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순덕 씨! 힘내라, 미똑이!

오늘도 어김없이 나는 파리의상실 한켠에 웅크리고 앉아 순덕 씨의 재봉틀 소리를 감상하고 있다. 드륵 드르륵. 말이 좋아 의상실이지 손바닥만 한 수선집일 뿐이다. 서산댁 순덕 씨는 이름만 컨트리스럽지 젊을 때의 디자이너 꿈과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 미시족이다.

나는 베이징올림픽이 끝난 다음해, 중국 천진에서 태어났다. 천진은 자전거 공장만 해도 500개가 넘는다는 대표적인 공업도시다. 응팔년도 때야 ‘뭐가 차이나도 차이난다’해서 손사래를 쳤지만 이제 중국은 명실상부한 ‘세계의 공장’으로 발돋움 했지.
그해 중국에서 태어난 8천만대의 동족(?) 가운데 다행히도 황해를 건너 3일 만에 한국의 평택항에 도착했지. 나를 중국산 천진댁이라 하지만 한국회사에서 디자인과 스펙을 정해 한국상표를 이마에 붙이고 태어났으니 한국 자전거라 할 만하지 않을까. 나이키는 어디서 만들든 나이키 아닌가. 
따스한 봄볕이 비치는 자전거가게 구석에서 졸고 있던 중, 향긋한 향기에 눈을 뜨고는 한방에 가버렸지. 숏커트의 머리, 호수 같은 눈망울, 죽이는 몸매, 한마디로 오드리 헵번 한국 버전이었어.
하지만 나는 이내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지. 가볍다고, 스펙 화려하다고 으스대는 티탄족이나 카본혈통 앞에서 난 그저 생활형 철자전거, 그것도 기어도 없는 궁색한 흙수저였을 뿐이니.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도 나름의 존재 이유와 가치가 있다지 않은가. 나는 여자에 의해, 여자를 위해, 여자로 태어났다.
우선 롱드레스를 걸치고도 우아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백조 목처럼 휘어진 스완 탑튜브, 앞뒤 휠의 거리가 넉넉하고 차체가 낮아서 느리지만 편안한 승차감 그리고 넓고 스프링 달린 안장과 높은 핸들은 폭신하고 부드러운 핸들링을 제공하지. ‘무자식이 상팔자’라 기어가 없으니 변속 트러블이 없고 조작과 관리도 편하지. 그 밖에도 흙탕물을 막아주는 롱 펜더, 모범생처럼 반듯한 더블 스탠드, 악어 이빨처럼 바지 끝을 물고 늘어지는 체인을 격리해주는 통체인케이스, 마켓을 통째로 담을 수 있는 커다란 바스켓, 포장도로와 궁합이 잘 맞아 미끄럼 없는 슬릭타이어 등 단언컨대 가성비가 ‘쩐다’고 보면 돼.
그녀가 몇 바퀴를 돌다가 나를 가리키며 “이걸로 할게요.”할 때는 없는 귀가 뻥 뚫린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는 동네 마실용을 구하는 중이었기에 나 같은 여성용 자전거를 택한 것이다. 역시 별명 ‘미똑이’답게 현명하고 눈이 밝다.

미똑이는 수선 재료를 사러가거나 시장을 볼 때 꼭 나를 대동한다. 복잡한 골목에서는 살짝 내려 내 양손을 잡고 브루스 추듯이 천천히 ‘끌바’하는 걸 좋아한다. 깔맞춤한 우리 커플을 슬쩍 훔쳐보는 시선을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미똑이는 작년에 도둑처럼 찾아온 갱년기에 힘들어 했는데 올해는 떼강도 코로나까지 겹쳐서 더 걱정이다. 그래서 요즘은 일과가 끝난 오후에는 안양천 자전거길로 그녀를 이끈다. 내 등에 올라 달리는 미똑이의 향기로운 숨결은 이내 온 몸에 퍼져 행복 에너지를 발산한다. 

어스름한 초저녁 라이딩이 끝나면 미똑이는 땀을 훔치며 천천히 의상실로 향한다. 미똑이의 집은 이곳에서 끊인 신라면이 불지 않는 거리에 있어 나는 의상실에 자리를 잡고 오늘도 부라더미싱 할배와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오늘도 고맙고 수고했어. 찐아!(천진)”하고 애인에게 작별인사를 하듯 찡긋하고 미똑이는 사라진다. 자기 전에 물기와 먼지를 털어내고 관절 곳곳을 재봉틀 기름으로 마사지를 해준다.
철자전거 10년이면 애완견 10년처럼 인간 팔순에 해당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2층 주인집의 몰티즈 기동이는 열여덟 살인데도 동안으로 인기 짱이다. 나도 닦고 조이고 기름 쳐서 오래 오래 살면서 우리 미똑이를 업어주고 싶다.

150년 전 우리네 선조 오디너리 할머니가 블루밍 바지와 함께 여성들을 해방시켰다면 나 찐이는 코로나의 암울시대를 만난 미똑이를 책임지고 지켜 주리라. 밝고 건강하게.
같이 힘내서 달리고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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