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잔차냐?”

 

스핑크스의 살벌한 질문 - 어린이는 동그라미 네개, 성인은 동그라미 두개, 늙은이는 동그라미 세개는?!
이때만 해도 우리 잔차들은 인간과 어울려 각 바퀴의 역할과 자부심으로 태평성대를 누렸지.
그리고 인간위에 인간 없고 잔차위에 잔차 없는 평등한 시대라고들 하지. 허지만 인간들 중에는 칼 같은 부류가 있어. 그것도 부지런한 식칼처럼 토막 내서 내편 니편, 착한 넘, 나쁜 넘 하며 편을 가르지.
우리 잔차의 세계에도 일부 잘난 체 하는 두바퀴들이 있어. “야, 리컴번트! 너는 기분 나쁘게 빠르니까 시합에 나오지 마. 어이 외발잔차! 너는 위험하니까 도로에 얼씬도 하지 마.” 뭐 이딴 식이야. 
역사로 치면 우리도 나름 뼈대 있는 집안이고 너네와 같은 선조를 뫼시고 있어. 1866년 제임스 스탈리가 앞바퀴가 크고 뒷바퀴는 쬐그만 잔차를 만든 거는 잘 알고 있겠지. 그 잔차는 ‘오디너리’란 이름으로 세상을 평정했고 잔차 끝판왕으로 등극했어. 바로 그 오디너리 할배가 우리 조상이야.
당시 뼈가 흔들릴 정도로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던 오디너리는 있으나마나한 뒷바퀴가 빠져 나간 줄도 모른 채 달렸고 그뒤 바퀴 하나는 쓸모없다는 결론을 내렸지. “두개는 너무 많다! 하나면 충분하다!” 그날부터 외발 자생이 시작된 셈이야. 물질문명의 대홍수에서 벗어나려는 미니멀리즘이 추구하는, 최소한으로 딱 맞게 보여주는 게 바로~ 우리 외발잔차 족이다.
두바퀴족은 북한군 장성의 유치찬란한 훈장 쪼가리처럼 핸들, 브레이크, 변속기, 짐받이 등속을 주렁주렁 매달고 땀을 쏟으며 달리지. 우리는 바퀴 하나와 중심축에 날개처럼 달려 있는 크랭크와 페달, 그걸 지탱해주는 포크에 바나나 안장을 물고 있는 시트포스트만 살짝 끼워주면 바로 출발이야.
덩치가 크다고 지하철 승차 거부당할 일도 없고 좁은 베란다에서 몸을 접어 웅크리고 청승을 떨 필요도 없어. 동춘서커스단의 빨간 코 피에로 하고만 놀고 있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정말 외눈박이 물고기야. 
‘세상은 넓고 잔차는 많다.’ 우리는 20, 24, 29, 36, 42인치 등 바퀴 사이즈도 다양하고 체인과 체인휠을 장착한 기린이란 놈도 있어. 다양한 스포츠 시합에도 출전하고 있고. 예를 들면 농구, 하키, 줄넘기, 댄스 등의 생활스포츠에서 산악마라톤, 더트점프 등의 익스트림 스포츠에서도 우리의 타고난 균형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지.

그를 처음 만난 건 “대~한민국! 짝짝짝” 2002년 월드컵이 막 끝났을 때였지. 온 나라가 우리 바퀴보다 작은 공에 미쳐 날뛸 때 우리는 태권도도장에 늘어져 있었어. 이웃 섬나라에서는 우리 족속들이 초딩들과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미팅하며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때였지.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두바퀴족의 탄압에 우리는 도장을 전전하고 있었던 거야. 
여수공고 2학년, 오태양은 더벅머리에 여드름이 드문드문한 고딩이었지. 자세히 보니 다리를 조금 절어. 그가 여기 태권도도장에 온 이유였지. 오른쪽 다리가 짧은, 아니 왼쪽 다리가 몇 미리 긴 것뿐인데 뭍의 놈들이 히죽댄거야. 암튼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이 되어 수박처럼 박살낼 거여. 작심삼초?! 친구들이 박살나기 전에 태권도 의지가 먼저 달아났어. 발차기에 저려오는 오른발 때문에 구석에 있는 내게 눈길이 멈추었지. 
뒤뚱뒤뚱 우당탕! 보조봉을 잡고 가는데도 지구의 중력은 자비가 없다. 그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안 찧으려고 하다 보니 나는 더 멀리 날라 가면서 맨땅에 헤딩. 안장은 까지고 페달은 덜렁거리고 노랑색 타이어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어. 근데 녀석이 학교만 파하면 책가방을 끼고 내게로 달려드네. 도둑을 피하면 강도를 만난다고 두바퀴족을 피했는가 싶었는데 독종을 만나버렸어. 사범 왈 “그렇게 당하면서도 외발잔차가 그리 좋으냐? 그래도 근성은 있당께.”
독종왈 “사범님! 지가 그래도에서 왔지라우. 후후."
"엥! 이넘이 시방 나와 농담 따먹기 하잔거여. 뭐여! 그래도라고 했능가.”

 

그래도! 제주도와 대마도의 중간에 있고 여수에서 24해리 떨어진 난바다에 있다는 전설의 섬!
일본 큐슈와 지근거리라 밀수의 거점이 되어 ‘밀거래섬’으로 불렸단다. 그러다가 철통 해경 덕분에 음침한 ‘밀’자를 떼어내고 거래도가 되었다가 그래도로 환골탈태했단다. 그래서 대한민국 4천개 섬 중에서 가장 포지티브한 아일랜드로 유명하지.
크기는 여의도의 다섯배인 400만평에 타원형 모양으로 제주도 성산일출봉처럼 중기 홍적세 때 화산 폭발과 함께 융기한 걸로 추정해. 오목한 일출봉과는 반대로 솥뚜껑처럼 볼록하고 주변은 20여m의 절벽이 파도와 싸우고 있지. 해발 200m의 봉우리는 희망봉이라 한대. 1987년 태풍 셀마가 왔을 때는 섬이 울릉도까지 밀려가는 줄 알았단다. 섬에 있는 뚜껑이란 뚜껑은 죄다 하늘을 날고, 엎드리고 있는 것들은 물속으로 처박혔거든. 30여 가구의 터전은 풍비박산이 나고 젊은 부부의 입속에는 모래만 까끌거렸지. 그래도 그들에겐 희망이 있었어. 세살배기 태양이가 생글거리고 있었으니까.

몇 해 전 태양이는 우리 족속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왔어. 항상 안개가 뿌연 섬에 환한 태양처럼 나타난 거야. 동네에 활기를 불어 넣고 섬을 다듬기 시작했지.
이른바 ‘긍정과 희망의 섬’ 그래도! 만들기 프로젝트였지. 물론 반대와 조롱도 있었지만 그는 한발 한발 나아갔어. 상처받은 외톨이들을 외발잔차로 소통해보자! 이곳 그래도에서!
동네 앞마당에 우리 연습장을 만들고 섬 주변 산책로 10km에 울타리 겸 보조봉을 설치해 단체 라이딩도 할 수 있게 되었지.
단순 무식한 우리와 달리 인간은 참 복잡하고 난해한 구조인가봐. 그래도 우리와 함께 하면서 점점 밝아지는 모습에 나는 오늘도 열심히 바퀴를 굴린다.
친구 태양과 함께! 오, 솔레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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