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사슴도 사람을 피하지 않는 오지 속으로
홋카이도에서도 오지에 드는 북동해안으로 넘어간다. 산길도 해안길도 인적이 드물다. 도로는 자전거의 독차지이고 여우와 사슴은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비에 젖은 이국의 나그네를 환대해준 부부의 친절에 감동은 긴 여운을 드리운다. 짙푸른 빛으로 넘실대는 오호츠크 해변를 벗어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시레토코 고개에서 악전고투를 펼치는데…
글·사진 오재홍(대전중앙중 교사)

• 필자 : ‌오재홍(55현 대전중앙중학교 교사울트라마라톤과 트레일런 수십회 완주. <자전거로 대만 한바퀴 돌기> 저자   
• 동행 : ‌정경헌(60최근에 오랜 사업을 정리하고 휴식 중울트라마라톤 그랜드슬래머
• 동행 : ‌손왕운(47사람과 사진’ 사진관 운영마라톤 sub3 및 울트라마라톤 완주.

 

3일차소운쿄(層雲峽)~몬베쓰(紋別
273번과 333번 국도를 두고 많은 갈등을 했다. 333번은 지도에서 보기에 만만치 않은 산악구간이고, 273번은 333번보다는 험하지 않아 보이나 거리를 가늠해 보면 최소 60여km는 우회해야 하는 것 같았다. 이국에서의 우회는 또 다른 볼거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우리는 273번을 택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한다. 초기부터 273번 도로는 서서히 오르막으로 시작된다. 외딴 국도여서 차량 통행이 거의 없이 뜸하다. 까마귀가 도로 중앙에 앉아 한가를 즐기고 있다. 싱그러운 풀과 나무 냄새가 코끝에 밀려오면서 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을 실어주고, 무성하게 자란 길가의 나무들은 더듬는 눈길마다 안정감을 준다. 자연 속에 우리는 오롯이 묻혔다. 대지를 무성하게 덮은 자연에 인간의 문명은 단지 도로 하나만 뻗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저 자연의 하나가 되어 자연 속에 침잠하고 있을 뿐이다. 
거의 14km에 달하는 오르막에 힘을 쏟으며 출발한 지 1시간20분이 지나서야 정상부에 올라왔을 때 우리는 모두 지쳤다. 카미코시(浮島) 터널을 만난다. 
목적지인 몬베쓰(紋別)는 75km 남았음을 알려준다. 완전한 산악지대답게 삼림만 무성한 길을 1시간 넘게 달린다. 왼쪽의 쇼코츠산(渚滑岳, 1345m) 줄기가 계속 우리를 따라서 이어진다. 

신나는 강변 물놀이 
도로에 특이한 표지판이 눈에 띈다. 체인 탈착 알림 표지판이다. 갓길에 휴게 공간을 만들어 놓고 이곳에서 체인을 탈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도로 복판에서 체인 탈착을 하며 타인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심이 돋보인다. 
지대가 낮아지면서 목장지대가 간혹 나타나지만 산에서부터 이어져온 상쾌한 공기는 온몸을 흐뭇하게 한다. 
정오가 되면서 젖은 땀을 식힐 겸, 휴식처를 찾은 곳은 쇼코츠천이다. 강안을 가득 메운 물은 유속이 빠르다. 물살에 조심스러워 하면서 자연에 몸을 맡긴 우리는 신나는 물놀이를 즐겼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하고 시원한 물은 방랑자의 지친 심신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다키노우에(瀧上) 시내에 도달했을 때 한낮의 더위는 정점으로 치닫는다. 산을 벗어나면서 고도는 점점 낮아지고 몬베쓰의 해안이 가까워진다. 비릿한 바다내음이 바람에 실려오면서 비로소 바닷가 지척에 왔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 황석어젓이나 밴댕이젓을 삭히는 것 같은 냄새가 풍겨왔다.
몬베쓰는 제법 주택과 상가가 바다를 따라서 길게 형성되어 있다. 언덕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법원도 보이고 그 옆으로 돌아가면 제법 멋들어진 전형적인 일본식 사찰도 있다. 
몬베쓰를 벗어나면서 만나는 오호츠크 유빙(流氷) 공원은 중심 건물이 멋지다. 해변을 따라 시원한 잔디밭이 길게 펼쳐진 대규모의 공원이다. 5시에 폐장한다는 안내문에 다음 야영지를 찾다가 코무케 원생화원(原生花園)이라는 곳을 3km쯤 더 가서 만나게 된다.  그러나 밤 12시 넘어 비 올 확률이 90%라는 일기예보에 다시 철수해서 코무카이(小向) 농촌공원으로 옮겨서 캠핑했다.   

4일차, 몬베쓰(紋別)~도코로(常呂)
고무카이 농촌공원은 초등학교가 뒤에 위치해서 그런지 어린아이들 현장체험학습장으로 조성되어 있다. 열차역 분위기가 풍기는데 열차 관련 시설물도 약간 설치되어 있다. 
시야를 무겁게 덮은 흐린 날씨는 여행의 기분이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든다. 더구나 자전거 여행에서 비를 맞는 것은 최악의 불편을 준다. 
오늘의 목적지는 아바시리(網走)이다. 아바시리는 홋카이도의 어업전진기지로 예전에 고래를 많이 포획했고 어업이 발달한 곳이다. 아바시리까지 가는 길은 우리나라 경포호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바다모래가 길게 이어지면서 만들어 준 호수들의 연속이다. 날씨가 좋으면 호수의 아름다운 경치에 여행의 재미를 더할텐데 흐린 날씨로 이는 기대하기 어렵겠다.
출발한 지 1시간 지나 유베쓰(湧別) 대교를 건넌다. 다리 밑 둔치는 골프장과 공원이다. 볼품없는 유베쓰 다리와 어울리지도 않고 한적한 시골이라 이용객도 많지 않아 보이지만 멋진 모습으로 잘 정돈되어 있다. 다리 밑을 흐르는 물줄기는 도도하게 풍부한 수량을 과시하면서 홋카이도 북쪽 오호츠크해를 향해 힘차게 내려가고 있다. 
길이가 25km에 달하는 거대한 사로마 호수로 접어든다. 하지만 길은 호반을 들락날락 해서 호수는 잠시 얼굴만 가끔 비출 뿐이다.  
유베쓰 교통공원에 도착했다. 사로마 초군생지(草郡生地) 입구라는 푯말도 있다. 검고 육중한 증기기관차가 전시되어 있다. 오래 전에 사용했건만 외관은 잘 관리돼 있고 깔끔해서 지금 운행한다 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빗속에 한가는 있을 수 없다. 그저 일별하고 다시 앞으로 전진.
출발한 지 3시간이 지나서 길가에 서 있는 ‘아바시리 국정공원(國定公園)’이라는 푯말을 만난다. 아직 아바시리 시까지는 거리가 남아 있고 사로마 호수도 반 못 되게 남아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사로마 호수는 행정구역으로 볼 때 유베쓰와 아바시리로 나뉘어 있는 듯하다. 정오쯤 되어 우리는 드디어 사로마 호수를 빠져 나왔다. 

빗속에 천사를 만나다
비는 계속 줄기를 더해 가면서 앞길에 방해를 부린다. 사카나(さかな)관(館)이라는 작은 수산물시장이 나왔다. 비를 피할 겸 어떤 해산물이 있나 하는 호기심에 실내로 들어가 보았다. 특이한 것이 있는데, 성게어묵, 문어주둥이 말린 팩, 킹크랩 카레 등이 색달랐다. 그러다가 눈에 띈 것이 문어 한 상자. 일행의 먹고 싶다는 말에 흥정을 하게 되었다. 한 마리만 필요한데 한 상자를 통째로 팔지 낱개로는 팔지 않는다고 한사코 우겨서 결국 6마리가 들어있는 살아있는 문어를 샀다. 많은 문어를 서슴없이 산 이유는 가격이 800엔이었기 때문이다. 먹다가 버리더라도 너무 쌌다. 
빗줄기는 더 심해졌다. 20여분 더 직진하니 조그만 동네가 나온다. 도코로(常呂). 작은 도시답게 조용하다. 오후 3시경인데 주택은 모두 문을 닫고 상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불빛이 보이는 한 사무실을 발견하고 숙소를 물어보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40대 중반쯤 된 아주머니가 놀라면서 우리를 맞아준다. 그리고 주변에 여관을 알아보는데 3군데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가격이 1인당 7000엔이라 한다. 
가격에 놀란 우리는 혹시 근처에 캠핑장이라도 있나 물으니 잠시 후 다른 분을 데려온다. 우리의 사정을 전해 듣고 자기 집이 어떠냐고 제안을 해온다. 깜짝 놀랐다. 초면에 만난 낯선 사람,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세 사람, 비에 젖어 몰골이 형편없는 우리를 자기 집에 재워주겠다는 것이다. 체면이고 뭐고 없이 우리는 신세를 지기로 했다. 
알고 보니 그 사무실 사장 부인으로 남는 방이 있어서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샤워와 빨래까지 모두 해결하고 있을 무렵 이 분은 사무실에 갔다 와야 한다면서 저녁 먹을 것까지 필요한 것 없느냐고 하는데, 우리는 문어를 요리해 먹으면 되기에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했다. 마음이 너무 넓은 이 부부. 안주인의 이름은 유카코(由佳子)이다. 2시간 정도 우리만 있다가 이 분은 남편과 6시에 돌아왔는데 저녁 먹거리까지 장을 봐왔다. 
우리가 가져온 팩소주와 주인이 내놓은 산토리위스키, 아사히맥주까지 곁들인 만찬이 시작되었다. 간단한 식사가 아니라 제법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여러 요리가 나왔다. 부부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요리를 내놓는다. 격의 없는 식사를 하면서 너무 편안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해 주었다. 그리고 식사 후에는 이집 사장이 음악을 좋아하는데 아프리카 악기인 ‘봉고’라는 것을 내놓고 연주를 들려준다. 작은 북으로 소리가 꽤 명랑하고 귀여워서 아이들 장난감 같았다. 
처음으로 일본에서 받은 커다란 환대에 마음속으로 너무 놀랐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도 내가 이런 경우 이렇게 낯선 외국인을 전적으로 접대를 해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야말로 천사, 그 자체다.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한가? 낯선 사람들에게 자신의 보금자리를 2시간이나 비워주고 성의 있는 식사까지 제공하는 이런 분은 매사가 선행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 역사 속에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배일감정은 이런 곳에서는 전혀 존재할 이유조차 없다. 여행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 투영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다. 이런 곳에 다른 무슨 이유나 조건이 존재하겠는가?

5일차, 도코로(常呂)~샤리(斜里) 
홋카이도에서 접한 3개의 자전거도로 중 2번째 도로를 만난다. 바다와 호수를 배경으로 초지와 물풀, 새들이 조화를 이뤄 멋진 장면을 펼치고 있었다. 한동안 일반 자동차도로나 인가를 볼 수 없어 안전한 라이딩을 할 수 있어서 마음이 편안했다. 나중에 지도를 보니 사로마호 끝부분에서 출발한 이 자전거도로는 아바시리호(網走湖)까지 39km에 걸쳐있고 곳곳에 주차장과 휴게시설, 심지어 조그만 철도박물관도 보였다. 
모처럼 여유를 갖고 잘 정돈된 자전거길을 즐겼다. 이용객은 전혀 없었다. 간혹 일반 자동차도로와 접근해서 마을도 지나기에 편의점이라도 있을까 해서 잠시 벗어나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노토로호(能取湖)로 접어들었다. 해발 3m라는 표지판도 보인다. 갑자기 앞에 중장비 자동차가 한 대 나타났다. 자동차의 왼쪽 아래로 수평으로 드리워진 긴 톱날이 자동차의 진행과 동시에 풀을 순식간에 깎으면서 지나간다. 예초기 벌초가 아닌 자동차 벌초로 짧은 시간에 많은 풀을 깎으면서 사라져갔다. 처음 보는 방식의 자동차 예초기라 신기할 뿐이었다. 
아바시리호에 접어들면서 멋진 풍광이 자전거도로와 함께 나란히 지나갔다. 자전거도로가 끝나는 지점이 아바시리 천이다. 그 옆 광장에 조그만 공원이 있고 표지판에 그려진 내용을 보니 사로마호에서 아바시리호까지 이어지는 이 자전거도로에 휴식처(화장실)는 6곳 있고 국도에 접근할 수 있는 곳은 2곳으로 구간별 거리표시와 함께 안내가 되어 있다. 공원 가운데에 ‘인간도로회의상(人間道路會議賞) 대상(大賞)’이라는 글귀가 쓰인 커다란 돌탑이 서있다. 어떤 내용인지 모르지만 꽤 상징적인 공원임을 은근히 알려 준다.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여우 
해는 머리 위에 올라와 있었다. 한낮의 더위 속으로 들어간다. 이어서 아바시리역을 발견한다. 인파는 물론이고 주차돼 있는 차량도 몇 안 되는 한적한 역으로, 역사 규모도 아담해서 단정한 느낌을 주는 2층 건물이다. 이제 아바시리는 제법 도시다운 면모를 갖춘 곳으로 자연 속에서 벗어난 것을 확연히 느끼게 된다. 
잠시 후 특이한 서양인 라이더를 만났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건강한 모습의 남자는 이태리 사람이고 깡마른 아내는 프랑스인, 그리고 자전거에 딸린 트레일러에는 유치원생 나이의 어린 아들 둘, 이렇게 네 식구가 자전거여행 중이었다. 우리도 짐을 실은 트레일러로 힘든데, 이 친구는 부부가 어린 아이들을 이끌고 여행하니 우리보다 더한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이 친구와는 오늘 꽤 여러번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며, 멋진 바닷가를 배경으로 작품 사진까지 촬영했다. 
이윽고 바닷가에 있는 아바시리 관광안내소에 도착했다. ‘유빙가도 아바시리(流氷街道網走)’라는 간판이 크게 걸려 있는데, 실내로 들어가 보니 관광안내소와 자전거대여점, 쇼핑센터가 모여 있어 여행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곳이었다. 
도시를 벗어나니 자전거길은 해안도로를 따라서 길게 뻗어난다. 눈앞에 나타난 바닷가는 짙푸른 하늘색과 더불어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를 펼쳐 준다. 눈이 호강을 한다. 산악 지형을 벗어나 이제 바다에서 해풍과 더불어 신선놀음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동해안 자전거길이 연상되는 멋진 곳이다. 
아바시리 국정공원(網走國定公園) 코시미즈(小淸水) 원생화원(原生花園)을 만난다. ‘원생화원’ 하면 지난번 힘들게 야영을 포기했던 곳의 기억이 살아나는데 이곳은 화창한 기운을 받아서인지 산뜻한 모습을 하고 있다. 관광지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의 여유로움과 주변 상가들도 있다. 상가에는 특이하게 사슴 가죽을 말려서 판매 중이었다. 
상가 옆에 철도 건널목이 있는데, 표지판에는 천황일가가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곳을 지나면 높지는 않지만 주변을 360도 살펴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타나는데 그 너머를 바라보니 넓은 바다가 가득히 눈앞에 펼쳐졌다. 그 아래로는 목책을 양 옆으로 두른 오솔길이 풀밭 사이로 길게 이어져 바닷가로 향해 있다. 푸르른 물감을 짙게 풀어 놓은 듯한 원색의 대양은 여행자의 심신을 순식간에 풀어주는 듯했다. 오른쪽의 토후스호(濤沸湖)를 따라 길은 직선으로 지루하리만치 뻗어 있다. 
오호츠크 해안도로에 이어 야무베쓰(止別) 시 방향으로 향했다. 30여분 푸른 초원과 목장지대, 밀밭이 좌우가 넓게 펼쳐져 있고 인가는 없는 곳을 달렸다. 저 멀리 산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가끔 철길이 옆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이윽고 야무베쓰 시에 도착했다. 조그만 시골 동네로 아담한 기차역이 한가롭게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우리는 계속 동쪽으로 달렸다. 샤리(斜里)까지 9km 남았다고 표지판이 알려준다. 간혹 숲 속에서 여우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가 평소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듯 우리를 보고도 그리 서두르지 않고 사라진다. 도로는 무척이나 한산하다. 모텔이나 호텔을 좀처럼 볼 수 없다. 간혹 여관 간판이 보인다. 거리에서 본 일본의 여관들은 대부분 가정집으로 편안한 숙박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캠핑이 아니라면 이용함직 하다. 
샤리에 도착해서 우리가 묵은 곳은 아담한 시골 슈마루(朱円) 소학교. 비를 피할 수 있었고 시골학교의 정겨움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인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개교한지 100년이 넘는다는 기념비가 있어 전통 있는 학교임을 알 수 있었다.
새벽에 우리는 별을 보았다. 밤하늘을 가득 덮은 크고 작은 하얀 보석을 온 천지에 가득 깔아 놓은 듯 빛나는 황홀을 맛보았다. 아련한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어릴 적 시골에서 맛보았던 그 동심의 세계를 다시 볼 수 있었다.

6일차, 샤리(斜里)~라우스(羅臼) 
시레토코가 39km 남았음을 표지판이 알려준다. 바닷길에 연해 있는 산기슭을 휘돌아 바닷가를 따라 길게 이어진 도로를 따라 전진한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쾌청한 날씨를 배경으로 멋진 바다는 싱그럽고 푸르게 우리를 맞아주고 있다. ‘세계자연유산’이라는 자랑스런 푯말이 시레토코 도착 전의 기대를 부추겼다. 
한동안 바다만 보면서 해안도로를 달렸다. 우측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천연의 숲으로, 오염되지 않은 울창한 삼림은 풍부한 계곡물을 끊임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끝없이 해안가를 따라 펼쳐진 바다는 세속을 망각하게 하는 듯했다. 다른 잡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자연 속에 빠져든 하나의 점일 뿐이다. 
시레토코를 25km 남짓 남겨놓은 지점에서 우리는 일본 100대 폭포 중의 하나인 오신코신 폭포를 만나게 된다. 울창한 삼림에서 뚫고 나온 폭포수는 널리 부채살 모양으로 펼쳐지면서 웅장한 물줄기를 뿜어낸다. 웅장한 굉음 속에 물줄기의 파편인 물방울은 꽤 멀리 튀겨 나오면서 은빛가루를 사방으로 뿌려준다. 폭포는 바로 옆 도로 아래로 빠져서 흔적도 없이 그 강한 기세를 숨기며 바다로 사라진다. 폭포 옆의 작은 가게에는 다양한 기념품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녹용 말린 것을 통째로 팔고 있다. 
출발한 지 3시간쯤, 푯말은 시레토코 세계자연유산과 관광안내소가 200m 앞에 있음을 알려준다. 기온이 슬슬 올라가기 시작한다. 홋카이도에 올 때 가장 기대했던 곳이 시레토코였는데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와 대면할지 몹시 궁금하다. 
시레토코의 가장 번화한 곳에 관광안내소와 세계자연유산 기념관이 있다. 이곳의 볼거리 중의 하나인 5호(湖)까지 관람할 수 있는 스카이 버스(sky bus)가 운행되는데 자전거여행이 아니라면 타보고 싶었다. 5호까지 자전거로 갔다 오기에는 코스가 불편해서 생략하기로 했다. 

오호츠크해 크루즈 여행  
마치 부여의 백제박물관과 비슷한 관광안내소 옆의 ‘시레토코 세계유산센터’에 들어갔다. 정면 벽에 가득히 쿠릴열도 속의 시레토코와 사할린이 찍힌 사진이 걸려 있다. ‘비경’이라 쓴 또 다른 사진은 시레토코 주변의 바다가 하얗게 얼어서 굳어버린 동토의 왕국을 보여주는 멋진 한겨울 사진이다. 비록 사진이지만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시레토코의 생태를 보여주는 곰이나 독수리, 물고기 모형도 있지만 전시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인근 유람선 매표소에서 시레토코 바다 크루즈 여행을 예약했다. 3시간용은 이미 예약이 끝나서 잠시 후 10시반 출발 1시간반용 크루즈 표를 구입했다. 승선료가 정말 대단하다. 1시간반용이 3300엔이다. 
항구를 벗어난 유람선은 시퍼런 바다를 미끄러져 달린다. 특이한 점은 유람선 실내에서 실외로 나가 구경할 때는 반드시 구명조끼를 입도록 승무원이 통제를 한다. 인원수도 한정해서 마구 나가게 하지도 않고 일정 인원만 나가게 한다. 정면에 산언덕 위로 길게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유람선에서 내린 후 혹시 저 길을 올라야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앞선다. 기온이 올라가고 있고 오르막 경사가 무척이나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배를 타니 여태 자전거로 힘들었던 근육이 보상을 받는 듯 몹시 편안하다. 
해안 절벽과 바다갈매기, 그리고 바다로 떨어지는 멋진 폭포들, 저 멀리 위로 끊임없이 시레토코 반도를 굽어보면서 길게 수평으로 이어진 산맥들. 바다의 파란 색과 육지 산의 풍부한 녹색이 서로 어우러져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초자연의 순수와 웅장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점심식사는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시레토코 야영장에서 했다. 야영장에는 이미 텐트를 치고 편안함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시레토코야영장(國設知床野營長)이란 푯말이 서있고 야영비는 지난번 소운쿄의 반값도 안 되는 1인당 400엔이다. 
다시 전진, 예서 머무를 수는 없다. 오늘 목적지는 라우스(羅臼)까지다. 그런데 라우스까지 가는 길이 이번 여행의 최고 난코스다. 시레토코에서 라우스까지는 시레토코 반도를 횡단해야 한다. 유람선에서 보았던 바로 그 언덕으로 길이 인도한다. 아, 힘들다. 올라가기 싫어진다. 무릎과 심장은 요동을 친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태양도 버거운데 게다가 몸까지 사정없이 혹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오른다. 드디어 유람선에서 보았던 언덕위에 올라섰다. 시레토코 시내가 발아래 멋지게 나타났다. 올라온 힘겨움을 충분히 보상할 만큼 멋진 풍광이다.

2시간을 힘겹게 오른 시레토코 고개 
그런데 알고 보니 이곳은 시작에 불과했다. 라우스산 정상까지 앞으로 남은 거리가 13km, 시내에서 여기까지 2km 남짓 온 것이다. 산모퉁이를 돌아서 잠시 후 나타나는 주차장에 많은 차량이 서있는데 주차장 건너에는 후레페폭포가 있다. 계속 직진하니 갈림길이 나타난다. 좌측으로 시레토코 5호로 가는 길과 갈라져 334번 직진도로가 라우스 방면으로 ‘시레토코 고개’로 향한다.  
이제 도로는 본격적인 오르막으로 우리의 가슴을 압박해 왔다. 차량은 방해를 받지 않을 정도로 이따금 스쳐지나간다. 오르막과 더불어 기온도 계속 올라가면서 압박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심장박동수는 쉬지 않고 고통을 전해 오고 있었다. 멀리 라우스산(1660m) 정상이 보인다. 마치 조롱하는 듯한 은근한 미소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힘겹게 실컷 고생을 하면서 올라오라는 것처럼…. 
어느 순간 사슴이 길가에 나타나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도 도망가지 않는다. 평소에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쏜살같은 지나침을 보다가 이번에 자전거 탄 우리를 만나니 이 녀석도 신기한가 보다.   
좌우에 보이는 나무는 이제 키가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한다. 고도가 높아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거의 3/4을 올라온 듯하다. 잠시 고개를 돌려 숨을 고르면서 뒤를 돌아보니 여태 나를 힘들게 괴롭혀 온 산세가 발아래 납작 엎드려 있다. 잠시 후 산림의 빽빽함이 옅어지면서 곧게 자란 나무가 서서히 비틀어지기 시작한다. 마치 지리산 천왕봉 가다가 만나는 고사목 지대 분위기다. 이제 라우스고개의 정상이 점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시원스레 뻗어내린 능선의 단정함은 적당한 경사로 좌우로 양팔을 드리우고 있다. 100m 앞에 정상 주차장이라는 푯말을 발견하고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나는 기쁨이 일어난다. 
1시반에 출발해서 더위와 싸우면서 딱 2시간 걸려서 정상을 밟았다. 라우스산과 주차장 주변은 소박한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자연을 해치지 않고 잠시 사람들이 머물렀다 가도록 화장실과 주차장의 기본 시설만 있다. 
드디어 정상에 오른 커다란 희열을 맞본다. 반대편으로 신나게 내려가야 할 하산 길이 길게 펼쳐져 있다. 공원에는 ‘시레토코 세계자연문화유산’과 ‘시레토코국립공원’이라고 쓰인 정상석이 라우스산을 배경으로 아담하게 서있다. 또 다른 쪽에는 ‘북방영토 방향지시판’이 있는데 시레토코 앞에 펼쳐진 주변 여러 섬들을 그린 주석판이다. 일본이 그토록 돌려받고 싶어 하는 북방영토 4개 섬이 아스라이 보인다. 
해는 벌써 정수리에서 기울어지려 한다. 기온이 내려간다. 정상이라 기온 변화가 더 민감하게 피부에 느껴진다. 라우스 정상이 멀어진다. 너무 빠르게 내려가니 공들여 올라온 산길이 아까운 생각이 든다. 발아래 삼림은 마치 예초기로 깔끔하게 정돈해 놓은 듯 일정한 높이로 좌우로 짙고 가득하게 펼쳐져 산세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길가에 또 긴 꼬리를 옆으로 세운 갈색의 여우 한 마리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 어슬렁거리면서 산속으로 사라진다. 라우스까지 8km를 알리는 표지판을 보았다. 숲속에 또 노루 한 마리가 숨어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숲이 깊어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 
드디어 시레토코 반도의 허리를 자전거로 넘어왔다. 오기 전에 지도를 볼 때는 산악지형이라 상당한 두려움을 가진 곳이었다. 
라우스 시내로 내려왔다. 규모는 우리나라 시골 면 크기로 동네가 조용하고 아담하다. 작은 호텔이 있어서 숙박비를 물어보니 역시 비싸다. 오늘도 야영을 하기로 한다. 주변을 돌아보니 수도시설에 비를 막을 수 있는 라우스소학교가 적절했다. 주차장엔 자동차 캠퍼가 숙박하려는지 두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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