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 흥망의 뒤안길

700년 고대왕국 백제는 백마강변 부여에서 최후의 꽃을 피우고 또 스러져 갔다. 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는 고분과 절터, 폐탑, 버려진 성곽 정도다. 나라든, 개인이든, 물건이든 흥망성쇠의 운명은 피할 길이 없다. 지금 잘 나간다고, 지금 행복하다고 내일도 내년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전무하고, 언제 어느 때 추락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미 극한의 추락을 경험한 ‘황성옛터’는 무상(無常)의 교훈을 실감하기에 좋다. 햇살마저 조락하는 황혼녘에 폐도에 서면 하심(下心)이 절로 된다

텅 빈 백마강에 황혼이 어린다. 드넓은 둔치공원에는 산책하는 주민 몇 명이 작은 점으로 움직일 뿐 강에는 유람선도 끊겼다. 추위도 아랑곳 않고 이 강변에서 두 바퀴와 동반한 이는 나뿐이다. 그마저 히든파워의 도움이 아니라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바람은 차갑고 풍경은 쨍해도 정서가 깃들 여유는 없다. 차가운 대기에 노출된 겨울 풍경은 선가(禪家)에서 자신의 죽음을 간접체험하기 위한 수행법인 백골관(白骨觀)의 확장판이다. 여름의 그 무성했던 녹음과, 대지에 가득히 꼬물거렸던 그 다종다양한 동물과 벌레 따위는 간 곳이 없고 앙상한 뼈대만이 남았다. 생명이 거세되면, 생명이 다해도 결국 저리 될 것이다.
객지에서 홀로 맞는 황혼은 언제나 쓸쓸하고 망연하다. 다가오는 밤을 어디서 어떻게 보내야할지 아득하고, 반겨줄 이  기댈 곳 없는 신세가 뼈저린 고독을 동반한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여기 백마강을 방황하고 있다. 

강변에 응축된 영고성쇠  
백마강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고 동경하는 강변 경관이다. 이 강줄기에 한때 중원과 일본열도에까지 세력을 떨치던 고대왕국 백제의 영고성쇠가 어려 있고, 제왕은 물론 귀족과 엘리트, 천하의 미인미녀가 이곳에서 희로애락에 부침하다 사라져갔다. 이 강변이 왕도였던 것은 122년(538~660)에 불과하지만 700년 왕국이 최후의 불꽃을 피우고 꺼져간, 희비극의 교차지대였음이 극적인 비장미를 더해준다.    
부여읍내를 돌아가는 금강줄기의 별칭인 백마강(白馬江)은 백제를 정벌하러 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조룡대(釣龍臺)의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말을 희생으로 삼아 제를 올린 경우가 많았는데 용은 왕을 의미하기도 해서 의자왕을 포로로 잡은 것의 비유가 아닌가 싶다. 어찌됐든 백마강은 그 이름에마저 패망한 왕국의 상흔이 깃들어 있다. 

자온대에서 구드래나루까지 
백제교 서쪽 강언덕 위에 우뚝한 수북정에서 짧은 여정을 시작한다. 수북정 뒤편으로 상당히 크게 형성된 규암마을은 백마강을 낀 구릉지를 배경 삼아 밝고 아늑하다. 금강자전거길을 여행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쉬어가는 곳이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궁극의 쾌락과 명예, 동시에 극단적인 추락과 고통이 뒤엉켜 있는 왕성에 여전히 응어리져 있는 것만 같은 감성의 용광로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입지도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불구경, 싸움구경은 언제나 현장에서 한발 떨어져서 안전한, 그러나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봐야 가장 흥미진진한 것과 같다. 
백제교를 건너 둔치로 내려가 강변을 따라 북상한다. 건너편으로는 물위에 떠있는 것 같다는 부산(浮山)이 동그랗고 그 맞은편으로는 낙화암이 머리를 내민 부소산이 길게 흐른다. 
부소산 아래 구드래나루터 일대에는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고 ‘큰나라, 좋은 것’의 이미를 갖는데, 구드래나루터와의 친연성도 느껴진다. 
조각공원 초입에는 일본의 불교단체가 1972년에 세운 ‘불교전래사은비’가 서 있다.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기념비다. 백제 성왕은 552년 승려 노리사치계를 통해 처음으로 불경과 불상을 일본에 전해줘 고대 일본의 종교적, 문화적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일본 나라(奈良)의 고찰 호류지(法隆寺)에 모셔진 구세관음상은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 모습을 되살려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교토의 히라노신사(平野神社)는 성왕을 주신으로 모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왕은 부여시대의 중흥을 이끈 왕으로, 부여읍내의 중심 로터리에 동상으로 모셔져 있다.  

 

부산 너머에는 왕흥사지가 
백마강 강변길의 진수는 동쪽이 아니라 서안이다. 홀로 동떨어져 있는 부산에서는 강 저편으로 부여읍내를 바라볼 수 있고 산자락에는 정자와 비석, 부산서원 같은 유적이 남아 있다.   
부산을 지나 조금 더 북상하면 낙화암을 바로 마주보는 자리에 왕흥사지(王興寺址)가 널찍하다. 위덕왕이 577년에 창건한 왕실사찰로 역사속에 사라져간 왕조처럼 빈터만 남아 고적하다. 맞은편으로 사비성 최후의 날, 궁녀들이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이 애처롭다. 
바로 여기, 낙화암 건너편의 백마강변은 내게 가장 스산하고 어딘가 슬픔이 깃든 매혹의 풍경이다. 낙화암에서 바라보면 나른하고 평화롭지만 왕흥사지 쪽에서 보면 낙화암의 애상이 바로 전해져서일까, 정서적 격동을 자극한다.   
왕흥사지를 통과해 백마강교를 지나 북상하면 백마강 최북단에 해당하는 천정대 절벽이 강변으로 기다랗다. <삼국유사>에 보면, 백제에서 재상(宰相)을 뽑을 때 후보자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봉함해서 이곳에 두면 저절로 특정인의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서 재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런 설화는 어떤 사실을 암시한다. 아무리 왕이 절대권한을 가진 왕조시대라고 해도 세력이 큰 신하나 호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들 세력 간에 알력이 있을 때는 왕이라도 사람을 쓸 때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늘의 뜻에 기댈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백마강의 밤
기어이 떠나지 못하고 백마강변에서 머문다. 허름한 모텔 창밖으로는 백마강이 보이고 먼 마을의 불빛이 아롱거린다. 
여수(旅愁)에 겨워 밤중에 다시 강변으로 나섰다. 수북정은 이미 어둠에 잠겼고, 백제왕이 왕흥사 가는 길에 들리면 저절로 바위가 따뜻해졌다는 자온대(自溫臺)는 강바람에 차갑다.  
지구가 태양을 외면하는 이 잠깐 사이, 우리는 흔히 ‘어둠이 덮친다’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빛의 부재일 뿐이다. 밤은 그래서 절대 공허에 가깝고 잠시 스쳐 지나는 나그네의 심사에 허무감, 허탈감, 고독을 한층 사무치게 한다. 
문득 나그네가 아니라 주민으로 이곳에서 살고 싶은 충동이 인다. 허무와 고독의 밤이 아니라 풍요와 여유의 밤을 이 강변에서 보내고 싶다. 창가로 비치는 먼 불빛을 보며 그런 생각 한 번에 술 한 잔, 또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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