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아름답다!

설악에 뿌린 눈발에 도시의 가로수도 떨고 있다. 새파랗던 이파리들은 이대로 떨어지면 쿵 아플까봐 최대한 무게를 덜어 여윈 노랑으로 또는 불그스레한 날개짓으로 사뿐사뿐 내려앉는다.
우리가 즐겨 찾는 곳은 도시의 뒷골목이다. 삐까번쩍 세련된 회색 빌딩숲보다는 어눌하지만 정감이 있는 일상과 마주할 때 마음이 편안해진다.
창신동 산동네는 일수쟁이처럼 만나기 싫은 추위가 윙윙 서둘러 오는 곳이다. 비스듬하게 이어지는 땜빵 시멘트 길은 가파르게 오르는 허리에 못 이기고 우툴두툴 계단으로 탈바꿈한다.
이제 달이는 나를 모셔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탈것이 상전이 된 것이다. 에헤라디야~

나는 소형 자전거, 즉 미니벨로다. 덩치로 깔아뭉개고 속도가 권력인 시대에 발발이 미니벨로라니. MTB도 투나이너가 대세라고~. 물론 알지! 잘 알고말고!
하지만 소 잡는 칼로 닭 잡겠다고 덤비는 바보는 없겠지. 비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에서는 내리기 쉽고 방향전환이 수월한 조그마한 몸집이 절대신공이란다. 그래서 우리 소인족, 미니멀리즘도 시대의 부름에 맞춰 태어났지. MTB도 나오기 전인 1960년대 오일쇼크로 기름 가격이 하늘 엉덩이를 찌르자 영국에서 미니 자동차가 만들어졌고 알렉스 몰튼 박사가 우리 가문을 일으켜 세웠어. 마침 그때 미니스커트도 아찔한 유행을 탔고.

그 후에도 우리 미니족은 거인족의 낭비와 사치 속에 경제가 망가질 때마다 나타나 지구를 구하곤 했지. 슈퍼맨이 망토를 펄럭이며 날고 있을 때 우리는 허리를 접고 핸들을 꺾어 박쥐처럼 몸을 웅크려 적들의 요새에 침투하지.
난체하는 부랄통 대공, 스딸당 백작, 따온느 귀부인, 구라뎅 기사는 상젤리제 거리를 활보하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다지 내세울만한 가문 출신도 아니고 절반으로 접히는 요술봉도 없는 민초 미니라네. 그래도 접는 부위(힌지) 때문에 무거워지거나 부러질 염려가 없고 부피를 줄이자고 하면 앞뒤 바퀴를 그냥 빼기만 하면 되지. 캄파 형이 80년 전에 만들어준 퀵릴리스 레버가 있어 공구 없이 순간 탈착이 가능하거든. 무엇보다 달이가 다시 페인팅하고 데칼까지 코디해줘서 ‘온리원 미니’로 재탄생했지.

내 단짝 달이는 인간보다는 우리 자전거하고 더 친하게 지내라는 운명을 타고난 것 같아. 폭력 아빠와 욕쟁이 새엄마 그리고 굴러온 누나와의 동거는 초딩 5학년에겐 최악의 환경이었지.
그때 외삼촌의 선물, BMX는 지옥의 불구덩이를 가로질러 탈출하는 모터크로스였어. 붕붕~~
집에서의 왕따 달이는 친구들에겐 짱이었고 학교가 파하면 골목길을 빠져나와 울퉁불퉁 논밭길을 달리다 보면 하늘 저편에서 엄마가 빙그레 웃고 있었대.
안장에 앉아 빵을 씹으며 고독을 삼켜버렸다나 뭐래나. 세상에서 젤 편한 자리가 자전거 안장이더래.

이제 흐른 세월만큼 희끗희끗 귀밑머리 달이는 180의 장신이라 허리를 숙이고 나를 항상 챙긴다. 우리는 나이프엔 포크처럼 붙어 다녔고 꺼꾸리와 장다리라 놀리기도 하지. 어릴 적 20인치 BMX를 특별 경험한 DNA 덕분에 계속 같은 사이즈만을 고집하고 있나 보다.
자칭 ‘골목 탐사 전문가’라는 달이는 퇴색한 이발소 간판에서 추억을 읽고, 담벼락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의 얘기를 앵글에 담아 자기만의 시선으로 스토리를 적어 나가는 작가, 골목의 파수꾼이자 홍보맨이다.

쌩 찬바람이 거세지고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지붕이 보이는 걸 보니 꼭대기에 다 올라왔나보다. 벌써 나체가 된 느티나무를 기대고 구공탄 배달 지게가 달달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어이 젊은 양반, 이 삭막한 동네에 뭐 볼게 있다고 자전거까지 들고 왔수? 여기 평상에 쪼매 쉬었다 가슈.” 개미슈퍼 할머니가 문을 빼꼼 열고 쳐다본다.
“그래 좀 쉬어갈까. 李公! 자네도 내 옆에 앉게.”
“엥? 이공이라니? 이 자전거도 이름이 있능가?”
“예, 있고말고요. 저는 정선달이고 이 친구는 이선달이라고 불러요.”
갑자기 욕심 아니 욕망이 생긴다. 올 겨울에는 인간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싶다.
아주 깊게! 푹~~ 어매 겁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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