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TRAVEL
대중가요의 골목길(10)-덕수궁 돌담 그리고 정동길영원한 연인의 길, 덕수궁 돌담 그리고 정동길

대중가요의 골목길(10)
영원한 연인의 길, 덕수궁 돌담 그리고 정동길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서면 도시의 번다(煩多)는 순간에 사라진다. 태극과 별무리가 그려진 깃발이 호소하는 분노도 이 골목을 따라오지는 않는다. 따스한 봄도 스산한 가을도 덕수궁 돌담을 배경으로 찾아오고 사라진다. 정동길의 고운 풍경은 환난의 근대사와 숨 가쁜 현대사를 거치면서도 붉은 벽돌 건물에 정물(靜物)처럼 남아있다. 진송남의 <덕수궁 돌담길>이 끝나는 곳에 이문세의 <광화문연가>의 배경은 열린다. 하지만 광장의 봄은 멀다. <태평로>의 이름을 잃어버린 두 광장으로 통하는 대로는 여전히 대립의 정치로 소란스럽다 

 

진송남의 <덕수궁돌담길>은 혼자 추억하는 길, 이문세의 <정동길>은 둘이 추억을 나누는 길이다

 

옛 가요의 거성, 작곡가 김교성이 떠난 자리 <찔레꽃>
지하철 시청역을 빠져나온 옛 태평로는 태평하지 않다. 아침 햇살이 채 퍼지기도 전이건만 토요 아침에 일터가 아닌 곳으로 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산하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습관처럼 흔들었다. 부민관(府民館)이던 한 시절을 지나 국회의사당으로 쓰였던 서울시의회회관 건물은 시린 겨울 하늘을 이고 하얀 외벽이 더욱 창백해 보인다. 세실극장 앞을 지나가는 덕수궁담장은 최근 영국대사관의 협조를 얻어 오랫동안 막혀있던 체증을 뚫었다.

덕수궁 담장의 높이는 사람 두 길은 족히 되게 높아서 엄정하다. 누구는 담장을 헐어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철책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덕수궁 안에서 보는 담장은 버스나 사람처럼 대궐 밖의 움직이는 풍경을 한꺼번에 삭제한다. 고풍의 담장과 현대의 빌딩이 조화를 이루는 이 풍경이야말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건축가의 주장은 귀에 쏙 들어온다.
대한문으로 내려가는 이 담장 아래에서 대중가요사에 명멸하는 작곡가 김교성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1930년대에 신인가수 선발대회를 열어 ‘콩쿠르의 대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교성이 이 돌담길 앞에서 쓰러져 사망한다. 1960년의 일이다. 그 옆에 한참 후배인 작사가 월견초(본명 서정권)가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57세로 떠난 스승을 그리워하며 반야월은 영산다방에서 급히 <추도사>를 썼다. 김교성이라 하면 낯설지 몰라도 <찔레꽃>이란 노래를 작곡했다 하면 ‘아하’ 할 것이다. 또 하나의 국민애창곡 <울고 넘는 박달재>도 그의 곡이다. 성품이 강직해 ‘고바우영감’으로 불린 그는 오로지 실력으로 가수를 뽑고 키우던 예인이었다. 제주 처녀 ‘백난아’(본명 오금숙)를 톱가수로 만들고 진방남(반야월의 가수 예명)과 박재홍도 발굴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동창생
천 리 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작년 봄에 모여앉아 찍은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찔레꽃> 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백난아 노래, 1942

‘붉은 찔레꽃’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 산천에 흐드러지게 피는 찔레꽃은 하얀 빛깔이 창백하도록 곱다. 가사 속 붉은 찔레꽃에 대한 설명은 제각각이다. 찔레꽃이나 해당화나 장미나 가시가 있는 꽃은 모두 학명으로는 장미과다. 누구는 아마도 가수 백난아가 제주 출신이라 그 꽃이 해당화일 거라 했고, 망향의 서러움이 피어나 그리움이 붉게 피어났다 라고도 해석했다. 하지만 당대의 늦깎이 소리꾼 장사익이 ‘하얀꽃 찔레꽃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러운 꽃’으로 절창함으로써 찔레꽃은 그가 늘 입고 나오는 옥양목 빛 두루마기로 더욱 선명해졌다.
백난아의 <찔레꽃>에는 ‘노래하던 세 동무’라는 가사가 언젠가부터 이데올로기의 눈치 속에 ‘동창생’으로 바뀌었다. 정감 있게 ‘백인’ 사진은 ‘찍은’으로 표준화하고, ‘천리객점’ 북두칠성은 입에 붙게 ‘천리객창’으로 바뀌어버렸다. 누구는 ‘객점’이라는 낯선 단어는 오기(誤記)이니 그리 바꾼 것이라 하지만 백난아가 그 노래를 부르던 만주 시절의 유랑극단 입장에서는 차라리 천리 객잔(客棧: 중국의 지방상인 등이 머무는 숙박시설)에서 고국의 남녘 하늘을 그리워한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사라져버린 3절마저 불러야 가슴이 진정된다.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 떠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서울지방국세청 별관이었다가 ‘서울도시건축전시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골조 일부는 남아있다. 부민관이었다가 한때 국회의사당으로도 쓰였던 서울시의회 건물이 뒤로 보인다

 

진송남이 위로한 1970년대, <덕수궁 돌담길>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앞은 수문장 교대식을 보려고 서 있는 외국관광객과 토요정기집회를 준비중인 가설무대가 뒤엉겨 있다. 쌍용자동차근로자의 빈소가 있던 그 자리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부당하다는 측으로 손바꿈이 이루어져 있다. 역사는 순환한다더니 이 자리는 어쩔 수 없이 현실정치의 분노로 절어있다. 
덕수궁 돌담길로 돌아서면 감자기 평온한 주말의 일상으로 진입한다. 그 소란한 분위기는 단번에 편한 걸음에 제압당한다. 웅웅거리는 스피커음도 높은 담장 위로 날아가 옅어진다. 철 따라 다양한 이벤트와 버스킹이 열리기도 한다. 한류 열풍을 타고 도심으로 들어온 외국인들이 곡선미를 한껏 뽐내는 돌담길을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몰입한다. 그들에겐 ‘인생 사진’이거나 ‘인증사진’일 것이다. 그래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게 덕수궁 돌담길의 추억은 가수 진송남의 노래로 남아있다.

비내리는 덕수궁 돌담장길을
우산 없이 혼자서 거니는 사람
무슨 사연 있길래 혼자 거닐까
저토록 비를 맞고 혼자 거닐까
밤비가 소리 없이 내리는 밤에

밤도 깊은 덕수궁 돌담장길을
비를 맞고 말없이 거니는 사람
옛날에는 두 사람 거닐던 길을
지금은 어이해서 혼자 거닐까
밤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밤에
<덕수궁돌담길>   정두수 작사, 한산도 작곡, 진송남 노래, 1966, 지구레코드

부산MBC 전속가수로 작곡가 정풍송과 함께 출발한 진송남은 1965년 <추풍령>의 남상규 음반에 <사나이 엘레지>란 노래로 데뷔했다. 1966년 <덕수궁돌담길>을 한산도 작곡 제1집에 발표하면서 스타의 길로 접어든다. <덕수궁 돌담길>이 빗속을 걸어가는 사내에 대한 3인칭의 궁금증이라면 한산도 작곡 제2집에 실린   <바보처럼 울었다>는 떠나간 여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빗물이 눈물로 변한, 1인칭의 애절한 속편처럼 보인다. 
웃통을 벗고 근육을 뽐내던 청년 시절, 남진, 태원과 함께 해병대에 입대하여 월남전까지 참전하는 열혈 남아의 모습에서 남성미를 새삼 느낀다. 
1974년 발표한 <잘있거라 공항이여>는 이듬해 문주란이 재발표해서 공전의 히트를 했다. 전성기가 기울면서도 코러스를 넣어주던 부인과 함께 부부듀엣을 결성해 <나란히 걸어갑시다>, <청실홍실> 같은 젠틀모드로 바꾸었다. 데면데면하게 사는 장년 부부들에게 시샘과 눈총을 한꺼번에 받으면서도 여전히 활약하는 현역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징크스를 만든 배경은 지금은 서초동으로 이사를 간 대법원(현 서울시립미술관)이 덕수궁 돌담길 맞은편 언덕에 있어서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사라진 고담이다.

 

신학문과 신교육으로 이 땅을 눈 뜨게 한 배재학당, <학도가>
서울시립미술관을 지나 골목길로 마주한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우선 1916년에 세워진 고색창연한 건물(서울시기념물 16호)에 2008년 개관했다. 18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미국 선교사 아펜절러가 세운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인데다 이승만, 김소월, 주시경, 나도향 등 근대지식인들의 신문화요람이었으니 동문들이 ‘배재 135년’을 자랑할만하다. 언덕에 선 570년생 향나무가 정동 언저리의 영고성쇠를 지켜본 노익장으로 이제 곳곳에 보철한 흔적을 감추지도 못한다. 
당시 조선의 학생들은 <학도가>를 부르면서 면학의 기풍을 만들자고 다짐했을 터이다. 학도가는 고운봉, 채규엽 등 여러 버전으로 전해온다. ‘동천조일’이 일본제국을 상징하고 메이지유신을 찬양한다는 거북함에도 널리 불린 것은, 교훈적인데다 행진곡풍에 찬송가에서 따온 듯한 심플한 멜로디여서 배우고 자시고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양악의 선구자 김인식이 작사했다고도 전하고, 아예 작사 작곡 미상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일본의 철도창가 <도카이도> 편에 나오는 멜로디를 그대로 빌려왔다. 

청산(靑山) 속에 묻힌 옥(玉)도 갈아야만 광채 나네 
낙낙장송(落落長松) 큰 나무도 깎아야만 동량(棟樑) 되네 
공부하는 청년들아 너의 직분 잊지 마라 
새벽달은 넘어 가고 동천조일(東天朝日) 비쳐온다 
유신문화(維新文化) 벽두 초에 선도자의 책임 중코 
사회진보(社會進步) 깃대 앞에 개량자 된 의무로다 
농상공업(農商工業) 왕성하면 국태민안(國泰民安) 여기 있네 
가급인족(家給人足) 하고 보면 국가부영(國家富榮) 이 아닌가
<학도가>  작사, 작곡 미상, 채규엽 노래


레트로의 향수가 있는 무대 정동극장
옛 문화방송이 있던 북쪽 길로는 이화여고와 신아일보사 별관 등이 적벽돌에 박힌 역사를 그대로 이어 오늘에 이른다. 고종의 ‘아관파천’ 역사가 서린 정동 언덕 구러시아공사관은 벽체 일부만 남아서 탑처럽 보이지만 정동길의 랜드마크처럼 무심하게 서 있다. 1901년 덕수궁의 별채로 지어진 왕립도서관인 중명전도 빠트릴 수는 없다. 비운의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이지만 오래도록 경성구락부로 시대의 책임을 걸머진 사람들의 사교장으로도 쓰였다.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역사가 묻어나는 길에는 정동극장이 문화적 향기를 더한다. 극단 ‘원각사’의 정신을 계승한다면서 문을 연 이 극장에는 상상력이 풍부한 문화기획자 홍사종의 개척정신도 담겨 있다. 지금 상연되고 있는 ‘경성스케이터’는 간판으로만 봐서도 ‘YMCA야구단’의 누른빛이 나는 필름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가수 홍민의 가까운 집안인 그에게서 ‘스토리텔링’이란 단어를 처음 배우면서 해박한 문화 지식과 공연기획의 이면을 엿볼 수도 있었다.


대중가요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 <광화문연가>
다시 로터리를 이루고 있는 정동교회 앞에 이른다. 정동길과 덕수궁을 서정성 넘치는 고즈넉한 공간으로 그린 한 폭의 유화 같은 노래가 이문세가 부른 <광화문연가>다. 고인이 된 작곡가 이영훈의 얼굴이 덕수궁 담장 아래에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서울의 여섯 번째 노래비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이하 생략)
<광화문연가>  이영훈 작사·곡, 이문세 노래, 1988

이영훈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십여 년을 훌쩍 넘겼다. 노랫말 속 조그만 교회당인 정동제일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로 1990년에 이미 100주년을 기념했다. 이화여고로 이어지는 골목이 웨딩 촬영의 명소가 되고 있는 것이 이문세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영훈의 시적 가사와 서정성이 넘치는 <광화문연가>가 배경음악으로 깔리기 때문이다. 
손편지로 사랑을 보내고, 손글씨 엽서로 별밤지기 이문세와 함께 힘겨운 수험생활에서 위로를 얻던 소녀들도 이제는 갱년기를 벌겋게 달아올라 쩔쩔매며 넘어가는 줌마세대가 되었다. 팝송 일변도의 심야프로그램의 거장 이종환과 최동욱 시대를 마감시키고 고품격 국산 팝발라드라는 새 장르를 개척한 공로가 이영훈 이문세 콤비에 있다. 80년대의 무적함대 이 콤비가 3집 150만장, 4집 285만장을 발매한 기록은 ‘86·88시대’에 3년 연속 골든디스크상을 안겨주었다. 정훈희, 이수영, 이승철, 임재범, 신화, 빅뱅, 신해성, 성시경을 비롯한 여러 가수들이 재해석해서 이영훈의 노래를 불렀다. 
<가로수 그늘 아래에 서면> <붉은 노을> <옛사랑> <사랑이 지나가면> <시를 위한 시> <소녀> 같은 노래의 배경은 그대로 정동길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나 또한 ‘마삼트리오’로 불렸던, 도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문세의 노래에 취한 시간이 적지 않았기에 돌담길의 서정이 그리워진다. 진송남의 <덕수궁 돌담길>길에서 연인은 혼자로 돌아간 사람의, 혼자의 추억으로 각각 분리되어 쓸쓸하지만 이문세의 <광화문연가> 속 연인은 함께 돌아올 거라며 공유하는 추억으로 따스하게 자리 잡는다.  

 

 

만월대의 꿈을 이야기하는 임시공간, <황성옛터>
이제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정동고갯길로 광화문을 향한다. 담장 아래를 점령한 경찰버스와 노란 형광빛 경찰 재킷은 깊어가는 가을빛 서정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시절을 물들이고 떠나야 하는 낙엽 쌓인 길에서 경찰의 눈길은 무심하게 피곤하다. 미대사관저를 넘어 들어간 반미시위의 여파는 줄줄이 책임자를 징계로 엮었으니 경계는 강화될 수밖에 없다. 
1921년 경운궁(덕수궁)을 축소하는 과정에서 국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의 출입문인 영성문에서 정동까지 길이 뚫리면서 덕수궁 돌담길은 생겨났다. 정비석의 <자유부인>에 등장하는 ‘남몰래 하는 사랑’의 주인공들이 넘던 으슥한 ‘사랑의 길’도 촘촘히 늘어선 경비 경찰의 눈초리로 더 이상 은밀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고종이 황급하게 아라사(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던 ‘고종의 길’ 그 골목까지도 경찰의 눈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언덕을 넘어선다. 최근 <정동1928 아트센터>로 재탄생한 구세군중앙회관의 고졸한 건물이 옛 경기여고터와 마주하고 있다. 때마침 빈터로 남아있는 철담장 안에 ‘개성 만월대, 열두 해의 발굴’이라는 기획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5에서 이승소가 말한 “남은 대(臺)는 적막한데 꽃은 주인 없고 옛 궁전은 황폐하여 대숲만 우거졌네.”라고 말한 만월대다. 황해북도 개성시 송악산에 있는 고려 태조의 궁궐인 건덕전 터인데 조선조에 붙인 이름이 만월대다.
역사학계는 오래도록 만월대의 발굴이 숙원사업이었다. 북한의 협조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것이 없었다. 남북이 해빙무드를 타면서 2007년 5월에야 북의 민족화해협의회와 남의 남북역사학자협의회가 공동으로 발굴을 시작한다. 가장 덜 이념적인 한반도 역사의 공통분모에 대한 공감이었다. 순조로웠던 발굴은 2011년 12월 김정일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파헤친 흙을 제대로 덮지도 못하고 황급히 철수했다. 그 후 2015년 발굴에서는 금속활자 5개를 진귀한 보물로 건졌다. 8차에 걸친 작업은 회경전과 장화전 구간의 축대와 계단 같은 중심권역의 발굴작업까지 이르렀으나 현재 남북간 어정쩡한 대화의 엇박자 속에 다시 삽질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안타까운 마음의 전시였다. ‘<황성옛터>란 노래의 무대가 바로 여깁니다’라고 설명해 놓았더라면 관람객의 눈에 확 와닿았을텐데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듯하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못 이뤄
구슬픈 벌래소래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황성옛터>  왕평 작사, 이애리수 노래

<황성옛터>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음에도 “이 노래의 무대는 경주가 아닐까”하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촉광 낮은 달빛이 망해버린 왕조 신세만큼이나 처량하여 만월을 붙인 건지도 모르겠다. 1928년 개성 만월대에서 느낀 감정을 왕평이 작사하고 전수린이 곡을 붙여 극단 순회공연중에 이애리수라는 여가수가 불러 히트했다. <荒城の迹>이란 이름의 재킷에 들어있는 허물어진 성터, 세상의 허무란 단어는 누가 봐도 나라를 빼앗긴 백성의 비애를 표현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조선의 세레나데로 불리던 이 노래의 가창을 조선총독부가 금지했으니 최초의 대중가요 금지곡인 셈이다.
일제시대를 살아온 대통령 박정희조차 애창했던 황성옛터는 한과 비감이 절묘하게 배합된 민족의 노래다. 이애리수나 고복수의 황성옛터는 역사성을 지닌 시대의 음색이라 의미가 있다. 
이생강이 연주하는 대금버전도 좋고, 시대를 거부하는 듯한 한영애의 목소리로 들어도 새롭지만 역시 절창은 조용필이 처연하게 가슴을 도려내는 비음으로 버무린 <황성옛터>다.

 

대립으로 쪼개진 광화문 광장, 함께 부르는     <아침이슬>
만월대 발굴 회고의 문을 나서자 바람결에 들려오는 노래는 시위대가 점령한 광화문 광장 발 대중가요다. 곡목을 알 수 없는 노래는 심박수를 높여 광장에 뜨거운 기운을 불어넣는데 쓰는 용도다. 이영훈이 깊은 밤 서정적 멜로디를 그러넣었을 공간 무대 ‘광화문’은 아니었다. 광화문네거리의 주말은 분노와 대립으로 점령당해 있다. 이념의 과잉, 내편과 네편의 갈림이 광화문 광장에서는 서로를 등 돌리게 한다. 세종대로 전체를, 아니 전 국민을 광장으로 불러냈던 2002년의 붉은 티셔츠의 열정과 함성 이후로 광장은 누구의 편도 아닌 채 손바꿈을 해댔다.  광우병 광풍이 ‘뇌에 구멍 송송’을 외치며 버스 차벽까지 흔들던 일도, 세월호의 비탄이 분노로 바뀌어 결국 대통령 탄핵의 벼랑에 이르기까지 광장은 왼쪽으로 기울었다. 
도저히 가망 없을 듯싶은 역사의 용수철이 광장을 오른쪽으로 밀며 주말 광화문을 시위해방구로 만든다. 공산 치하와 6·25 전쟁을 몸에다 새긴 세대, 유솜(USOM)에서 원조하는 밀가루와 강냉이죽으로 허기를 견딘 보릿고개 세대가 흔드는 저 태극기와 성조기의 의미는 거의 절규에 가깝다. 민족의 성군, 성웅이라며 광장으로 모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께서 오도 가고 못 하고 광장 한가운데서 이 못난 후손들의 멱살잡이를 지켜보느라 속에 천불이 일어나시리라. 서울시는 최근 광화문광장을 더 넓히는 계획을 발표했다. 차량통행을 줄이고 걸으면서 문화를 향유하도록 광화문광장을 서쪽으로 넓혀 차를 쫓아내는 계획을 발표했다.
BTS 같은 전사들이 지구촌을 뒤덮어 만든 K-POP 한류가 세계인들을 광장에 초대해 넘친다.  엄지를 치켜세운 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 할 광경’ 앞에서 어떤 서울발 소감의 텔레그램을 전송할지 궁금하다. 필름을 되돌려보자. 광우병 괴담이 광장을 뒤덮고, 경건한 촛불이 분노의 열화로 돌변한 2008년의 이 광장을 우리 모두 기억하지 않는가. 한 곡의 노래가 떠오른다. 김민기가 짓고 불렀던 노래, 양희은이 다시 불러 시대의 노래, 역사의 노래가 된 <아침 이슬>이다. 청와대의 주인이 어둠속에서 북악에 올라 가만히 불러보았다는 그 노래, 그 대통령은 무슨 생각으로 이 노래를 혼자 읊조리듯 불렀단 말인가. 김민기의 노래로 다시 들어 본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 이슬>  김민기 작사·곡, 양희은 노래

이 노래가 뜨거운 아스팔트 위의 대립을 노래한 건 아닐지라도 기약 없는 현실과의 싸움에 대한 다짐과 위로라는 점에서 수작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쪽이 부르더라도 나름대로 의미와 해석을 가질 수 있는 이 노래의 오지랖은 오래도록 넉넉할 것이다. 이념에 찍은 낙인의 완고함을 넘어 자유를 향한 외연 확장까지도 열망하며 진지하게 불러야 할 노래다. 
그나저나 정수라가 부른 <아, 대한민국>을 언제 다시 광화문 광장의 평평한 무대에서 우리 다 함께 부를 날이 오기는 오겠는가. 
 

 

 

 

 

참고자료
1. 한국가요사1, 2  박찬호, 미지북스, 2009
2. <야화 가요60년사> 황문평, 전곡사, 1983
3. <정동, 역사의 뒤안길> 중구문화원, 상원사, 2008
4. ‘이문세, 이영훈 황금콤비, 대중가요에 대한 인식을 바꾸다’, 최규성(대중문화평론가), 2010, 한국일보
5. <학도가> 나무위키
6. ‘백난아의 찔레꽃은 왜 붉게 피나’, 주간동아, 권재현 기자

 


조용연 편집위원  choyy@nate.com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용연 편집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