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국충정이 부딪힌 중원의 역사, 남한강의 노래

충북 충주
한반도에 삼국이 겨루던 그 옛날 충주는 이 땅의 한가운데였다. 탄금호반 탑평리 7층 석탑이 중앙탑이 된 이유다. 충청도의 머리글자가 충주에서 따왔으니 그‘충(忠)’은 마음의 중심이자, 한반도 허리의 상징이다. 충절이 부딪힌 중원의 넓은 벌에 오래된 대중가요가 없다는 것은 뜻밖이다. 그래도 충청의 산하를 사랑한 향토 작곡가 백 봉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목계나루> <탄금대 사연> <달래강> <월악산>까지 그의 정통트로트가 없었으면 충주 편을 엮지도 못했을 것이다. 트로트 르네상스를 이끄는 중견 장윤정이 충주에서 태어났다. 댄스 트로트가 아니라 묵직한 노래 <초혼>을 가요의 골목길까지 불러올 수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한강의 원류 남한강이 고장마다 이름을 벗고 제 이름을 찾는 곳이 충주다. 충청의 아름다운 산협을 감돌며 흘러내리던 물은 탄금대에서 허리띠를 푼다. 벼랑에 부딪힌 물줄기가 북서진하며 한양의 물, 서울의 물이 되러 떠나는 자리다.
대중가요에서 보면 충주는 건조한 편이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큰 맥은 경부선이나 호남선 축에서 이루어졌다. 3번 국도변의 서정에 눈길을 줄 만큼 한가롭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리 보면 작곡가 백 봉은 향토음악인으로서 유달리 충주를 사랑한 사람이다. 그의 노래 전편은 충주를 중심으로 충청의 산하를 사랑한 고향 유정으로 가득하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오늘은 물길을 거슬러 하류에서 노래의 여정을 시작한다.

시절의 영화는 덧없다, 남한강 나루 김용임의 <목계나루>
충주의 초입, 남한강 가 목계나루를 찾아간다. 나루터는 표지판이 없다면 지나치리만치 황량하고 그 이미지에 끌려 찾아간 이라면 실망할 게 뻔하다. 이제 올해 말이면 충주까지 우선 개통하는 중부내륙철도가 남한강을 건너며 목계나루 옛터를 굽어보고 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어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이랴. 남한강 수운의 중요한 지점인 목계나루는 목계장과 함께 그 시절 사람들의 생활이자 도진(渡津) 취락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거기다 충주에서는 민족시인으로까지 이름 붙인 신경림의 시에 목계장터, 목계나루의 모습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필자의 ‘한국의 강둑길’ 연작에서 소개했던 목계의 풍경을 인용하는 것이 도움 되겠다.
중앙탑에서 조정지에 이르는 강변은 벚꽃이 피는 철이면 길 따라 굽이치는 벚꽃의 열병만으로도 제 몫을 다한다. 하지만 남한강의 서정을 제대로 불러일으킨 유공은 누가 뭐래도 시인 신경림의 몫이다. 그는 1935년 충주시 노은면 보련산(764m) 자락에서 태어났다. 중부내륙고속도로 북충주나들목에서 동쪽으로 건너다보이는 제일 높은 산허리는 온통 광산이었다. 검은 석탄이 아니라 그야말로 황금을 캐는 금광마을이었다. 금광이란 허망하기도 하고, 한 큐 잡기도 하는 것이어서 덕대(광산하청부업자)와 연상(鉛商)들의 허세와 낙담이 질펀한 색주가의 젓가락 장단과 더불어 밤이 깊어가곤 했다. 그런 저잣거리의 풍경 속에서 세상을 향해 눈을 뜨고, 소풍 가던 목계솔밭과 장터 풍경은 오롯이 시인의 가슴에 들어와 언어로 형상화되었다.
강원도의 뗏목뿐만이 아니라 밀물 때 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 배가 만드는 강장(江場), 갯벌장이 모래강변을 달구었다. 정해진 날도 없이 소금 배가 오는 날이면 닷새고 이레고 장이 열렸고, 새우젓은 물론 직물, 약을 비롯한 여러 물목이 강원도로 경상도로 등짐장수들에 실려 오고 갔다. 그의 나이 44세에 낸 시집 <새재>에 실린 <목계장터>는 되돌릴 수 없는 서정을 문자로 박은 한 시대의 문신이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 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장터 전문>

6·25 난리 통에 어린 신경림 시인이 장미산성 기슭에서 본 남한강은 참혹한 기억이었다, 비행기의 기총소사로 뒤집히는 나룻배와 허옇게 떠내려가던 무고한 목숨에 대한 목격은 그의 많은 시가 진혼의 노래로 이어지게 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1990년 <강마을의 봄>을 노래하면서도 그는 봄눈을 틔우는 버들강아지를 볼 겨를도 없었다. 
비행기 사격훈련의 표적이 되었던 가흥 앞 모래섬 벌떡내에 눈이 머문다. 장미산 쪽 가흥도, 강 건너 목계도 이제 한 시절의 영화는 그림자도 찾기 어렵다. 그저 한국의 대표적 수석 산지였음을 증명하듯 온통 강바닥을 훑어 온 듯 수석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최근에는 고서화를 비롯한 옛것들을 취급하는 거래상들이 모여들어 골동품 경매를 정기적으로 연다. (‘한국의 강둑길’ 한강 4, 본지 2017년 3월호)

남한강 칠백 리 구름이 흘러간다
님을 싣고 사랑 싣고 아리수 아라리요
첫사랑 묻어 놓은 그 날 그 자리 그리우면 돌아오세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라도 좋아요
기다리고 있겠어요 기다리며 살겠어요
목계나루 아가씨

중앙탑 충주호에 실안개 풀리는데
님과 함께 어화둥둥 능암온천 아라리오
너무나 사랑했던 그 날 그 자리
그리우면 돌아오세요 밤이나 낮이나 언제라도 좋아요
기다리고 있겠어요 기다리며 살겠어요
목계나루 아가씨
<목계나루> 유홍무 작사, 백 봉 작곡, 양나미 외 4 노래,2010, 청미음반

가요 <목계나루>는 장소와 이미지는 빌려왔지만 가사 속에서는 어떤 감흥도 발견하기 어렵다. 60~70년대의 아가씨 열풍 속에 경향 각지에서 만들어진 ‘아가씨’ 노래는 제목만으로도 230여 곡이 넘는다. 그것도 산업화의 열풍 속에 밤 열차를 타고 떠나는 단봇짐 행렬은 당연한 시대의 자화상이겠지만 2010년에 만들어진 노래일진대 사실감이 없다. 목계나루의 적막한 풍경 속에서라면 더 그렇다. 그나마 김용임의 뛰어난 가창력이 이끄는 곡조에 실린 버전은 다행이다.

 

풍류의 벼랑에 우국충정이 살이 있다, 주현미의 <탄금대 사연>
조정지댐이 만든 탄금호반으로는 봄이면 벚꽃길의 퍼레이드가 벌어진다. 목재로 만든 잔도 그늘과 굽어보는 드넓은 호수는 국제조정 경기가 열릴 수 있는 넉넉한 수면을 내어주고 있다.
중앙탑공원은 고구려와의 격전이 비석으로 남아 있는 자리와 맞닿아 있다. 국립충주박물관이 이곳에 자리한 이유이기도 하다. 달천과 남한강이 껴안는 합수머리에 탄금대가 있다.
남한강 기나긴 물줄기에서 탄금대는 중요한 변곡점이다. 산협을 둘러 내려오며 골짜기마다 품고 있던 사연까지 보태 남서진하던 물길의 방향타를 북서로 돌리는 지점이다.
탄금대는 알아도 대문산은 잘 모른다. 그저 백 미터 남짓한 산에 문패는 탄금대로 달고 있다. 1400년 전 가야사람 우륵이 신라에 귀화하여 진흥왕의 은전을 받아 이곳에 정착했다. 가야금을 만들어 12곡 노래를 짓고, 춤과 더불어 후학들을 가르치던 풍류의 자리가 탄금대다.
하지만 역사는 풍류를 한가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가. 비운의 역사, 이름 없는 고혼을 기리며 탄(嘆)하고, 슬픈 가야금(加耶琴)의 조곡(弔哭)을 탄(彈)하는 자리가 되었다. 신립 장군상과 8천 고혼비가 그렇고, 이승만 대통령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쓴 친필 휘호 아래 2,838위의 위패가 모셔진 6·25 참전 위령탑이 그렇다. 검게 산화된 신립의 칼은 허공을 가를 뿐이고, 백성의 또 다른 이름인 군졸의 표정엔 고혼의 억울함이 얼비친다. 
신립이 왜 천혜의 요새 문경새재를 버리고, 너른 벌판과 퇴로조차 막막한 벼랑 끝에 진을 쳤는지 숱한 말들이 전사(戰史) 주변에 널려 있다. 출정식에서 신립의 투구가 땅에 떨어졌다는 불길한 조짐이 있었다고 <징비록>은 전한다. 그가 열두 번을 오르내리며 싸움을 북돋웠다는 ‘열두대’ 바위 벼랑에 서면 백마강 낙화암의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신립이 몸을 날려 장렬히 전사하므로 임란 최대의 육지전은 패전으로 마감되고, 선조는 야밤에 임진나루를 건너 의주 몽진 길에 오르는 치욕이 왕조사(王朝史)에 기록된다. 
탄금대에는 두 개의 노래비가 서 있다. 그 가운데 한 개는 일제 때 독립운동가이자 동요시인 동천(洞泉) 권태응 선생의 동요 <감자꽃>이다.
 
자주 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권태응 시, 백창우 작곡)

아주 짧은 동시가 노래가 되었다.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 대한 저항이라는 해석은 그가 일본 유학 중 스가모 형무소 수감과 고문 후유증으로 33세의 나이에 6·25 전쟁 중 고향 충주에서 세상을 뜬 때문이다. 한두 곡 취미로 쓴 동시가 아니라 짧은 생애에 남긴 동요 421편에 어린이와 나라 사랑이 녹아 있다. 충주시가 생가터에 ‘권태응 문학관’을 짓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의미가 각별하다. 한마디로 수원이 효(孝)의 도시를 표방하듯 충주는 충(忠)의 도시다.
또 하나의 노래비가 주현미의 <탄금대 사연>이다.
 
탄금대 굽이돌아 흘러가는 한강수야
신립 장군 배수진이 여기인가요
열두대 굽이치는 강물도 목메는데
그 님은 어디 가고 물새만이 슬피 우나

송림이 우거져서 산새도 우는가요
가야금이 울었다고 탄금인가요
우륵이 풍류 읊던 대문산 가는 허리
노을 진 남한강에 임 부르는 탄금 아가씨
<탄금대 사연> 이병환 작사, 백봉 작곡, 주현미 노래, 1986, 오아시스

1절이 신립 장군의 슬픈 패전이고, 2절은 악성 우륵의 가야금 풍류다. 탄금대의 아름다움에다 아가씨의 임을 전형적으로 붙인 노래다. 작사자 이병환이 지역언론인이고, 작곡자 백 봉 또한 충주에 살았으니 완전한 향토의 노래라 할 만하다. 작품성이 다소 덜하다 해도 이미자가 부르면 노래의 맛이 살아나듯 주현미의 정통트로트가 비운의 현장, 풍운의 역사를 대중의 노래로 재해석해 준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전국의 노래비에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긴 하지만 세울 때는 거창하나 아주 간단한 관리조차 안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음각된 노랫말을 가까이 다가가도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검정 바탕의 돌이나 철제 조형물에 칠한 페인트는 흘러내린다. 그저 1년에 한 번 붓질이라도 해주면 어떤가. 건립 주체가 불분명하다면 쓰레기 줍는 공공근로를 잠시 돌리면 될 일이다. 충주의 노래비는 로터리 클럽이 자신들이 세웠다는 마크를 크게 조형물로 내세우고 있다. 돈만 기부할 것이 아니라 로타리 회원들이 매년 사업으로 나서면 더 의미 있지 않겠는가. 이 클럽의 좌우명이 ‘초아의 봉사’ 아니던가. 초아를 한글로 새겨놓아서 무슨 뜻인가 했다. 이타(利他) 정신쯤으로 이해되겠지만 솔직히 나는 초아(草芽)를 새싹들의 봉사란 뜻으로 ‘참 겸손하구나’하며 이해했었다. 

트로트 부활 시대의 신데렐라, 장윤정의 <초혼>
가요가 빈약한 충주에 기어이 연고를 찾아내면 이제 중년 고개에 막 올라선 가수 장윤정이 충주 태생이다. 충주 사람들이 배우 박성웅과 함께 안태(安胎) 고향 충주의 대중 연예인으로 장윤정을 꼽는 것은 그녀의 대중적 인기를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이다. 개인사의 신산한 구석이 있다고는 해도 유년의 골목길은 잊을 수 없는 법이다. 
장윤정은 트로트가 청춘의 장르라곤 상상하기 어려운 시절을 연 공로가 있다. 새천년의 서막과 함께 그녀의 가요 인생도 일찍이 등판했기에 벌써 데뷔 20년이다. 2012년 데뷔 10주년 기념 무대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 정도였으니 가요계의 기린아다. 트로트는 물론 노래의 장르와 진폭은 팝, 록, 발라드를 망라하고 세미트롯 시대의 개막에 한 축을 맡았다. 스타의 부상과 침몰은 인내심이 깊지 못하지만 대중의 속내가 절대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선 곤란하다. 장윤정은 열화 같은 인기에 힘입어 10년 만에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무대에 섰지만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그 자리에 서기까지는 무려 반세기가 걸렸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대중가요의 기둥인 나훈아, 패티김이 그냥 그 무대에 선 게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 대중가요 사의 한 단면이다. 솔직히 <어머나>가 공전의 히트를 할 때 나는 뜨악했다. 어쩌면 내 가요의 편식 취향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부박하다’고 눈길을 돌려버렸다. 유행은 희한도 하지. 그녀의 <초혼>이 다가왔을 때 후회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한 장윤정이었다. <어머나>의 경박이 경쾌로 들리고, 유머로 미소 짓게 한다는 사실은 내가 가요 대중을 너무 가벼이 본 결례였다.

살아서는 갖지 못하는
그런 이름 하나 때문에
그리운 맘 눈물 속에
난 띄워 보낼 뿐이죠

스치듯 보낼 사람이
어쩌다 내게 들어와
장미의 가시로 남아서
날 아프게 지켜보네요

따라가면 만날 수 있나
멀고 먼 세상 끝까지
그대라면 어디라도
난 그저 행복할 테니

살아서는 갖지 못하는
그런 이름 하나 때문에
그리운 맘 눈물 속에
난 띄워 보낼 뿐이죠
(후렴 반복)
<초혼> 김순곤 작사, 임강현 작곡, 
장윤정 노래, 2010, 장윤정 5집(인우프로덕션)

 

역시 가요 시의 전설로 남을 김순곤의 노랫말이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나 <못 찾겠다 꾀꼬리>, 최유나의 <흔적>. 나미의 <인디언 인형처럼>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는 명작을 만들었다. ‘초혼’이란 단어를 배운 건 김소월의 시였다. 망자의 혼을 불러 세우는 용마루 위의 처절한 외침에서 마을은 한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된다. 목 놓아 부르는 죽은 이의 이름에서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확실한 명제 앞에 놓인다. 소월의 <초혼>은 허무와 상실, 비련이 비원과 탄식의 점층적 구조 속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중략)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초혼> 김소월 시

김소월은 남의 아내가 된 정인(情人) 오순이 남편에게 맞아 죽은, 기가 막힌 상황 앞에 통곡을 대신해 쏟아 놓은 헌시이자 절규다. 김순곤의 <초혼>은 장윤정의 해금 같은 목소리에 실려 허공으로 날아가지만, 격정보다는 체념과 아픔으로 아로새겨진다. “장윤정의 험난한 삶의 굴곡이 느껴지는 곡”이라고 한 어떤 평가도 그녀의 노래 밖 세상사를 대입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신도 그 곡의 호소력을 알고 있기에 10주년 세종문화회관 콘서트의 이름을 <초혼>이라 붙였으리라.

 

맺지 못할 남매의 사랑 그 비극, 김국환의 <달래강>
탄금대에서 합수하는 달천과 한강, 달천강둑을 따라가는 자전거길은 ‘새재 자전거길’이자 ‘국토종주 자전거길’의 일부다. 유주막 다리 아래를 지나면 강둑이 사라지고 계곡에 만든 구 3번 국도가 반원을 그리며 상류로 따라간다. 
달천은 비교적 순수한 강의 이미지가 도드라지게 남아 있다.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 이 또한 ‘한국의 강둑길’에서 소개된 문장을 그대로 빌려오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되지 싶다. 
유독 달천이 와닿는 느낌은 다르다. 세속을 떠난다는 속리산에서 법주사를 거친 물줄기는 괴산에 오면 칠성면을 지나고 괴강(槐江)으로 불린다. 토속신앙인 칠성(七星)의 영검하심은 절의 뒤란 높은 자리에 칠성각을 올려놓았다. 경향 각지에 있는 성불산 성불사가 감물(甘勿)에도 있고, 불정(佛頂)은 또 어떤가. 부처의 이마가 아닌가. 부처님의 미간백호(眉間白毫)의 광명상 자리가 여기다. 칠성, 감물, 불정 모두 달내강 언저리의 마을 이름이다. 수달이 많이 살아 달천이든, 물이 달아 단내(달천)든 나는 구극(究極)의 니르바나(涅槃)에 이르는 달천(達川)이 아닐까 주석을 달아 본다. (‘한국의 강둑길’ 달천 편, 본지 2015년 7월호)

새재 자전거길이 향산리 싯계 마을로 향한다. 상수도 보호구역이 강섶을 손대지 않아 더 자연스럽다. 수주팔봉에서 물길이 갈라질 때쯤 비경이 나타난다. 1963년 인공 수로를 만들면서 수주팔봉의 허리를 잘라 폭포를 만들었다. 평소에야 검버섯 핀 노인의 오줌 줄기나 될 수량이지만 장마철에는 얘기가 다르다. 폭포 위로 출렁다리가 놓여 칼바위 능선을 조금 타면 팔봉에서 바라보는 물돌이동의 비경을 파노라마 각에서 눈에 담을 수 있다. 물줄기가 크게 도는 내력이 중앙경찰학교가 있는 마을 이름 수회리(水回里)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웃도어 시대에 물가 자갈밭에 차를 세우고 캠핑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기도 하다.
달천은 달래강이라고 부를 때, 원래 우리 산하를 흐르는 토속의 이름이 되살아난다. 달천, 달천강, 달래강이란 이름은 전국 30여 곳에 산재한다. 달래강 설화 버전 또한 20여 개가 각기 다른 색깔로 윤색되어 있다. 달래는 산천에 겨울을 뚫고 나오는, 미려한 뿌리의 하얀 속살이 깨끗하다. 너무나 익숙한 설화는 생략한다 해도 근친상간이란 금기의 비극적 종말의 마지막 말은 “달래나 보지”였다. 사람의 도리가 원초의 욕망을 가로막아 이긴 징표가 ‘달내’의 낙조를 더 슬픈 보랏빛으로 채색한다고 적었었다. 강마을 사람들은 이루지 못할 남매의 사랑이 피눈물로 흘러 ‘달래강’ 이름을 얻었다고 한 거다. 

말이나 한번 해보지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그토록 꼭꼭 숨기면
하늘인들 알 수 있겠니
날마다 그리워 흘린 눈물이
강이 되도 말 못 한 미련한 사람아
바람도 물새도 서러워 울고 간다
달래강 애달픈 사랑

말이나 한번 해보지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그토록 꼭꼭 숨기면
하늘인들 알 수 있겠니
날마다 그리워 흘린 눈물이
강이 되도 말 못 한 미련한 사람아
바람도 물새도 서러워 울고 간다
달래강 애달픈 사랑
(후렴 생략)
<달래강> 김동찬 작사·작곡, 김국환 노래, 2015, 정서기획

여러 가수가 <달래강>을 노래했다. 1965년에 발표된 이미자의 <달래강>(박지훈 작사, 박춘석 작곡)이 결은 다르지만 원조다. 이후 김승덕의 <달래강>(박지훈/김승덕/1989), 권윤경의 <달래강> (이병환/백 봉/1991), 김민경의 <달래강>(이용구/유계열), 박희정의 <달래강 소녀>(김수영/고경환/2007) 등이 있다. 그 가운데 김동찬 작사 작곡의 김국환의 <달래강>이 최신 버전이면서 널리 알려져 있다. 노랫말의 배경이 슬프지만 경쾌한 세미트로트 리듬이다. 
<은하철도 999> 같은 만화영화 주제가부터 <꽃순이를 아시나요>, <타 타 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노래를 불러온 김국환은 대기만성의 실력파다. 그의 명곡들이 김희갑 악단 전속가수로서 탄탄한 기초 위에 탄생했다. 이제 현철까지 와병 중인 가요무대의 세대교체 속에서 그는 원로에 속한다. 달래강의 사연을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보는 비련에 대한 촉촉한 감성이 의외로 경쾌한 멜로디에 실려 씻겨 내려간다. 역시 김국환은 오랜 무명의 시간이 축적되어 피어난 야생화다.

 

신라를 품은 충청의 영산 월악산, 주현미의 <월악산>
수안보에서 점심을 하고 미륵리로 향한다. 수안보의 온천으로서 명성도 전국의 유명 온천지와 처지가 비슷하다. 물 온도 53도의 내륙에 숨어 있던 온천이나 썰렁하다. 그래도 두어 해 뒤 공사 중인 중부내륙철도가 개통하고 나면 더 낫지 않을까 토박이들은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
산적에게 통행세를 내고 넘어야 했다는 닷돈재를 넘어 월악산 자락으로 들어선다. 
미륵리는 오래도록 미륵사지로 알려져 왔다. 절터 언덕에 미륵불이 선 자리 근처에서 대원사란 이름도 찾았다. 하늘재로 넘어가는 초입이라 원터도 주춧돌이 선명하다. 영남과 충청을 잇는 길목에 불교의 힘과 관청의 행정이 한 골짜기에서 이루어졌다.
계립령(鷄立嶺)이란 한자 이름을 가진 하늘재는 크게 보면 월악산과 주흘산 사이의 잔등이다. 문경새재가 뚫리면서 밀려났다. 오늘날 이 지역에서 백두대간을 넘는 고갯길 3개는 양반이 과거 보러 다니던 조령(새재)과 보부상과 소, 말이 짐을 싣고 넘던 하늘재로 나뉘고, 이화령 신작로가 뚫리며 찻길이 열렸다. 하늘재는 문경읍 관음리에서 송계면 미륵리로 이어진다. 관음이 현실의 직관이라면 미륵은 다음 세상의 염원이다. 525m 남짓한 이승과 저승의 고갯길쯤이라고나 할까.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는 일제 카메라 캐논이 바로 관음(觀音), 관세음보살의 눈이다. 그 일본식 발음 칸논(かんのん)이 영어로 캐논(Cannon)이다. 
대원사지 미륵불 주위를 정비하는 공사 가림막 임시 건물이 5층 건물 높이로 섰다. 세월의 이끼가 자연스레 끼어 절터에 고졸하게 서 있던 그 모습을 잃지 않게 복원되었으면 할 뿐이다.
대원사와 원터는 결국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이 마지막 힘을 겨루던 국경이었다. 왕조의 멸망, 그 비운을 고스란히 안은 대표적 사람은 역시 천년이 지나서도 신라의 마의태자다. 그의 저항과 은둔의 스토리는 골짜기마다 전설의 씨앗이 되었는데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인 하늘재도 예외가 아니다.

월악산 난간머리 희미한 저 달아
천년 사직 한이 서린 1천3백 리 너는 아느냐
아바마마 그리움을 마애불에 
심어놓고 떠나신 우리 님을
월악산아 월악산아 말 좀 해다오 그 님의 소식을

금강산 천 리 먼 길 흘러가는 저 구름아
마의태자 덕주공주 한 많은 사연 너는 아느냐
하늘도 부끄러워 짚신에 삿갓 쓰고 걸어온 하늘재를
월악산아 말 좀 해다오 그 님의 소식을
<월악산>, 이종학 작사, 백 봉 작곡, 주현미 노래, 1985, 오아시스

역시 향토 작곡가 백 봉이 자신의 본명으로 작사까지 한 정통 트로트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주현미의 <월악산> 노래비가 서 있는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까지 가려면 한참을 돌아야 한다. 송계계곡을 미처 빠져나가기 전에 덕주공주의 한 서린 사연이 전해지는 덕주사가 월악산 서쪽 덕주골에 중건되어 있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다가 하늘재를 넘으며 꿈을 꾸었는데 절을 짓도록 계시를 받아 무려 8년이니 머물며 대원사를 짓고, 같은 꿈을 꾼 덕주공주는 덕주사에 마애불을 세웠다니 월악산 전체가 신라 비운으로 울울창창하다.
2010년 백 봉이 월악리 신륵사 입구에 <월악산> 노래비를 세운 것은 아무래도 그의 고향이 이곳인 때문이기도 했겠다. 비구름에 가려져 있는 날이 많은 최고봉 영봉은 이름마저 영험한, 거대 바위 봉우리다. 월악산 영봉이 물 위에 비치면 태평성대가 온다는 전설은 충주댐이 만들어지면서 월악산 코밑까지 물이 들어차 현실이 되었다. 
2019년 가곡으로도 탄생한 <월악산>(임경희 작사, 정영택 작곡)은 담백하게 노래한다. ‘해와 달도 쉬어 간다’는 월악산, 인고의 세월을 견딘 그 기상이 유장한 남한강 물줄기에 더해져 소란스러운 세상에 국태민안의 평안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주현미의 <월악산> 속 ‘우리 님’이야말로 미륵 세상 오는 소식을 하루바삐 전해 주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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