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 다시 천년, 노래도 묵직하다

경주는 찬연한 신라의 심장이다. 형산강이 적셔주는 너른 벌에 펼쳐진 고도(古都)엔 역사의 흔적이 발에 차인다. 한 시절, 경주로 몰려든 수학여행 행렬은 머릿속에는 신라를 확인하고, 가슴 속에는 추억을 새기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반 백 년도 더 지난 지금, 다시 경주를 걷는다. 신라인의 숨결만큼이나 대중의 노래도 묵직하다. 현인의 <신라의 달밤>이 경주의 밤 풍경을 그리고, 송창식의 <토함산>이 석굴암 부처님의 이마에 빛나는 동해의 아침을 노래했다.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과 배호의 <마지막 잎새>란 가요시가 평생 경주를 지킨 작사가 정귀문의 가슴에서 탄생했다. 장르를 뛰어넘어 김동리와 박목월에 이르면 문학의 지평은 끝도 없고, 때론 시인의 사랑, <이별의 노래>가 탄생하기도 했다

 

경주로 간다. 노래의 무대로도 아껴둔 경주로 가는 일은 무엄하게도 우선 신라 천년에 나를 대입해 보는 과정이다. 서울에서 두 시간도 채 못 되어 도착하는 고속열차를 두고 중앙선 완행을 탄 것은 경주 여행이 느리게 가야 제격일 거라는 고집이 거든다. 
제천에서 탄 무궁화호는 3시간을 걸려 경주역에 내려 준다. 전철 복선화 공사가 단양 도담에서 경주로 진행 중이라 디젤기관차의 퉁퉁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더구나 의성에서 영천에 이르는 구간은 태백산맥의 종아리답게 영동선 봉화 골짜기를 지나는 듯 심산유곡의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공중파 예능 ‘간이역’의 무대가 된 ‘화본역’, 탑리, 신령이란 이름도 낯선 역마다 하루 왕복 2편밖에 없는 완행열차가 일일이 섰다 가는 것은 이곳이 팔공산의 뒤통수를 보고 사는 교통오지임을 말해준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면서 창밖 풍경을 완상하노라면 무궁화호가 전혀 느리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화려한 신라 천년, 영원은 없다. 현인의 <신라의 달밤>
경주역에 내려 중앙시장에서 국밥 한 그릇으로 시장기를 달래고 고도 답사에 나선다. 미니벨로의 위력은 소소하게 이동해야 하는 여행지에선 절대적이다. 잠시 페달을 저어도 벌써 첨성대다. 첨성대가 작아졌다. 아니 중학교 때 본 첨성대가 줄어들 리 없지만 내가 두어 뼘 자란 게다.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이 발굴되었다. 귀족들의 술잔이 물길을 타고 순배를 돈다는 포석정이 안압지 어디쯤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나는 얼마나 경주에 무례한가. 
반월성으로도 불렀던 월성 언덕에 올라선다. 궁궐터를 발굴하는 작업이 동궁과 월지 건너편 나지막한 언덕 위에서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한눈에 봐도 천혜의 요새다. 그러고 보면 경주는 음택(陰宅)에 들어선 도시다. 시내 한가운데에 제주의 오름 마냥 솟아오른 왕릉군이 ‘대릉원’이라는 이름으로 점점이 박혀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선덕여왕이 성군의 치세를 다 한 흔적이 복원된 해자로 둘러싸인 반월성 옛 성터에서 확인된다. 거기가 양택(陽宅)이다. 힘이 겨뤄지는 전장(戰場)에서 언덕은 엄청난 힘이다. 내려다보는 싸움은 전쟁에서 거반 다 이긴 거나 마찬가지다. 눈높이가 같을 때 싸움의 승산은 알 수가 없다. 올려다봐야 하는 순간 무릎은 저절로 꿇게 되는 것이 삶이나 전쟁이나 같은 이치다. 그래서 삶을 전쟁이라고 하는가.
인솔 교사를 따라 현장학습을 나온 중학생들은 궁궐터를 발굴하는 붓질을 보고도 무심하게 지나간다. 아빠 엄마 따라 일찍이 주말여행으로 와본 경주는 새로운 감흥이 없다.
그러나 반 백 년이 지난 지금 와서 보니 “하던 일 다 접으면 저는 경주에 가서 살 겁니다”라고 하던 김병훈 작가의 말이 새삼 와 닿는다. ‘제주 한달살이’가 자연풍광과 낯선 섬에 대한 현재의 향유라면, ‘경주 한달살이’야 말로 신라 천년과 선인에 대한 경탄의 재발견이 되리라.

 

불국사로 가는 이십 리 남짓한 길은 자전거에 대한 배려는 고려되지 않았다. 불국사역 입구 구정로터리에서 만나는 <신라의 달밤> 노래비는 거석이다. 신라 천년을 자랑이라도 하듯 지석묘를 연상케 하는 50t의 자연석이 압도적이다. 그에 비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스피커는 아예 망가져 있다. 디테일의 실종이다.
노래비의 의미는 각별하다. 자타 공인 노래채집가인 주철환 PD의 노래비에 대한 정의는 놀랍다. “전국에 노래비가 있지만 거긴 노래를 묻은 곳이 아니다. 노래를 심은 곳이다. 노래의 일생이 끝났다고 추모하는 게 아니라 노래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라고 세운 비석이다.” 수많은 노래비를 만나면서 나는 왜 이 문장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는 노래의 무한 광맥을 찾아다니는 덕대(德隊)이자 선산부(先産夫)다. 탄가루 묻은 얼굴로 활짝 웃는 그의 표정은 질투 날만큼 부럽다. 
<신라의 달밤>은 천년왕조의 역사와 흔적 불러 세우기의 걸작이다. 경주를 월성으로 부르니 반월의 푸른 기운이나 만월의 나른한 기운이나 모두 ‘신라의 달밤’에 담겨 있다. 
현인의 노래는 옛노래의 격을 한 단계 올려 주었다. 부산 출신 현동주(현인의 본명)는 일본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서 정통 성악(바리톤)을 공부했고, 플루트, 기타, 트럼펫 연주자였다. 
혀 짧은 듯한 소리면서도 정확한 음정, 이중 삼중으로 내는 독특한 비브라토는 현인, 이미자, 배호의 ‘대중가요 3대 창법’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트로트, 서남아시아풍, 라틴리듬, 스탠더드팝, 행진곡풍까지 그의 노래는 광폭이다. 희극배우 김희갑을 비롯해 숱한 모창 퍼레이드가 인기를 말해주니 지금 경유지는 조명섭의 싱크로율 높은 복제에까지 이르렀다.
<신라의 달밤>은 조명암이 원래 작사했다고 사위 주경환은 말한다. 월북작가의 멍에는 대중예술까지 죄어왔다. 작곡자 박시춘이 유호에게 다시 노랫말을 손보게 했다니, 일제 때 만든 <인도의 등불>이 1947년 <신라의 달밤>으로 재탄생 된 배경이다.
시공관을 미어터지게 한 현인의 인기는 럭키 레코드를 만들게 하고, 볼레로 리듬의 이국적 분위기는 광복 후 혼돈의 시대에 옛 영화(榮華)를 갈구하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6·25 전쟁 때는 포로를 잡아서 <신라의 달밤>을 부를 줄 알면 국군, 부를 줄 모르면 인민군으로 간주해서 처리했다는 말도 있다.

아~~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 신라의 밤이여
화랑도의 추억이 새롭고나
푸른 강물 흐르건만 종소리는 끝이 없네
화려한 천년 사직 간 곳을 더듬으며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신라의 밤이여
아름다운 궁녀들 그리웁고나
대궐 뒤에 숲속에서 사랑을 맺었던가
님들의 치맛 소리 귓속에 들으면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신라의 달밤>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1947, 럭키 레코드

그 밖에도 백일평의 <신라 천년>, 도미의     <신라의 북소리>, 신세영의 <신라의 칼>, 백년설의 <신라제 길손>, 이미자의 <님 그리운 망부석> 같은 신라를 향한 옛 노래도 <신라의 달밤>의 그늘에 가려져 버렸다. 어느 옛가요 애호가가 자신의 학창 시절에 개사해서 부르고 다녔다는 코믹한 <종로의 달밤>에서는 당시 유행했던 이 노래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아~ 종로의 밤이여
조계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덕성여고생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수송골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종로의 밤 노래를
 
불국사로 가는 길, 불국사 관광단지에서 특수를 누렸던 수학여행 전문 숙박업소는 이제 무인 모텔이 되거나 마사지샵으로 변했다. 시멘트로 발라 만든 골조와 기와지붕이 처량하다. ‘신라의 전통 마사지’라는 믿거나 말거나 간판에 실소하면서도 그게 세월인 걸 어쩌랴 싶다.
불국사는 규모부터가 남다르다. 거대한 불교문화 유산이자 대표적 관광사찰이다. 우선 입장료부터 다르다. 전국 평균 3000원 선의 곱절이다. 비닐 재질의 연등은 전국 사찰 공통이다. 부처님 오신 날이 한 주일밖에 안 지나서였을까, 알록달록 색감 과잉이다
자극이 심한 오신채(五辛菜)를 삼가는 불가의 정신에 비추어도 정갈하면 좋으련만, 흡사 국적 불명의 한복이 한류와 함께 궁궐을 휩쓰는 듯한 느낌이랄까. 다보탑과 석가탑은 가설 구조물에 뒤덮여 있고 청운교와 백운교의 우아한 분위기와 부조화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이 그토록 예찬하는 국보의 모습을 온전히 감상하기엔 지금은 때가 아니다.

 

 

해를 보고 앉았으나 갇혀버린 석굴암, 송창식의 <토함산>
석굴암을 보러 오르는 길은 자전거엔 고행이다. 버스를 타야 미니벨로의 효용이 입증된다. 석굴암 초입에 자전거를 묶어놓고 토함산에 오른다. 2km 좀 못 미쳐 오르는 길은 산 이름 그대로 ‘흙을 품은 길’(土含) 이다. 혼자 사색하거나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갈 수 있는 산길이니 숨을 헐떡이지 않아도 된다. 길섶엔 세월의 무게를 못 이긴 나무들이 팔다리가 잘린 채 버티고 있다. 토함산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동해, 그리고 경주 남산과 저 멀리는 영남알프스의 최고봉 가지산(1241m)까지 연무로 시야가 아쉬울 뿐이다. 
석굴암으로 가는 600m 길은 잘 다져져 더없이 평탄하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경주와 별개 세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석굴암은 전각에 가려져 있다. 마모와 훼손을 막기 위해서 석굴암의 지붕을 능처럼 흙을 씌웠으나 습기 문제로 아예 유리로 막아 놓아 그냥 눈으로 보고 담는 수밖에 없다. 6000원을 내고 입장하는 관람치고는 사진조차 못 찍게 하니 억울하다.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명분이라지만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으면 될 게 아닌가. 정작 석굴암 부처님은 관람 시간 내내 전등불을 받고 땀을 흘려야 하니 촬영금지가 글쎄 닿는 이유인지 모르겠다. 
찬찬히 들여다본다. 석굴암 부전 스님은 축원문을 들고 때맞춰 염불 독경을 하는가 보다. 접수대 보살은 그저 축원 공양 돈을 세는 데 여념이 없다. 토굴에 눈을 감고 계신 부처님 앞에 놓인 바나나 빛깔이 더욱 샛노랗게 보인다. 자, 송창식의 <토함산> 이야기로 돌아가자.

토함산에 올랐어라 해를 안고 앉았어라
가슴속에 품었어라 세월도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
터져 부서질 듯 미소 짓는 님의 얼굴에도
천년의 풍파 세월 담겼어라
바람 속에 실렸어라 흙이 되어 남았어라
님들의 하신 양 가슴속에 사무쳐서 좋았어라 아 하~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맨발로 땀 흘려 올라라
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 천년의 두께로 떠받혀라
산산이 가루져 공중에 흩어진 아침 그 빛을 기다려
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 돌이 되거라
힘차게 뻗었어라 하늘 향해 벌렸어라
팔을 든 채 이대로 또다시 천년을 더 하겠어라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찾는 님 하나 있어
천년 더한 이 가슴을 딛고 서게 아 하~~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맨발로 땀 흘려 올라라
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 천년의 두께로 떠받혀라
산산이 가루져 공중에 흩어진 아침 그 빛을 기다려
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 돌이 되거라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맨발로 땀 흘려 올라라
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 천년의 두께로 떠받혀라
산산이 가루져 공중에 흩어진 아침 그 빛을 기다려
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 돌~이 되거라
<토함산> 김현수 작사, 송결 작곡, 송창식 노래, 
1978, 서라벌 레코드

목탁 소리로만 시작하는 반주 없는 도입부는 듣는 이를 꼼짝 못 하게 붙든다. 토함산을 노래하는 송창식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가선(歌仙)이다. 가왕이나 가황과는 가는 길이 다르다. 가객(歌客)을 넘어 가선에 이른 그의 초월은 하회탈의 대책 없는 웃음과 통하는 맥이다. 송창식의 노래 가운데서 공적 반열에 오르는 두 곡을 든다면 <토함산>과 <가나다라>다. 추리닝 바람처럼 건들건들 노래하는 <담배가게 아가씨>나 볼멘 목소리로 토해 내는 <왜 불러>하고는 다르다. <창밖에는 비 오고요> 같은 촉촉한 서정과는 대척점에 선 기상 넘치는 노래다. 쿵 짝짝짝~ 쿵 짝짝으로 밀당하는 리듬은 장르로 따지면 ‘락 트로트’라고 해야 할 박진감이 노래 속에 살고 있다. “완성도에 비하면 대중적 인지도가 떨어지긴 해도 <토함산>은 결단코 질리지 않는다.”라고 한 방랑시인의 칼럼에 한 표 던진다. 자연에 몰입하고, 그 아름다움을 송창식 자신만의 세계에서 완성한 <토함산>은 유행가가 아니라 명반, 명작의 선반에 꽂혀 있을 명곡이다.
송결 작곡이라고 발표한 걸 보면 결혼으로 아들을 얻은 감격이 강렬한 비트에 새겨져 있다. 1978년 ‘MBC 서울 국제가요제’에 참가곡으로 우수가창상을 받았으니 그의 실력은 이미 전파상 스피커 앞을 서성거린 유년 시절에서 발원한다. 가수 겸 완벽한 싱어송 라이터로서의 실력은 나훈아와 쌍벽을 이룰만하다. 그는 70년대 한국 음악계에 포크 열풍을 불러오고 한국적 정서를 살린 음악과 노래의 선구자이자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기인이다. 음악평론가 강헌이 “가왕 조용필의 맞은편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단 한 명의 가수다”라고 한 단정에 동의한다. 그렇다, 그저 아쉽다. 노랫말 첫 소절처럼 미간 백호에 해를 안고 천년을 견뎌온 석굴암 부처님이 더는 햇볕을 쬘 수 없는 동굴 속에 박제되어 버려 그렇다.

 

 

동해 허허바다에 선 뜻밖의 노래비,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석굴암에서 바다로 가는 길은 긴 언덕을 내려간다. 자전거엔 보너스다. 경주에 원자력발전소와 방폐장이 들어오면서 아예 한수원 본사까지 양남면 산속에 자리 잡다 보니 4차로 도로가 별도로 나, 옛길은 그야말로 그다지 방해받지 않고 동해에 이를 수 있다. 감포 방향에서 바다와 마주치는 T자 삼거리에 나정해수욕장이 있다. 2009년 세워진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가 거기 있다. 경주의 향토 작사가 정귀문 선생이 지은 노랫말의 인연으로 경주의 바다에 세워졌다. 세상사 풀리지 않아 하염없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건져 올린 것은 고기가 아닌 노랫말 ‘바다가 육지라면’과 ‘이 몸이 철새라면’이란 가정법의 문장이다.
2008년 KBS 가요무대가 선정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명가요 60선’에 든 명곡이기에 정귀문 작사가의 어머니 장례 때, 상여를 매고 가던 친구들이 목놓아 불렀다는 <바다와 육지라면>이다. 사실 조미미의 출세 곡 중 하나이기에 어쩌면 이 노래비의 위치는 다도해가 펼쳐진 목포나 남해 어디 섬이 어울리지 싶다. 경주 앞바다엔 섬이 없다. ‘그리운 서울을 파도가 길을 막아 못 가는 곳’이라면 섬마을 섬 처녀의 한탄일 테니 말이다. 연락선도 부두도 없는 해변에 세워진 노래비에 이별의 애달픈 서정을 풀어낼 배경과 소품의 부재를 느끼는 것은 너무 예민한가. 아니다. 경주 사람들의 향토 사랑이 이 노래를 선점했다고 대견해하는 것이 맞겠다.

얼마나 멀고 먼지 그리운 서울은 
파도가 길을 막아 가고파도 못갑니다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 
아- 아- 바다가 육지라면 눈물은 없었을 것을 

어제 온 연락선은 육지로 가는데 
할 말이 하도 많아 목이 메어 못 합니다 
이 몸이 철새라면 이 몸이 철새라면 
뱃길에 훨훨 날아 어데론지 가련마는 
아- 아- 바다가 육지라면 이별은 없었을 것을
<바다가 육지라면> 정귀문 작사, 이인권 작곡, 조미미 노래, 1970, 오아시스 레코드 

노래 재생 스피커는 역시 망가져 있다. 휴대전화기로 들으면서 경기도의 한 골프장 메뉴판에 적혀 있던 ‘바다와 육지라면’이 뜬금없이 생각났다. 해물이 듬뿍 들어 있다는 라면 요리의 재기 넘치는 패러디 작명에 무릎을 치며 감탄했던 기억이야말로 ‘꼬꼬기’(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억)의 연속이다.

한국적 서정시인의 그늘은 넓고 깊다, 박목월의 <이별의 노래>
감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박목월의 생가로 건너뛴다. 경주역 앞에서 건천행 버스를 타면 모량에서 하차해야 한다. 이정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선도산을 멀리 건너다보는 목월 생가 앞으로 경부고속철과 연결되는 중앙선 전철화 공사가 한창이니 목월의 유택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문을 빼꼼히 열고 내다보는 관리인은 사무적으로 방문자의 코로나 신원확인을 요구할 뿐 말을 아끼고 문을 닫아 버렸다. 복원된 초가는 튼튼하긴 해도 그 시절의 보편적 산촌의 삶을 상상하기엔 지나치게 건조하다. 목월의 초상과 장롱 궤짝, 호롱불, 그리고 몇 권의 색 바랜 책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게 없다. 불국사 근처에 세워진 ‘동리목월문학관’의 묵직한 전용공간과 추모의 시를 새긴 전각 판이 서 있는 정원에 기를 다 빼긴 듯 멀리 찾아온 나그네를 목마르게 한다. 목월 시의 한국적 서정을 표현하기 위해 일군 밀밭이 제법 누른빛을 띠며 익어가고 있는 풍경마저 없었다면 더 실망스러웠으리라. 해설사의 역할이 더해져야 할 일이다.
생가에서 건천국민학교 4학년까지를 다닌 목월 박영종은 대구로 유학 가 계성중학을 졸업하고, 교사를 거쳐 서울대 등에서 교편을 잡는다. 이미 문재(文才)는 일찍이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로 유명한 동요 ‘송아지’를 지은 데서 드러난다.
한국적 서정을 노래하는 ‘나그네’ ‘산도화’나 이내가 깔려오는 그 푸르스름한 기운에 감긴 듯한 시 <산그늘> <가을 어스름>의 시맥을 따라가는 일은 어두운 조명 속에서 목월 선생의 육성이 은은하게 들려오는 불국사 옆 ‘동리목월문학관’이 적격이다.
밀밭 귀퉁이 정자에 앉는다. 시인 목월의 서늘한 사랑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별의 노래>로 남은 그 사랑의 그림자는 장르 구별이 무색하게 가요 대중도 아끼는 가곡이 되었다.
영화 같다. 얼마나 애절했으면 6·25 난리 통의 사랑 이야기가 그냥 세간으로 흘러 흘러 무성한 숲을 이루었을까. 서울대 강단도 버린 채 떠난 여대생과의 제주로의 밀행은 전설이다. 얼마 뒤 아내의 방문과 생활비와 옷 두 벌, 말 없는 귀가, 그 결말은 극도로 절제된 극복의 과정에서 교훈적이나 그 시대 어머니의, 아내의 속울음도 읽힌다.
이별의 징표로 써주었다는 시에 얽힌 이야기는 그대로 시요 소설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기죽은 요즘 남자에겐 꿈꿀 수조차 없는 로망이 줄거리에 매달려 있다. 다 버리고 떠날 만큼 절절한 사랑인가. 아내의 초인적 인종과 맺지 못할 사랑의 전개, 기항지에 닿는 과정이 부러워 어쩌면 이 시대가 퍼 나르는 건지도 모른다. 사랑과 인간의 도리 사이에서 가슴을 도려내는 이별을 고하기까지 그 처연한 공감이 노래의 전편에 흐른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별의 노래>, 박목월 시, 김성태 작곡, 1952

1952년 피난지 대구에서 해군군악대 지휘자였던 김성태에게 이 시를 주어 노래를 만든 걸 보면 목월의 사랑의 여진은 잦아든 게 아니었을 수 있다.
목월이 <종말의 의미>라는 수필에서 옛 연인과의 해후를 이야기한다. “그녀를 보자 나는 하얗게 재가 되어 삭아 내린 기분이었다.”라고 했다. 사랑의 열병 스무 해도 더 지난 다음에 만난 H가 제주의 그녀인가는 모호하다. “이별의 노래에서 내가 노래한 상대가 누구냐고 묻는 질문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자기 평생에 소중한 이름 하나 감출 줄 모르는 헤프고 어리석은 바보도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H를 만나고 온 이듬해 1978년 3월 24일 목월은 산책에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예순세 살이었다.

이제
그를 방문했다. 
겨우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겨우
그를 방문했다.
이제 
내가 가는 길에 눈이 뿌렸다
(중략)
그의 눈에는
영원히 멎지 않을 눈발이 어렸다.
나의 눈에는 
눈발이 내린다.
사람의 인연이란
꿈이 오가는 통로에
가볍게 울리는 응답
박목월이 H를 만나고 온 뒤 썼다는 시 <방문>

한양대에서 후학을 가르친 목월의 시간은 시 전문지 <심상>을 창간하면서 시업까지 이어갔다. 수많은 제자 가운데서도 굳이 따진다면 역시 한양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이건청 시인이 적자다. 이 시인의 글의 많은 부분이 목월 선생과 맞닿아 있다. “목월 선생 가신지 43주기다. 시에 엄격하고 인간에 다감하셨던 어른, 작고하시기 전날 나를 학장실로 불러 “‘시협’(한국시인협회) 회장직을 내려놓아야겠다. 시에 대해 승부를 걸어야 할 때가 되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운명 15시간 전에 하신 말씀이다.” 
사람의 일은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이 시인은 목월 선생이 돌아가신 뒤 사모님 유익순 여사가 주신 목월의 만년필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시를 쓰고 있다. 목월의 후기 시 <경상도 가랑잎> <무순>을 썼던 펜이다. 

 

 

고향 경주를 지킨 작사가 정귀문, 배호의 <마지막 잎새>
목월 생가에서 현곡면 남사저수지로 향한다. 정귀문의 명곡, 배호의 유작인 <마지막 잎새> 노래비를 보기 위해서다. 자전거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며 신라의 옛땅을 지나간다. 한(恨)과 정을 노래한 향토 음악인 정귀문은 경주의 자랑이다. 그는 평생 경주를 지켰다. “정귀문은 선비다. 명예, 관직, 재물을 탐하지 않고 대중의 가슴만 사랑하다 간 작가”라는 말은 영예로운 훈장이다.
1967년 세광출판사가 추천작가로 <만추>가 입선하면서 가요시를 쓰기 시작해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배호의 <마지막 잎새>, 이미자의 <꽃씨>, 김연자의 <먼 훗날>, 봉은주의 <동네방네 뜬소문>, 최안순의 <안개 낀 터미널> 등 1,000여 곡을 썼다. 그의 일대기는 생략하자. 
대개 노래비는 가수의 연고지나, 가사 속 의미 연관 장소에 세워지나 작사자의 연고지에 세워지는 일은 흔치 않다. 배기모(배호를 기념하는 전국 모임) 회원들이 성금을 내고, 고향의 유지들이 부지를 마련했기에 전국 16개 시도 지부장과 232개 시군지회장의 이름이 비문에 빽빽하다. 현곡국민학교 친구였던 소녀가 전학을 가면서 건네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와 어느 가을 교정에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잎사귀 한 잎을 잡으면서 느낀 첫사랑의 속앓이 같은 시 한 편이 노랫말이 되었다.
“배호의 타계 소식을 고향 집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다가 라디오로 들었다. 내가 <마지막 잎새> 가사를 써서 배호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팬들의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고 정귀문 작사가는 증언했다.
어느 가요평론가의 문장은 거슬린다. “노랫말이 씨가 된 가수는 많다. 신신애는 <세상은 요지경>을 부르고 사기를 당했다. <서른 즈음에>를 부른 김광석이 그 나이에 자살했고,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른 차중락은 일찍 세상을 떴다. 유행가 노랫말을 짓는 작사가들이 운명에  역행하거나 숙명에 굴복하는 어휘들을 오선지 가락에 걸칠 때는 유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훈수를 두는 듯한 논평은 가요계의 뒷담화라면 모를까 활자화된 글로는 어색한 조합이다.
<마지막 잎새>, <안녕>, <또 하나의 이별>, <파란 낙엽> 등 배호의 노래에 드리운 그늘이 그의 운명을 암시한다고 단정한다. ‘유행가는 극적(劇的) 이어야 한다’는 명제에 충실하다 보면 사랑과 이별이 주종을 이루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영시의 이별>을 불렀기에 배호가 자정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단정은 억지에 가깝다. 1971년 11월 7일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세브란스병원 538호실에서 저녁 8시 반에 출발한 배호가 구급차 속에서 외삼촌 김광빈의 무릎을 베고 운명한 미아리고개의 시간을 0시에 끌어다 붙인다면 잔인한 뒷말 만들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덧 낙엽 지고
달빛만 싸늘히 허전한 거리
바람도 살며시 비켜가건만
그 얼마나 참았던 사무친 상처길래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

싸늘히 파고드는 가슴을 파고들어
오가는 발길도 끊어진 거리
애타게 부르며 서로 찾은 길
어이해 보내고 참았던 눈물인데
흐느끼며 길 떠나는 마지막 잎새 
<마지막 잎새> 정귀문 작사, 배상태 작곡, 배호 노래, 
1971, 지구레코드

우거진 신록 속에 저수지 정자에 앉아 정귀문 선생이 생전에 이 노래비 앞에서 노래의 배경과    <마지막 잎새>를 힘겹게 부르는 화면을 끝까지 본다. 20대에 세상 떠난 천재 가수 배호를 기리며 회원들이 정성으로 노래비를 만들고, 찾아다니며 노래 부르는 저 팬심이야말로 노래의 뿌리를 찾아 자전거를 타고 산천을 누비는 나의 땀 정도야 비할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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