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심장 터지게 달려는 봤나!

나는 1998년 춘삼월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지. 나의 첫 사랑, 철이는 부산 초량 출신으로 중·고 시절 여러 사이클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유망주로 떠올라 탐내는 팀이 많았지만 홀어머니를 모시고자 프로의 길을 택했어.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이제 생긴 지 5년된 경륜 새내기로 입문하게 되었지.
철이를 맞이한 한국 제일의 사이클 제조 장인은 결혼 예복을 맞추듯이 엄숙하게 팔 길이, 사타구니 길이 등을 꼼꼼히 잰 후 도면을 그려나갔지.
이탈리아의 명문 콜럼부스의 크롬몰리 합금강이 재단되고, 일제 나가사와 정밀 러그를 끼운 다음 정확하게 프레임을 세팅해. 용접 토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파란 불꽃에서 800도의 열이 서서히 가해지면 황동봉은 노란 액체로 변해 달구어진 틈새의 공간을 찾아 스며들면서 단단하게 제자리를 잡아가지. 이렇게 해서 나는 명문가의 소재와 최고의 장인이 만난 뼈대 있는 가문의 프레임으로 탄생한 거야.
완성된 후 역시 ‘바다사나이’답게 철이는 나에게 퍼시픽 블루 컬러의 원피스를 입혀 주었지. 여기에 최고급 듀라에이스 부품으로 꾸몄으니 출동준비 완료. 
야구장보다 훨씬 작아 안방 같은 벨로드롬에 들어서면 관중들의 열기가 온 몸에 바로 전해져. 평소 수줍던 부산 갈매기는 붉은색 3번 선수로 들어서는 순간 먹잇감을 향한 수직하강의 수리로 변신해. 두툼한 손이 핸들의 고무그립을 촥 감싸 쥔 후 토클립에 발을 끼워 넣으면 나는 가죽끈으로 칭칭 감아서 그와 완벽일체를 이루지.
키 185cm, 100kg이 넘는 거구를 뼈대만 앙상한 고작 8kg의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처음엔 ‘깜놀’이었지. 특히나 이 불곰이 침대 위처럼 가만히 있지 않고 내 위에서 오만 발광을 할텐데. 침대가 과학이라면 자전거는 분명 첨단 고문과학일 거야.
하지만 우리는 일심동체, 맞벌이 부부로 맺어진 운명! 악착같이 살아 보기로 약속했어. 333m트랙 6바퀴를 오뚜기 카레가 만들어 질 때쯤 훽 돌아 끝내야 해.
전장에서는 적에게 등을 보이면 바로 죽음이지만 우리의 싸움에서는 상대에게 뒤태를 보여주는 게 이기는 거야. 그야말로 꽁무니를 빼고 달리고 달리는 게 장땡. 바퀴야 나 살려라!

드디어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형형색색의 선수들이 유도원을 따라 서서히 왼쪽으로 돌기 시작한다. 느리게 보여도 시속 30~40km로 달리면서 탐색전이 한창이다. 네바퀴 반을 끝으로 유도원이 트랙에서 빠져 나가면 본격적인 스퍼트가 시작된다. 서로 선두의 바람막이가 되는 걸 피하면서도 우위를 차지하려는 눈치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마지막 한 바퀴가 남았다는 종은 캠코드를 3배속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관중석은 쥐가 죽어 고요한 가운데 거친 숨소리와 샛바람이 지나간다. 휙휙휙~

코통령 : 코렉스가 제작한 경륜용 모델 ‘코렉스 프레지던트’의 속칭. 경륜 모델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초창기 픽시 붐도 이끌었다
코통령 : 코렉스가 제작한 경륜용 모델 ‘코렉스 프레지던트’의 속칭. 경륜 모델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초창기 픽시 붐도 이끌었다

철이도 속도를 내기위해 엉덩이를 안장에서 살짝 떼고 핸들을 세차게 누를 때는 어깨가 빠질 것 같아. 뒷바퀴 허브 속의 베어링은 서로 머리를 부딪치며 아우성이야. 동시에 촉석루 기둥 같은 허벅지가 부풀어 오르며 페달을 밟아, 아니 찍어 버린다고 해야 맞아. 쳐쳐쳐!
체인은 꺼이꺼이~ 숨이 넘어가고. 순간 시속 70km를 웃돌아.
마지막 커브에서도 속도를 유지하면서 원심력에 튕겨나지 않으려고 35도 경사 트랙을 벽인양 기대며 찰싹 붙어서 질주해. 고개를 숙인 채 마지막 피치를 올리는 철이의 황소 콧김에 핸들이 녹아내릴 것만 같아. 우두두두~~
와~! 환성이 터지는 소리에 결승선을 통과했음을 직감해. “3번 황철 선수 우승입니다!” 간결한 방송 멘트가 꿈결인 듯 들려오면 온 몸에 힘이 쭉 빠져.
당시 IMF라는 암울한 분위기에서도 올림픽 벨로드롬은 북새통을 이루었고 그런 와중에  해피싸롱, 춘자마담도 명함 돌리느라 바빳다나 뭐라나. 그동안 철이와 나는 정말 이를 악물고 심장아 터져봐라 하면서 원 없이 내달렸지. 연말 신인상까지 거머쥔 철이는 부산 갈매기에서 황금 갈매기로 승격하고 나는 우승 제조기라 불렸지.
해가 바뀌어 새로운 시즌이 시작될 때만 해도 우리가 들어서면 환호 갈채를 받았지. 하지만 우승을 견제하는 선수가 늘어나면서 철이의 웃음도, 우승도 드물어 갔지. 가을 시즌이 끝나갈 무렵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어. 모처럼의 기회를 잡은 우리가 치고 나갔는데 바로 앞의 선수와 부딪치면서 그대로 튕겨 나간거야. 
철이는 쇄골이 부러지고 갈비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어 병원으로 직행하고, 나는 핸들이 탑튜브를 세게 때려 창원으로 이식 수술을 받으러 가야 했지.
2000년 밀레니엄 시대가 열리는 축포 속에서 우리는 이별을 예감했지. 한번 사고를 경험한 나는 그 엄청난 질주를 함께 할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어. 철이는 손사래를 쳤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철이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결단이 필요했던 거야.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주라는 말도 있잖아. 
우리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숨이 턱에 차오르고 심장이 터질 정도로 달려 봤으니 후회는 없어.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워. 용광로에 들어가서도 잊지 못할 거야. 앗 뜨거!

철이는 어떻게 되었냐구?
경륜 선수로 명예와 부를 얻어서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딸과 잘 살고 있다고 들었지. 3년 전에 은퇴해 자전거 공방을 차렸다고 했는데 가보질 못했네.
나? 그 후 10여년을 컴컴한 창고에서 엄습하는 습기와 스물스물 올라오는 녹하고 싸우다가 2010년경 세계적인 픽시 붐에 다시 살아났지. 그동안 몇 번 파트너가 바뀌어 이젠 지치고 늙었지만 여전히 ‘코통령’을 알아봐주지. 이놈의 인기는. 
오늘은 팔당댐 수문이 열렸다 해서 나섰는데 암사 아이유고개가 이제는 만만치 않네. 그래도 갈 곳이 있고, 갈 능력이 있고, 지금 가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눈물 찔끔 나게 고맙고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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