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길과 돌담길 거쳐가는 낭만의 오름 라이딩

한라산 동쪽 중산간지대인 표선면 가시리에는 조선시대 때 최고의 말을 사육하는 갑마장이 있었다. 최고 등급의 갑마(甲馬)들이 다니던 길이 곧 ‘갑마장길’이다. ‘쫄븐갑마장길’은 갑마장 주변에 산재한 8개 오름을 돌아오는 코스 중에 걷기 좋은 ‘짧은(쫄븐)’ 코스다. 따라비오름의 부드럽게 구비치는 능선과 억새밭, 큰사슴이오름의 장쾌한 조망, 옛 목장 담장인 잣성이 특히 인상적이다

 

위치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산 54-2 
코스   조랑말체험공원(꽃머체·행기머체) ~ 가시천숲길 ~ 따라비오름 ~ 잣성 ~ 큰사슴오름 ~ 유채꽃프라자
거리   약 10km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는 조선시대 때 왕에게 진상하는 최고의 말을 사육하는 국영목장인 갑마장이 있었다. 갑마(甲馬)는 최고 등급의 말이고 갑마들을 모아서 기르는 곳이 ’갑마장‘이며 이 말들이 다니던 길이 ‘갑마장길’이었다. 
갑마장길은 가시리 방문자센터에서 시작해 당목천,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 행기머체, 소꼽지당, 안좌동입구를 거쳐 8개의 오름을 돌아오는 약 20km에 달하는 코스다. 그중에서 걷기 좋은 코스만을 뽑아서 만든 길이 ‘쫄븐갑마장길’이다. ‘쫄븐’은 ‘짧은’의 제주 방언이다.
‘쫄븐갑마장길’은 행기머체에서 출발해 가시천, 따라비오름, 잣성, 큰사슴이오름, 유채꽃프라자, 꽃머체에서 행기머체로 돌아오는 약 10km 코스이며, 3~4시간 정도면 넉넉하게 완주할 수 있다.
가시천 곶자왈, 잣성과 함께 따라비오름과 큰사슴이오름까지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져 지루할 틈이 없지만, 역사 이야기가 있는 길이라 더 정겹다. 봄에는 유채꽃, 가을에는 억새물결이 더욱 환상적인 풍경으로 만든다.

머체, 왓, 곶, 자왈…
제주에서 ‘머체’라 함은 돌무더기 정도를 일컫는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머체왓’이나 ‘머체왓숲길’ 등도 흔하게 쓰는 표현으로, 여기서 ‘왓’은 일정한 공간이나 구역을 뜻하며 ‘터’와 같은 맥락이다. 자연 생태가 살아있는 깊은 산중이나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숲속을 ‘곶자왈’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환경에서도 규모와 상관없이 ‘머체’를 만날 수 있다. 
‘곶자왈’ 역시 ‘곶’과 ‘자왈’의 합성어로 된 제주어로서 ‘곶’은 숲을 뜻하며, ‘자왈’은 바위와 돌,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서 수풀 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으로 이해하면 된다.  
한라산 동부권 표선면 가시리 마을 인근에는 ‘꽃머체’와 ‘행기머체’라고 부르는 명물이 있는데, 바로 ‘쫄븐갑마장길’ 코스를 통하여 만나볼 수 있다. 
조랑말체험공원 입구의 녹산로 바로 앞에 ‘행기머체’가 있다. 어떻게 보면 인공적으로 조성된 듯한 모습이다. 머체(돌무더기) 위에 ‘행기물(녹그릇에 담긴 물)’이 있었다 하여 행기머체라고 한다. 원래 오름의 지하에 있던 마그마가 시간이 지나 외부로 노출된 것이다. ‘지하용암돔’이라고 불리는 크립토돔(Cryptodome)인 행기머체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하거니와 제주에서도 유일한 분포지이며, 동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이곳에서 건너편으로 100m 떨어진 곳에 ‘꽃머체’ 역시 크리토돔으로 제주탄생의 지질학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말을 사육하던 곳 
출발점인 조랑말체험공원은 제주의 말 문화를 쉽고 재밌게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말을 사육했던 갑마장이 있던 가시리에 있다. 600년 목축문화의 역사를 녹여 만든 말 박물관과 카페, 아트숍, 너른 승마체험장 등을 운영하고 있다.
조랑말박물관 3층에 오르면 가시리 풍력발전단지의 웅장한 모습과 넓은 초지를 배경으로 올록볼록 솟아있는 오름들, 마을의 돌담까지 가시리와 제주산간 풍경을 360도로 관찰할 수 있다. 
조랑말체험공원의 행기머체에서 바로 앞 녹산로를 건너면 작은 공터가 ‘쫄븐갑마장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출발해 오른쪽 가시천(加時川)을 따라 울창한 숲길이 ‘따라비오름’으로 이어진다. 가시천은 평상시에는 물이 거의 흐르지 않는 건천 상태이며, 하천의 토양은 바위와 큰 자갈로 이루어져 있고 주위를 에워싼 다양한 수종의 숲길은 햇볕이 들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다. 

 

억새 물결치는 따라비오름 
울창한 가시천 숲길을 벗어나면 드디어 시야가 트이고 이윽고 따라비오름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바로 앞의 계단을 오르는 길과 반대쪽으로 우회해서 오르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따라비오름(342m)은 3개의 분화구(굼부리)와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화산이 폭발할 때 분출된 용암이 부드러운 산세를 만들어냈고, 가을이면 오름을 뒤덮은 억새군락이 장관을 이룬다. 이런 풍경에 취한 사람들은 따라비오름을 ‘오름의 여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억새는 오름 초입부터 화려함을 뽐낸다. 넓은 평원은 바람에 흐드러진 하얀 억새풀로 채워지고 그 사이로 아늑한 오솔길이 놓였다. 최고의 인생샷을 남기기 위해 사람들은 얼굴을 빼꼼 내민 채 억새 숲에 몸을 숨기기도 한다.
따라비오름 정상까지는 30분 정도 소요되며 누구나 쉽게 탐방할 수 있다. 계단길을 따라 오르는 사이 잠시 가려졌던 시야는 산정에 도착하는 순간 경이로움으로 활짝 트인다. 굼부리와 능선은 감미로운 곡선을 이루고 수많은 억새 솜털 뒤로 큰사슴이오름(대록산)과 풍력발전단지가 햇살 아래 펼쳐진다. 
봄이 오면 파란 하늘과 검붉은 흙, 확 트인 초록의 대지가 조화롭다. 햇살은 따갑지만 바람은 상쾌하고, 360도 파노라마로 굽어볼 수 풍광이 펼쳐져 더더욱 아름답다. 한라산 아래로 넓게 펼쳐진 대초원과 오름의 향연. 수많은 말들이 뛰놀았을 갑마장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가을이 되면 따라비오름 산정부는 마치 억새의 바다와 같다. 바람은 잔잔하게 때론 거칠게 은빛 파도를 일으킨다. 능선을 따라 걷든, 굼부리의 사잇길을 횡단하든, 따라비오름에서는 움직이는 모든 것이 그림이 된다. 
해가 지평선에 가까워질수록 금빛으로 익어가는 바다. 따라비오름에선 시시각각 색과 빛이 조화를 일으킨다. 제주 토종 억새는 10~11월에 만발의 극치를 이루며 겨울까지 생명력과 정취를 유지한다. 

큰사슴이오름의 놀라운 조망 
따라비오름에서 큰사슴이오름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잣성(목장 경계를 표시한 돌담)은 제주에서 가장 또렷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길을 따라 아름다운 삼나무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잣성‘은 제주지역의 중산간 목초지에 만들어진 국영목장의 경계를 표시한 돌담으로 고도에 따라 상잣성, 중잣성, 하잣성으로 나뉜다. 큰사슴오름과 따라비오름 사이는 중잣성으로서 제주의 목축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잣성을 따라 가시리의 너른 목장을 보면서 호젓한 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 
잣성을 따라 다채로운 풍경을 만끽하며 달리다 보면 가시리 오름 군락 중에 우뚝한 큰사슴이오름(472m)을 만나게 된다. 정상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은 따라비오름보다 두세 배는 힘들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서면 한라산 자락으로 넓게 펼쳐진 장쾌한 풍광은 주변을 압도해서 힘든 것을 잊게 해 준다. 
큰사슴이오름 허리를 걸어 오르는 길에서 보는 풍경, 바람을 안고 돌아가는 거대한 바람개비들 사이로 보이는 크고 작은 오름들이 장관이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 있는 풍경, 줄 지어 서 있는 풍력발전기들이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큰사슴이오름 정상 조망은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오름들뿐만 아니라 멀리 한라산까지 눈에 들어온다. 정상 바로 아래로 대한항공이 운영하는 정석비행장과 정석항공관이 보인다. 잠시 시선을 돌려 따라비오름에서 지나온 풍광을 바라보노라면 막혔던 가슴이 확 터지는 느낌이다. 큰사슴이오름은 가시리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더욱 빛을 발한다. 
큰사슴이오름을 내려가면 유채꽃 광장과 함께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설치된 평원이 펼쳐진다. 긴 계단길을 따라 큰사슴이오름을 내려가자 이 산의 명물인 억새밭이 모습을 드러낸다. 유채꽃 광장에는 건물 앞에 설치된 커다란 의자를 주변으로 인생사진을 담으려는 여행객들로 늘 붐빈다. 
시간이 여유롭다면 큰사슴이오름 둘레길을 돌아보자. 바로 ’대록산둘레길‘이다. 둘레길은 그리 길지 않지만 유채꽃프라자 주변에 펼쳐진 억새밭 임도는 라이딩의 참맛을 느끼기에 제격이다.  
아름다운 경관을 뒤로하고 녹산로 옆 숲길 1.6km를 산림욕하며 달리다 보면 어느덧 출발지인 ‘조랑말체험공원’에 도착하게 된다.

 

머물고 싶은 가(加)·시(時)·리(里) 
사람들이 제주도를 찾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환경을 보기 위해서다. 산과 바다, 하늘과 구름, 꽃과 나무가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제주도의 풍경은 사시사철 모습을 달리하면서 사람들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오름과 오름을 잇는 아름다운 숲길, 큰사슴이오름과 따라비오름을 잇는 아름다운 ‘쫄븐갑마장길’… 유채꽃프라자와 조랑말체험공원을 잇는 녹산로의 유채꽃이 눈부신 제주의 동쪽마을 가시리는 더할 ‘가(加)’와 때 ‘시(時)’ 시간을 더하고 늘려준다는 뜻만큼이나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곳이다.
한라산 동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병풍 같은 오름으로 둘러싸인 가시리 마을은 새것과 옛것이 함께 하는 한가롭고 여유로운 아름다움이 있다. 표선면의 42%를 차지하는 대평원을 품은 마을은 제주마(馬)의 역사와 자연을 느끼며 색다른 풍광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쫄븐갑마장길은 어느 곳에서든 지평선과 수평선을 동시에 볼 수 있는데, 활짝 트인 대평원에 솟아오른 큰사슴이오름과 따라비오름 정상에 올라야만 진정한 제주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라이더라면, 제주의 옛 목축지와 흔적을 따라 ‘쫄븐갑마장길’을 달려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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