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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둑길59-논산천·강경천·노성천(공주·논산·완주·익산)황산벌에서 다시 보다, 전쟁과 호국을

한국의 강둑길59-논산천·강경천·노성천(공주·논산·완주·익산)
황산벌에서 다시 보다, 전쟁과 호국을


이 땅 곳곳은 전장(戰場)과 호국(護國)의 인연이 깊다. 아니 적어도 ‘국방수도 논산’에선 진행형이다. 백제 장군 계백이 장렬히 싸운 황산벌이 그랬고, 한 모퉁이 돌면 오늘의 계룡대 앉은 자리가 그렇다. 신묘한 터 신도안에 마음먹고 들어선 국군의 심장이니 쉬이 허물어질 성(城)은 절대 아니다. 논산훈련소에서 머리를 빡빡 깎고, 군복에 몸을 맞추던 일은 이 땅의 남자들이 전사로 다시 태어나는 통과의례였다. 서울  외곽에서 자리잡고 있다 뒤늦게 내려온 국방대학교까지, 나라 지키는 일을 빼놓고 논산을 얘기하는 것은 헛헛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강경 미내다리 옆을 지난다. 염라대왕이 “살아 있을 때 미내다리를 보고 왔는냐?”고 물어 볼만큼 무지개 형상이 아름답다

 

 

 

 

 

한겨울 논산천을 찾아가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정수리까지 띵하고 얼얼한 추위가 유난히도 여러 날 한반도를 움켜잡고 있다. 그나마 영하 5도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날 아침, 남으로 달린다. 

논산벌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완주(完州) 하고도 산골짜기 고당리는 너무 깊이 숨어 있다.   자전거 바퀴까지 오톨도톨 마찰력이 큰 걸로 갈아 끼웠으나 산골짜기 어디에도 눈은 없다. 충청, 전라 해안의 잦은 눈도 이 깊은 골짜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마른 겨울이다. 논산천의 상류는 장선천이다. 산 너머 동쪽은 금산군 남이면이고, 남쪽은 금강 상류 용담댐 언저리 운일암,반일암이다.

 

탑정 저수지, 논산천의 젖줄이자 일제 때부터 있어온 해묵은 수원지다(논산 부적)

 

논산천의 상류는 전북 완주 고당리, 피묵마을이 첫 동네다. 장선천으로 부른다(완주 운주)

 

논산천의 뿌리가 이   리 깊을 줄이야
피나무가 변성된 피묵마을에서 자전거에 오른다. 계류가 좋으니 여름에 북새통일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산모롱이를 돌자, 이 추위에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산골짜기에 테니스라니…. 때마침 정현 선수의 호주 오픈 4강 진출로 귀족스포츠라는 테니스를 다시 보는 터라 더 하다. 전등을 밝히고 밤늦게까지 테니스를 치며 가족과 함께 주말을 보내는 젊은 여유가 이 골짜기에 있다. 닭백숙 끓여 둘러앉아 술기운에 취하는 계곡물 ‘탁족’ 휴식과는 격이 다르다.

느닷없이 나타나는 삼거리라는 이정표는 그 옛날 산을 넘어 금산으로 가던 고갯길 흔적이다.  썰렁한 삼거리에서 장선리까지 나와야 전주와 금산으로 가는 큰 길을 만난다. 한국게임과학고등학교다. 겨울방학 중인 학교가 고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이 깊은 골짜기에 현대문명 깊숙이 뿌리내린 유희의 총아인 ‘게임’을 만나다니, 그것도 ‘과학고등학교’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편견은 자료를 찾다가 여지없이 무너졌다. “게임제작을 원하는 학생은 한국게임과학고등학교로”라는 표제가 야심차다. 학생 수 207명에, 교사 27명이니 개인과외 수준이다. 특성화고여서 전국에서 모여든 인재는 저마다 컴퓨터게임 개발의 정상을 꿈꾼다. 대한민국 최고의 화이트 해커(해킹범죄를 막는 보안전문가) 이정훈이 이 학교 출신이다. 마음만 먹으면 현존하는 모든 스마트폰과 PC를 다 뚫을 수 있다고 한다. 미국 라스베가스 해킹올림픽에서 3위 입상하더니 아시아 팀 첫 우승을 이끌었고, 캐나다 해킹대회에서 우승하며 상금 2억5000만원을 거머쥔 인재다. 삼성에 근무하던 그가 구글로 떠난 것은 큰물로 나아간 것이리라. 이 골짜기에서 기적 같은 일이 더 일어나길 바란다.

 

지난해 이사 온 국방대학교. 옛 격전지 황산벌에 제대로 자리 잡았다. 국방 인재의 산실이 되길 기대한다(논산 양촌)

 

 

볕 잘 드는 마을 양촌 그리고 딸기
대둔산의 물을 몰고 오는 괴목동천과 운주에서 합류한 장선천은 논산천이 되어 이내 양촌(陽村)으로 접어든다. ‘양촌’은 볕 잘 드는 배산임수 마을의 대명사다. ‘전원일기’의 김회장 댁 무대도 김포 양촌리였다. 볕이 잘 드니 사람 살기 좋고, 농사가 순조로울 수밖에 없다. 양촌은 논산 딸기가 가장 많이 재배되는 곳이기도 하다. 농협에서는 매일같이 농가를 돌며 직접 수매를 하고, 30억원 언저리의 돈을 농가의 통장에 바로 넣어준다. 농부는 열심히 맛있는 딸기만 만들어 내면 된다. 

이제 딸기농사의 비법도 평준화되어 전국에서 제 고장의 이름을 단 딸기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밥상에 오른다. 딸기가 채소인지 과일인지는 얼핏 답하기 어렵다. 쉬운 농사가 어디 있겠는가만 딸기농사 10년에 무릎, 허리 할 것 없이 죄다 망가졌다는 하소연은 엄살이 아니다. 2단 3단으로 재배상을 높이 세우고 수경재배를 하는 기법까지 나와 한 겨울에도 우리는 딸기 맛을 제대로 본다.  

또 한 사람, 양촌에는 대검찰청 차장과 법제처장을 지낸 송종의 이사장이 있다. 그가 강직하고 잘 나가던 검사라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전관예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똬리를 틀고 있던 시대에 법조를 떠나면서 정해진 코스인 변호사 개업 대신 양촌리 행을 택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우리시대 원로가 되고도 남는다. 평안남도 출신이니 낙향도 아니었다. 이미 1973년, 강경지청 검사 시절에 국유림을 임대하여 심었던 밤나무는 그의 인생2모작 묘목이었는지도 모른다. 월남파병을 마치고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헐벗은 강산은 녹색열망을 일깨웠다. 1996년, 그가 ‘양촌영농법인’을 만들어 딸기와 밤을 가공하고, 농산유통을 마을사람들과 함께 일궈냈다. 하필 그해 대학생이던 외아들을 사고로 먼저 떠나보내며 세상의 벼랑 끝에 섰다. 그가 아들의 사십구재에 쓴 고유문(告由文)을 다시 읽으며 아들의 아비인 나도 입술을 물었다.


“생이 일편부운(一片浮雲, 한 조각 뜬 구름)이라. 부자 인연 20년, 이 애통과 허무를 어찌하랴. (중략) 창밖의 산야는 저토록 푸르른데 회색빛 한 줌의 재는 어찌 이리 어두운가? 너의 유골을 이 고유문에 살라 산야에 흩으려 한다. 해탈하여 서천(西天) 안양국(安養國)에 상생(常生)하길 바라면서 아비의 간장을 녹인 물로 쓰는 글이다.” 라는 결미에서 누가 주저앉지 않겠는가.

아들이 떠나가므로 스스로 무명에 허우적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고백, 도덕률만 강조했던 깐깐한 아비를 용서하라는 그 절절한 간구(懇求)에다 나를 투사해 보며 부끄러워 눈을 감는다.

그가 세운 영농법인은 영어로 양촌을 뜻하는 ‘써니빌’로 개명하여 벌써 6대째 이어가고 있다. 그가 만든 ‘천고법치문화재단’은 좀해서 상 받기 어려운 법조인들 가운데 올곧은 사람을 골라 상찬하며 세상을 밝히고 있다.

 

계백장군은 가족까지 목숨을 바쳐 백제를 지키고자 했으나, 승자가 쓴 역사에 의해 의자왕과 함께 사라졌다가 호국의 용감한 상징으로 부활했다(논산 부적)

 

주인과 함께 사냥하러 나온 검둥이, 총 한방에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다니. 사냥은 아무나 하나(완주 운주)

 

고정산 터널, 계백장군과 유학자 김장생의 묘소만 아니었으면 터널이 생길 이유가 없다(논산 부적)

 

은진면을 지나는 논산천은 논산을 크게 외곽으로 돈다(논산 은진)

 

황산벌에서 호국을 다시 생각하다
한낮에도 체감으로는 영하 5도 어간이다. 자전거는 손과 발이 얼어오면 견디기 어렵다. 탑정호로 흘러드는 논산천은 강둑을 보강하는 공사가 군데군데 진행 중이라 확장 중인 697번 지방도로 나간다. 

국사봉 아래에 새로 이사 온 하얀 건물 여러 채가 자리 잡고 있다. ‘국방대학교’다. 서울 시대 62년을 청산하고 2017년 9월 이전해 왔다. 이름은 대학교지만 대학공부를 마친 사람들이 입학대상이다. 대학원 안보과정은 군 대령 이상, 4급 이상, 공공기관 단체 임직원이 해당된다. 한때 경무관으로 진급해 국방대학원을 가는 것은 출세를 위한 기본코스에 속하기도 했다. 참여정부의 중앙기관 지방 분산화에  따라 이미 다른 교육기관들은 여러 해 전에 수도권을 벗어나 충청지역 등으로 옮겨 앉은데 비하면 국방대학교는 미적거리다 늦게 온 셈이다. 연유야 어찌되었건 옛 황산벌 언저리에 자리 잡았으니 국방도시 논산에 걸맞는 선택인 셈이다. 계백의 5천 군사가 김유신의 5만 신라군을 상대로 4번이나 대승한 곳도, 화랑 관창의 목 잘린 시신을 본 신라의 필사의 반격에 계백이 전사한 곳도 황산벌이다. 

계룡시 신도안에 들어선 3군 본부까지 호국의 일념을 클러스터화 하기에 논산만한 곳도 없다.
탑정호 북안으로 접어들려면 조그만 터널을 지나야 한다. 보통 도로공사라면 단박에 산허리를 뭉개버렸을 언덕이지만 ‘고정산’ 터널은 뜻이 담겨 있어 보인다. 순전히 계백장군의 묘와 조선 서인(西人)의 영수격인 유학자 김장생(1548~1631)의 묘가 이 능선에 물려 있어 맥을 끊을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와 토정 이지함의 가르침을 받았고, 문하에는 우암 송시열과 지천 최명길 같은 거유들을 두었으니 학문적으로는 성공했다. 그가 조선조 중기이후 성리학을 형식 중시의 예학(禮學) 중심으로 끌고 간 것만은 당쟁의 뿌리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탑정호가 보이는 터에 계백장군의 묘가 자리하니 ‘백제군사박물관’이 들어선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지금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계백장군이 아내와 자식까지 죽이고 전장으로 나간 황산벌 결전은 호국의 기상이 넘치는 스토리텔링 거리다. 다만 부적면 충곡서원에 배향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단종복위사건’의 사육신 모두를 ‘논산의 인물’란에 소개한 것은 한참을 오버한 것이다. 충남 홍성 사람 성삼문, 경북 구미 사람 하위지, 대구 달성 사람 박팽년, 경기 포천 사람 유응부까지 논산의 인물이라니.

 

갈대의 환영을 받으며 하이파이브라도 해야 강둑길이 덜 심심하다(익산 여산)

 

넝쿨이 덮인 강경천 표지판, 겨울이어서 글씨가 보인다. 그나마 ‘국토해양부장관’이다. 하기야 툭하면 바뀌는 관할이니 성가시기도 하겠다(익산 망성)

 

 

쇠잔한 소읍 강경으로 흐르는 물, 강경천
탑정호에서 숨고르기를 한 논산천은 은진면을 거쳐 논산 시내로 흘러내린다. 하천 둔치도 자전거길만 다듬어 놓았을 뿐 별달리 치장 없는 자연미인에 가깝다. 연산천 냇물을 업고 내려오는 노성천이 논산천에 합류하는 지점 언저리로 천안-논산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유독 논산벌의 안개는 지독해서 아침나절 서논산IC 근처를 지나가는 차들은 툭하면 벌벌 기곤했다. 안개 속 추돌로 엉킨 대형사고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모두 강경을 지나는 금강과 석성천, 노성천과 논산천의 물 기운이 밤새 들판을 휘감고 놓아주지 않아서다.

강경 옥녀봉을 코앞에 두고 강경천이 마지막으로 논산천에 합세한다. 강경천은 간발의 차이로 금강 제1지류하천의 자릴 놓쳤다. 쇠잔한 소읍 강경은 곰삭은 젓갈 가게들과 관청 몇 군데를 여태 붙들고 있는 자존심을 빼고 나면 그다지 내세울 게 없는 형편이다. 애써 이전(移轉)을 외면하던 관청들도 이제 벼랑 끝까지 몰렸다. 논산경찰서만 해도 노후신축우선 1순위를 4~5년이나 넘겨 이제 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계룡 시민들이 강경은 너무 멀다고 불평하는데다(계룡시도 논산경찰서 관할) 이전하는 김에 이름마저 KTX 역명처럼 ‘계룡논산경찰서’라 4자성어형으로 개명해야한다고 압력을 넣고 있다. 하필 올해 말 정년을 앞두고 있는 강경출신 경찰서장도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지만 이제 결단을 내려야할 형편이다. 이미 논산에 부지가 마련되어 있는 검찰지청이나 세무서도 굳이 먼저 나서서 강경 사람들에게 욕먹을 필요 없다고 경찰서 눈치만 살피고 있다.

이제 전라북도 여산에서 발원하는 강경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북서풍이 뒤에서 밀어주니 자전거바퀴가 날개를 달았다. 채운면 미내다리(충남유형문화재11호)에서 잠시 멈춘다. 전라와 충청을 잇던 다리였다. 하상을 정비하면서 물길이 달라져 강둑길과 나란히 마주한 퇴물이 되었지만 홍예(虹霓) 구조를 한 수문의 미려한 자태는 여전하다. 미내 스님이 시주로 놓았다하기도 하고, 강경상인이 돈을 쾌척해 만들었다고도 하나 아무렴 어떠랴. 얼마나 예뻤으면 죽어 염라대왕 앞에 갔더니 “강경 미내다리를 보고 왔느냐?”고 물었다지 않는가. 예쁜 것이 또 하나 있다.

구름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채운(彩雲)이라 이름 붙였을까. 기녀의 이름이라 해도 곱다. 하나로 부족하여 두개의 ‘채운’이 가까이 있다. 논산시 채운면이 있고, 강경읍 채운리가 있다. 해발 57m 채운산에 붙은 ‘호남명산’이라는 수식어가 과장이 아닌 것도 올라봐야 안다. 새로 뚫린 도로가 가로막긴 했어도 익산 용안, 함열로 펼쳐지는 들판이 발아래다. 호남의 너른 평야가 시작된다는 신호다.

 

논산천, 강경천, 노성천은 논산벌의 안개를 만드는 주역이다(논산 광석)

 

유모차에 기대어 걸어가는 할머니의 귀가. 동행은 아마도 칠순을 바라보는 며느리겠지(논산 채운)

 

고달픈 보릿고개의 뒤안을 기억하고 있을 옛 다리. 제풀에 허물어져가고 있으나 아직 마을길로 쓸 만은 하다(익산 망성)

 

한국시조문학의 거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 터에 마련된 문학관이 강둑에서 가깝다(익산 여산)

 

 

논산훈련소, 청춘이 국가를 다시 생각하는 관문
강경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연무대가 가깝다. 강경역에서 갈라져 나온 강경선 철로는 오로지 군사용으로만 이용된다. 한 시절 입영열차가 운행되던 때는 전국에서 열차가 들어오던 선로였다. 이제는 훈련소를 나서는 신병들을 태우고 떠나는 열차만이 신연무대역에 드물게 들어올 뿐이다.    

이 땅의 남자들에게 논산과 훈련소는 하나의 단어다. ‘육군제2훈련소’라는 것도 잘 모른다. ‘육군제1훈련소’가 6·25 전란 중에 제주에 있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 그저 논산은 지긋지긋한 군 생활, 그 추억의 시발점으로 기억할 뿐이다. 잔반통의 밥까지 헹구어 허겁지겁 먹던 배고픈 기억을 물 바랜 추억으로 업그레이드 해준 건 세월의 힘이다. 바리깡으로 밀어낸 빡빡머리, 지급된 군복에다 몸을 맞춘 차림새는 훈련병이 더 이상 철조망 밖 사제인간이 아님을 증명해주는 인상착의였다. 이제 1년6개월로 줄어들 군복무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식과, 연인과의 이별은 눈물겹다. 입소식 날 부모님과 가족을 향한 마지막 경례에 제일 먼저 고갤 돌려 눈물을 닦는 이는 엄마다. 논산은 제 잠자리도 안 개고 살아온 아들을 잠시라도 효자로 만들어주는 ‘국립훈련소’다. 요즘은 짧아진 군복무에다 툭하면 포상휴가 나오는 아들이니 그리울 틈도 없다. 그러니 무대 뒤에서 목소리만 들려주는 엄마를 제 엄마라 우기는 병사들을 보고 가슴 뭉클해 하던 ‘우정의 무대’도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다. 

강경천이 발원하는 원수저수지까지 가는 길은 온통 강둑 정비공사다. 강둑 리모델링은 강경천에 걸쳐있는 해묵은 다리들의 이끼 위에 먼지를 날리며 진행 중이다. 여산은 강경천이 지나는 길목에서 가장 큰 동네다. 부사관학교가 자리 잡고 있어 전라북도 익산 땅이지만 역시 국방수도 논산 영향권이다.

 

논산천과 강경천이 합류한다. 멀리 금강을 굽어보고 있는 옥녀봉 느티나무도 벌거벗었다(논산 채운)

 

강경천의 발원지인 여산 원수저수지(익산 여산)

 

노성천변에서 본 겨울 계룡산, 눈이 백발처럼 덮여 있다(공주 계룡)

 

이 겨울 강둑에서 자전거를 탄 촌로를 만나다니, 반가워 먼저 인사했다(논산 상월)

 

 

임금님께 진상하던 노성참게, 아직 귀하다
또 하나의 강, 노성천의 발원에서 논산벌을 내려가는 여정이다. 계룡산의 3대 명찰(名刹)에 속하는 갑사 초입의 계룡저수지가 계룡산 서북사면의 물을 모은다. 신원사 앞 경천저수지도 예비 집결한 물을 보탠다. 계룡산 연봉은 국사봉에서 한번 발끈 솟았다가 남으로 흐른다. 이 겨울이 아니면 노성천 강둑은 자전거에겐 거북한 길이다. 한 해 소임을 다한 풀들이 모두 스러져 잠들어  다행이다. 경운기가 낸 바퀴자국 그 속살이 아니면 갈 엄두를 내기 어렵겠다. 강둑과 하상이 한 길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천정천의 전형이다.

갈대의 합창, 갈잎의 노래가 아니면 쥐죽은 듯 잠든 들판길이다. 서북풍에 드러눕듯 손을 흔드는 갈대와 하이파이브를 해보는 재미도 없으면 달려간다 한들 선방의 면벽수좌랑 다를 게 무어 있으랴. 자연하천의 형상을 간직한 8km 구간이 고향집 마당처럼 편안하다. 상월면을 지나면 금남호남정맥에서 분기한 소조산, 노성산과 주산 옥리봉 아래 윤증고택이 있다. 그 유명한 ‘명재고택’이다. 선녀가 거문고를 타며 노래 부른다는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 명당에 자리 잡았다. 소론파의 지도자이자 대학자면서도 관직을 마다한 백의정승의 집, 집 전체를 둘러싸는 담이 없다. 오지랖 넓은 대청은 3면이 열려 있고, 눈 덮인 고가는 한옥디자인의 교과서로 건축역사기행 단골답사지다.  

노성천 하면 임금님께 진상하던 ‘노성참게’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다. ‘짠물을 먹고, 민물로 목을 축인다’는 노성참게, 모래에 씻겨나가 다리에 털이 없다는 참게를 살리려는 논산시의 노력은 가상하지만 아직 노성천 참게는 귀하다. 탑정호 주변에 십여 군데 참게탕 집이 있지만 값이 만만치 않다. 안개 자욱한 논산벌판을 만드는 물길, 노성천 그 너머로 호남선 KTX가 석양의 들판 위를 하늘열차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참고 자료
1. 한국의 발견, 충청남도, 뿌리깊은나무, 1989 
2. 이 세상 아빠들에게 띄우는 편지, 여성동아, 2009. 3월호
3. 정통풍수지리교과서2, 고제희 2009, 문예마당 

4. 두산백과, 위키디피아 
5.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2012



 ‌기술·용품 협찬 : 태능한성바이크(02-971-7206)
 ‌취재지원: 김정우(논산경찰서, 경위)

 

 

 

 

 

 

 

 

 

조용연 편집위원  choyy@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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