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의 베일 뒤에 숨은 비범한 산세

평범의 베일 뒤에 숨은 비범한 산세
음성 가섭산~보덕산 일주

어디에 있는지, 무슨 특산물이 있는지 감을 잡기 어려운 지역 중 하나가 음성이다. 흔치 않게 음(陰) 자를 지명에 넣고 있고 역시 특별한 이름의 가섭산(710m)이 날렵하게 솟아 있다. 읍내 남쪽의 보덕산(509m)은 언젠가 큰 인물이 난다고 ‘큰산’이라고도 부르는데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생가가 풍수상 좋은 자리에 있어서 주민들은 전설을 뒷받침한다고 믿는다. 조용한 은둔의 고장, 그 곳을 대표하는 산들의 진면목은 과연 어떨까

 

가섭산 정상의 장쾌한 동쪽 조망. 겹주름으로 흘러내리는 산줄기 저 아래로 충주 주덕읍 일원의 평야가 질펀하고, 멀리는 제천 일원의 준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음성? 음… 경기도인가, 충청도인가? 충청도인 것 같은데 그럼 충남인가 충북인가….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현실이기도 한 것이 유독 존재감이 없는 지방이 있다. 물론 주관적인 생각일 수도 있으나 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그런 곳이 있는데 내게 특히 그런 곳 중의 하나가 음성이다. 

몇 달 전 한겨울, 문득 오지 열차가 몹시 타고 싶어 대전~제천 간 충북선 무궁화에 오른 적이 있다. 그때 음성역을 지나면서 ‘야 내가 전국을 그렇게 많이 돌아다녔는데 여긴 생전 처음이구나!’ 싶었다. 처음 보는 풍경, 처음 보는 산, 처음 보는 지명이었다. ‘음성이 여기 있었네!’ 하는 재발견이랄까. 어찌 보면 여행을 취미이자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게 미안한 마음 반, 호기심 반으로 음성의 산을 올라보기로 했다. 뜻밖에 읍내 주변에만도 가섭산(710m)이 헌칠하고 ‘큰산’으로 불리는 보덕산(509m)도 남쪽으로 둔중하다. 알고 보니 보덕산 아래에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생가가 있었다.

 

산 아래에서 바라본 가섭산. 정상에는 통신탑이 도열해 있다. 그만큼 주변에 걸릴 것 없이 돌출한 지형이란 뜻이기도 하다

 

하필 음성(陰城)일까
양지마을, 음지마을 하듯이 마을의 방향을 두고 햇볕이 잘 드는 배산임수의 남향은 양지마을, 반대는 음지마을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읍 단위의 큰 마을에 대개는 꺼려하는 ‘음(陰)’ 자를 지명에 넣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음성읍이 북향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옛기록을 보면 고구려 때는 잉홀(仍忽), 잉근내(仍斤內)라 하다가 전국의 지명을 한자식으로 통일한 신라 경덕왕 때 음성으로 고쳤다고 되어 있다. 조선조에는 설성(雪城)으로 불리기도 했다지만 음성이든 설성이든 유래는 나와 있지 않다. 현지의 지형을 보고 느낀 것은, 내륙의 산간지대에 협소하게 형성된 분지여서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고 눈도 오랫동안 남아 있어 음(陰)이나 설(雪) 같은 지명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실제로 답사 당일도 서울보다 훨씬 남쪽인데도 기온은 더 낮았다. 

코스는 한번에 가섭산과 보덕산 두 산을 다 오르는 것이다. 다행히 두 산 모두 정상까지 라이딩이 가능한 길이 나 있다. 음성 종합운동장에서 출발해 가섭산을 올랐다가 보덕산~반기문 생가를 거쳐 돌아오는 여정이다. 거리는 38km 정도로 짧은 편이다. 읍내가 이미 해발 150m로 높아서 실제 등반고도는 두 산을 합쳐야 900m 남짓이다.   
 
 
가섭산에 올라 염화미소를
읍내에서 북동쪽으로 바라보이는 가섭산은 산체가 매끈하고 고도감도 상당하다. 남북으로 긴 배 형태의 산세는 날씬한 미감을 준다. 전국의 많은 산을 등산과 라이딩으로 올랐지만 가섭산은 처음 듣는 이름이다. 이런 준봉이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특별할 것 없이 내륙 산간지대에 조용히 묻혀 있는 음성의 존재감처럼 가섭산도 숨겨진 듯 하지만 고고하게 돌출한 산머리는 비범하다.

가섭산(迦葉山)도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가섭은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우두머리로 존경받은 인물이다. 석가모니가 설법 중 아무 말 없이 연꽃을 들어보이자 홀로 빙그레 웃으며 화답해 서로 뜻이 통했다는 염화미소(拈花微笑)의 주인공이다. 우리나라 산 이름은 상당수가 불교와 관련 있지만 10대 제자가 산 이름으로 차용된 경우는 이곳 말고 들어본 적이 없다. 그 흔한 문수봉, 보현봉, 비로봉 등은 실존인물이 아니라 상상의 법신불(法身佛)에서 따온 이름이다. 

석가모니는 생전에 “내가 죽은 뒤 가섭이 모든 수행자의 의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가섭은 석가모니 열반 후 500명의 제자(아라한)를 모아 스스로 좌장이 되어 석가모니가 설법한 내용을 모아 경전을 편찬했고 이후에도 교단을 이끌었다. ‘염화미소’로 인해 그는 선가(禪家)의 조종으로도 인정받는데 이 산에 주석한 어느 선승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절 마당에서 곧장 일망무제의 조망을 자랑하는 가섭사

 

가섭산의 놀라운 조망 
이제 가섭산에 올라 염화미소를 지어볼거나. 가섭산 정상 바로 옆에는 통신시설이 모여 있어 아스팔트로 포장된 관리도로가 잘 나 있다. 폭은 좁고 구불거리지만 여유롭게 고도를 높여간다. 정상 턱밑의 해발 630m 지점에 탁 트이고 밝은 기운이 감도는 가섭사가 앉아 있다. 

속이 시원해지는 너른 마당에 서면 겹겹이 너울거리는 능선의 파노라마가 끝간데 없이 펼쳐진다. 겨우 630m 높이에도 눈앞의 산이 모두 발아래로 보이는데 안성, 진천, 증평, 천안 일원에는 이보다 더 높은 산이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마당이 탁 트인 절을 나는 특히 좋아하지만 전국을 통틀어 이런 절은 그리 많지 않다. 대찰은 아늑한 골짜기 안에 터잡기 마련이고, 작은 암자가 그나마 산중턱 높이 간혹 이렇게 마당이 트여 있다. 마당 전망이 좋기로 유명한 영주 부석사보다 경관의 스케일은 더 크다.         
      
가섭산 정상에는 옛 봉수대와 측량용 수준점만 남아 있다. 지금은 작은 돌무더기로 표시해 놓았지만 봉수대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주위에서 두드러지는 입지를 말해준다. 옆에는 데크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동쪽 방면의 경치가 놀랍다. 충청 내륙의 중심에 주위보다 높게 솟아서 제천~충주~괴산 방면의 산악지대 조망이 발군이다. 주덕읍에서 요도천을 따라 충주로 이어지는 내륙평야가 질펀하고 아득히 최후의 스카이라인은 제천의 백운산(1087m)에서 남쪽으로는 월악산(1097m)까지 거대한 산군이 맥동치는 장쾌한 경관이다. 처음에는 감탄이 일다가 이윽고 입가에는 나도 모르게 득의의 미소가 번진다. 이런 장관을 마주서기 위해 여기까지 오른 것 아닌가. 

가섭산 정상에는 수준점과 낡은 깃발만이 나부낀다. 산 아래로 음성읍내가 보인다

 

우연의 풍수지리
가섭산을 내려와 읍내를 거쳐 이번에는 보덕산을 오른다. 북쪽 하당저수지에서 시작되는 임도는 정상 부근을 거쳐 서쪽의 덕정리로 내려선다. 

북사면이라 고도가 조금 높아지니 곳곳에 빙판이다. 이 정도 빙판이면 3월말은 되어야 다 녹을 것 같다. 하지만 길 자체는 부드럽고 숲은 아늑하다. 가섭산이 급경사로 삐쭉 서 있다면 보덕산은 덤덤하고 널찍하게 퍼질러 앉았다.     

어렵지 않게 오른 정상에는 팔각정이 맞아준다. 산이 높지 않고 산간지대에 갇혀 있어 원경은 대단치 않으나 근경은 볼 만하다. 동쪽 바로 아래로 반기문 생가가 있고 증평~충주로 이어지는 36번 국도가 직선으로 풍경을 양분한다. 

정상에서 반기문 생가를 보면 “참, 풍수적으로 기막힌 자리에 있네!”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간혹 역사적 인물이나 유명인의 생가, 조상의 묘를 가보면 전통적인 풍수지리 형국론(形局論)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입지여서 놀라게 된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소위 말하는 좌청룡우백호의 산줄기와 마주보이는 편안한 안산(案山, 앞에 있는 책상 같다고 해서 이렇게 부름. 서울의 안산도 이 형국론에 따른 것임), 모아서 흘러내리는 물줄기 등등의 기본적인 입지만을 봐도 그렇다. 대표적인 곳으로 흥선대원군이 선친의 묘를 옮겨 아들(고종)을 왕으로 만들었다는 예산 남연군묘와 구미의 박정희 전대통령 생가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보덕산 정상.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반기문 생가가 있다. 공단 뒤편의 낮고 길쭉한 능선이 안산에 해당하는 오대산

 

정말 풍수지리의 효과가 있는 걸까. 산줄기를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기가 흘러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지금 눈앞에 보이는 반기문 생가도 그렇다. 보덕산의 줄기가 출렁이며 흘러내린 끝자락에 생가가 포근히 안겨 있고, 좌우로는 좌청룡우백호에 해당하는 능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며, 맞은편에는 오대산(397m)이 넉넉한 안산으로 앞을 가려준다.

문외한이 봐도 정말 완벽한 형국이지만 나는 이런 지형 덕분에 대단한 인물이 났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렇지 않은 곳에서 태어난 위인들도 많기 때문이다. 풍수지리의 전통이 없는 외국은 또 어떻고. 다만, 풍수에 민감한 명문가에서 일부러 이런 형국을 찾아서 집을 짓고 묘를 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능하고 출세한 사람이 나올 확률이 높았을 뿐이다.  유능한 인물이 성공할 가능성이 큰 것은 당연하다. 재능이나 지성, 재력이 있는 집안에서 유능한 인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것도 자연스럽다. 

산을 내려가 보니 반기문 생가 일대는 거창한 관광지로 꾸며져 있다. 평일이라 찾는 이 없어 휑한 가운데 보덕산(큰산)의 기운에 대한 설명도 빠지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웬만하면 고층 아파트에 살고 조상은 납골당에 분말로 모시고 있으니 현대의 풍수 지리는 ‘부동산 재테크’가 정답 아닌가.  
 

가섭산 정상에 엉성하게 복원해 놓은 봉수대. 아궁이만도 못한 꼴이라 없느니만 못하다

 

반기문 생가 바로 뒤로 보덕산 줄기가 요동치고 있다. 정상의 팔각정이 보인다

 

여정
음성읍내에서 출발해 가섭산과 보덕산을 순서에 관계없이 다녀오면 된다. 거리가 멀지 않고 고도차도 낮아서 두 산을 한데 돌아보기에도 큰 무리가 없다. 다만 가섭산과 보덕산을 오갈 때 36번 국도를 지나야 하는데 차량이 다소 많고 주행 속도도 빨라 주의가 필요하다. 가섭산은 읍내를 북쪽으로 벗어나 ‘KBS 중계소’ 방면으로 우회전하면 되고, 보덕산은 36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읍내를 벗어나 하당1리 버스정류장 직후에 하당초등학교 방면으로 우회전하면 된다. 하당저수지 끝부분에 왼쪽으로 ‘반기문 비채길’ 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

음성 가섭산 ~ 보덕산 일주 3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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