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戰勢)를 일거에 바꾸고 대한민국을 구하다

‘상륙작전은 한물갔다’는 상륙작전의 무용론 속에서…

3년 넘게 싸웠던 6·25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최대의 전환점이 어디였느냐고 물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인천상륙작전이었다고 말한다. 6·25전쟁 최대의 전환점이었던 인천상륙작전과, 6·25전쟁 발발 사흘 만에 북한군에게 빼앗긴 수도 서울을 탈환한 작전은 구분된 작전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전개된 작전이었다. ‘수도 서울의 탈환’을 인천상륙작전의 실질적인 목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크로마이트작전의 범위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 제10군단과 낙동강방어선으로부터 총반격작전을 실시한 미 제8군의 연결 작전까지도 포함하여 넓게 보아야 한다. 6·25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 수복을 이룬 것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1950년 9월 15일과 28일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이달에는 인천상륙작전으로부터 서울 수복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꺾일 것 같지 않던 북한군의 공격 기세가 저지된 곳은 낙동강방어선이었다. 북한군은 가용 전력 모두를 쏟아 부으며 이 저지선을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이 벽을 넘지 못한 채 멈칫거려야만 했다. 이곳을 넘기에는 힘이 달렸던 것이다. 
유엔군은 전세를 일거에 반전시킬 ‘비장(秘藏)의 작전’을 결행했다. 그것이 바로 ‘5000 : 1의 도박,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낙동강전선에서의 ‘총반격작전’과 연결되면서 6·25전쟁의 전세가 급전되기 시작했다. 
미 제10군단은 9월 15일 최악의 상륙 조건을 갖춘 인천에 기습적인 상륙돌격을 감행하였고, 다음 날 상륙작전의 목표인 ‘해안두보’를 확보했다. 이어서 공세를 계속하여, 전쟁 발발 3일 만에 빼앗겼던 수도 서울을 93일 만에 다시 탈환했다. 그 다음 날, 역사적인 환도식이 중앙청에서 거행됐다. 
인천상륙작전 다음 날을 기해 총반격작전을 개시하여 북상해 온 미 제8군(제1기병사단)과, 인천에 상륙하여 수원으로 남진한 미 제7사단(31연대)은 9월 27일 오산 북방에서 연결했다. 이로써 북한군 14개 사단이 대규모 포위망에 갇혔고, 이 중 2.5~3만 명만이 포위를 벗어나 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어서 10월 1일을 기해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작전을 펼쳐 나갔다. 인천상륙작전의 파급 효과는 이렇게 엄청났다.

인천상륙작전
개  요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사단, 국군 해병대 제1연대와 육군 제17연대로 구성된 미 제10군단이 북한군들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에 상륙한 작전이다. 이 작전은 상륙 당일, 인천을 방어하고 있던 북한군(인천경비여단과 9사단 예하 제87연대)을 격파하여 월미도와 인천시가지를 확보했다. 다음 날인 16일에는 상륙해안으로부터 10여km 내륙 일대까지 진출함으로써 상륙작전의 실질적인 목표인 ‘해안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서울을 향한 공격 발판을 마련하였다. 

북한군의 대비 
당시 인천 일대를 방어하던 북한군은 월미도 방어병력 400여 명을 비롯해 2,000여 명에 달했다. 서울 지역을 경계하던 부대들 중에서 9사단은 8월에 낙동강전선으로 이동했으며, 18사단도 9월 중순에 낙동강방어선 돌파에 가담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서울 · 인천지역에서 활동 중인 적의 총병력은 1만 명 정도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별도의 부대들을 추가적으로 증원할 여력이 되지 않았고, 해 · 공군도 상륙작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상륙작전의 전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함정 261척에 병력 7만5천명 규모였다. 4만여 명의 상륙군이 투입된 인천상륙작전은 제1진인 제5해병연대 3대대(500명)가 월미도에 상륙하면서 전개됐다. 9월 15일 새벽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어둠 속에서, 사전에 침투한 특수부대가 밝힌 팔미도 등대의 불빛 안내에 따라 ‘비어수로(飛魚水路)’에 진입한 상륙함정으로부터 ‘상륙주정’들이 발진했다. 상륙주정 7척으로 이루어진 제1파는 맹렬한 항공폭격과 함포지원, 해병 항공기의 근접항공지원을 받으며 06:33에 월미도에 설정된 ‘녹색해안’에 첫발을 내디뎠다. 뒤이어 전차와 후속병력이 속속 도착하면서 전투력을 증강시켜 나갔다.  
월미도가 인천항 일대의 전 지역을 굽어보며 모든 접근로를 통제할 수 있는 요지라서, 이곳을 제압하지 않는 한 인천항 어느 곳에도 상륙할 수가 없다. 월미도에 상륙한 대대는 저항하는 적들을 제압하여 08시에 월미도 최고봉인 월미산(105m)을 점령했고, 정오경에는 월미도 전 지역에 대한 소탕작전을 완료할 수 있었다. 월미도 점령 과정에서 북한군 108명이 사살되고 136명이 생포됐다. 150여명은 참호 내에서 매몰된 것으로 추정됐다. 미 해병대는 17명의 부상자만 발생했다. 

 

대대가 상륙한 뒤 썰물이 되면서 거대한 해안 개펄지대가 드러나자 많은 함정들도 외해로 물러났다. 월미도에 상륙한 대대는 적진 한 가운데에 완전히 고립된 채 11시간 후의 다음 물때에 상륙할 후속부대를 기다려야만 했다. 극도의 긴장된 순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900m에 불과한 방파제를 따라 북한군이 증원해 올 경우, 월미도에 상륙한 1개 대대만으로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초조의 시간이었다. 다행히 북한군은 그런 절호의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 그런 초조의 11시간을 버티고 나서야 후속부대가 상륙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긴장의 시간이 지나고 오후 만조시간(17:30)이 됐다. 제5해병연대(본대)와 국군 제3해병대대가 ‘적색해안’에 상륙하여 월미도를 사수하던 3대대와 연결했고, 미 제1연대는 ‘청색해안’에 상륙했다. 국군 해병연대 본대도 해질녘에 적색해안에 상륙했다. 오후 물때에 상륙한 적색 · 청색해안은 5m 내외의 해벽(海壁)으로 이뤄져 있어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극복할 수 없는 곳이다. 해벽을 통과한 직후에는 적의 강한 저항으로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미 제1해병사단은 첫 만조시간에 맞춰 월미도를 탈취한데 이어, 오후 만조시간대에는 인천시가지에 인접한 해안에 직접 상륙하여 인천 중심가까지 진출했다. 16일 새벽부터는 시가지 전투를 전개하여 인천 도심을 장악해 나갔지만, 해안두보를 조기에 확보하기 위해 공격 속도를 높이느라 북한군을 완전하게 제압하지는 못했다. 국군 해병부대들은 시가지에 진입하여 저항하는 잔적들을 소탕하는데 집중 투입함으로써 미 해병연대들의 진출 속도를 보장했다. 16일 저녁 무렵, 상륙해안으로부터 내륙으로 10여km까지 진출함으로써 상륙작전의 실질적인 목표인 ‘해안두보’ 확보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해안두보를 확보한 이후, 미 제1해병사단은 서울 탈환작전에, 미 제7사단은 서울 남부지역작전 및 미 제8군과의 연결 작전을 전개하였다. 

인천상륙작전 반대를 설득한 맥아더 장군
인천상륙작전을 ‘성공 가능성 5000 : 1의 위험하고 불가능한 작전’이라며 반대 의견이 많았다. 심지어 맥아더장군의 참모나 예하 지휘관 중에서도 반대 의견이 많았다. 미 합참은 인천지역의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와 상륙가능 시간의 제한, 반격부대(낙동강방어선 부대)와의 과도한 이격으로 인한 각개 격파의 위험성, 낙동강방어선 유지의 곤란 등을 들며 인천 상륙작전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어렵다는 주장의 저변은, 무엇보다도 인천이 갖는 지역 특성 때문이었다. 수로 자체가 좁고,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261척이라는 대규모 연합 함대가 작전을 전개하기에는 위험성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함정들이 인천항으로 접근할 때 이용할 수 있는 수로는 단 두 개이다. 팔미도 일대에서 합류하면, 상륙해안까지 약 15km의 ‘비어수로(Flying Fish Channel)’가 된다. 간만의 차가 크고 수로의 물살이 최고 7~8노트로 빨라서 속도가 느린 상륙함정은 기동 자체도 쉽지가 않다. 수로의 폭도 2km 정도로 좁고, 수심도 15m 내외여서 수로 내에서 함정 간 충돌사고가 발생할 경우 수로 전체가 봉쇄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만약 북한군이 기뢰를 부설한다면 인천 상륙작전 성공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실시 가능 여부의 문제가 될 수 있는 여건이었다. 또한, 수심이 얕고 조석 간만의 차가 커서 상륙 가능한 날짜는 매월 3일 정도이고, 하루 두 번 있는 만조시간 대 2~3시간씩만 상륙이 가능하다. 이때를 이용하지 못하면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하는 등 온통 어려움뿐이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거의 모든 북한군 부대들이 낙동강전선에 투입되어 있어 인천지역 방어가 허술하므로 기습 달성이 가능하다.” 또한, “병참선이 과도하게 늘어져 있어 서울을 경유하는 도로망 · 철도망을 신속하게 차단할 경우 낙동강방어선 부대들의 전투능력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등의 의견을 제시하며 인천상륙작전을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북한군도 인천을 상륙지역으로는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수도권을 방어하던 일부 부대들을 낙동강전선으로 투입하여 낙동강방어선 돌파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점도 강조했다. 바로 이런 점들을 들어 인천상륙작전에 반대하거나 회의를 갖는 고위 군사지도자들을 합리적으로 설득하여 자신의 소신을 관철시켜 나갔다. 
북한은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소련으로부터 약 4천발의 기뢰를 제공받아 상륙 가능한 지역에 부설했다. 원산 일대에 약 3천발을 부설하고 나머지는 서해의 진남포, 해주, 인천, 군산 등에 고루 부설했다. 다행스럽게도 북한군은 인천에 대한 상륙작전 가능성을 낮게 봤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양의 기뢰를 부설하지 않았다. 인천 수로에 설치됐던 기뢰(12개)도 상륙작전 직전에 발견하여 폭파함으로써 안전한 가운데 상륙작전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계획’은 이후에도 수많은 논쟁과 반대를 거쳐, 마침내 대통령의 지지를 얻어 8월 28일 부로 ‘크로마이트 작전계획’이 승인됐다. 

 

장사상륙작전은 어떤 작전인가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대규모 상륙작전인 경우, 끝까지 보안을 유지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 작전에 참가하는 많은 부대와 함정들이 일본의 각 항구에 도착하고 승선하는 모습이 자주 노출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맥아더는 ‘상륙 장소 · 시기’를 숨기기 위해 마지막까지 다양한 기만활동을 계획하고 시행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동 · 서해 상륙 가능 해안(삼척 · 주문진 · 군산 · 남포 등)은 물론, 북한지역(원산만, 진남포, 해주 등)에 대해서도 항공폭격과 함포사격을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군산 지역에는 미 · 영 특수부대를 투입하고 지역 주민 대피를 위한 홍보전단을 살포했으며, 동해안 ‘장사’ 지역에서는 실제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등 수많은 기만대책을 계획 · 시행했다.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날인 9월 15일 영덕군 동해안에서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가 실시한 상륙작전을 말한다. 대부분 학도병으로 구성된 유격대대(772명)가 지원세력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작전을 감행하여 상륙에 성공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장사동에 상륙하여 동해안의 유일한 보급로인 7번 국도를 차단하고 후방지역을 교란시켜 국군 제1군단(포항・안강)의 작전을 유리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유격대대는 상륙 후, 공중보급과 항공・함포지원을 받아가면서 북한군을 격퇴하고 낙동강방어선으로 연결되는 북한군의 보급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급기야 주보급로 차단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북한군이 2개 연대를 영덕 방향으로 전환함에 따라 국군 제1군단에 대한 적의 압박을 완화시키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유격대대의 고립 상황이 장기화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격대대와 문산호 선원 구출작전을 전개하여 부상자를 포함해 생존자들을 부산항으로 복귀시켰다. 하지만 미처 승선하지 못한 30여 명을 남겨놓은 채 복귀해야만 했다.
장사상륙작전이 일반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갈 즈음, 해병대에 의해 문산호가 발견되면서(1997년) 장사상륙작전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관련 세미나가 이어지고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이 조성되었는가 하면(2014년), 지난해에는 장사동 해안에 LST-문산호를 본뜬 함정형태의 ‘전승기념관’까지 개관했다.
장사상륙작전에 대한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인식은 ‘인천상륙작전에 기여하기 위해 실시한 기만작전’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관련 자료들이 발견되고 연구가 진척되면서 ‘기만작전’이라기보다는, 낙동강방어선에서 작전 중인 국군에 대한 북한군의 압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지원 작전으로 보는 경향이 우세해지고 있다. 장사상륙작전에 관한 연구의 추이를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서울 탈환 작전
‘해안두보’를 확보한 미 제10군단은 9월 17일부터 서울을 향한 진격작전을 시작했다.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제1해병연대는 서울의 서쪽에서 중심부로 공격해 들어가고,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는 서울의 남쪽으로 진출하여 북한군의 증원 · 퇴로를 차단하는 한편,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여 북상하는 미 제8군과 연결하도록 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되면서 연합군의 서울방향으로의 공격이 확실해지자 북한군은 서울 주변은 물론 후방지역의 가용 부대들을 서울로 집결시켰다. 낙동강방어선 돌파를 증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시킨 부대들까지도 급히 복귀시키는 등 서울지역 방어력 강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서울 방어를 위한 북한군의 전체 규모는 약 2만 명으로 증가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미 제1해병사단의 서울 방향 진출 
미 제1해병사단은 9월 17일 07시를 기해 서울 방향으로 공격작전을 전개했다. 경인가도 북쪽에서 진출하던 제5해병연대는 부평 일대에서 인천상륙지역으로 투입되던 부대를 비롯해 산발적인 북한군의 저항을 격퇴하고 9월 18일 08시를 기해 김포비행장을 완전 장악했다. 이어서 개화산 일대에 설정된 ‘한강 도하 출발지’를 점령하여, 9월 19일 야간에 ‘은밀 도하’를 실시했으나 행주산성 일대의 적 저항에 의해 좌절되었다. 9월 20일 아침 엄청난 포격을 실시하여 적을 무력화시킨 상태에서 국군 해병부대들과 함께 한강을 도하해 행주산성을 탈환한 뒤, 서울 서 측방 ‘수색’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18일에 확보된 김포비행장에 전개한 전투기들은 이곳에서 출격하여 서울탈환작전에 대한 항공지원작전을 전개했다.
경인가도 남쪽에서 영등포로 진출하던 제1해병연대는 ‘소사’를 거쳐 19일에 영등포 서쪽까지 진출했다. 다음날, 교통과 보급의 중심지인 영등포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에 봉착해 고전하였으나, 22일이 되면서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영등포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일부 부대를 노량진(한강인도교)까지 진출시킨 가운데, 제1해병연대의 주력은 24일을 기해 여의도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합정동(서강)’ 일대까지 진출했다. 
9월 23일 제7해병연대가 능곡(고양시) 일대에 전개하여 제1해병사단의 좌 측방을 엄호하면서 북방에서 서울에 이르는 적의 진로를 차단했다. 이로써 제1해병사단 예하 3개 연대가 병진으로 서울 중심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서울 탈환의 고비, 104고지전투와 연희고지전투 
9월 20일 제5해병연대가 행주 일대에서 한강을 도하할 때만 해도 잠잠하던 북한군의 저항은 ‘수색’을 거쳐 서울로 진격해 가자 강해지기 시작했다. 
수색을 지나면서부터 국군 제1해병대대가 공격의 선봉에 섰다. 군인은 전장에서 공격의 선봉에 서는 것을 명예로 생각한다. 국군 제1해병대대가 주공부대로 지정되어 선봉에 선 것은, “앞으로 전개될 서울 탈환작전에 한국 해병대가 앞장서게 해 달라”는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창설된 지 1년이 조금 넘은 시점이라, 전투경험과 장비 면에서 부족하지만 정치적 고려와 사기를 감안해 맥아더와 10군단장이 받아들인 것이다. 국군 제1해병대대는 ‘연희동 104고지’와 ‘연희고지(연세대 서측)’에 대한 공격 임무가, 제5해병연대 예하 대대들에는 북쪽의 ‘안산’과 남쪽의 ‘와우산(홍익대)’ 공격 임무가 주어졌다. 
한국 제1해병대대는 9월 21일부터 22일 새벽 사이에 104고지를 놓고 북한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격전을 벌였으나 큰 피해 없이 ‘104고지’를 확보했다. 해병대대의 다음 공격목표는 1km 떨어진 ‘연희고지’였다. 연희고지는 ‘안산-연희고지-와우산’으로 연결되는 북한군의 최후 방어선 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을 통과하면 서대문을 거쳐서 중앙청・광화문에 곧장 닿을 수 있다. 그래서 북한군은 이 방어선을 연해서 동굴진지까지 구축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방어하고자 했다. 
한국 제1해병대대는 서울 진입의 선봉부대라는 자부심을 걸고 ‘연희고지’ 전투에 돌입했다. 그러나 22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전투에서 전차와 야포로 증강된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참전 후 최대의 피해를 입고 예비대대와 임무 교대했다. 임무를 인수한 미 제5해병연대 2대대도 많은 피해를 입으며 고전했으나, 강력한 항공・포병사격 지원 하에 공격을 감행하여 마침내 연희고지를 점령했다. 1개 중대가 26명만 남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연희고지 일대에서 확인된 적의 시체는 무려 1,500구가 넘었다. 
연희고지 일대를 적의 전초진지 정도로 판단했으나 사실상 북한군의 서울 서 측방 방어의 최후 보루였다. 한국 제1해병대대와 제5해병연대 2대대에 의해 수행된 연희고지 전투는 서울 탈환작전 간 가장 치열하고 가장 결정적인 전투였다. 

 

서울 탈환 작전계획의 변경,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의 서울 공격 투입 
미 제7사단 본대와 국군 제17연대는 9월 18, 19일에 인천에 후속 상륙했다. 이들에게는 한 · 미 해병대가 서울 북서쪽에서 서울 중심부로 접근할 동안 서울 남 측방에 대한 엄호,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해 올라오는 미 제8군과의 연결 임무가 주어졌다. 이에 따라 미 제32연대와 국군 제17연대는 영등포 남쪽을 거쳐 과천과 신사동 일대로 진출했고, 미 제31연대는 수원비행장을 확보한 상태에서 오산 일대에서 미 제8군과 연결하기 위해 남진하였다.  
한 · 미 해병대가 한강을 도하한 지 4일이 지난 23일까지도 서울 서 측방 방어선을 뚫지 못하자, 미 제10군단장은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 일부 부대를 서울 공격에 추가 투입하여 북한군을 압박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리하여, 9월 25일 06시를 기해 ‘신사동’에서 ‘서빙고’ 방향으로 도하 공격을 실시했다. 도하 후, 미 제7사단 32연대는 남산과 장충동 · 왕십리 방향으로 진출하고, 국군 제17연대는 서울 동쪽 ‘용마산’과 망우리 일대를 점령하여 북한군의 탈출로인 경춘도로를 차단했다. 25일부터 미 제7사단 32연대와 국군 제17연대에 의해 실시된 서울 남쪽으로의 공격은 서대문과 마포에서 중앙청(광화문) 방향으로 공격 중이던 미 제1해병사단에 큰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극이 되어 해병부대들의 진출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한 · 미 해병부대들의 서울 도심 진출, 서울 탈환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의 한강 도하 및 서울 탈환작전에 투입하는 것으로 계획이 조정되면서 한 · 미 해병부대의 마음이 급하게 됐다. 서울 도심으로의 진출을 서둘렀다. 
24일 아침, 제5해병연대 1대대의 엄호 아래 서강 일대로 한강을 도하한 제1해병연대(한 해병대 2대대 포함)는 마포를 경유하여 중앙청 방향으로의 진격에 박차를 가했다. 24일 오전 연희고지에 이어 서측방방어선을 돌파한 제5해병연대(한 해병대 1대대 포함)는 24일 야간부터 서울 서 측방으로부터 진입하기 시작했고, 제7해병연대는 제5해병연대의 좌측(홍은동, 평창동 방향)으로 진출했다.
북한군이 중앙청(광화문)에 이르는 접근로 요소요소에 지뢰를 매설하고 진지를 구축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25일부터 28일 서울 수복 때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은 무차별 공중 폭격, 함포 및 포병지원사격으로 인해 북한군의 저항은 도처에서 비참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26일이 지나면서 북한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크게 감소되었으나 그래도 마지막 저항은 계속되었다. 한 · 미 해병대는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의 지원에 힘입어 중앙청 방향으로의 진출 속도를 배가해 나갈 수 있었다.
드디어 27일 새벽(06:10) 한국 해병대가 석달 동안 인공기가 게양되어 있던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서울 탈환작전의 하이라이트가 아닐 수 없다. 28일을 기해 서울 4대문 내 잔적 소탕을 완료함으로써 서울시를 완전 장악했다. 이로써 전쟁 발발 3일 만에 북한군에 탈취당한 서울은 93일 만에 다시 수복되었다. 그리고 29일 12시에 중앙청에서 ‘환도식’이 열렸다. 인천 월미도에 첫발을 내디딘 지 2주간의 작전이 일단락된 것이다.

 

10군단과 8군의 연결, 거대한 포위망의 형성 
‘크로마이트 작전’의 또 다른 임무는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해올 미 제8군과 연결하여 거대한 포위망에 갇힌 북한군을 격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 제7사단 31연대가 수원으로 진출하여 수원비행장을 확보한 상태에서(‘모루’가 되어),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북상 중인 미 제8군의 연결부대(린치 특수임무부대, ‘망치’)의 북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제8군과의 연결이 성공한다면 인천상륙작전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지만, 만약 연결이 실패할 경우에는 수도 서울을 탈환한 제10군단의 배후가 위협받을 수 있어서 인천상륙작전의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국군 해병대에 의해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된 27일 당일 08시 경 오산 북방에서 미 제10군단과 제8군이 연결됐다. 이로 인해 대규모 포위망이 형성됐다. 
유엔군의 대규모 포위망을 벗어나 38도선 이북으로 돌아간 북한군은 2.5~3만 명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됐다. 미 제8군은 반격작전 간 상륙작전부대인 제10군단과의 신속한 연결에 주력한 나머지 잔적 소탕을 소홀히 했다. 상황이 진전된 후 천천히 소탕해도 될 존재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한 패잔병 3만 여명은 이후 게릴라가 되어 오대산 · 태백산 · 지리산 등지로 잠입해 아군 후방에서 병참선 차단과 습격 등 후방교란 임무를 수행한 암적인 존재로 변했다. 

국군 해병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다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전개된 서울 탈환작전 과정에서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것은 서울 탈환작전의 대미를 장식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부대는 국군 제2해병대대 소속 6중대 1소대였다. 이 부대는 미 제1해병연대에 배속되어 서울시청을 거쳐 미아리 방향으로 공격 중이었기 때문에, 중앙청은 대대의 책임지역 밖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앙청은 서울 서 측방에서 공격해오는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제1해병대대의 책임지역 내에 있었다. 당시 두 부대는 서울의 서 측방방어선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나머지 중앙청으로의 진출이 지연되고 있었다.
박정모 소대가 ‘중앙청 태극기 게양 계획’을 세우게 된 경위는 이렇다. 박소위 소대는 9월 26일에 서울시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후, 종군기자(박성환)와 인터뷰 하는 과정에서 “중앙청에는 우리 국군이 태극기를 올려주기 바란다”라는 대통령의 의지를 알게 되었다. 박소위는 “온 국민이 소원하는 나라의 심장에 태극기를 올리는 일만은 꼭 우리 해병대의 손으로 하고 싶다”는 각오로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할 것을 계획했다. 박소대장은 대대장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은 다음, 27일 새벽 소대원 총원과 함께 중앙청으로 이동하여 소대원들의 엄호 하에 소대장외 2명이 중앙청 돔으로 올라가서 06:10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지 3개월 만인 27일 이른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중앙청의 태극기는 힘차게 휘날렸다. 
당시,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리는 부대에 상금 3천만 원이 걸려있었다’는 얘기도 알려지고 있다.

 

70년 전의 서울 탈환작전을 기억하는 어떤 기념비도 기념공간도 없다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한 지 13일 만인 9월 28일 수도 서울을 완전 탈환했다. 전쟁 개시 사흘 만에 적에게 빼앗겼던 수도 서울을 다시 탈환한 것은 어느 한 전투에서의 승리와 어느 한 지역의 회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차원이 다르고 의미도 다른, 실로 엄청나며 감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을 사는 국민들에게 70년 전에 있었던 6·25전쟁은 어느새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경향이 있다. 하물며, 서울 탈환작전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얼마나 될까. 앞으로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서울 시내 어디에도 70년 전에 있었던 ‘서울 탈환작전’을 기억하게 하고 그날을 기리는 기념물이나 기념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서울 탈환작전 간 있었던 전투와 관련된 기념 조형물이 2개가 있기는 하다.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행주산성)와 ‘해병대 104고지 전적비’(서대문구 연희동)가 전부다. 서울 탈환작전 간 해병대가 수행한 주요 전투 현장에 선배 해병들의 공적을 기리고, 희생된 장병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1958년 해병대 자체에서 건립한 것이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6개 사단)가 수행한 ‘한강방어선작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6일 간의 한강방어선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든 작적이었다. 그런데 한강방어선작전과 관련된 전적비는 백골연대(육군 제18보병연대) 예하 제3중대가 전투한 것을 기리는 ‘한강방어 백골부대 전적비’가 유일하다. 백골전우회에 의해 양화인공폭포 곁에 건립했다가 지난 해 여의도 고수부지로 이전했다.
해병대에서는 매년 9월 28일에 ‘서울수복 기념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1995년 중앙청(구 조선총독부)이 철거되기 전까지는 중앙청 앞 광장에서, 중앙청이 철거된 이후에는 경복궁 내의 적절한 공간에서 실시해왔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서는 서울시청 앞 광장이나 전쟁기념관 광장 등 여기저기 순회(?)하면서 행사를 열고 있는 실정이다. 70년 전에 한 나라의 수도를 적의 수중으로부터 탈환했던 역사적 사실에 걸맞은 기념물이나 기념 공간 하나 제대로 없다는 것이 맞는 것일까?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할 때다. 특정 인사(人士)나 특정 사건의 경우는 이런저런 기념 조형물이나 기념회관이 넘치도록 건립하는 것과 비교하면 더욱 안타깝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경우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 서울시의 경우를 인근의 인천광역시나 춘천시, 칠곡군 등의 지자체와 비교하면 너무 차이가 나서 더욱 아쉬움이 많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오늘의 서울은 70년 전 그들이 흘린 피와 생명의 대가가 아닌가.  

작전의 결과와 이후의 전개 
맥아더장군의 구상에 의한 ‘크로마이트 작전’, 인천에 상륙한 제10군단이 ‘모루’가 되고 제8군이 ‘망치’가 되어 포위망 속의 북한군을 때려잡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 인천으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동안 국군과 유엔군의 총 손실은 4천여 명이었던 반면, 적은 사상자 1만4천여 명, 포로 7천여 명이 발생했고 수많은 장비를 잃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대한민국의 정치 · 경제 · 정신적 중심인 수도 서울을 되찾음으로써 6·25전쟁의 구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월미도에 첫발을 내디딘 지 불과 15일 만에 38도선 일대까지 다시 도달하는 등 모든 것이 전쟁 전으로 돌아왔다. 북한군은 무엇보다도 병참체계에 결정적 타격을 입음으로써 패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38도선 이남을 회복한 국군과 유엔군은 전쟁 재발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고 한반도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북한군을 완전히 격멸하기 위해 10월 1일부터 국군 제1군단(3사단)을 필두로 군단별로 38도선을 넘어 북한지역으로 총진격작전을 전개해갔다. 

 

참고자료
<6·25전쟁사>(제5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8   <6·25전쟁사 부도>, 육군대학, 2007   <6·25전쟁의 실패 사례와 교훈>, 육군군사연구소, 2013   
<우리가 겪은 6·25전쟁>(Ⅱ), 대한민국육군협회, 2012   <굳세어라 금순아를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 기파랑, 황금알, 2014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