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 반도를 넘어 북아프리카까지

차백성의 인문탐사기행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 북아프리카까지
라만차의 풍차여, 각오하라! 400년만에 자전거 탄 내가 왔다

‘안달루시아’는 여행자에게 자전거 동호인에게 동경의 이름이다. 너울대는 구릉지 사이로 숱한 사연을 품은 길과 마을이 풍경화로 펼쳐지고, 해마다 봄이면 ‘지로 디 이탈리아’의 자전거 대열이 밝은 태양 아래 질주한다. 알람브라궁전을 비롯해 이슬람과 유럽 문화가 조화를 이룬 경이의 문화유산이 지천이다. 돈키호테가 거인으로 착각하고 공격했던 라만차의 풍차는 이번에는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다시금 돌진한다 

 

인생이란 꿈을 꾸고 도전하는 과정이다. 설령 패배할지라도. 콘수에그라의 풍차 앞에서

 

아프리카에 가까워서일까.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땅은 척박하고 하늘은 뜨겁다.
안달루시아란 이름은 이베리아 반도에 이슬람교 지역을 가리키는 중세시대 이름인 아랍어 ‘알 안달루스(Al- Andalus)’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유럽과 아프리카의 교차점인 대서양과 지중해를 모두 품고 있으니 흐르는 문명의 통로다. 고대 로마인들로부터 서고트족, 북아프리카 아랍인(Moors, 무어인)들이 건너와 기존 문화와 융합되어 새로운 문화를 형성했다. 두 문화가 공존할 때 얼마나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인류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아란후에스는 과거 왕실 여름궁전이었다

 

달려라, 남으로! 올라, 안달루시아!
안달루시아는 전형적인 스페인 이미지의 진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잔혹한 죽음의 미학 투우와 격정적인 춤, 플라멩코의 고향이기도 하다. '태양의 해변(Costa Del Sol)'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바다는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다. 음울한 서유럽, 북유럽 사람들에게 선망의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북유럽 은퇴자들은 여생을 아예 여기서 보내려고 오늘도 몰려들고 있다.
안달루시아는 현대문명이 급속도로 유입되는 가운데서도 무어인의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며 전통방식을 고수하려는 두 얼굴로 나를 맞았다.

여름궁전, 그리고 아란후에스 (Aranjuez) 협주곡
마드리드를 떠난 자전거는 남쪽을 향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간 마드리드에서 시차적응과 신체조절로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평소 습관대로 어느 낯선 곳에 도착하든, 절대 낮잠은 자지 않고 시내일지라도 30~40km 달려주면 된다.

2시간 정도 달려 아란후에스(Aranjuez Palacio Real)에 도착했다. 작은 마을 전체가 왕실의 휴양지로 조성된 곳이다. 16세기 펠리페 2세가 건설을 시작해 18세기 후반 카를로스 3세 때 궁전 전체를 완성했다. 타호 강(Rio Tajo)을 이용해 만든 인공 섬에는 프랑스식 정원인 ‘섬의 정원(Jardin de Isla)’과 6척의 왕실선박이 전시되어있다. 지난날 이곳에서 왕족들이 뱃놀이를 즐겨 ’여름궁전‘이란 별칭이 붙었다.

나는 왕실 별장이기 때문에, 혹은 궁전이 아름답기 때문에 온 것만은 아니었다. 톨레도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지만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은 감미로운 선율 때문이었다. 선율이란 바로 <아란후에스 협주곡, Concierto de Aranjuez>이다. 작곡자 호아킨 로드리고(Joaquin Rodrigo)는 이 궁전을 무척 좋아해 이곡을 작곡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는 영감을 얻기 위해서 여러 차례 방문했다. 1939년에 완성해 이듬해 바르셀로나에서 기타독주로 초연, 대찬사를 받았다. 맹인이었기 때문일까, 그의 수많은 곡이 대부분 이 곡처럼 애수에 차있다.

 
청각의 기억을 찾아서
좋아하는 ‘음악의 고향’을 찾아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그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페달을 돌렸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랜 기간, 매주 토요일 밤이면 모 방송의 ‘주말의 명화’ 프로그램의 시그널 뮤직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면 “이번 주는 뭐지?” 하며 온가족이 오손도손 TV 앞에 모여 앉았다. 극장 한번 가는 것이 호사일 때 텔레비전 한 대에 온가족이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의식의 흐름을 타고 걱정 없던 지나가버린 시절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곡이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런 말을 했다. “과거는 풍화되어 잊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기억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로 되살아난다.”라고. 그는 소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홍차에 곁들여 마들렌 과자를 먹다가 유년시절을 보낸 꽁브레(Combray)란 마을의 기억을 홍수처럼 떠올리는 대목이 나온다. 프루스트는 잠재된 미각의 촉매제를 말했지만, 나는 청각의 기억을 꺼냈다. 인간의 모든 감각 중에서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있는 것이 청력이라고 한다. 

자전거와 함께 청각의 기억을 찾아 가는 이 짜릿한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물론,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에 가더라도 타레가의 감미로운 선율 <알람브라궁전의 추억> 기타 반주를 들으며 페달을 밟을 것이다.

“톨레도를 보기 전까지는 스페인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아란후에스를 떠나 N400번 국도를 타고 톨레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 도로는 자전거 전용 갓길은 아니지만 교통량이 적어 자전거로 달리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태양은 뜨거웠다. 열풍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래도 긴 장갑, 긴 바지에 팔 토시와 얼굴가리개를 둘렀다. 눈에도 선글라스를 끼니 노출은 한 점도 없다. 태양이 뜨겁고 더울수록 몸을 가리는 것은 과거 아프리카 근무 시절 아랍인들에게 배운 생활의 지혜였다. 자전거는 PAS(Pedaling Assist System)를 3단계로 맞추고 기어는 중간정도에 놓았다. 대신 케이던스를 최대한 높이니 바람의 방향에 상관없이 절전도 되며 시속 30km는 유지되었다.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기 전까지 톨레도는 이 나라 수도였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처럼 언덕에 자리 잡은 도시를 타호 강이 휘감아 도는 형상이 마치 성 주위에 파놓은 해자(垓字) 같다. 그래서 안전지대란 뜻의 라틴어 톨레툼(Toletum)에서 도시이름이 유래되었다.

원래 이 도시는 로마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의 전략적 거점으로 건설했다. 그 후 무어인의 지배를 받아 번영을 누리면서 이슬람교, 유대교, 가톨릭교가 융합되며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중세의 성곽과 시가지, 각 종교관련 건물들이 그대로 내려오는 유럽에서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다. 이렇게 톨레도가 원형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점령지 문화를 파괴하지 않았던 이슬람의 포용정책에 기인한다. 터키 이스탄불의 소피아성당도 맥을 같이 한다.

물론 스페인 내전 때는 공화파 정부군과 프랑코 반군이 이곳 알카사르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결정적인 것은 2차 세계대전의 무차별 공습을 피한 것이다. 

 

톨레도 가는 길. 사진에는 안 나온 것이 있다. 뜨거운 열풍!
톨레도 전경. 타호강이 휘돌아 천연 요새임에는 틀림없으나 발전의 한계가 있어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겼다
알칸테라 다리 너머로 보이는 톨레도의 상징, 알카사르

 

‘끌바’도 힘든 톨레도 중세 골목
과거에는 ‘톨레도의 칼’로 대변되듯이 철 관련 산업이 번성했다. 그 명맥은 아직도 남아 거리 곳곳에 당시의 칼과 갑옷 등을 파는 가게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영화<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세밀하고 정교한 갑옷과 옛 무기들이 모두 여기서 제작되었다.

우리의 경주(慶州) 격인 톨레도는 1986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역사의 향기를 간직한 유물과 건축물이 한 가득이다. 참고로 스페인은 이탈리아를 제치고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최다 보유국이다.

16세기 카를로스 1세 뒤를 이은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로 천도하면서 톨레도는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여전히 스페인 가톨릭의 본산으로서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대성당 외에도 크고 작은 성당, 수도원 등 종교관련 건물이 산재해있다.

옛날 그대로의 길-도시 전체가 미로로 얽힌 골목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냥 골목길이 아니고 경사진 골목도 많아 옛사람들은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몇 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외벽이나 간판들이 낡고 녹슬어 세월의 무게를 말해준다. 미로 같은 골목길 사이사이 금, 은, 철기류 등의 세공점이나 레스토랑이 즐비해  ‘끌바’도 눈총을 받을 정도였다.

 
톨레도가 낳은 ‘그리스 인’
엘 그레코(El Greco)는 고야, 벨라스케스와 함께 스페인 회화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벨라스케스-고야-피카소-미로-달리로 이어지는 스페인 천재화가들의 계보는 바로 엘 그레코에서 출발한다.” 

이것도 포용문화의 전통 아닐까! 외국 출신 예술가에 관대한 이들의 풍토가 부럽기도 하다. 그렇게도 고국 러시아를 사랑했던 망명 작가 솔제니첸은 “나무도 이식하면 뿌리를 내린다.”라며 미국에 정착해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엘 그레코의 태생은 그리스 남단 크레타 섬이다.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레코는 르네상스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간다. 그곳에서 대가 티치아노에게서 화법을 배워 활동하다가 스페인에 온 것은 35세 때인 1577년이다.
엘 그레코는 그의 이름이 아니다. 원래 도메니코스 데오토코풀로스(Domenikos Teotokopoulos)인데 발음이 어려웠는지 스페인 사람들은 그를 그냥 ‘그리스 사람’이란 뜻의 ‘엘 그레코’라고 불렀다. 그것이 굳어져 그의 이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작품에 서명할 때는 반드시 본명을 써넣었다. 

그가 스페인에 왔을 때는 엘 에스코리알 (El Escorial, 본지 2월호 p194 참조) 궁전이 한창 건축 중이었다. 펠리페 2세는 궁전을 장식할 작품을 요청했다. 이에 엘 그레코는 <성마우리시오의 순교, El Martirio De San Mauricio>를 2년에 걸쳐 완성해 제출했으나 왕의 반응은 시큰둥해, 창고로 직행하고 말았다. 따라서 그의 간절한 꿈, ‘궁정화가’도 사라졌다. 실망한 나머지 ‘한물 간 도시’ 톨레도로 내려와 죽을 때까지 40여년간 창작에 몰두해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위기가 기회가 된 것이다. 애석하지만 죽어서 빛을 보았다. 현재 엘에스코리알 궁전의 보물 제1호는 당시 왕의 눈 밖에 났던 <성마우리시오의 순교>이다. 아마 천국에서 펠리페 2세에게 감사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톨레도 대성당. 스페인 카톨릭의 총본산이다. 1493년에 완공되었는데 공사기간이 무려 26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대작이라 ‘말’이 많나, ‘말’이 많아 대작인가
톨레도에 있는 그의 걸작은 산토 토메 성당에 있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El Entierro Del Conde Orgaz>과 대성당에 있는 <벗겨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의, 띠 Expolio>가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우선 산토 토메(De Santo Tome) 성당을 찾았다. 대성당에서 트리니다드 거리를 따라 조금만 걷다보면 콘데 광장(Plaza del Conde)이 나오는데 바로 그 부근이다. 성당 자체는 작고 볼품 없었지만 오로지 엘 그레코의 이 작품 하나로 성당 앞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니, 찾기는 쉽다. 큰돈은 아니지만 입장료(2.5유로)도 내야한다. 미술관, 박물관, 고궁이 많은 유럽을 여행할 때 입장료 지출은 물값(생수)에 버금간다. 목은 말라도 참을 수 있지만, 볼 것은 꼭 봐야한다.

1323년, 세상을 떠난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날, 기적이 일어났다. 천국에서 어거스틴 성인과 스테판 성인이 내려와 시신을 매장했다는 것. 이 믿기 힘든 구전을 바탕으로 그린 성화이다. 그림의 주인공인 백작은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이었다. 살아생전 성당에 많은 헌금을 했고, 죽은 후를 대비해 유산의 상당부분을 헌납하기로 유언장까지 작성해두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사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인 1586년, 한 신부가 서류를 정리하다 우연히 유언장을 발견, 백작의 후손을 설득해 263년 만에 오르가스 백작의 유언이 실행에 옮겨졌다. 이 또한 믿기 힘든 이야기이다. 어쨌든 백작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성당측은 엘 그레코에게 작품을 의뢰해 탄생한 것이 바로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다. 여기에 또 문제가 발생했다. 작품 가격을 놓고 성당 측과 엘 그레코가 송사(訟事)까지 벌였던 것이다. 이런 ‘사연’ 덕분일까. 오늘날 <천지창조>, <최후의 만찬>과 더불어 세계3대 성화의 반열에 낄 만큼 대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그림에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 다윗 모세, 마리아, 성 베드로, 성 세바스챤 등 20여명이 등장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레코는 자신과 어린 아들 마뉴엘도 그려 넣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각기 다른 방향이나, 이 두 사람만이 정면을 보고 있다. 고로 감상자와 눈을 맞출 수 있으므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마뉴엘의 윗 호주머니에 출생년도인 1578이 표기되어 있어 그레코의 진한 부정(父情)마저 알 수 있다. 

 

예수의 옷을 벗김. 1579년작. 톨레도대성당 소장
엘 그레코의 성마우리시오의 순교. 펠리페 2세에 의해 퇴짜맞은 작품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6년작. 산토토메성당 소장
엘그레코 자화상

 

 

인사하는 라만차 지방의 풍차여~
‘돈키호테의 땅’ 라 만차(La Mancha)는 지평선을 따라 끝없이 펼쳐지는 건조하고 메마른 땅이다. 이름 그대로 메마른 땅이란 뜻의 아랍어 알 만샤(Al Manshah)에서왔다. 황무지 사이로 소실점이 보일 정도로 길은 시원스레 뻗어있다. 과거 미국 대평원을 여행할 때의 풍광을 떠올리게 했다.
넓은 대지위에 야트막한 언덕이 하나 솟아있고 정상에는 풍차 날개가 보인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서 달려가자, 애마(愛馬), 로시난테야!”
작은 언덕이라고는 하지만 폭양 아래 애마로 오르기는 쉽지 않다. 톨레도에서 달려와 배터리 눈금은 밑에서 세는 것이 더 빠르다. 절전을 한다고 했지만 풍향과 자전거 무게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오늘밤 숙소까지 가려면 최소 두 칸은 남겨 두어야 한다.
배터리 용량은 여자의 마음처럼 변덕스럽다. 50km를 넘게 달려도 꿈쩍 않다가 한 칸 떨어지면 다음부터는 속절없이 줄어든다. 23kg의 무거운 자전거에 30kg의 짐을 달고 육신의 힘만으로 언덕을 오르려니 힘이 부친다. 강한 맞바람마저 부니 일어서서 체중까지 실어 밟아야했다. 체인이 끊어질까 조바심이 일었다. 풍차가 많은 이유를 알겠다.

추월하는 관광버스 안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엄지 척을 올려댄다. 어떤 이는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한국인 아니면 중국인일 것 같다. 
콘수에그라(Consuegra)가 가까워지자 돈키호테 조형물이 나타나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조형물은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올라, 아미고! 한국의 ‘돈 바이크차(Don BikeCha)’. 4백년만이요…!”

 

풍차여, Don BikeCha가 왔노라! 400년만에!
돈키호테가 거대한 적으로 알고 돌진했던 풍차가 가까워지고 있다

 

자초한 인생의 전환기에서
“칠흑 같은 태평양 상공. 비행기는 공중에 정지한 듯 떠있다. 
승객들도 모두 잠든 불 꺼진 비행기 안 “인간은 던져진 존재”라는 니체의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국에서 홀로 자전거를 타며 장거리 여행을 하려니 온갖 상념이 머리 한 가득이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생판 낯선 곳에서 지도에만 의지해 길을 찾아야하고 병에 걸리거나 갑작스런 사고로 다칠지도 모른다. 강도를 만나 몽땅 털릴 수도 있다. 또 허허벌판에서 자전거가 고장이라도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런저런 위험 때문에 집 떠나기가 두렵다면 안가면 그만이다. 대신 먼 곳은 영영 못 가보고 만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시도해볼만하지 않는가.
서양에 ‘Nothing Venture, Nothing Win’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가 될 것이다. 도전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 한다는 말은 동서양 구분 없는 인간사의 철칙이다.”
졸저 <아메리카 로드> 중 첫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한 장면

나이 50살이 되던 해, 공개채용 1기로 입사해 25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자초해 인생의 전환점(turning point)을 만들었다.

이 시기에 나의 삶을 바꾸어 줄 결정적 모멘텀이 필요했다. 극심한 고통의 경험이건 격렬한 환희의 순간이건 삶을 바꾸는 극적인 체험 말이다. 그땐, 정말 남은 인생을 남을 위한 것이 아닌, 나만의 삶을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너무나 강렬했다.

여행이 한사람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한 개인의 여행이 인류 역사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20세기 위대한 혁명가로 꼽는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는 원래 의사 지망생이었다. 의학도 신분으로 떠난 라틴 아메리카 여행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거창한 목적을 가지고 떠난 것은 아니었다. 고국 아르헨티나 너머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의 열정에 이끌려 중고 모터사이클(자전거였더라면!) 하나에 의지해 장장 8개월간의 긴 여행길에 올랐다. 길바닥에서 얻은 크고 작은 경험들이 깨달음을 촉발한 것이다. 여행을 마쳤을 땐 “나는 여행을 통해 나 자신을 보았다.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세상과 마주서는 법을 배웠다”며 의사도 성직자도 아닌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다.

나는 전환기에 첫 번째로 해낸, 일다운 일이란 자전거로 미국 대륙을 종단한 것이었다. 시애틀에서 샌디에이고까지 3천km. 딱 한 달 동안에 ‘폭파’했다. 계산상으로는 하루 100km씩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린 셈이었다. 그때의 모토는 ‘극기-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였다. 

나의 시도는 여러 사람들에게 마치 돈키호테가 풍차를 적으로 간주해 돌진하는 것처럼 황당한 짓으로 보였다. 냉소와 조롱도 많았다. “쉽지 않을 걸… 한번 혼나봐야 정신 차리지!” 이런 반응도 있었다. “갔다 와서 그 다음은 뭐 할 건데?” 

 
<돈키호테>에서 받은 영감으로
전환기에는 왕따 당할 용기가 필요했다. 용기란 유년시절에 꾸었던 소박한 꿈을 실현하는 것이 ‘인생길에서 남보다 뒤처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사실 그 용기는 젊은 날 읽었던 <돈키호테>에서 세르반테스의 통찰에서 얻은 영감이었다. 시골 아낙 둘시네아(Dulcinea)를 공주로, 풍차를 위협적인 적군으로 생각해 늙은 말 로시난테를 몰아 돌진했던 돈키호테. 그는 열정과 신념을 다해 무엇을 시도하든 자신을 내던졌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면 어떤 위험도 감수하며 도전했다. 깨지고 얻어터져 만신창이가 되어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싸워 이길 수 없는 적들과 싸움을 하고,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으려고 달려갔다. 이것은 오늘날 나에게도 그대로 유효하다. 

나의 꿈은 어디에 있는가. 여건과 환경을 핑계 삼아 반복되는 삶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저항하지 않았는가. 돈키호테가 나에게 던진 메시지는 ‘세상은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자의 것’이었다. 사전에도 없는 조어지만, 나의 신조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쳐야 도달한다)’ 과 맥이 닿아있다.

 
고전이 알려주는 삶의 지혜
“고전(古典)은 누구나 그 가치를 인정하는 책이다. 하지만 누구도 읽지 않는 책이다.” 이런 뼈있는 우스개도 있지만, 몸에 좋은 약은 써서 먹기 힘들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고전을 읽어 많은 것을 배웠고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들이 검증한 인생의 지혜가 담겨있기 때문에.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태어나서 가끔은 기쁘고 고통 받다가 늙고 병들어 죽어간다는 삶의 진리가 바뀔 리 없다. 고전은 이런 변치 않는 우리네 삶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더 나아가 고전은 인생의 ‘기출 문제집’이다. 이를 통해 출제원리를 파악한 학생은 시험이 다가와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전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은 오늘날 우리 삶에도 생생히 살아있는 것들이다.

2002년 노벨 연구소는 세계 50개국 100명의 유명 작가에게 “세계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소설 10편을 꼽아 달라”는 요청서를 보냈다. 결과는 <돈키호테>였다. 그 이전에도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전 세계를 다 뒤져봐도 <돈키호테>보다 숭고하고 박진감 넘치는 픽션은 없다”며 극찬했고,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스페인 문학의 걸작 <돈키호테>는 다른 모든 작품들을 조악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돈키호테, Don Quijote>의 원래 제목은 ‘만차 지방의 영특한 시골 귀족 돈 키호테(El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이다. 이 소설은 1605년에 초판이 나왔고 내용이 수정된 속편은 1615년에 재간행 되었다. 주인공 돈키호테가 기사(騎士) 이야기에 몰두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돕겠다고, 종자(從者) 산초와 더불어 기사 수업여행을 떠나면서 기지와 풍자를 곁들인 여러 가지 황당한 모험을 하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이다.
그래서 ‘돈키호테’라는 말은 소설의 주인공 돈키호테에 빗대어 현실을 무시한 공상적 이상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말하자면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또한 그런 인물의 유형을 돈키호테형이라고 부르며, 골똘히 생각하며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는 유형을 햄릿형이라고 불러 서로 대비시킨다.

작가 세르반테스는 주인공 돈키호테를 통해 당시의 부조리한 인간사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했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돈키호테의 묘비명을 이렇게 썼다. “미쳐서 살다가 깨어서 죽었다.”
작가는 꿈을 이루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진 돈키호테를 통해 자신의 꿈인 정의사회 실현을 추구했다. 또 ‘인간은 행위로 존재를 증명한다’며 꿈을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를 강조했다. 온갖 역경과 수모를 겪어도 굴하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려갔던 돈키호테의 도전정신. 설령 당장 이룰 수 없는 꿈일지라도, 설령 오늘 실패했을지라도 꿈을 꾸는 사람, 도전하는 사람에게 내일이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세르반테스, 그는 누구인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는 <돈키호테>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는 마드리드 인근에서 가난한 시골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규교육은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학문을 깨우쳐, 22살 때 이탈리아로 건너가 추기경의 수행원이 되었다. 1571년 오스만제국(지금의 터키)과 레판토(지금의 그리스) 해전이 터지자 세르반테스는 장교급 간부로 참전한다. 전투 중 왼팔을 잃어버려 ‘레판토의 외팔이’란 별명을 얻게 된다. 

귀국길에는 오스만 해적의 포로가 되어 알제리에서 5년간 고초를 겪었다. 이 기간 중 4번의 탈옥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처형위기까지 몰렸으나 동료를 감싸는 그의 따뜻한 성품에 해적까지도 감복해 목숨을 건졌다. 이런 일련의 모험과 사건은 후일 작가가 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고국으로 돌아와 먹고살기 위해 하급 세리(稅吏)로 일하다 누명을 쓰고 감옥 생활까지 하게 되는 파란 많은 삶을 살았다. 나라를 위해 전쟁에 나가 팔까지 잃으며  고생이 막심했지만 입에 풀칠하기 어려워 글을 쓰기 시작했다. 58세의 나이에 <돈키호테>를 세상에 내놓았다. 당시 기독교가 지배하는 엄격한 사회에 이런 해학과 풍자소설은 신선한 충격을 주며, 인기리에 팔려나갔다. 

국왕 펠리페 3세가 길거리에서 책을 보며 낄낄거리는 사람을 보고는 “저 자는 미친놈이 아니면 세르반테스의 책을 읽고 있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책은 많이 팔려나갔지만 출판사와 판권계약을 잘못해 가난은 여전했다. 그래도 나이를 잊고 창작의 집념을 불태우며 1615년 <속 돈키호테>를 출간했다. 이듬해인 1616년 4월23일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나이로 70세. 당시로는 엄청난 장수였다. 닥쳐온 많은 파란에 좌절하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했던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연의 일치로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도 같은 해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마침 이날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책의 날(정식 명칭은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이기도 하다

 

세르반테스 상.왼손에 들고있는 책은 돈키호테. 오른팔은 레판토해전에서 잃었다

 

그라나다(Granada)
안달루시아를 대표하는 그라나다 ― 이슬람 문화를 꽃피웠던 도시로 스페인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 원래는 집시들이 주로 살던 땅이었다. 이때는 사회적, 정치적 혼란기였다. 여기에 무함마드 1세가 나스리 왕국(Nasrid Dynasty)을 세웠다. 1248년부터 1492년까지 존속했는데, 이 시기는 무어인의 스페인통치 말기로 볼 수 있다.

도시이름은 석류(石榴)에서 유래되었다. 즉, 스페인어로 석류는 그라나다이다. 그러니 당연 석류가 도시의 상징이다. 거리에는 사이프러스(cypress)만큼이나 석류나무가 많고, 입간판에 석류그림은 물론, 선물용품점에 가도 석류를 모티브로 한 것들이 많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수류탄을 영어로 그리네이드(grenade)라고 하는데 스페인 어는 그라나다이다. 수류탄 구조가 금속 통 안에 철제 알갱이가 채워져 있는 것이 석류를 닮아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자동차 이름에 유독 스페인어가 많다. 과거 고급차의 대명사 그라나다를 비롯해 브리사(Brisa, 산들바람), 아반떼(Avante, 전진), 에스페로(Espero, 희망), 다마스(Damas, 숙녀들), 시에로(Ciero, 하늘), 마티즈(Matiz, 색조), 티뷰론(Tiburon, 상어), 디오스(Dios, 神들), 산타 페(Santa Fe, 성스러운 믿음) 등이다.
 

그라나다 가는 어느 한적한 안달루시아 지방 도로

 

 

‘참을 수없는 유혹’ 이베리아 반도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에는 통일 국가가 없었다. 부족 단위로 흩어져있던 아랍인들에게 유일신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 마호메트(Muhammad Abudal Kassim, 570~632)가 등장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적수공권으로 장사를 해 큰돈을 벌었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해 탄탄한 세력을 구축했다. 

세속적으로는 대단히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지상에서 누리는 삶이 전부가 아니다. 죽은 뒤에 천국에서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설파했다. 이것이 다수 하층민들에게 먹혀들어갔다. 하지만 기존 질서를 수호하려는 귀족들의 박해가 심해지자 마호메트는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 그곳을 포교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것을 헤지라(Hegira, 성천-聖遷)라고 하며 이슬람력의 원년이다. 교세는 급격히 팽창해, 680년에는 북아프리카의 모리타니아(현재의 모로코 일대)까지 무슬림 수중에 들어갔다. 이때 무어인(Moors, 스페인어로는 Moro)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북아프리카는 아라비아 반도만큼이나 혹독한 사막지대이다. 그런데 지척의 바다건너에 맑은 물이 흐르고 숲이 우거진 지상낙원 이베리아 반도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드디어 711년, 타리크 이븐 지하드(Tarik Ibn Ziyad) 장군은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을 주축으로 한 무슬림 1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히브랄타르(영어식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했다. 

서구에서는 ‘한손에 코란, 한손에는 칼’이란 표현을 한다. 이것의 출처는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십자군이 타락해 이슬람원정에서 패배했던 13세기 중엽 때이다. 이를 금과옥조로 서구는 이슬람교를 폭력의 종교로 호도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슬람 교리의 골자는 순종과 평화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유일신(알라)에게 절대 순종함으로써 몸과 마음이 진정한 평화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무슬림이란 이런 복종자, 즉 교인을 뜻한다. 그러므로 마호메트교나 무슬림교라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고 이슬람교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아무튼 여러 봉건 가톨릭 영주들로 갈라져있던 이베리아 반도는 이때부터 타리크의 통치를 받게 된다. 수도를 코르도바(Cordoba)로 정하고 11세기까지 이슬람 문명을 꽃피웠다. 이후 13세기까지는 세비야(Sevilla)가 바톤을 이어받았다. 다음으로 이슬람지배의 말기격인 15세기까지 그라나다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라나다의 영혼, 알람브라 궁전
알람브라 궁전(Palacio De Alhambra)은 아랍어로 “붉은 성”이란 뜻이다. 과거 궁전의 밤을 밝히던 횃불에 비친 성벽이 붉은 빛을 띠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 지방 특유의 황토빛 흙으로 만든 벽돌이 연한 홍조를 띈 것 같다. 

  궁전은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시에라네바다(‘눈 덮인 산맥’이란 뜻)를 배경으로 그라나다의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미국 네바다 주에도 같은 이름의 산맥이 있다. 미국 서부에 처음 도착한 스페인 군대가 만년설 덮인 거대한 산맥을 보고는 자국 것과 같은 이름을 붙였다.

궁전은 원래 그라나다를 수호할 요새로 지었다. 차츰 시간이 흐르며 ‘말기적 증상’으로 호화롭게 증, 개축을 거듭해 정교한 이슬람문화의 진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시인 프란시스코 데 이카자는 이 궁전을 “그라나다에서 장님이 되는 것보다 더 큰 형벌은 없다”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바로 앞 언덕에 ‘신성한 언덕(사크로 몬테, Sacro Monte)’이라 불리는 동굴들이 무수히 많은데 떠돌이 집시와 빈자의 집단 거주지였다. 이 극과 극의 대비는 왕조의 종말을 고하는 한 단면이었다.

타리크 이후 781년의 세월이 흐른 1492년 겨울,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인 보압딜 압둘라 무함마드(Boabdil Abdullah Muhammad)는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저항조차 해볼 수 없을 만큼 대세는 기울었다.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탈환 운동)를 부르짖으며 2년 전부터 인근 산타페(Santa Fe) 기지에 주둔하며 도시를 포위, 공격해온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드 왕에게 궁전의 키를 넘겨야했다. 금화 3만 양과 잔류하는 무어인의 재산, 종교, 생활양식을 보호받는 조건으로. 근 800년의 이슬람 지배가 종말을 고하고 가톨릭 스페인이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라나다에 살던 무어인들은 정든 땅과 토지를 빼앗기고 무참히 죽어갔다. 

선조 타리크가 왔던 그 길을 따라 1월의 차가운 눈보라 속에 시에라네바다를 넘으며 보압딜은 “스페인을 잃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알람브라궁전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원통하구나!” 하며 통한의 눈물을 쏟았다. 이를 본 그의 모친의 한마디 말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남자로서 용감히 싸워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가며 계집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는구나.” 대단한 여인이었던 모양이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라는 말이 이 경우에도 들어맞는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불운한 왕이시어! 죽을 용기가 없어 알람브라를 떠나는 못난 왕이시어! 남아있는 인생이 무어 그리 대단할진대, 그까짓 왕관 하나 벗어던지지 못하고, 그라나다를 눈물로 떠나가느뇨!” 이런 사연으로 그가 울고 넘던 언덕을 후세 사람들이 ‘무어인의 탄식(Suspira Del Moor) 고개’라고 이름 지었다.

예술을 사랑하고 눈물이 많았던 보압딜은 모로코에 가서도 패자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며 꿈에도 알람브라를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63세로 페즈(Pez)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초라한 궁전은 알람브라를 닮았다고 전해진다.

 

알람브라궁전의 대표 정원. 12마리 사자가 받치고 있는 원형분수. 사자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데 이는 이슬람교에서 생명의 근원을 의미한다
사자의 중정. 왕의 사적 공간으로 왕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알람브라를 대표하는 명소 아라야네스 중정
자매의 방. 둥근 천장을 장식하는 화려한 모카라베(mocarabe, 종유석 모양의 장식)
아줄레주(아랍식 타일) 위에 정교하게 새긴 문양. 아랍글씨는 코란의 주요 구절이다

 

문학과 음악의 힘
아랍 건축물의 특징은 외관은 투박하고 견고한 요새 같아 별로 볼품이 없다. 알람브라 궁전도 내부로 들어가 문을 하나하나 통과할 때마다 빼어난 기하학적 문양과 무데하르 건축술, 도처에 물이 흐르는 정원, 화려함에 눈이 어지럽다. 

슬픈 역사가 깃든 이곳을 오늘날 세계적 명소 반열에 오르게 알린 것은 인간의 감성에 호소한 문학과 음악이 크게 기여했다. 아랍인들이 스페인을 떠나고 수백년 간 이곳은 집 없는 부랑아나 집시들의 소굴로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러던 중 1826년, 스페인 주재 미국공사로 부임해온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워싱턴 어빙(Washing Irving, 1783~1859)으로 미국 근대 단편소설의 아버지라 불린다. 

고교시절 그의 대표작 <스케치북, The Sketch Book>에 실린 ‘립 반 윙클(Rip Van Winkle)’의 이야기가 영어 교과서에 소개되었다. 너무 재미있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잔소리꾼 아내를 피해 깊은 산에 나무하러갔다간 립 반 윙클은 낯선 사람에게서 술을 한잔 얻어 마시고 한 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니, 옆에 도끼는 녹슬고 자루는 썩어 있었던 것. 그 사이 수십년이 흘렀던 것이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시간 개념과 맥이 통해 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할 때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어빙은 미국문학사에 제법 비중이 큰 인물이다. 그는 여행을 좋아해 유럽 여러 나라를 두루 섭렵했다. 그중 스페인에 ‘필’이 꽂혔다. 특히 과거 무어인들의 문화에 심취했던 그는 수개월 안달루시아 지방을 여행하고는 <알람브라 이야기, The tales of Alhambra>란 수필집을 썼다. 달빛에 비친 알람브라 궁전을 어빙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한 여름 밤의 안달루시아 날씨는 너무나도 영묘(靈妙)하다. 
마치 우리가 더욱더 순수한 대기 속에 들어가 있는 것만 같다. 거기에는 영혼의 고요함과 정신을 고양시키는 부력이 있으며 단순한 존재조차 기쁨으로 만들어주는 탄력이 있다. 
알람브라를 비추는 달빛에는 마법 같은 무언가가 있다. 
달빛 속에서 시간의 모든 균열과 틈, 모든 부패의 기미와 풍화의 얼룩은 사라지고 대리석은 태초의 흰 빛을 되찾으며 길게 줄지어선 기둥들은 밝게 빛나고 부드러운 광채는 홀들을 밝히며 이윽고 궁전 전체가 아라비아의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마법의 궁전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궁전이 세상에 알려지자 스페인 당국은 국가기념물로 지정하고 대대적 개보수 작업을 시작했다. 또 그의 공로를 인정해 ‘알람브라의 아들(Hijo De Alhambra)’이라고 극찬하며 궁전 내 ‘어빙의 방’을 만들어 감사를 표하고 있다. 이곳 또한 궁전 내 주요 볼거리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다른 한사람은 전설의 연주가 타레가(Francisco Tarrega, 1852~1909)이다. 그는 기타가 독립된 연주악기로 자리 잡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바흐와 베토벤 곡을 편곡해 많은 갈채를 받아 ‘클래식 기타’란 장르를 개척한 장본인이다.

타레가는 제자인 미모의 콘차를 사랑하게 되는데 불행히도 그녀는 유부녀였다. 이루어질 수 없기에 그녀를 향한 타레가의 연정은 더 뜨거워졌다. 1896년 어느 날 콘차와 함께 여행을 떠나 알람브라를 방문하게 된다. 석양에 반사되어 궁전이 붉게 물들 때 타레가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실의에 젖어 달빛 속에 즐거웠던 그날을 회상하며 작곡한 연가가 바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Recuerdos De La Alhambra>이다. 

이루지 못 할 사랑은 슬픈 역사를 간직한 궁전에 용해(溶解)되어 스페인 낭만주의 ‘음악의 꽃’은 이렇게 탄생했다. 나 역시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이런 간장을 녹이는 선율을 누가 만들어 냈을까!”하며 감동받은 기억이 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타레가의 고백이 받아들여졌다면 어땠을까.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은 세상에 없을 것이고…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살다가 범부로 죽어갔을 것이다. 
아,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허사(虛辭)가 아니로구나!

 
사라진 내 마음의 보석
나는 전세계를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수없이 많은 다양한 길을 달렸다. 강과 바다를 따라 이어진 길을 달리면 모든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된 것 같고, 거칠고 험한 길을 달리면 모험가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전부터 꼭 한번 달려보고 싶었던 길은 바로 독일의 ‘로맨틱 가도’이다. 빙엔(Bingen)에서 코블렌츠(Koblentz)까지 70km 구간은 라인 강변 코스 중 백미, ‘로맨틱 라인강’이라 불리는데 그곳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유명한 ‘바위 언덕’이 있다. 

~ 옛날부터 전해오는 전설, 
그 이야기에 가슴이 젖네, 
저무는 황혼 바람은 차고, 
흐르는 라인강은 고요해 ~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불러보았던 노래― 로렐라이. 라인강의 전래설화를 하이네가 시로 만들고 여기에 곡을 붙인 것이 만인의 애창곡이 되었다. 애인에게 버림받는 로렐라이가 라인강에 몸을 던져 반인반조(伴人半鳥)의 요정으로 변해 달 밝은 밤이면 투신한 바위 언덕에 앉아 노래를 불러 지나가는 선원들의 혼을 빼, 배와 함께 수장시켰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

부푼 가슴으로 한참을 달려 마침내 로렐라이 언덕에 도착했다.
“아니~이게 뭐야…”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나왔다. 135m 높이의 자그마한 암산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이걸 보려고 여기까지 왔나!” 싶을 정도로 후회가 밀려왔다. 동시에 “차라리 오지 말고 마음속에 두고 그릴 것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의 상실감이 밀려왔다. 

문득 로마의 ‘스페인 광장’에 갔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보잘 것 없는 계단 몇 개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먹은 장소라고 해서 세계적 관광명소가 되었다. 트레비 분수나 ‘진실의 입’도 마찬가지다. 브뤼셀에서 보았던 60cm 남짓한 ‘오줌 누는 꼬마상’은 정말 실망스러웠다. 코펜하겐에서 보았던 ‘인어 여인상’은 실망을 넘어 분노마저 일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탈바꿈한 것은 탄탄한 문화적 배경에 고운 옷을 입혔기 때문이다. 그렇다! 문화적 아이콘으로 무장한 스토리텔링의 흡인력을 절감했다.

 

미국 외교관겸 작가 워싱턴 어빙이 여기서 집필했다
보압딜이 시에라네바다 산의 눈물의 언덕을 넘으며 회한에 찬 얼굴로 알람브라궁전을 되돌아보고 있다
나스르 왕조의 최후. 보압딜이 백마탄 이사벨 여왕에게 알람브라 궁전의 키를 넘겨주고 있다
이사벨 여왕. 야심찬 그녀는 가톨릭 결속을 위해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와 정략결혼을 결행했다
그라나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류 형태의 생활용품

 

 

‘스토리 텔링’의 위력
나는 알람브라 궁전의 가치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훌륭한 아랍의 건축물이고 내부의 정교한 문양과 물이 흐르는 정원은 독특하다. 오래 보존해야할 인류의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의 솔직한 감상평은 ‘그저 괜찮았다.’ 정도였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이 인간의 상정이다. 그동안 세계를 돌며 멋진 건축물에 ‘면역’된 탓도 있을 것이고, 서울에서 스터디를 많이 하고 온 것도 한 이유가 될지 모른다. 

이것을 보기위해 전세계에서 연간 수백만명이 찾아온다. 궁전측은 하루 8260명으로 입장을 제한한다. 일단의 그룹을 구성하면 30분 단위로 입장시킨다. 성수기에는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권의 현장구매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 생각으로는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관광지일 것이다.
스페인 사정에 정통한 헤밍웨이도 “스페인에서 딱 한곳만 갈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알람브라궁을 택하겠다.”라고 했으니. 

‘펜은 어떤 힘보다 강하다’는 서양 격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문학과 음악이 어우러져 시너지까지 ‘홍보’에 힘을 보탠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바로 이것이다.
사실 잘 찾아보면 우리나라에도 곳곳에 전설과 신화가 널려 있다. 이중에서 문화적 가치와 예술적 심미성이 있는 것을 골라 환상의 콘텐츠로 발굴한다면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송이송이 꽃처럼 흩날리는 3천 궁녀가 몸을 던진 낙화암 스토리는 로렐라이 언덕보다 훨씬 더 중량감이 있다. 에밀레종의 전설이나 아리랑 고개, 소양강 처녀 등의 소재도 훌륭하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독특한 콘텐츠를 개발해 ‘스토리텔링’이라는 고운 옷을 입힌다면 로맨틱 가도의 로렐라이 언덕이나 그라나다의 알람브라처럼 무한 경쟁시대에 필살의 무기가 될 것이다.
나 역시 남들이 가지 않은 ‘전업 자전거여행가’의 길을 택했고, 나만의 차별화된 콘텐츠(차백성표 여행 이야기)를 발굴하기 위해 오늘도 페달을 돌리고
있다.  
     
협찬 : 벨로스타, 참좋은여행, 포메라스포츠, IL인터내셔날
 

알람브라궁전에서 제일 높은 전망대 알카사바에 올라. 그라나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나무 싸이프러스가 널려 있다
일년내내 붐비는 알람브라궁전 정문
길은 역시 동호인에게 물으면 친절하게 알려준다. 아란후에스에서 만난 미께레씨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