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아~ 여름이다! 해변으로 가요!!

세상은 미쳐도 세월은 흐르고 계절은 여름의 꼭대기를 향해 느릿느릿 오르고 있다. 내가 구멍 숭숭한 시멘트 블록벽에 양철지붕을 이고 있는 헛간에서 기나긴 겨울잠과 어수선한 봄을 보내고 기지개를 켠 지 달포가 지났다. 같이 있던 원형 접이탁자와 플라스틱 의자 그리고 파라솔은 원팀이 되어 의젓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 옆에는 비치 안락의자가 전신을 쫙 펴서 햇볕을 만끽하고 있다. 서핑보드는 작년의 상처를 페인트로 치료 받은 후 늘씬한 몸매를 벽에 기대고 있고. 
나도 목욕재계하고 신발에 공기를 빵빵하게 채운 다음 숏다리를 치켜세운다. 흠흠… 할일 없이 왔다갔다 하는 파도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설악산 쪽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그녀가 이제나 저제나 오려나? 아니 오기는 할건가?

 

 

코로나! 죠스처럼 이빨이 날카롭거나 에일리언처럼 징그러운 것도 아닌 것에 전세계 인간들이 ‘패닉’에 빠졌단다. 그래서 ‘팬데믹’이란다. 이런 형체 없는 코로나의 모습을 굳이 그려본다면 패닉과 팬데믹의 어원이 된 ‘군중의 신’ 판(Pan)의 모습 아닐까. 그리스신화에서 헤르메스와 페넬로페 사이에서 태어난 ‘판’은 반은 인간이고 반은 염소 모습이다. 머리에는 조그만 뿔이 나 있고 몸은 털로 덮여 있으며, 역삼각형 얼굴에는 턱수염이 달려있는 흉측한 몰골이다. 그래서 판과 같은 코로나 때문에 인간세상이 혼란위축 상태인 것이리라.
그래도 시원한 바다와 파란 하늘이 맞닿아 있는 풍경,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이곳을 잊을 수 있을까! 

나는 비치크루저 족이다. 흔히들 우리 이름을 듣고는 오해하지. 얘들은 해변에서 노는 넘들? 그럼 여름 한철만 즐기다 가는 족속들이네 하고. 
우리의 애초 명칭은 ‘캘리포니아 비치크루저’였어. 당근 캘리포니아는 아열대 지중해성 기후로 평균기온이 1월 15도, 8월 20도이니 일 년 내내 바닷가에서 살아도 무방하다는 말씀! 이름하여 해변의 ATB인 셈이다.
1960년대 캘리포니아 뉴포트 해변에 살던 래리 매컬리는 리사이클링 센터를 하고 있었대. 특히 잔차를 좋아했던 그는 폐잔차의 부품들을 요리조리 조합해 해변의 울퉁불퉁한 길도 편하게 달릴 수 있는, 캐주얼하고 빈티지한 족속을 탄생시키고는 ‘캘리포니아 비치크루저’(California beach-cruiser)라고 명명했어. 그 다음해는 본격적으로 슈윈(Schwinn) 크루저 족이 쏟아져 나왔지. 우리의 흔적을 더듬어 보면, 1934년 슈윈에서 내놓은 ‘B-10E’가 조상이라 할 수 있어. 당시는  대공황 시기라 가난한 서민들의 발이 되기 위해 우리는 허리를 한층 굽혔지. 몸값을 낮추기 위해 원피스 크랭크, 코스터 브레이크, 벌룬 타이어 등을 장착했어. 그러면서도 모터사이클 흉내를 내려고 탑튜브에 가짜 기름통을 붙이고 주먹만 한 헤드라이트도 켰지. 다들 알고 있겠지만 우리 족속이 그 유명한 MTB의 원조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야. 서민의 발이 발전해서 전 세계인의 머신이 되었으니 말이지. 

나는 편한 넘이다. 우리 조상들이 서민들과 함께 골목길을 달리고 재래시장 바닥을 쓸고 다녔듯이 그 뼈대와 습관은 그대로다. 우선 여성전용이라 탑튜브가 다소곳이 구부려져 있어. 치마입고 발차기를 할 수는 없잖아. 엉덩이의 불평을 잠재워주는 쌍 스프링이 달린 함지박 안장, 안락소파에 기대앉듯 편안한 페달 포지션, 앞 경치가 훤하게 보이는 높고 넓은 핸들, 손목만 약간 틀어주면 오르막도 거뜬한 트위스트 7단 변속기, 해변의 소금기를 차단하는 내장 변속시스템과 코스터 브레이크, 자길길과 모래길도 집어 삼키는 넓은 타이어, 튀는 물을 가차 없이 막아주는 길고 듬직한 펜더로 무장하고 있지. 옵션으로 서핑보드를 운반할 수 있는 작은 고리도 있다니까. 
그녀는 지금쯤 미시령 터널을 지나고 있을까?

 

내가 이곳 속초로 온 지도 벌써 4년째에 접어든다. 2017년, 서울양양고속도로 개통으로 이곳의 땅들은 자맥질을 하고 투기꾼과 관광객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우리도 그 같은 변질의 역사에 걸맞은 소품일 것이다. 한적했던 물치해수욕장은 동양의 와이키키로 강추되면서 ‘서핑의 성지’로 블로그에 오르고 있다.
송림 그늘에서 깜박 졸았는데 달달하고 귀 익은 소리에 화들짝 놀라 넘어질 뻔 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챙 넓은 모자와 잠자리 선글라스, 그리고 마스크로 얼굴 전체를 가렸지만 분명 그녀! 그녀였다. 어떻게 알아보냐구?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며! 작년 여름 우리는 삼일동안 꼬박 붙어 있었는데 안 봐도 비디오지. 그녀 역시 나를 척 알아보고는 내 손목을 살짝 잡으며 속삭인다. “잘 있었지? 너와 함께 하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그럼, 3일 후에 반납해요.” 소금기에 절은 주인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그녀 옆에 바짝 붙었다. 그녀의 친구 두 명을 우리네 등에 태우고 동네 골목을 기웃거린다. 해변에서 멀어질수록 한적하고 민박료가 떨어지는 걸 여우같은 그녀가 모를 리 없다.
여장을 풀고 세 미녀(?)가 양은냄비의 라면 가닥을 인양하느라 이마를 부딪치고 있을 때 우리는 마당 한켠에서 소박한 행복을 바라보고 있었지.
다음날 새벽, 물치항으로 향했다. 어스름한 길인데도 나의 핸들을 잡고 요리조리 잘도 가더라.마치 무동을 태운 딸이 아빠 귀를 잡고 머리를 흔드는 것처럼.
오징어, 가자미, 새우 몇 마리를 가져와서는 오징어는 회를 치고 가자미와 새우는 무, 파, 고춧가루 등과 친구가 되어 매운탕이 되어 주었지. 먹성 좋은 그녀들! 그래, 건강미 넘치는 글래머에게 한 표. 
잠시 후 과감한(?) 비키니 삼총사 등장이다. 드디어 우리의 진가를 발휘할 타임이다. 비키니 삼총사를 비치크루저 삼형제가 모시고 좁은 골목길을 나서니 그야말로 ‘어사출두’ 레벨이다. 사람들의 눈알이 튕겨져 길에 뿌려진다. 꽹과리 대신 ‘호텔 캘리포니아’ 팝송이 흘러나온다. 자신감에 찬 그녀들은 몸을 뒤로 한껏 제치고 핸들을 넓게 벌린 채 페달은 슬로우 슬로우 밟으며 은모래, 금모래, 쪽빛 바다, 흰 파도, 높은 하늘, 둥실 구름이 있는 해변으로 접근 중이다. 이렇게 찢어질듯 좋은 삼일을 위해 나는 나머지 삼백예순 하고도 이틀을 매달려 있어도 괜찮다. 정말 괜찮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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