 줄여 겨우 허락을 받았다. 

프랑코가 직접 공사를 지휘감독한 이유는 뭘까. 피로 정권을 잡은 그로서는 죽은 이의 영혼과 역사가 두려웠을 것이다. 오래 남을 거대한 성당을 만들어 ‘주님께 바치면’ 자신의 과오가 탕감된다고 생각했을까. 프랑코 자신이 설계에서 공사까지 직접 지휘감독을 했다.
공사는 국정의 최우선 순위였다. 이념의 화합과 화해를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내전으로 희생된 4만여 기의 무덤을 정부군, 반란군 구분 없이 함께 안치했다.  

공사의 최대 난관은 발파였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무수한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동원된 약 2만 명의 작업 인원은 주로 정치범으로 충당했는데, 하루 일하면 이틀의 형기를 감해 주었다고 한다. 공사비도 절약하고 명분도 챙긴 독재자의 절묘한 술수였다. 종교적인 이해와 용서를 구하는 추모공간이 아니라 프랑코 자신을 위한 이기심의 전당인 셈이다. 이런 까닭에 집권 당시에는 성소였다가 이제는 크기만 큰 그저 공허한 관광지로 전락한  느낌이 들었다. 십자가로 올라가는 궤도도 녹슬어있었다. 여기서 만난 스페인 사람이나 방문객 모두 덤덤했다. 내가 그래서인지 모두들 냉소적이라는 느낌마저 받았다.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 2차 세계대전의 리허설
1936년 7월, 스페인령 모로코에 주둔하던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소장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코는 전 병력과 장비를 이끌고 신속하게 지브롤터 해협 건너 본토에 상륙했다. 독일의 공수작전 도움으로 남부의 거점도시 세비야로 옮겼던 것이다. 이 작전이 내전의 국면을 좌우하는 분기점이었다. 

프랑코의 반란 명분은 “이데올로기로 갈라진 스페인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역사학자들은 19세기 초엽부터 ‘두 스페인’에 관한 개념의 대립을 말해왔다. 하나는 개방적이고 관대하며 급진적이고 범세계적인 지식인과 진보주의자들이 이끄는 스페인이고, 다른 하나는 가톨릭에 기반을 둔 엄격하고 폐쇄적이며 민족주의적인 보수주의자들이 끄는 스페인이었다.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경찰이나 나라를 지키는 군대 역시 둘로 갈라져 있었다. 1930년대 당시의 사회상은 서로의 틈을 메우기에는 그 골이 너무 깊었다. ‘전쟁밖에 해결책이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내전은 초기단계부터 유럽은 물론 온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소련과 멕시코가 공화파 정부군을,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랑코 반란군을 지원했다. 이런 의미에서 스페인 내전은 2차 세계대전의 ‘리허설’ 성격이 짙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의 비극’(1월호 P184 참조)이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리더십 부재가 부른 비극적 결말
미국을 비롯한 50여개 나라에서 6만여명이 ‘국제여단(International Brigades)’이란 이름으로 위기에 처한 공화파 정부를 돕기 위해 자원했다. 대부분 정부차원이 아닌 개인적 신념에 의해 참전했다. 이들의 구호는 파시스트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에 대항하여 “당신과 나의 자유를 위하여!”였다. 대표적인 지식인들로는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조지 오웰 등이 총을 들었다. 헤밍웨이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남겼다. 게리쿠퍼, 잉그리드 버그만이 열연한 동명 영화로도 제작되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가슴 먹먹한 라스트 신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인적, 물적 원조가 공화파 정부군에 답지했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정규군으로 이루어진 프랑코 반란군이 우세했다. 정부군은 미래를 향한 비전도 없이 안일무사주의였고 뚜렷한 리더가 없으니 조직력도 응집력도 와해되어 계속 수세에 몰렸다. 

드디어 1939년 3월 마드리드가  반란군에 함락되면서 내전은 종지부를 찍는다. ‘전초전(前哨戰)’이 끝난 불과 몇 개월 뒤, 히틀러가 독소불가침 조약을 깨고 폴란드를 전격 침공하면서 둘로 갈라진 세계는 대전의 참화 속으로 빠져든다.
 

전몰자의 계곡 가는 길. 저멀리 거대한 십자가가 보인다

 

성당 내부

 

 

프랑코, 그는 누구인가
북부 갈리시아 지방 출신인 그는 타고난 군인이었다. 톨레도에 있는 육군보병학교를 졸업, 소위로 임관했다. 초급장교 때부터 모로코에서 게릴라전을 지휘하며 용맹을 떨쳤다. 승진을 거듭해 33세에 장군으로 진급, 스페인 군 역사상 최연소 장군이란 타이틀을 얻었다. 체구나 목소리는 작아 대중 연설가는 못되었지만 군인다운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에겐 이런 일화가 있다. 모로코에서 특수부대를 지휘할 때의 일이다. 지급된 전투식량이 형편없다고, 한 겁 없는 병사가 프랑코에게 식판을 던지며 무례하게 대들었다. 프랑코는 침착하게 보급장교를 불러 병사 앞에서 시정할 것을 지시한 다음 한 점 동요 없이 “이 병사를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런 무자비한 규율 지상주의의 군인이었다.
정권을 잡은 후에는 철저히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했다. 스스로 독재자를 자처하며 스페인은 평등선거나 의회민주주의 때문에 멸망한다고 믿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정치단체나 언론기관, 지식인의 처형, 투옥을 일삼았다.

“나는 오로지 역사와 천주님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신념으로 1975년 11월 죽을 때까지 무려 36년간을 군림했다. 그러나 철권 통치자도 죽음 앞에서는 한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가 최후로 남긴 ‘대국민 영결의 말’이다.
“스페인 국민 여러분, 나는 이제 하느님에게 나의 목숨을 넘겨드리고 그분의 절대적인 심판의 법정에 서려고 합니다. 나는 국민 여러분께 용서를 구합니다. 무릇 나의 적이라고 공언해온 사람들―아무쪼록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스페인을 위대한 자유국가로 만드는데 헌신적으로 힘쓴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죽음에 임한 내 생애 마지막 순간, 사랑하는 하느님과 스페인 국민 여러분을 진심으로 포옹하고 여러분과 함께 목청껏 외치고 싶습니다. 아리바 에스파냐! 비바 에스파냐!” (둘은 같이 ‘스페인 만세’란 뜻이지만 여기서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아리바 에스파냐’는 내전 당시 프랑코 반란군의 구호였고, ‘비바 에스파냐’는 공화 정부군의 구호였다)

 

성당 내부에는 프랑코의 묘가 있다

 

프랑코의 젊은시절. 163cm의 단구였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타고난 군인이었다

 

스페인 내전을 전세계에 알린 사진.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의 '정부군의 죽음.' 1939년

 

 

세고비아(Segovia) ― “기타 못 치면 간첩!”
세고비아(Segovia)는 나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이름이다. 좀 오래되었지만 한때 ‘기타 못 치면 간첩’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봄가을 휴일이면 시 외곽 유원지, 특히 남이섬, 대성리, 강촌 등지에서 야외 전축과 어우러진 기타 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졌다. 춘천 가는 기차 속에서도 기타 퉁기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으니…. 돈은 없었지만 꿈이 있던 내 젊은 날, 그 시절 풍속도였다.

당시 들고 다니던 통기타 상표가 ‘세고비아’였는데 실상은 이 도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만 저명한 기타리스트 안드레스 세고비아(Andres Segovia)의 이름을 따서 지었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빚었다.
이 도시의 기원은 고대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되었으며, 스페인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의 대표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유명한 것이 셋 있다. 하나만 있어도 관심을 끌텐데 셋이나 있으니 마드리드에 온 관광객이라면 꼭 한번은 들러볼 만하다. 약 2천 년 전 로마인들이 축조한 수도교, 월트디즈니 만화영화의 모티브가 된 알 카사르 성(城), 익숙한 재료지만 독특한 명물 음식 코치니요가 그것이다. 

수도교, 옛 사람의 토목공사 실력
먼저 세고비아의 중심거리 아소게호 광장으로 향했다. 멀리서도 거대한 구조물이 위용을 드러낸다. 과거 로마인들이 이곳에 물을 공급하려고 건설한 수도교(혹은 수로교, acueduct)였다. 무려 1900여년 전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에 건설했는데, 지금 보아도 그 규모나 미적 감각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더 놀라운 사실은 현재도 상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 1920년대 이후에 철재 파이프를 설치해 사용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고비아에서 17km 떨어진 푸엔프리아(Fuenfria) 산에서 발원한 아세베다(Acebeda) 강물을 이 수로를 통해 세고비아로 끌어왔다. 도시를 관통하는 수도교는 총연장이 900m, 높이는 28m, 이를 지지하는 120개의 기둥과 160개 아치가 있다. 특이한 점은 시멘트나 회반죽 같은 접착제 없이 오로지 2만여개의 화강암을 레고블록 쌓듯이 차곡차곡 올려 아직까지 옛 모습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돌과 돌의 접촉면은 긴 세월 비바람에 풍화되어 약간 이지러지는 했지만, 구조역학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기본적으로 구조물의 하중을 견디는 기초공사가 완벽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유럽을 여행하며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등지에서 본 적은 있으나 이렇게 크고 온전하게 내려오는 것은 처음이다. 로마시대에는 공과대학 토목과(?)도 없었을 터인데, 무려 2천년이나 견디는 구조물을 만들었다니! 건설장비는 물론 트랜싯(transit)이나 레벨(Level) 같은 측량도구도 없이 1도 경사를 유지해 자연수압으로 흐름을 조절한 당시 ‘엔지니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세고비아 도심 한복판 아소게호 광장을 가로지르는 수도교

 

긴 세월 서서히 풍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도교의 컨트롤 타워 내부

 

영국 바스에 있는 유적지 로만 바스

 

1907년 7월 5일자 만국평화회의보에 실린 3인의 독립투사. 좌로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전직’에서 자유로울 수 없나?
나는 여행 중 독특한 구조물이나 미교(美橋)를 만날 때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 과거 공사현장 경험을 떠올리며 수로교를 처음과 끝을 천천히 거닐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시 초입 즉, 수로 서쪽 끝단에 ‘Water-Tower'라 불리는 작은 건물이 하나 있다. 컨트롤타워라 해도 좋을 듯하다. 

수원지에서 흘러온 물을 일단 여기에 저장해둔다. 그 이유는 섞여온 불순물을 가라앉힌 다음 수량을 적절히 조절해(purifying & regulating) 시내로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토목공학에서 하천학이나 수리학(水理學)은 주요 커리큘럼 중의 하나인데, 일천한 나의 지식으로 어림잡아도 당시 인구대비 물의 양은 풍부했을 것이다. 현대 도시도 삶의 수준과 도시기능 여부를 측정할 때 일인당 물소비량을 지표로 삼는다.

그리스인들이 물의 심오한 철리(哲理)를 깨달았다면 로마인들은 한수 더 떠 물을 쾌락의 도구로 떠받들었다. 로마에 가보면 그 옛날 대중목욕탕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분수에 놀란다. 이를 위해서는 수도교 축조기술이 발달해야 한다. 그러니 과거 모든 로마의 수도교들은 멋진 외관은 물론, 도시의 존재여부를 결정하는 필수 구조물이었다. 

한 예를 들면, 세고비아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로마인에 의해 건설된 도시가 또 있다. 영국 서남부 브리스톨 근처 ‘바스’란 작은 도시다. 도시 이름부터 목욕을 뜻하는 ‘Bath’이다.  지난 서유럽 기행 때 비싼 돈 내고 들렀던 로마시대의 유적지 ‘로마 목욕탕(The Roman Baths)'의 기억이 새롭다.

월트 디즈니에 영감을 준 알카사르

 

헤이그에 있는 르데르잘 궁전. 1907년 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기억하라, 이들의 피와 땀을!
공중목욕탕이 황제의 치적으로 치부되던 시기가 있었다. 귀족들은 여기서 그들만의 특별 탕에서 국사를 논의했다. 평범한 로마시민들은 하루 시간의 절반을 대중목욕탕에서 즐겼으니 당연 사교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의 생과 사를 가르는 자극적 이벤트를 즐긴 다음, 먹고 마시고 목욕을 하며 피로를 풀었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게 마련. 이를 위해 궂은일은 노예가 도맡아 해야만 했다. 건설 장비가 없었던 그 시대, 노예들이 이 큰 화강암 덩어리를 쪼아 다듬어 운반해 쌓아올리느라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을까. 화려한 영광의 유적 뒤안길에는 전쟁에서 패해 울부짖는 가족과 생이별하며 끌려온 노예들의 원혼이 스며있을 것이다. 

월트 디즈니에 영감을 준 알카사르(Alcazar)
아랍어로 알 카사르(al-qasr)는 요새란 뜻이다. 오래전 요새가 있던 자리에 12세기 알폰소 8세가 성을 신축했고 수세기에 걸쳐 증개축이 이뤄졌다. 1469년은 스페인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가 크다. 다름 아닌 카스티야의 왕위계승자인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의 왕위계승자 페르난도 왕자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로서 그간 난립했던 가톨릭 봉건세력들이 단합하여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단일국가로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단초가 되었다.

외관이 마녀의 뾰족한 모자 같은 탑이 여러 개 솟아 서양동화에서나 나옴직한 마법의 성 같다. 그래서일까. 미국의 월터 디즈니가 ‘백설공주의 성’을 이곳을 모티브로 해 대성공을 거두며 알카사르의 존재를 전세계에 알렸다.

나는 이 성을 보는 순간 “어디서 본 듯한 건물인데…” 하며 과거의 기억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맞아! 몇 년 전 네덜란드 헤이그의 빈넨호프 광장에서 보았던 르데르잘 궁전(현재는 국회의사당)과 흡사해. 뾰족한 탑들이! 당시는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식민 지배하에 있었으니….”  

여행이란 새로운 것을 보는 것도 좋지만 자신만의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공통분모를 찾아보는 것이 여행 중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다. 그간 유럽에서 여러 양식의 건물들을 보아왔지만 유독 이 건물을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500년 사직의 마지막 왕이 최후의 저항을 기도했다 좌절된, 우리에게는 잊지 말아야할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어디서 본 듯한 건물인데…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회의란 세계평화 운운하는 열강(列强)들이 둘러앉아 그간 피땀 흘려 쟁취한 약소국 땅을 사이좋게 나눠먹는 강자들의 성찬이었다.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1905년 5월, 대한해협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함대가 일본 연합함대에 궤멸되며 전쟁은 일본의 완승으로 끝났다. 이로서 기로에 선 조선왕조는 승자의 전리품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친러파 고종은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아직도 노대국(老大國)에 미련이 남아 ‘마지막 몸부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고종은 일말의 희망을 러시아에 걸고 위험한 도박을 한다. 

1907년 4월, 덕수궁 중명전에 구금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심복 이준을 불러 신임장을 주며,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장에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라는 어명을 내린다. 가는 도중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수도)에 들러 이범진 러시아 공사를 통해 니콜라이 황제의 친서를 받을 것을 당부했다. 당시 만국평화회의 의장국이 러시아였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과 국방권이 일본으로 넘어갔지만 이범진은 계속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버티고 있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종을 들쳐 업고 뛰어 러시아공관으로 피신시킨 이범진. 그의 고종을 향한 충성심은 대단했다. (일제의 소환령에 계속 불응하다 경술국치를 당한 그해 겨울, 차가운 러시아 하늘 아래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임 향한 일편단심, 애절한 유서를 고종에게 남기고)

이범진의 부단한 노력도 헛수고였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미 일본을 향해 돌았는데 러시아 황제가 친서는커녕 만나주기나 하겠는가. 하는 수 없이 이범진은 자신의 아들 이위종을 통역관으로 특사단에 합류시켜 어명에 힘을 보태주었다. 어쨌든 보름이란 시간만 허송하고 빈손으로 헤이그에 도착해 리데르잘 궁에 왔지만 이미 시작된 회의, 예상된 문전박대였다. 

한양을 떠난 지 64일 만에 도착한 이준은 회의 의장 넬리도프에게 여러 차례 하소연 했지만 “외교권이 없는 나라에서 온 당신들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요.”라는 매몰찬 답변만 돌아왔다.

나는 궁전 앞 광장 벤치에 앉아 100여년 전 그들이 울분에 차, 피 토하는 처절한 심정으로 거리외교를 펼치던 광경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리고 이 순간 나에게는 ‘자유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랑스럽게 태극기를 달고 이렇게 전세계를 다닐 수 있으니! 어둠이 내릴 때 비로소 안장에 올라 리데르잘 궁을 떠난 그날 밤의 기억이 새롭다.

코치니요 아사도(cochinillo asado) ― 미각과 인간의 ‘잔인함’에 대하여
이것은 볼거리가 아니라 세고비아의 명물 먹거리다. 코치니요 아사도라고 불리는데, 우리말로하면 ‘새끼돼지 통구이’쯤이다. 요리의 특징이라면 생후 어미젖을 떼자말자 바로 잡아 내장을 제거하고는 굽는 것이다. 즉, ‘재료’는 태어나 최후를 맞을 때까지 약 3주, 인간의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 고작 20여일 만 빛을 볼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이것은 다른 지방에서는 맛보기 힘들다. 외국으로는 유일하게 스페인의 오랜 지배를 받은 필리핀에 레촌(lechon)이라는 요리가 코치니요와 흡사하다. 레촌은 스페인어 레체(leche, 우유)에서 유래되었다. 

요리 방식은 전기 통닭이나 케밥처럼 꼬치에 끼워 돌려가며 열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 질그릇 접시에 올려놓고 피자 굽듯 화덕에서 뭉근 불로 장시간 구워낸다. 요리가 완성되면 단체손님 특히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이런 퍼포먼스를 한다. 손님 앞에 가지고 와서 접시에 옮겨놓고는 담아온(구울 때 쓴) 접시로 돼지의 목을 힘껏 내리쳐 절단한 다음, 그 접시는 바닥에 던져 박살낸다. 기름 빠진 껍질은 과자처럼 바삭하고 고기는 솜처럼 연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고개를 돌리고 심한 경우, 먹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3주’도 마음에 걸리는데, 먹을 사람 눈앞에서 목까지 내리치다니! 어째 잔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 어린 시절, 시골에서 ‘집에서 키우던 개’를 잡을 때, 동네 아저씨들이 나무에 목을 매놓고는 야구선수 프리 배팅하듯이 몽둥이를 휘두르는 광경이 떠올랐다. 목줄이 잠시 풀어져 피를 흘리며 몽둥이 쥔 주인의 손을 예전에 하듯이 핥으며 꼬리를 흔들던 그 황구…. 애처로운 눈빛에도 “너 이러면 못쓴다!”하며 다시 ‘교수대’로 끌고 가던 개주인 아저씨. 어린 마음에도 “참, 해도 너무하다” 생각했고, 뇌리에 박힌 그 장면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코치니요, 먹어보기로 결심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세고비아에 왔으니 ‘큰맘’ 먹고 먹어보기로 했다. 내가 들린 집은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유명 대형식당이 아니었고 자국인들이 주로 오는 ‘라리(Lali)’ 란 조그만 식당이었다.
보통 한 마리는 5kg 정도로 2, 3인이 먹을 수 있다. 가격은 일인당 25~30유로로 우리 돈 3, 4만 원 정도면 풀코스가 제공된다. 풀코스란 직접 구운 빵과 생선스프, 스페인 식 샐러드, 음료로는 하우스 와인의 일종인 ‘샹그리아’ 포함이었다.

드디어 ‘메인 디시’가 나왔다. 큰 접시에 얹힌 ‘반통돼지’, 가늘고 짧은 다리와 작은 발이 애처롭다. 불연 듯 두 살배기 손자의 앙증스런 발이 떠올랐다.
칼질하기 전 나는 마음속으로 ‘일용할 양식 감사기도’와 더불어 ‘위령기도’를 올렸다. “기구한 돈생 영가(豚生 靈駕)여~, 너 숙세(宿世)에 무슨 대역죄를 저질렀기에 생이 이리도 짧았더란 말이냐, 이제 질곡의 이승은 끝났으니 내세에는 인간으로 환생해 좋은 가정, 훌륭한 양친 만나 금 수저 물고 태어나거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멘.”

식사를 끝내고 예쁘장한 웨이트리스 아가씨에게 얼마간의 팁을 건넨 후 “쉐프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하니 그녀는 기다리라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마음씨 좋게 생긴 분이 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쉐프겸 식당 오너인 로베르토 씨였다. 나는 먼저 “당신 솜씨를 맛보기위해 멀리 한국에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며 너스레를 떤 후 언제부터 이 일을 했는지 물었다.

그는 “30여 년 전부터 코치니요 요리를 배웠고, 라리의 주방장이 된 지는 8년이 되었죠.”라고 말했다. 내가 그간 궁금했던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3주입니까?”
“돼지는 생후 3주면 모유수유가 끝나죠. 무게는 5kg 내외가 됩니다. 다른 사료를 먹이기전 즉, 젖살일 때가 육질이 가장 연하고 맛있죠. 껍질 또한 얇아 전체를 다 먹을 수 있습니다. 뼈와 발만 빼고 말이죠.”하며 웃었다.
 

 
막 구워낸 코치니요

 

스페인식 샐러드와 상큼한 맛의 와인 샹그리아

 

코치니요 메인디시

 

코치니요 요리의 전문쉐퍼 로베르토(오른쪽) 씨와 친절했던 종업원 아가씨

 

 
‘슬픈 돼지’
코치니요 요리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런 재미있는 스토리가 전해 내려온다. 이슬람들은 돼지고기를 절대로 먹지 않는다. 여러 설이 있으나 더운 지방이니 쉬 변질되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새우나 게 등 갑각류도 금기인데 이것 역시 잘 부패된다. 8세기 이후 이베리아 전역이 정복자 이슬람교도인 무어인(Moors) 발밑에 있을 때 원주민인 가톨릭 교인들이 저항하기 위해 각종 돼지고기 요리를 열심히 먹었다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거의 비슷한 요리가 있다. ‘애저’라 불리며 생후 1개월 남짓한 새끼 돼지 배를 갈라 마늘과 생강 등을 넣고 꿰맨 다음 푹 삶아 초장에 찍어먹는다. 우리의 ‘곰’은 여러 명의 배를 채울 수 있지만 스페인의 ‘구이’는 몇몇 사람의 입을 즐겁게 했다. 이는 스페인이 부유했다기보다 우리의 ‘국물문화’에 기인한다.

애저의 유래는 조선중엽 호남 진안의 토반(土班)들이 즐기던 보양제로 알려져 있다. 예부터 산이 많아 농사지을 땅이 부족했던 진안에서 많이 키웠던 돼지는 돈을 벌어주는 농가의 주요 소득원이었다. 돼지는 새끼를 많이 낳다 보니 가끔은 어미 뱃속에서 죽은 채로 태어나거나 잠든 어미 품에서 젖을 빨다가 압사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불쌍하지만 가난한 농가에서 버릴 수는 없으니 요리를 해 먹어 왔다. 그래도 우리는 스페인보다 일말의 ‘인정’은 있었다. 영저(嬰猪)나 유저(幼猪)라 하지 않고, ‘애저(哀猪, 슬픈 돼지)’라 했으니 말이다. 

돼지에 얽힌 에피소드, 젊은 날 비망록 한 페이지
1970년대 중반, 나는 건설 기술자로 해외에 파견되었다. 회교국인 아프리카 수단(Sudan)의 수도 카르툼(Khartoum)에 12층짜리 이 나라 영빈관(迎賓館)을 짓는 일이었다. 공사장 입지는 에티오피아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흘러온 청나일과 케냐 빅토리아 호수에서 흘러온 백나일이 합류되는(하나가 된 나일강은 이집트 카이로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나간다) 전망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작업환경은 최악이었다. 

‘하붑’이라는 사막 모래열풍이 불면 짙은 황사가 태양을 가려 차량은 낮에도 라이트를 켜고 다녀야했다. 눈, 코, 귀는 물론 입속에까지 모래가 지글거렸다. 이 나라 모기는 야행성이 아니고 24시간 시도 때도 없이 물어대니 ‘말라리아 왕국‘이라 할 만 했다. 한번 걸리면 구토와 설사, 고열로 2주 정도 고생막심이었다. 만약 재수 없어 말라리아 원충이 혈관을 타고 뇌로 가면 바로 사망이다. 

특효약은 예방이나 치료에 공히 키니네(quinine) 한 가지뿐이다. 그런데 이 키니네는 간세포를 파괴시키는 독성물질이다.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었다. 그래도 말라리아는 서서히 죽여주지만 당장 또는 단시간에 죽이는 무서운 복병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교통사고다. 평범한 교통사고였지만 의료시설미비로 죽어간 경우를 여러 건 목격했다. 대형병원에 냉동실이 없다. 시신에 파리가 들끓었다. 애통한 개죽음이었다. 한국에서라면 분명 살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꼰데’라 불리는 나의 세대는 70~80년대를 이렇게 살아왔다.
당시 한낮은 40도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더위였다. 철근 작업을 할 때는 방염장갑을 끼어도 화상환자가 속출할 정도였다. 한국인 근로자가 150여명 되었는데 공사의 속도나 질을 좌우하는 것은 이들의 식사문제였다. 

더위에 모두들 축축 처지고 식욕을 잃었다. 바나나, 망고, 수박 등으로는 일할 수 없었다. 쌀과 조미료 등은 서울에서 왔지만 기타 부식은 다 현지조달이었다. 현지의 소고기는 맛이 영 아니었고 양고기 역시 노린내가 난다하여 인기가 없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목구멍에 쌓인 먼지를 녹여낼 삼겹살이나 고추장 제육볶음 등이었다. 회교국에서는 연목구어(緣木求魚)란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였다. 

그래도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법. 스페인 선교사가 카르툼 외곽에 돼지를 키운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톨릭 신자 직원들이 물어물어 찾아갔다. 스페인 식 햄인 하몽(hamon)을 만들려는 신부님께 간청해 새끼 돼지 두 마리를 얻는데 성공, 모두들 쾌재를 불렀다. 현지인(특히 공사감독인 수단 관리)에게 알려질까 마음 졸이며 나일 강가 외진 곳에 허름한 우리를 짓고는 풍부한 잔반으로 금지옥엽 정성을 다하니 돼지는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모두들 꿈에 부풀어있던 어느 날 아침, 돼지들이 홀연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상한 족적을 남기고…. 급히 여러 사람들이 현장으로 달려가 설왕설래했지만 내린 결론은 하나. 나일 강의 악어들이 습격해 물고 간 것이라고. 이상한 족적이란 돼지의 치열한 저항의 징표였다. 공사현장에서 가급적 멀리 둔다고, 강 가까운 둔덕에 돈사(豚舍)를 만든 것이 실수였다.    후일담이지만 며칠 전부터 악어가 한두 마리 수면위로 머리를 쳐들었다 사라지곤 했다는 것이다. 강 하류에 사는 녀석들이 냄새를 맡고 정찰 차 왔던 것이다. 다시 세력을 규합해 원정까지와 미명에 허술한 우리를 덮쳐 강으로 물고 갔던 것이다. 최소 두 마리 이상의 소행으로 결론 내렸다. 입맛만 다시던 우리는 황망했지만, 그 녀석들은 ‘나일의 선물’로 생각하며 우리 대신 멋진 회식을 즐겼을 것이다. 

요즘도 나는 TV 야생동물 프로에서 악어가 나오면, 그때의 황당했던 추억을 떠올리곤 아련한 향수에 젖는다. 10년의 세월을 보낸 아프리카는 나의 제2의 고향이기에…. 

 
 
수단영빈관 공사현장. 지팡이 잡고 있는 사람이 수단 대통령 자와파르니메이리. 우측에서 두번째 헬멧 쓴 이가 필자. 1977년 가을

 

수단 근무 당시 나의 싸디크(절친이란 뜻) 알리 말리크 씨. 나에게 이슬람으로 개종을 권해 잠시 사이비 신자 노릇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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