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도 통일됐는데 남북은?

삼국도 통일됐는데 남북은?
진천에서 태어난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의 유산

우리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전국시대는 삼국이 쟁패하던 5~7세기다. 고구려, 백제, 신라 여기에 가야까지 한반도에 거점을 둔 고대국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를 벌였고, 중국과 왜는 호시탐탐 침략을 엿보았다. 삼국중 최약체였던 신라는 가야를 병합하고 일취월장,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결국은 통일을 이뤄낸다. 그 주역은 태종무열왕(김춘추), 문무왕 그리고 김유신 세 사람이다. 그중 김유신은 평생 전장을 누비며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그는 뜻밖에 경주 출생이 아니고 충북 진천 태생이다. 왜 그는 진천에서 태어나고 자랐을까

 

전국시대(戰國時代)는 말 그대로 전쟁이 횡행하던 전란의 시대로, 인간의 힘에 의해 대규모 인명이 한순간에 몰살하거나 한 나라가 하루아침에 멸망하는, 청천벽력 같은 난세였다.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혼란기로만 알기 쉽지만 생명과 재산이 걸린 만큼 개인과 나라 모두 필사적으로 힘을 모으고, 국력과 전력 확보에 전념한 효율극대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결국 가장 강하고 효율적인 세력이 전란을 평정하면서 전국시대는 끝이 난다. 무예와 체력, 실무를 숭상하는 상무(尙武) 정신이 충일하고 사회의 기강이 칼날 같던 시대이기도 해서 국민의 정신무장이 자연스럽게 되는, 자발적 국민 계몽의 시기이기도 했다.

죽어서 대왕이 된, 전무후무한 신하
중국의 전국시대는 7웅이라는 7개의 강국이 쟁패하다 진시황제가 통일하기까지 기원전 5~3세기이고, 일본의 전국시대는 군웅이 할거하던 15~16세기였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도 전국시대가 있었던가. 공식적으로 시대명칭이 부여되지는 않았으나 우리의 전국시대는 역시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서로 쟁패하던 5~7세기가 단연 두드러진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 가야(6세기 중엽 멸망)까지 업치락뒤치락 전쟁으로 지새우던 시대로 삼국통일전쟁기라고도 한다. 
그 시기 각국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이 없었고 생존을 위해 동맹과 배신을 여반장으로 하며, 중국과 왜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전국시대의 결과는 아이러니였다. 한때 고구려의 속국이기도 했던 최약체 신라가 가야를 병합하고 일취월장해 당시의 세계제국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삼국을 통일해낸 것이다.
신라가 가야를 병합한 것은 실질적으로 삼국통일을 이루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는데, 가야 출신 인물들이 통일전쟁기에 대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김유신(595~673)이다. 그는 태종무열왕(김춘추), 문무왕(김법민)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세 원훈으로 꼽힌다. 김춘추와 김법민은 당시 신라의 왕이었고,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며 통일의 초석을 다져나간 것은 군권을 손에 쥔 김유신이었다. 
그런데 김유신은 경주 사람이 아니고 뜻밖에도 충북 진천 사람이다. 진천에서 태어나고 자라 나중에 화랑의 대표인 풍월주가 되고 평생 50여회의 전투에서 전승을 거두는 전설의 무장이 된다. 이번 진천행은 그를 만나 통일의 희망과 비전을 얻기 위해서다.
      
              
망국의 왕자 
김유신과 신라의 삼국통일은 최근에 와서 폄하되는 분위기가 없지 않다. 가장 강대한 고구려에 의해 통일이 되었어야 만주까지 우리 땅으로 차지하는데 신라가 통일하면서 국토가 한반도로 국한되었다는 논리다. 또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을 친 배신자라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를 현대의 관점에서 재단하는, 터무니없는 얘기다.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라면 모를까,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해 가공할 폭정을 펴고 당나라와 무리한 결전을 벌여 국력을 소모한 연개소문과, 그의 사후 벌어진 자식들 간의 내분으로 고구려는 자멸했다고 봐야 한다. 
백제는 초기에 현명하던 의자왕이 자만과 방탕으로 충신을 멀리하면서 국력이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고구려와 백제도 당에 사대하며 동맹을 원했지만 그 치열한 외교전에서 신라가 승리한 것뿐이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비로소 하나의 언어와 제도를 갖춘 한민족이 탄생한다. 지금 전해오는 성씨를 봐도 대부분의 현대 한국인은 신라 계통이다.  
삼국통일을 이뤄낸 주역이라는 김유신은 그러나, 엄격히 말해 신라인이 아니다. 532년 신라에 병합된 가야연맹의 맹주, 금관가야의 왕손이기 때문이다. 금관가야의 마지막왕 구형왕의 증손자가 김유신이다. 구형왕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은 적극적으로 신라에 협력해 진흥왕의 한강유역 점령에 앞장서 이 지역에 새로 설치한 신주(新州)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 성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해오자 이를 격퇴하고 성왕을 전사시키는 전공을 세워 신라 최고의 무장으로 추앙받았다. 그의 아들 김서현(김유신의 부)도 무장으로 입신해 지금의 진천인 만노군(萬弩郡)의 태수와 대량주(합천) 도독을 지냈다. 김유신이 진천에서 태어난 것은 아버지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열전의 특별대우  
1145년 김부식(1075~1151)이 펴낸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에 관해서는 현존하는 최고의 정사(正史)다(<삼국유사>는 설화와 전설을 모은 야사로 본다). 유학자인 김부식이 사대주의 관점에서 서술해 주체성이 부족하고 기사가 간략하며, 신라를 위주로 하고 있어 고구려와 백제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간소한 문제점 등이 지적되지만 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 한 정사로서 <삼국사기>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 
후세의 오해와 달리 김부식은 오히려 매우 강한 자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사기>를 완성하고 왕에게 올린 표문을 보면, “사대부들이 우리 역사를 잘 몰라 유감입니다. 중국의 사서는 우리 역사를 간략히 전하고 있고, 삼국의 고기(古記)는 졸렬해서 왕, 신하, 백성의 잘잘못을 따져 후세의 규범이 되지 못합니다”하고 편찬 동기를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는 기원전 1세기에 쓰여진 중국 역사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형식을 본따, 각국의 사건을 시대순으로 기록한 본기(本紀)와 삼국의 문화와 지리를 다룬 지(志), 왕들의 연대기인 연표(年表), 위인들의 전기인 열전(列傳)으로 구성된다. 
다채로운 인물들의 일대기를 다룬 열전에는 총 50명의 위인이 등장하는데, 그 첫 번째 등장인물이 김유신이다. 놀라운 것은, 열전의 전체 페이지 중 김유신 한사람에 배당된 것이 1/4이나 된다는 점이다. 김유신 이후 을지문덕부터 견훤까지 49명이 나머지 3/4 분량을 채우고 있으니 <삼국사기>가     얼마나 김유신을 특별대우 하는지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삼국사기>는 김유신을 삼국시대 최고의 인물로 꼽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읽으면 왜 김유신이 삼국시대 최고의 인물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단순히 삼국통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것뿐 아니라 끝내는 신라까지 욕심을 낸 당을 몰아내자고 주창한 점, 평생에 걸쳐 전장을 누비며 50여회의 전투를 이끌어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고 늘 앞장서온 점, 왕을 능가할 수 있는 병권을 쥐고도 그가 모신 5명의 왕에게서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끝까지 충성으로 섬긴 점, 그리고 전쟁이 끊이지 않던 그 처절한 전국시대에도 영명하게 살아남아 79세로 천수를 누린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사후 150년 뒤에 흥덕왕은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한다. 공이 있는 신하가 죽으면 작호를 조금 높여 봉하는 것이 관례이긴 해도 ‘왕은 하늘이 낸다’고 믿던 전제왕조 시절 아무리 공이 크다 해도 신하에 불과했던 김유신에게 ‘대왕’을 추봉한 것은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경주시내를 내려다보는 좋은 위치에 자리한 김유신의 무덤도 웬만한 왕릉보다 규모와 장식이 뛰어나다. 무덤 앞에는 왕릉에만 붙이는 ‘능(陵)’과 신하의 무덤을 뜻하는 ‘묘(墓)’라는 비석이 마주 서 있다. 무덤만 보아도 신라인들이 김유신을 얼마나 각별하게 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
※ ‌이하의 내용은 필자의 저작 <산성삼국기> 중 관련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소설적 가공이 일부 포함되어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역사설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역사의 가정과 아쉬움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을 쳤고, 통일 후에는 고구려의 북방 영토를 잃은 것을 들어 신라의 삼국통일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는 고구려 정통론을 앞세워야 하는 북한식 논리이고, 일제 때 신채호가 민족자주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민족의 개념이 없었다(근대적 민족주의는 19세기 들어 유럽에서 비롯되었고 여기서 일본 학자가 ‘민족’이란 말을 번역해 냈다). 고구려와 백제는 동명성왕에서 유래해 시조가 같았으나 나중에는 원수처럼 되었고, 신라의 지배세력은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 계통으로, 만주에서 기원한 부여(夫餘)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 백제와는 뿌리가 달랐다. 세 나라가 당시 ‘우리는 같은 민족이니 잘 지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졌거나 언젠가는 통일해야 한다는 열망을 공유했다는 추론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라뿐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도 당을 비롯한 중국에 조공하며 상대국을 치려고 했고, 결국 신라가 외교전에서 승리했을 뿐이다. 
‘고구려가 통일을 주도했으면’ 하는 것은 부질없는 역사의 가정이다. 고구려는 당시로는 세계최강의 제국인 수, 당과 장기간에 걸쳐 전쟁을 치르며 국력이 고갈된데다 최후에는 연개소문의 폭정과 그 아들들의 내분으로 스스로 무너졌다고 봐야 한다. 신라는 당나라를 이용했으되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당은 신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각각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두고 직할통치를 획책했고, 신라마저 칠 기미를 보인다. 이에 신라는 반격에 나서 당을 상대로 전쟁을 치러 결국에는 한반도에서 쫓아내고 통일국가를 완성한다. 당에게 고구려와 백제 땅을 모두 내주었다면 모르지만 그 거대한 당을 작은 신라가 자력으로 물리친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나라는 작지만 당 같은 대국도 결코 제압할 수 없었던, 신라가 가졌던 상무정신의 총화를 엿볼 수 있다. 이때의 신라는 마치 현대의 이스라엘을 보는 듯하다. 
결국 당은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겨 한반도에서 철수했고, 이후 요동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들어서면서 당은 다시 요동에서 물러나고 만다. 결국 삼국통일전쟁 후에도 당이 실제로 얻은 땅은 요동의 일부밖에 없다. 
아쉬움이 있다면 통일신라와 발해가 통일하지 못한 점인데,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을 자처했지만 숙신, 말갈, 예맥 등 고구려의 변방세력들이 주류를 이뤄 남하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신라와의 친연성도 적었다. 여기에 당이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함) 정책으로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의 북진을 허용하면서 발해와 신라는 끝내 적대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면서도 실제는 전쟁도, 문화적인 교류도 없이 두 나라는 철저히 문을 닫아걸고 완전히 남처럼 자기의 길을 간다. 발해는 신라와는 국교를 트지 않았지만 일본과는 교류가 많았다. 926년, 건국 후 227년 만에 발해는 거란에 멸망당하면서 우리 역사에서는 다소 어정쩡한 소외지대로 남고 말았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한데 아우른 통일신라는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맥이 이어져 지금의 한민족이 가진 기본적인 정체성을 만든 시원이 되었다. 삼국통일을 통해서 한민족이란 민족의식이 점점 체화되어 간 것이다. 그래서 삼국통일의 진정한 의미는 ‘민족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 왕자가 신라에 적극 협력한 이유
금관가야 제6대 좌지왕(坐知王, 재위 407~420)은 매우 호색하는 성품이어서 각국의 여자를 아내로 맞다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자의반타의반으로 신라에 청혼하게 된다. 이때 신라에서 보내준 여인이 도령(道寧) 아찬의 딸 복수(福壽)로 신라 왕실과 혈연관계가 있는 진골 출신이었다. 복수가 아들 취희(吹希)를 낳자 좌지왕은 매우 기뻐하며 복수를 정비로 삼았다. 
이후 취희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고, 복수는 태후로 섭정하며 가야 조정에 신라인들을 많이 등용한다. 가야인들도 신라에 많이 들어가 살면서 두 나라는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사실상 국경 개념이 허물어져 금관가야는 신라의 속국처럼 된 것이다. 가야왕이 정사를 잘 돌보지 않으면 신라가 사신을 보내 책망하기도 했으니 가야의 자주성은 갈수록 희미해졌다.  
이후 취희왕도 신라의 진사(進思) 각간의 딸 인덕(仁德)을 왕비로 맞으면서 금관가야의 왕은 신라의 귀족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처럼 되었다. 마지막 구형왕도 신라귀족 계봉(桂凰)의 딸 계화(桂花)와 결혼해 무력(武力)과 무득(武得)을 낳았다. 신라에 복속된 후 무력도 진흥왕의 딸인 아양공주(阿陽公主)를 아내로 맞아 서현(舒玄)을 낳았고, 서현은 진흥왕의 손녀이자 만호태후(萬呼太后)의 딸 만명(萬明)과 결혼해서 김유신을 낳는다. 실로 김유신은 가야출신이면서 진골에 대원(大元, 신라의 왕비를 배출한 모계 가문)을 모두 아우르는 신라의 정통귀족이기도 했던 것이다. 연원을 따지자면 7대 선조인 좌지왕부터 줄곧 신라의 여자를 아내로 맞았으니 김유신의 피는 가야보다 신라쪽이 더 진했다. 
금관가야 왕실은 200년 이상 신라의 귀족 여성을 아내로 맞으면서 자연히 신라화 되었고, 이 때문에 구형왕은 별 거리낌 없이 500년 사직을 들어 신라에 항복할 수 있었다. 신라도 이에 화답해 가야 왕족을 진골 귀족으로 자연스럽게 편입시켰던 것이다. 구형왕의 아들 무력이 병권을 잡고 장군으로 크게 입신했어도 신라를 배반하거나 다시 가야를 재건할 생각을 했을 리는 거의 없다. 가야 출신이되 이미 몸과 정신은 신라인이었기 때문이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있을 때 치소를 두었던 도당산성에 김유신의 사당인 길상사가 자리하고 있다

 

진천으로 도피한 김서현과 만명  
지금의 진천인 만노군은 서라벌에서 중국행 배를 탈 수 있는 서해안으로 가는 길목이면서 백제와 접한 최전방이었다. 551년 신라에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나라가 기원한 이 지역을 회복하려는 생각을 잠시도 포기한 적이 없어 서북 접경은 내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백제 입장에서는 만노군만 뺏으면 한성 지역이 서라벌 방면으로부터 고립되어 쉽게 공취할 수 있는 요지였고, 신라 입장에서는 북으로 진출하려는 백제의 기세를 꺾을 수 있는 목줄 같은 곳이었다.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최전선이어서 언제든지 국지전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강력한 활(쇠뇌)을 뜻하는 노(弩)가 1만개나 있다는 뜻의 만노군 지명도 이런 사연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서현의 어머니 아양공주와는 시누 올케 사이로 사이가 좋지 않던 만호태후는 서현과 딸 만명의 결혼을 반대해서 두 사람은 최전방인 만노군으로 도피하듯 떠난다. 서현은 다소 위험하더라도 만명이 함께 있는 한 골치 아픈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이 마음 편했다. 만호태후도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으니 승낙은 아니어도 묵인은 받은 셈이고 지역 내에서는 자신이 최고 결정권자여서 누구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백제와의 최전선이기에 방비만은 소홀할 수 없어 부임하자말자 백제와 마주보는 가장 높은 산인 만뢰산(612m) 정상에 있는 만뢰산성(萬賴山城)부터 보수했다. 만뢰산성 맞은편에는 백제의 최전방으로, 지금의 천안 동쪽에 남북으로 뻗은 산줄기를 따라 북쪽에서부터 위례산성, 성거산성, 왕자산성, 흑성산성 등이 각각 10리 안쪽의 거리를 두고 도열해 있었다. 신라쪽에서는 전방으로 나온 것이 만뢰산성 하나뿐인데도 백제가 산성을 줄줄이 쌓은 것을 보면 얼마나 예민하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진중에서 태어난 유신은 군사적 긴장감이 팽팽한 변경에서 자라서인지 어릴 때부터 무예에 관심이 많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산과 들로 말을 달리며 저절로 강건한 기상이 몸에 배었다. 만명은 문무를 겸전하지 않으면 무식한 칼잡이가 될 뿐이라며 유불도(儒彿道)의 기본 경전을 가르쳤다. 
유신은 변경의 군중(軍中)에서 다소 거칠게 자랐지만 서현과 만명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야성과 지성을 겸비해 1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天日(태양) 같은 위엄이 있어 주변에서는 제왕이 될 풍모라고 입을 모았다. 

첫 출전 
김유신은 17세 때인 612년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가 되어 620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풍월주에서 물러난 이후의 행적은 분명치 않은데 중간급 무장이 되어 전선을 누볐거나 군사들을 훈련시키며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629년, 김유신은 마침내 부장군이 되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고구려가 북방에 집중한 틈을 노려 신라가 고구려의 최남단 전초기지인 낭비성(娘臂城, 청주 상당산성)을 공격한 것이다. 
고구려 입장에서 낭비성은 적진 깊숙이 파고 든 전초기지였다가 전력을 북방에 올인한 후에는 적진에 둘러싸여 위태롭기 짝이 없는 외로운 섬이 되고 있었다. 신라는 군사력에 자신감이 생기고 고구려가 북방에 집중하고 있을 때 100년 이상 눈엣가시 같고 심장을 겨눈 비수 같던 낭비성을 공격한 것이다. 629년의 낭비성 공략전에는 1만 정도의 군사가 동원되었는데, 김용춘과 김서현이 대장군으로, 김유신은 부장군으로 출전한다. 역사에 기록된 김유신의 첫 출전이다. 
북방 전선이 다급한 상황에서도 이때의 낭비성에는 8천 정도의 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난공불락의 산성을 8천의 군사가 지키는데 신라는 고작 1만의 군사로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견고한 산성은 수비병력의 10배가 공격해도 함락하기 어려운 법이다. 신라는 그것을 알면서도 북방에 눈이 쏠린 고구려 형편에 방비가 소홀할 것으로 생각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고구려군은 함락될 위험이 거의 없는 농성전은 아예 생각지도 않고 바로 성 밖으로 나와 신라군을 향해 공격대형을 짰다. 그냥 지키지 않고 나가서 무찔러 버리겠다는 기세였다. 
“감히 신라 따위가 우리를 공격하다니. 가만 두지 않겠다”는 분노와 조소가 고구려군의 분위기에서 읽혀졌다. 예기치 못한 고구려군의 반격에 신라군은 주춤했고, 고구려군은 틈을 주지 않고 강공으로 밀고 나왔다. 신라군은 공세에서 갑자기 수세로 바뀐 데다 고구려군의 기세에 밀려 진이 무너지면서 첫 접전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용춘과 서현은 “주력이 북방에 가 있는데도 여전히 고구려군의 세력이 대단한데…”하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첫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밀려 동료들을 잃은 군사들은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 다시 싸울 마음이 싹 가시고 말았다. 단 한번의 접전으로 벌써부터 잔뜩 주눅이 든 패잔병의 몰골을 보이고 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절정             
군사들은 지치고 공포에 질린 기색으로 움츠려 있고, 지휘부도 뾰족한 방법이 없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김유신이 용춘과 서현 등이 모여 있는 지휘부를 찾아왔다. 유신은 부장군이면서 上中下 당(幢)으로 나뉜 부대에서 중당의 당주를 맡고 있었다. 그의 휘하에 3천 정도의 군사가 딸린 것이다. 
이제 유신도 34세. 15세에 화랑이 된 이후 오랫동안 신라 청년들의 우상이 되었던 그지만 더이상 앳된 소년의 모습이나 싱그러운 화랑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는, 서슬 푸른 무장의 위용을 발산하고 있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용춘과 서현 앞에 무릎을 꿇은 유신은 투구를 벗고 예를 갖추었다.  
유신의 표정에 감도는 비장한 기운을 본 순간 서현은 속으로 “이 녀석, 일을 저지를 기세 아닌가”하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용춘도 유신을 보고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무슨 일인가?”하고 물었다. 
“저는 평소에 나라와 부모를 받드는 충효를 평생의 목표로 삼아왔습니다. 나라를 구하는 전쟁에 나설 때는 용감하게 싸우는 것이 도리입니다. 지금 첫 전투에서 패해 군사들은 기가 죽어 다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대패는 명약관화한 일이 될 것이고, 물러난다면 공포심이 몸에 남아 다시는 고구려군을 상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옛말에 옷깃을 들면 옷이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옷깃과 벼리가 되겠습니다.”
유신은 군사들과 제장들이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부장군 혼자서 말인가?”
용춘과 서현이 깜짝 놀라 물었지만 유신은 씩씩한 음성으로 “예!”하고 답하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군사들을 격동시키기 위해 사지로 뛰어들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뜻인데, 용춘은 이번 전투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신라의 미래를 걸머진 유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서현도 부자간의 정리를 떠나 유신 같은 인재를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채 말릴 틈도 없이 유신은 냅다 말에 올라 적진을 향해 박차를 가했다. 한번의 패배에 기가 죽은 신라군들은 패잔병처럼 숨죽여 있다가 유신이 혈혈단신으로 말을 몰아 적진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부장군이 미친 것 아냐. 혼자서 고구려군을 상대하겠다고?”
“과연 김유신이다! 우리가 패하자 목숨을 내놓고 사기를 올리기 위해 나선 거야. 죽을지도 모르는데 혼자서 저리 돌진하다니….”

 

단기필마의 전설 
부장군이면 뒤에서 지휘만 해도 되는데 혼자서 적진으로 쳐들어간다…. 이 순간의 김유신의 결단과 용기는 이후 평생 동안 그의 성공과 불패의 신화를 뒷받침하는 전설의 기원이 되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뒷날 그의 이런 행동을 따라 전세가 불리할 때 그의 부하들은 앞다퉈 목숨을 건 돌격을 자청하고 나섰다. 전세의 막다른 골목에서 적군의 사기는 꺾고 아군의 사기는 높이는 이런 무모한 돌격은 황산벌 대전에서 화랑 반굴과 관창처럼 희생적인 죽음으로 끝나기 일쑤지만 유신은 그 기세등등한 고구려군의 진지로 홀로 뛰어들어서도 살아 돌아왔다. 
유신이 첫 번째 돌격했을 때 고구려군은 놀라 당황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장수라 해도 달랑 혼자서 수천 군사가 창칼을 들고 웅거하는 진지로 뛰어드는 것은 무모한 자살행위 이전에, 엄청난 군세와 병장기가 뿜어내는 살기에 질려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적의 장수 하나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말을 달리고 칼을 든 모습에서 출중한 무예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낭비성의 성주는, “으음…. 대단한 기백이군. 아무튼 그냥 두면 안 된다. 적이 패한 상황에서 저 자가 살아 돌아간다면 사기만 높여줄 뿐이다” 하며 감탄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홀로 달려든 적장 하나를 잡기 위해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누가 저 놈을 상대하겠느냐. 놈의 목만 베어서 돌려보내야 한다”고 소리쳤다. 순간 “제가 가겠습니다” 하더니 부장 중의 하나가 군장을 갖추고 말을 몰아 유신을 향해 마주 달렸다. 두 사람은 대치중인 양군의 한 가운데가 아니라 유신이 먼저 나선 때문에 고구려군 진지 앞에서 마주섰다. 
“너는 누구냐. 싸움에 패했으면 졸개들을 이끌고 돌아갈 것이지 모조리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고구려 장수가 험악한 얼굴을 하며 야수가 포효하듯 으르릉 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신은 적군이기는 하지만 용기 있게 나선 고구려 장수를 높이 사고 싶었다.   
“나는 신라의 부장 김유신이다. 우리 신라군에게는 패배도 없고 후퇴도 없다. 성을 내놓고 물러가지 않을 것이면, 그대의 용기는 가상하다만 죽일 수밖에 없다.”
두 장수는 필사의 결투에 돌입했다. 둘 다 살기등등한 기세는 비슷했지만 화랑이 된 이후 20년 간 무예를 닦아온 유신의 기량이 몇 수 앞서 있었다. 5~6합 만에 고구려 장수의 목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순간 신라군에게서는 환호가 일었고 고구려군은 침묵 속에서 탄식을 흘렸다. 유신은 적장의 목을 들고 신라군쪽으로 돌아와 군사들 앞에 높이 치켜들었다. 군사들은 산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지르며 조금 전의 패배감을 완전히 떨쳐버렸다. 반면 고구려군은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유신은 적장의 목을 용춘과 서현 앞에 내려놓고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아니, 또 적진으로 간단 말이냐?”
서현은 대장군의 체면과 입장도 잊고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가 되어 유신을 불렀지만 아들은 칼을 꼬나들고 “아직 할 일이 더 있습니다!” 하면서 고구려군을 향해 다시 달려갔다. 
낭비성 성주는 “이번에는 절대 저 놈을 살려 보내면 안된다. 저놈이 살아가면 우리는 사기충천한 신라군을 당할 수 없게 된다. 누구 없느냐. 반드시 저놈을 죽여라!”하고 절규하듯 소리쳤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무리를 지어 공격하거나 궁수를 앞세워 유신을 떨어뜨리는 비겁한 편법은 쓰지 않았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도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도의를 어긴다면 설사 이긴다고 해도 오점으로 남아 적군은 물론 부하들로부터도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기골이 장대한 장수 하나가 나섰다. 하지만 그 역시 10여합을 버텼을 뿐 유신의 칼에 투구가 벗겨지고 칼을 떨어뜨려 위기에 몰리자 고구려 진지로 허겁지겁 되돌아가고 만다.  유신은 적장의 목을 베지는 못했지만 흘리고 간 투구를 집어 들고 와서 다시 신라군 앞에 치켜 올렸다. 이번에도 “와아~!”하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고, “김유신 장군 만세!”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반면 고구려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고 있었다. 군사들의 가슴을 격동시킨 유신은 적장의 투구를 용춘과 서현에게 바친 다음 아무 말 없이 말머리를 돌려 다시 적진으로 향했다. 마치 목숨이 여러 개인 것처럼 생사의 위기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유신의 터무니없는 활약에 신라군과 고구려군 모두 기가 질리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다  
신라 군사들은 “한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혼자서 적진으로 가다니… 아무리 천하의 김유신이지만 제정신인가”하며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쏟아내며 손에 땀을 쥐고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가장 속이 타는 사람은 김서현이었다. 그래도 이번 전쟁을 이끄는 대장군으로서 근엄한 표정으로 유신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속은 타들어가고 입은 바짝바짝 말랐다. 옆에 서 있던 김용춘은 눈물을 머금으며 “과연, 유신입니다. 정말 장해요. 계속 싸우다가는 우리가 전멸할 지경인데 유신이 혼자서 신라군을 살려내고 있어요” 하면서 감격했다. 하지만 두 번 살아왔다고 세 번째도 살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용맹한 고구려군을 상대로 혼자서 벌써 세 번째 돌격하고 있는데 어떻게 목숨을 보장할까. 설령 죽는다 해도 신라군은 사기충천해서 고구려군을 제압하고 말 것이다. 결국 유신이 노린 것은 이것이었다. 
겉으로는 표정관리를 하고 있어도 아들 때문에 반쯤 얼이 나가 있는 서현을 두고 용춘이 군사들의 앞으로 나섰다.
“제군들은 보았는가. 부장 김유신은 단기필마로 적진으로 달려가 적장의 목을 베고, 또 다른 적장의 투구를 뺏어왔다. 유신이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이렇게 보고만 있을 것인가? 자, 다시 전투를 준비하라. 이제 유신이 죽으면 그의 원수를 갚을 것이요, 살아 돌아오면 우리 모두를 살린 영웅의 귀환을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유신 한 사람도 대적하지 못하는 저 오합지졸 고구려군을 완전히 쳐부수고 말 것이다.” 
다시 “와~” 하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신라군이 전투대형을 갖추는 것을 본 고구려 진영에서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유신의 거침없는 단독 돌격에 고구려군은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는데 신라군이 공격진용을 갖추자 크게 당황했다. 
고대의 육상전은 영화에서 흔히 보는 개인간의 육박전이 아니라 무리를 이룬 진(陣) 간의 싸움이었다. 진을 어떻게 운용하고 짜느냐가 실전 병법의 요체였다. 사기가 오른 군사들이 강건한 진을 짜면 이건 탱크처럼 막기 힘든 공격력을 발휘한다. 반면 사기가 떨어져 군사들 사이에 공포감이 만연하면 진이 흐트러져 순식간에 상대방의 진에 당하고 만다. 고구려군의 진용에서 술렁거림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미 진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고구려 장수들은 진을 깨지 말도록 독려하느라 분주했다. 
유신이 다시 고구려진 앞까지 왔건만 그를 상대하러 나갈 장수는 없었다. 그 사이 유신은 군졸 몇 명을 벤 다음 군기 하나를 뺏고는 바로 말머리를 돌려 신라군쪽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신호였다. 용기백배한 신라군은 고구려군을 삼킬 듯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유신은 자신의 부대인 중당 앞에 서서 “보다시피 고구려군은 나 하나도 당하지 못하는 허깨비들이다. 우리가 어찌 저들에게 질 것인가. 이제 저들에게 죽은 동료의 복수를 하고 우리를 믿고 있는 대왕 폐하와 백성들의 근심을 없애자!”
기본적으로 쌍방간의 무기와 전술이 비슷하고 전력까지 큰 차이가 없다면 고대의 전투에서 승부는 사기에서 결정되기 마련이다. 한 번의 작은 승리에 취했다가 유신의 도전에 사기가 급전직하한 고구려군은 승리를 확신하고 덤벼드는 신라군을 당할 수 없었다. 신라군은 고구려군 5천 여명을 베고 1천 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둔다. 성안에 일부 남아있던 군사들과 관리들도 순식간에 뒤집힌 전세에 놀라 허둥대다가 고구려군이 무너지자 성문을 열고 항복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 내륙 깊숙이 들어와 후방을 노리던 전략적 거점을 잃었다. 낭비성의 함락으로 중부 산악지대를 통해 가늘게 유지하던 고구려의 남방 공략선은 사실상 무너졌다. 고구려 국경부터 낭비성까지 중간중간 있던 보루 규모의 작은 성들은 곧 신라에 함락당하거나 자진 철수하면서 사라졌고, 한강유역에 대한 신라의 장악력이 한층 다져졌다. 
낭비성 전투 하나로 김유신은 신라의 구국 영웅이자 신화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고구려와 백제에도 소문이 퍼져 전장터에서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가장 두려운 적장의 이름이 되었다. 신라에서 그의 활약상은 살이 보태져 김유신은 천하무적의 군신(軍神)처럼 받들어졌다. 만호태후가 서현과 떼어놓기 위해 만명을 가뒀을 때 번개가 쳐서 만명의 탈출을 도운 것도 결국은 하늘이 김유신을 내기 위해서였다는 소문도 다시 돌았다. 백성들은 “김유신 장군만 있으면 머지않아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전쟁 없는 평화시대가 열린다”는 소망섞인 기대감을 전파시켰다.  

 

진천사람 김유신의 흔적 
진천읍 서쪽, 해발 210m의 낮은 도당산 중턱에 김유신의 사당인 길상사(吉祥祠)가 있다. 이 자리는 그의 아버지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있을 때 치소(治所)를 둔 곳으로 추정되며, 지금도 길상사 주변으로 도당산성의 흔적이 잘 남아 있다. 여기서 백제와의 접경을 지키는 전방기지인 만뢰산성은 8km 정도 서쪽에 자리하고, 김유신의 탄생지는 그 중간쯤에 있다. 김서현은 여기 치소와 거처, 만뢰산성을 오가면서 지낸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 탄생지에는 조선시대식 건물 한 채만이 덩그러니 앉아 있다. 생가터 옆 주차장에는 ‘화랑무예태권도성지’ 조형물이 한쪽 구석에 방치되듯 서 있다. 뭔가 테마를 부여해서 개발하려다 중단한 느낌이다. 삼국통일이 폄하되는 시대에 김유신을 헌창하기가 난감했을까. 
생가터 바로 뒤 태령산(450m) 꼭대기에는 김유신이 태어났을 때 태를 묻은 태실(胎室)이 전한다. 태(胎)는 생명력을 부여하는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조선왕조에서는 왕손의 태를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만들었다. 김유신 태실은 왕족이 아니면서도 가장 오래된 태실로 인정된다. 
동남쪽을 바라보는 태령산 꼭대기의 김유신 태실에 서면, 김서현과 만명 부부가 왜 이곳에 태실을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경주를 향해 있는 태실은, 야합으로 경주에서 쫓겨난 두 사람이 “두고 보라. 우리 아들을 나라의 보배로 키워서 우리 부부의 연은 하늘이 맺어준 것이란 걸 증명할테니까” 하는, 입을 앙다문 결기가 느껴진다. 그만큼 두 사람은 김유신의 훈육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만뢰산성 아래는 펜션 마을인 ‘화랑촌’이 조성되어 있고, 더 안쪽 계곡의 보탑사 통일대탑은 삼국시대 목탑 양식을 본받아 1996년 조성되었으며 황룡사 9층탑을 모티브로 삼았다. 3층이지만 높이가 42.7m에 달할 정도로 높고 웅장하다. 그래도 9층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어정쩡한 모습인 것은 어쩔 수 없다. 
한중일 전국시대를 돌아보면 통일의 교훈은 자명하다. 통일의 의지가 확고하고 사람의 도리를 거스르지 않으며 가장 강한 국력을 유지하는 쪽이 승리한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상 최대의 혼란기를 정리한 삼국통일에서 교훈을 얻을 생각이 거의 없어 보인다. 역사가 유사하게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과거는 언제나 현재의 교훈이 된다. 
기대를 품고 간 진천행인데, 불안을 안고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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