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차의 고백

나는 완벽한 국산이다. 한국산? 아니 중국인이 말하는 국산 즉 중국산이지. 나는 1년 365일 내내 메케한 스모그가 뒤덮고 있는 회색 도시, 톈진에서 태어났다. 인간들이 말하는 숟가락의 등급으로 치면 흙수저는커녕 구멍이 숭숭한 똥바가지에 속할 것이다. 어쩌면 태어나지 말아야 할 귀태(?)인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뭐 태어나고 싶어서 세상에 나온 것도 아니니 나를 학대할 필요는 없지만 대책 없는 저질 체력은 영혼마저 비틀거리게 만든다. 그래서 밤마다 콩알보다 작은 개미의 장풍신공에 온 몸이 박살나는 악몽에 식은땀을 훔치고 있나보다.

나는 소위 말하는 ‘사은품 자전거’다. 신문을 봐주면, 우유를 마셔주면, 학습지를 신청해주면 덤으로 받는, ‘자전거처럼 생긴 자전거’다. 자라처럼 생긴 솥뚜껑인 셈이다. 구두 한 켤레 값보다 싼 원가로 중국 왕사장한테 품질 따위를 꺼냈다가는 소금 털털이가 될 것이다.
세상에 싸면서 좋은 물건은 절대로 없다. 있다면 사기일 뿐이다. 그래도 나의 명칭은 ‘유사 MTB’이다. 말이 좋아 유사지 사이비 즉 가짜라는 뜻이다. 그것도 모르고 술도 아닌 우유에 취한 아지매는 나를 이끌고 유사가 아닌 진짜 아들에게 향한다.

제주 오름처럼 여드름이 봉긋봉긋한 풋내기 앞에서 나는 신병처럼 바짝 쫄아 하체가 후들거린다. 다짜고짜 핸들을 잡고 안장에 턱하니 올라서더니 숨 쉴 틈도 없이 페달을 밟아댄다. 핸들을 마구잡이로 꺾을 때는 목뼈가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 오른쪽 그립을 쉴 새 없이 비틀어 체인과 스프라켓은 탱고인지 왈츠인지 국적불명의 미친 춤을 추고 있다. 그러다가 정작 오르막에는 변속을 못해서 체인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내리막 끝자락에서 탄력 붙은 속도에 겁먹은 풋내기는 엉겁결에 왼쪽 브레이크를 잡았나 보다. 끼이익~~ 나도 모르게 앞발을 멈추면서 궁둥이로 그를 냅다 튕겨 버렸다. 와장창 쿵쿵~~

찰떡궁합 천생연분이었다. 불량 자전거와 무대포 인간과의 만남이었다. 
”핸들은 안으로 접힌다”고 했던가. 꾀병 아들(일낸 분)은 아이스크림을 골라서 쳐드시는 동안 나(일 당한 넘)는 엄동한설 찬바람에 설움을 말아서 넘기고 있다. 그것으로 풋내기와의 터치는 끝난 셈이다. 그리고는 그 우두커니 선 자세로 다시 겨울이 오고 또 왔다갔다. “오! 필승 코리아! 대ㆍ한ㆍ민ㆍ국”에 간다고 엄청 좋아했는데. 뚝섬유원지에 취직했다는 단짝 쌍륜이도 만나야 하는데.
움직이는 바퀴가 있는 놈이 가만히 서서 이렇게 온 몸이 뻣뻣해지고 녹이 뱀의 혀처럼 날름날름 내 몸을 핥을 줄이야. 속 터진다, 내 팔자야. 차라리 아프리카에 갔었더라면 매일 힘들게 일해서 핸들은 속살이 드러나고 안장코에 쌍코피 쭉쭉 흘러도 보람은 있을텐데. 이럴 바엔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용광로에 직행하여 화끈한 불목욕이나 찐하게 했으면.
 
허나 우리는 싸구려 철 쪼가리에 부피 많이 차지하고 분리수거 귀찮다고 고물상에서도 손절매 품목이란다.
허브 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나보다. 우리라면 사족을 못 쓰는 미친 놈 아니 구세주가 떡하니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의 작업실은 방치, 폐기된 그야말로 버려진 동족 즉 폐족들의 은신처이자 신분 세탁소이다.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운단다. 우리 같은 쓰레기도 쓸모 아니, 가치가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다는 개똥철학에 침을 튀긴다. 그래서 나는 쿨하게 200여개의 장기(?) 포기각서를 제출하고 수술대에 다소곳이 올랐다. 그라인은 윙윙거리고 전동 드릴은 살갗을 뚫고 들어오고 용접 토치는 뜨겁고 살벌하지만 참고 견디기로 했지.

구세주는 ‘비치맨’(bici man)을 만들 거란다.
심장 같은  7단 스프라켓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쓸모가 많다. 비치맨의 손과 엉치뼈로 자리 잡았다. 구불구불한 체인은 금발이 되기도 하고 마이다스의 황금 손가락으로 어필한다. 체인휠은 동그란 얼굴이면서 동시에 든든한 신발이 되어준다. 포크는 서로 엉켜 튼실한 허벅지가 되고 스프링 안장발은 튀어 오를 기세다. 요염한 포즈를 잡아주던 스탠드는 허파가 되어 숨을 쉬고 있다.
머드가드는 늙어서도 어깨와 정강이 지킴이로 더 화려한 모습이다. 초짜 어린이의 독립만세를 돕던 보조바퀴는 이제 자랑스런 견장으로 승진했다. 폭신한 안장은 등쪽의 승모근으로 육체미를 더한다. 언제나 단짝인 풀리와 체인은 보석 같은 눈망울로 반짝인다. 관절통이 걱정되는 팔꿈치는 접이용 핸들의 무쇠팔로 무장한다. 그리고는 울긋불긋 색동옷을 휘감으니 날마다 설날이요, 때마다 까치소리다.
완전 변신한 거울속의 내 모습에 헐 쇼킹! 감동이다. 뒷간의 똥바가지가 이제는 상상의 나래에 꼬맹이들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비치맨이 된 것이다. 
저 멀리 난지도의 하늘공원에도 꽃들의 축제가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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