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金剛)의 기로 솟은 월출산, 노래도 풍성한 반향 영암

영암이 곧 월출산이다. 평야에 솟은 기암은 영검하고 외경스러워 영암의 사물엔 ‘기찬’이란 관형어를 자랑스럽게 붙인다. 아무리 봐도 금강이나 설악이 떠내려오다 자리 잡은 마지막 터다. 달이 걸린 천황봉은 자궁을 닮은 음택의 기(氣)로 명인 명사를 배출했다. 가야금 산조가 시작되고 현대 민요인 <영암 아리랑>이 태어난 풍류는 월출산 서쪽 몽해들에 풍년가로 흐른다. 60대에 노래 인생 60년을 기록한 하춘화의 진행형 일대기가 ‘한국트로트가요센터’를 이 소읍에 만드는 기적도 가져왔다. 확실히 영암은 신령스러운 기로 충만한 바위산 월출산을 한가운데 모시고 사는 고을이 틀림없다

 

유난히 무더울 거라는 올해의 일기예보는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장마마저도 반 토막으로 잘라먹고 대지를 달구고 있다. 
호남선으로 방향을 돌린다. 영암은 아껴둔 대중가요의 평야다. 여름방학 외가에 가듯 영암을 찾아간다. 거기 월출산이 있고, 가수 하춘화가 있고, ‘한국트로트가요센터’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숨 쉬는 영암의 옛 이름 낭주, 이미자의 <낭주골 처녀>
영암이 반향(班鄕)에 들 수 있는 한 가지는 ‘낭주(朗州)’라는 이름을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는데도 엿볼 수 있다. 낭주는 영암의 고려시대 때 지명이다. ‘낭주 최씨’가 반가를 이루고, ‘낭주교통’이란 명찰을 달고 군내버스가 벌판을 달린다. 하춘화가 개교에도 이바지한 ‘낭주고등학교’까지 살아 있는 이름이다. 어쩌면 ‘낭주’의 ‘낭(朗)’이 ‘밝고 맑게, 유쾌, 명랑, 또랑또랑’의 뜻이 담겨 있으니 소읍치고는 영암 노래가 많은 것은 이미 이름 속에 노래가 들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영암의 노래 둘을 꼽으라 하면 <낭주골 처녀>와 <영암 아리랑>이다. 두 곡 다 같은 시기에 나와서 군민의 자랑은 물론 전 국민이 사랑하는 노래가 되었다.
영암은 이름부터 월출산을 뜻하는 ‘신령스러운 바위산’이다. 평지에 솟은 산이라 1000m에 이르지는 못하나(811m) 영암읍으로 다가갈수록 더 높아진다. 금강산이 떠내려오다 호남 벌판에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 ‘호남의 소금강’으로 불리고, 신묘함이 골산(骨山) 주름 마다 새겨져 있으니 그 옛날 시인묵객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영암을 지나 해남, 강진으로 가는 사람들은 월출산의 동쪽 얼굴만 보고 간다. 기암이 솟아오른 기상에 감탄하며 눈에 담는다. 그러나 월출산의 진짜 모습은 서쪽 벌판에서 볼 수 있다. 그 형용은 다시 하기로 한다.
이제 전통 트로트의 살아 있는 기준점이 되어버린 이미자가 자신도 헤아리지 못하는 숱한 노래 가운데서 인생곡으로 꼽는 노래가 <낭주골 처녀>다. 박춘석 콤비와 부른 700여 곡 가운데서도 향토색이 짙다. 서른셋 이미자의 윤기 나는 목소리로 부른 이 노래엔 영암의 숨겨진 이름이 줄을 잇는다. 월출산, 천황봉, 낭주골, 초수동 범바위, 용당리 나루터까지 영암이 그려진다. 누가 노랫말을 지었을까. 전순남 작사다. 전혀 낯선 이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딱 이 노래 한 곡만을 남겼다. 전순남은 전 영암군수 전정식의 누이이자, 전 MBC 이환의 사장의 부인이다. 어쩌면 월출산 아래 월산마을에 살던 낭주골 처녀 전순남에게 바친 노래일지도 모르겠다. 하춘화의 노래로 알고 있을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영암의 노래로 자리 잡았다.

월출산 신령님께 소원 빌었네
천왕봉 바라보며 사랑을 했네
꿈 이뤄 돌아오마 떠난 그 님을
오늘도 기다리는 낭주골 처녀
노을 지면 오시려나 달이 뜨면 오시려나
때가 되면 오시겠지 금의환향하시겠지

초수동 범바위에 이름 새겼네
영원히 변치 말자 맹서를 했네
용당리 나룻배로 오실 그 님을
단장하고 기다리는 낭주골 처녀
노을 지면 오시려나 달이 뜨면 오시려나
때가 되면 오시겠지 금의환향하시겠지 
<낭주골 처녀> 전순남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노래, 1972. 지구레코드

기네스북에 오른 가요인생 60년, 하춘화의 <영암아리랑>
이제 본격적으로 하춘화의 노래를 찾아간다. 하춘화는 이화자- 황금심-박재란의 계보를 잇는 트로트의 보배다. 월출산록의 ‘기찬랜드’에 트로트란 트로트는 다 모여 있다. 하춘화의 ‘영암아리랑 노래비’와 더불어 ‘한국트로트가요센터’가 있기에 어릴 적 끼고 살던 종합전과처럼 한 자리에서 트로트 변천사를 더듬을 수 있다.
나지막한 2층 건물의 가요센터는 문을 열고 있다. ‘가야금산조테마공원’을 비롯해 대부분의 부대시설이 코로나로 문을 닫고 있는 걸 생각하면 영암군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사실 트로트가요센터는 하춘화의 가요인생 60년이 모태가 된 역작이다. 1층에는 한국 트로트 가요의 역사와 계보, 불멸의 명인 열전이 펼쳐진다. 전문가 수준에서 본다면야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영암군이 선점한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가.
반야월을 한국 트로트의 중시조쯤으로 당당하게 내세워 평가한다. 정작 <울고 넘는 박달재>가 국민애창곡 Top 3에 들면서도 오래전 친일 시비에 밀려 그 많은 자료를 기증까지 했던 가요박물관 건립을 없던 일로 만든 충북의 한 자치단체의 무기력과는 너무도 대비된다.
2층은 하춘화 전용관 아카이브가 오밀조밀하다. 이 모든 것이 101세로 2년 전 타계한 아버지 하종오 옹의 집념과 딸 사랑의 결실이다. 하춘화를 시대의 가수로 키워내며 모은 22권의 스크랩북이 밑천이다. 하춘화의 가요인생 스토리 가운데서 귀에 익은 부분은 건너뛰기로 하자.
영암 학산면 금계리(인터넷 자료는 모두 시종면 출신으로 오기) 출신의 아버지는 일찍이 부산으로 건너가 철강선 제조업체 ‘동아제강’을 만들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여서 하춘화도 부산에서 태어났다. 딸은 제쳐 놓던 시대에, 대여섯 살 딸이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를 부르는 재능을 알아보고 서울로 이사하면서 평생을 뒷바라지에 매달린 부정(父情)이 숙연하다. 하춘화가 자전적 에세이 제목을  <아버지의 선물>이라고 하게 된 배경이 그려진다.
가요센터에 들어서면 7세 하춘화의 밀랍 인형이 익숙한 대사로 맞아준다 “제가 하춘화예요. 금년에 일곱 살입니다. 노래란 것은 우리 생활에 있어서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꼭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그 깜찍한 말은 아버지나 누군가 써준 원고를 외웠을 테지만 너무나 귀엽다. ‘인생 60대에 가요인생 60년’이란 대기록은 글쎄, 미스트롯의 스타 김태연에게나 기대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1년 중 180일은 공연하고, 1981년 기준으로 8,500회 극장 쇼 기록이 기네스북에 오른 것은 초인적이다. 추정 기부액이 200억이 넘는다고 한다. “대중의 사랑을 받았으니 사회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좌우명은 그녀가 “아버지는 내가 가슴으로 배운 교과서였다.”고 말하는 첫 번째 단원에 나오는 말이다.
김대중 유세보다도 더 많은 2만여 군민들이 그야말로 구름같이 모였다는 1977년 하춘화의 낭주고등학교 개교 때 공연은 고향에 대한 보은의 자리이자 아버지께 드리는 얼마나 뿌듯한 선물이었을까. 스캔들 하나 없는 가수 인생 60년의 단정함, ‘사회변동기의 대중가요와 대중정서의 상관성 연구’라는 철학박사 논문으로 정리한 가요 인생은 경이롭다는 말이 적격이다.
자, 17세 여고생 하춘화가 부른 인생곡 <영암 아리랑>부터 먼저 듣고 이야기를 따라가자.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 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사와 데야
달을 보는 아리랑 님 보는 아리랑

풍년이 온다 풍년이 온다 지화자자 좋구나
서호강 몽해들에 풍년이 온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사와 데야
달을 보는 아리랑 님 보는 아리랑

흥타령 부르네 흥타령 부르네
목화 짐 지고 흥타령 부르네
용칠 도령 목화 짐은 장가 밑천이라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사와 데야
달을 보는 아리랑 님 보는 아리랑 
<영암 아리랑> 백암 작사, 고봉산 작곡, 
하춘화 노래, 1972, 지구레코드

 

 

월출산을 배경으로 구림마을은 소나무와 한옥의 풍경이 잘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다. 남도를 찾는 사람들이 머물며 느긋한 한촌(閑村)의 여유를 즐기기에 이만한 풍경이 없다. 영암아리랑의 가사를 누가 지었는가에 관해서는 주장이 엇갈린다. 하춘화의 아버지 하종오 씨가 만들어 담당 PD에게 준 ‘영암 연가’를 역시 영암 출신 이환의 전 MBC 사장이 손을 봐 자신의 호(號)인 ‘백암’ 작사로 등재하였으니 요즘 같으면 공동 작사자인 셈이다. 하춘화 아버지의 문학성 감수성은 하춘화의 첫 독집 <효녀 심청 되오리다>에 수록된 8곡의 작사자가 오종하인데서 발견된다. ‘오종하’를 거꾸로 뒤집으면 ‘하종오’가 된다. 그야말로 ‘로꾸꺼’(뒤집어 읽어보시라)인 셈이다. 
가까운 곳에 몽해리가 있다. <영암 아리랑>에 등장하는 영암의 지명 서호강과 ‘몽해들’이 바로 이곳이다. 몽해들과 학파저수지를 지나는 학산천이 서호강이다. 엄길마을이 바로 이환의 씨 고향이다. “작은 동산과 저수지(학파) 안으로 월출산이 수묵화가 되는 ‘엄길마을’이라고 어느 여행작가는 문장을 매듭지었다. 서호강으로는 바닷물이 드나들었고 ‘배들래’(배가 드나드는 곳)라는 지명까지 있었으니 그 물에 비친 월출산 연봉의 실루엣이 낭만과 사랑을 자아낼 만 하다. 몽해들이 더욱 풍성해진 것은 일제 때 시작하여 5·16쯤에 완성된 학파들의 드넓은 평야 때문이다. 여기에 호남갑부 현씨 집안이 등장한다. 
일제 때 영산강 간척 사업권을 따낸 현준호는 동척(東拓)의 지원을 받아 1949년 서호면 성재리와 군서면 양장리를 잇는 1.2km 제방을 완공한다. 현준호의 부친 현기봉의 호 ‘학파’를 따서 ‘학파농장’을 만들지만 6·25 전란 속에 장남 현영익과 2남 현영직이 인민군에게 피살되거나 자진(自盡)한다. 3남 현영원이 전남방적을 불하받은 갑부 김용주의 딸 김문희와 결혼하여 낳은 딸이 현대그룹의 현정은 회장이다. 김문희의 남동생인 김무성이 현정은의 외삼촌이다. 그 후 소작쟁의 등 간척지 소유권 분쟁 속에 ‘친일·반민족 행위 705인’ 명단에 현씨 일가가 올랐지만 여전히 학파들에는 그 이름이 남아 있다. 한 뼘 땅뙈기가 천금과 같던 시절, 수천 정보의 들판을 곡창으로 만든 것만으로도 그 공은 적지 않다. 이념도 먹고 사는 게 우선이다. 대대로 살아오는 엄길마을 주변 사람들은 ‘학파로’를 마을 길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몽해들로 자연스레 이어왔다.
흡사 현대가 정주영 회장이 천수만을 막아서 현대농장의 끝도 보이지 않는 땅을 만들었듯이 그렇게 현씨 일가의 간척지 땅 역사가 학파농장, 학파저수지에 여전히 담겨 있다.

영암천에 펼쳐지는 갈대밭 서정 ― 작사가 김지평, 이정옥의 <숨어 우는 바람 소리>
또 하나 영암이 낳은 대중가요의 명곡은 <숨어 우는 바람 소리>다. 살비듬이 넉넉한 중년 여인들이 가슴 저미도록 좋아한다는 노래다. 이 노래의 주재료는 갈대숲과 바람 소리다. 그 탄생 무대가 된 영암천 갈대밭으로 자전거를 몬다. 강둑은 무성한 풀숲을 이룬다.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창가에
길 떠난 소녀같이 하얗게 밤을 새우네
김이 나는 차 한 잔을 마주하고 앉으면
그 사람 목소린가 숨어 우는 바람 소리
(후렴)

둘이서 걷던 갈대밭 길에 달은 지고 있는데
잊는다 하고 무슨 이유로 눈물이 날까요
아~~ 길잃은 사슴처럼 그리움이 돌아오면
쓸쓸한 갈대숲에 숨어 우는 바람 소리
(후렴 반복)
<숨어 우는 바람 소리> 김지평 작사, 김민우 작곡, 이정옥 노래, 1993, 한국음반

1993년 MBC신인가요제 대상 곡이다. 이미 1988년 엮은 가사를 개작해서 발표한 것이다. 여인들이 그렇게 애창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저명한 작사가 김지평의 청소년기 목가적 정서가 담겨 있어서다. 영암천 언저리 덕진면 금강리 금산마을 출신인 김지평의 정서는 영암천 변에서 키워졌다. “뜬금없는 홍수로 사라진 코짐뱅이 마을의 기억, 달빛에 일렁이는 정념”이 그의 시작(詩作)의 바탕에 있다. 흡사 작사가 정두수의 고향 하동 주교천 냇가를 따라가는 시오리 솔밭길의 정서와 전혀 다를 게 없다. 김지평은 그 시절 열병처럼 유행하던 ‘S 누나’에 대한 연정을 <사랑이 아니어도 좋으리>에서 감추지 않았고,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이호준이 작곡한 <어린 고향>의 노랫말을 썼다. 
김지평은 서정에 그치지 않고 가요에도 분명한 정신세계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렇기에 아예 우리 가요사를 냉정하게 해부한, 자신감 넘치는 책 <한국가요 정신사>를 내기도 했다. 오래전 사두고 먼지가 쌓여 있던 <한국가요 정신사>를 이렇게 영암의 노래에 읽혀 펼쳐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아픔은 우리 주변의 일상이고 소리를 내 우는 것은 폐가 된다”고 믿어 조용한 인고(忍苦)를 ‘숨어 우는 바람 소리’로 치환했다.
가요 시의 정신에 대해서도 엄격해 다소 비장한 정의까지 내렸다. “북(北)은 인민(人民)이라고 말하면서도 위선적이고, 남(南)은 민중(民衆)을 말하지만, 엘리트의 허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나는 민초(民草)의 울음 앞에 내 노래를 바치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 민초는 바로 가요 대중이다. ‘대중가요의 골목길’에서 만나는 보통사람들의 다른 이름이다. 민초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노래는 일곱 단어로 집약된다. ‘갈대밭, 통나무집, 달, 사슴, 바람 소리, 소녀, 그리움’이다. 이쯤 되면 아무리 무딘 여성이라 해도 갈바람의 서걱임에 동하지 않을 리 없다. 
김지평은 그 시절 “돈을 벌면 사슴 몇 마리를 이 산 저 산에 놓아 풀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사슴의 작가’로도 불렸다. 인터넷 히트송 1호라는 <숨어 우는 바람 소리>를 부른 이정옥은 노래보다는 덜 알려진 가수임이 틀림없다. 호소력과 가창력이 탁월한 김연숙의 리메이크 버전이 더 알려져 유튜브를 달구고 있다. 이다래란 이름으로 활동을 재개한 이정옥의 목소리에도 세월이 묻어나 청아한 갈바람 소리는 LP에서나 기대할 일이다.

 

 

나훈아가 준 노래로 뜬 대기만성, 강진의 <땡벌>
영암천이 학산천과 합류하는 영산강 변에 시종면이 있다. 이 동네에 오랜 무명을 청산하고 그야말로 ‘핫하게’ 떠 있는 가수가 있다. 강진이다. 그 또한 6살 때부터 트로트를 구성지게 불러 소문난 ‘논두렁 신동’이었다. 인근 고장 이름이 마침 강진(康津)이라 ”강진에 강진은 없다“는 말이 ‘말이 되는’ 우스개다. 강진의 무명 30년은 출세하기 위해 호남선 밤 열차를 탄 70년대 상경의 시간과 함께한다. 라이브 무대에서 록 음악으로 시작하여 도무지 뜰 기미를 보이지 않는 그를 희자매 출신의 아내 김효선이 안면으로 들이대며 나훈아를 졸라서 넘겨받은 노래가 땡벌이다.

아 당신은 못 믿을 사람 아 당신은 철없는 사람
아무리 달래봐도 어쩔 수 없지만 
마음 하나는 괜찮은 사람
오늘은 들국화 또 내일은 장미꽃 
치근치근 치근대다가 잠이 들겠지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땡벌 기다리다 지쳤어요 땡벌 땡벌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너무 추워요
당신은 못 말리는 땡벌 땡벌 
당신은 날 울리는 땡벌 땡벌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너무 길어요

아 당신은 야속한 사람 아 당신은 모를 사람
밉다가도 돌아서면 마음에 걸리는 
마음 하나는 따뜻한 사람
바람에 맴돌다 또 맴돌다 어딘가 
기웃 기웃대다가 잠이 들겠지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땡벌 기다리다 지쳤어요 땡벌 땡벌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너무 추워요
당신은 못 말리는 땡벌 땡벌 
당신은 날 울리는 땡벌 땡벌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너무 길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땡벌 땡벌 
당신을 좋아 해요 땡벌 땡벌
밉지만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해 
<땡벌> 나훈아 작사·작곡, 강진 노래, 2005년, 강진 5집 앨범

<땡벌>은 조인성이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화끈한 술판 분위기를 띄우며 뜨기 시작했다. 탬버린을 흔들며 노래방에서 합창하는 ”땡벌~ 땡벌~“은 청춘들의 추임새가 되어 스트레스를 확확 날려버린다. 대학생들의 애창곡 리스트에 오르고, ‘사랑 고백곡’이 될 정도로 인기를 얻으면서 강진의 본격적인 이륙도 시작되었다. 
노랫말에 아무리 외롭다고 해도 도무지 외로워 보이지 않는 것은 경쾌한 리듬에 실려 어깨 흥이 먼저 나버리는 탓이다. “당신은 못 말리는 땡벌~ 기다리다 지쳤어요 땡벌”에서는 엄살과 애교가 적당히 버무려져 있다. 농담인 듯 진담을 말하는 재치와 유머가 젊은 피의 구미에 딱 맞아떨어진다. 땡벌을 표준어 ‘땅벌’이라고 부른다면 말맛이 확 줄어든다. 제아무리 소주가 표준어라 해도 ‘쏘주’라고 불러야 ‘캬아~’하는 뒷맛이 살아나듯 말이다. ‘땡벌’이 강원도 사투리라지만 경상도에선 ‘땡삐’라 부른다. 땡삐라는 말만 들어도 혼비백산할 지경이니 부산 사나이 나훈아도 노랫말에 ‘땡벌’이라고 독(毒)을 슬쩍 뺀 게 틀림없다.
군살이라곤 도무지 없는 도시풍의 남자 깔끔쟁이 강진도 노래에는 그의 고향 영암 논두렁의 향수를 깔고 있으니 <막걸리 한잔>이 그리 보면 어울린다. 미스트롯으로 불붙은 트로트 중흥시대에 ‘영탁의 막걸리’로, ‘양지은의 통일 <붓>’으로 다시 원곡자 강진이 불려 나오는 늦복이 터졌다. 제조원과 발매원이 함께 대박을 축하하는 상생의 시간이 그에게 펼쳐지고 있다.

이보다 장엄한 영산강은 없다, 이태헌의 <영산강>
자전거로 들판을 달리기는 여름날 더위보다는 아무래도 선선한 가을이 좋겠다. 삼포강이 영산강과 합류하는 언저리는 굽이굽이 꿈틀거리던 강이 제법 넓어진다. 과객의 발길도 뜸한 강변으로 나서면 정말 한적한 영산강을 만나게 된다. 이름도 어여쁜 은적산 사이 마을은 이름조차 금강리, 태백리다. 증산교의 창시자 강일순이 “백두(白頭)의 기운이 한라(漢拏)로 뻗고, 덕유(德裕)의 기운이 무등(無等)에 닿고, 금강(金剛)의 기운이 월출(月出)에 맺었다”라고 한 말이 상기된다. 그저 상서롭다고 믿고 싶다.
숱한 대중가요가 영산강을 노래할 때, 아무래도 영산강 300리에서 영암 쪽이 제격이다. 영암은 시종, 도포, 군서, 서호, 학산, 미암, 삼호 7개 면이 영산강과 접하고 있다. 이제 영산강의 노래를 찾아간다. 어느 날 ‘KBS 가요무대’에서 중절모를 눌러쓰고 기타를 메고 등장한 한 중년 남자를 만났다. ‘이대헌’이라 하나 낯선 얼굴이다. 그가 부르는 노래가 가슴을 헤집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영산강>이었다. 이보다 더 처연한 영산강은 아마도 없겠다.

푸른 바람에 부딪히는 물살을 보아라
보아라 백사장 세월의 무늬
사금파리 얼굴로 기웃거린다
토라지는 입술이 곱지 않느냐
영산강 상류에 가서 우리 엄니 빨래터에 
앉아 보거라
물속에는 송사리 떼 몰려가고
그 사이사이 세상살이 그을은
귀신같은 내 얼굴 맞이하더라
(후렴)

영산강 상류에 가 보아라
천년에 한번 백마 타고 오시는 님
님의 모습 가 보아라
천년에 한번 백마 타고 오시는 님

일몰에 영산강 강가에 서 보아라
천년에 한 번 울먹이는 소리 들어 보아라
천년에 한 번 울먹이는 역사 들어 보아라
아베의 말씀은 두만강에 서성이고
엄니 말씀은 영산강에 떠돌고
노기 띤 아베 말씀은 물밖에 서성이고
오늘도 아프게 영산강은 흐르더라
(후렴 2번 반복)
<영산강> 최규창 작시, 이대헌 작곡·노래,  2001, 파레트 뮤직 엔터테인먼트

 

 

<영산강>의 노랫말이 예사롭지 않다. ‘영산강 상류 어머니의 빨래터로 가보라’는 말은 오탁으로 절어버린 아랫 강 영산강의 절망처럼 들린다. 그 상류에서 만나게 되는 ‘천년에 한번 백마타고 오시는 님’은 미륵(彌勒) 세상의 구세주인가,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종사(宗師)인가. 세상 풍파 찌든 내 육신을 씻겨주는 강물 앞에 그저 눈물 흘릴 뿐이다. 영산강이 천년에 한 번 울먹이고, 아베(아버지)의 분노가 두만강에 다다르는 천년의 사건은 왕조의 몰락인가, 두만강과 영산강의 대비는 6·25 환난 끝 속절없이 여전한 분단인가. 나는 정해진 답을 찾지 못한 채 이 노래를 몇 번이고 다시 듣고 있다.
흡사 정태춘의 음유시처럼 들리기도 하고, 서유석의 걸걸한 목소리를 일깨우는 그 노래와 이대헌이 더 궁금해졌다. 역시 <영산강>은 시였다. 시인 최규창은 이미 1980년대에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중견 시인이자 전 기독교신문 주필이다. 시인의 고향이 나주인 걸 보면 그의 영산강은 유년 시절부터 가슴 깊숙이 흐르고 있어 ‘영산강’ ‘영산강 비가’ ‘아이야 영산강 가자’는 시가 우러나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소달구지’ ’백두산의 눈물‘ ’낮달‘은 서정적이나 초가지붕 처마에 매달린 빗방울 같은 슬픔이 구슬 되어 떨어진다. 강물에 어룽거리는 사금파리가 그의 시 편편에 등장하는 것은 맑은 영산강의 이미지를 갈급하는 만큼 속이 타고 있다는 뜻일 게다. 
이대헌은 90년대 그룹 ’데블스‘의 싱어 겸 리더 기타리스트였다. 포크 계열의 싱어송라이터로 여러 버전 가운데서도 김광석의 노래로 사랑받는      <먼지가 되어>의 작곡자다. 젊은 독자라면 KBS 2TV ‘이하나의 페퍼민트’ 진행자인 가수 이하나의 아버지라 해야 쉽게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알 만한 사람은 아는데 내 음악적 편식이 드러난 셈이다.

산업화시대 호남선 상행열차를 탄 내 님께, 송춘희의 <영산강 처녀>
또 하나 영산강의 노래 무대를 찾아간다. 송춘희의 <영산강 처녀>다. 아무래도 이 노래의 배경은 영상강 하류다. 노랫말 속에서 단서를 찾는다. 똑딱선 타고 서울 간 님은 나룻배로 건너가는, 홍어의 집하지(集荷地) 영산포쯤은 아니다. 더구나 2절에 유달산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면 강마을에 사는 영암 처녀가 분명하다. 영산강 하굿둑이 생겨나기 전이었으니 바닷물이 강 깊숙이 지천까지 들어오던 때였다. 어쩌면 삼호나 독천 갯벌에서 낙지를 잡던 처녀였음이 맞지 싶다. 이미자의 <낭주골 처녀> 속 떠나간 님이나 송춘희의 <영산강 처녀> 속 떠나간 님이나 용당리 나루터에서 똑딱배를 타고 건너다보이는 목포항 부두를 통해 호남선을 타고 서울로 간 님이다.

영산강 굽이도는 푸른 물결 다시 오건만
똑딱선 서울 간 님 똑딱선 서울 간 님
기다리는 영산강 처녀
못 믿을 세월 속에 안타까운 청춘만 가네
길이 멀어 못 오시나 오기 싫어 아니 오시나
아~ 푸른 물결 너는 알지 말을 해다오

유달산 산마루의 보름달을 등불을 삼아
오작교 다리 놓고 오작교 다리 놓고
기다리는 영산강 처녀
밤이슬 맞아가며 우리 낭군 얼굴 그리네
서울 색시 고운 얼굴 정이 깊어 아니 오시나
아~ 구곡간장 쌓인 눈물 한이 서리네
<영산강 처녀> 천지엽 작사, 송운선 작곡, 송춘희 노래, 1968, 오아시스 레코드

송춘희의 목소리는 기름지다. <영산강 처녀>는 낭군님의 무소식으로 애달프기 그지없지만 룸바 리듬으로 기운을 차리면서 부를 수 있다. 삼호 갯벌은 이미 메워져 거대한 공업단지로 변해 있고 용당리 나루터는 토박이들이 저기 매립지 모퉁이쯤이라고 손짓으로 일러줘 어림짐작할 뿐이다. 민물과 짠물이 섞여버린 드넓은 하구의 저편에 목포항과 유달산이 그 시절, 그 사연을 알고 있다는 듯 건너다보고 있다. 

 

 

 

 

참고자료
1. <아버지의 선물>, 하춘화, 중앙북스, 2009
2. 영암을 대표하는 대중가요, <낭주골 처녀>, <영암 아리랑>, 문배근, 영암신문, 2018. 11. 16
3. <한국가요 정신사>, 김지평, 아름출판사, 2000
4. 역사 속 전라도 영암학파농장과 친일파 현준호, 서일환, 광주드림, 2020. 2. 28
5. 주철환의 음악동네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문화일보, 2021. 8. 2
6. 한국가요편람(신민요부터 1990년 말까지), 문화방송·한국음악저작권협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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