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차의 고백⑭ - 투어링 바이크

나는 잔차족 중에서 쉬지 않고 바퀴를 굴려야하는 운명이다. 가다가 멈추면 쓰러지고 구르지 않으면 이끼가 공습한다. ‘move move’ 해야만 행운을 만날 수 있는 역마살이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지구별은 중단 없는 공전을 통해 계절 변화의 신비를 일깨워주고 자전으로 낮과 밤의 역할을 부여해준다. 난바다의 파도 따위가 무서워 부두에 몸을 꽁꽁 묶어놓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선박이 아닌 선착장일 뿐이다. 나는 집안에 있을 때는 차가운 시체였다가 문만 나서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온 몸에 생기가 넘치는 여행용 잔차족이다.

 

미국에 살던 우리의 조상 오디너리 할배는 토마스 스티븐스라는 모험청년과 함께 1884년 8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를 출발하여 유럽, 중동, 아시아를 지나 2만4천km를 돌고 와서 영웅이 되었지. 이후 로드바이크, 산악자전거, 미니벨로 등의 다양한 혈통들이 모여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어. 
편하고 튼튼한 우리 몸에 어미젖을 빠는 새끼 쥐들처럼 주렁주렁 패니어를 매달면 의식주가 해결된다. 몸통이 작은 아담족(미니벨로)은 뒤꽁무니에 트레일러를 연결하면 된다. 이런 섹시한(?) 모습에 인간들은 마릴린 몬로에 홀린 듯 신세계를 꿈꾼다. 잘 나가던 대기업 임원을 50세에 사표 쓰게 만든다. 6400km 아메리카 횡단길에서 저질체력의 여행자를 홀로 헐떡이게도 한다. 히말라야의 깔딱고개들을 다리미로 펼 수 있다고 뻥을 치기도 한다. 아마 나는 전생에 고통의 신 파리카(Parika)였던가.
그래도 신은 인간이 감당할 만큼의 고통을 준다지 않는가. 고통은 오히려 깨달음으로 가는 고속도로라고도 하지.
그는 30여년 간 일한 잔차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온 몸에 잔차 독(毒)이 퍼져 있음을 실감한다. 하루라도 잔차에 오르지 않으면 엉덩이에 가시가 돋고 한시라도 잔차를 생각지 않으면 머리가 깨지는 심각한 병이다. 암처럼 퍼져 있는 액운을 털어 내기 위해 섬나라 수도에 있는 용한 연금술사를 찾는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한 분이라 뵙기도 쉽지 않았고 가나문자를 쓰는 그의 말귀를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1,185일간의 수련 끝에 나를 낳았다. 실험용으로 로드족, MTB족을 만들어 보고 나서 드디어 나를 잉태한 것이다. 무겁지만 강하고 탄성 좋은 크롬몰리 합금강으로 뼈대가 이루어진다. 지름 28.6㎜의 가는 파이프로 앞 삼각을 만들고 13㎜ 내외의 파이프로 시트스테이와 체인스테이를 붙이면 다이몬드 차체가 완성된다. 포크도 결합한다. 구동계, 조향계, 브레이크 등의 컴포넌트는 이전 MTB ‘구르미’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형들에게서 교복, 책가방 등속을 물려받는 막내의 속쓰림이다.
한마디로 너절한 고물상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에 베어링은 울렁거리고 그의 고국에 간다는 기대감에 타이어는 한껏 부풀어 있다. 등에처럼 짐받이를 걸치고 패니어를 달고 핸들바에는 가방을 부착해 2천km의 섬나라 탈출 작전이 시작된다.

일부일처제로 가정의 평화를 다져온 긴 세월이 그 효능을 입증하고 있건만 아직도 우리에겐 일부다처제의 늪에서 신음하고 있다. 프라하의 봄? 아니 잔차의 봄은?
하지만 질투가 결코 해열제가 될 수 없음을 잘 아는 우리다. 그 또한 잔차 매니아니 여러 족속의 잔차와 함께 살고 있다. 달빛 교교한 밤중의 베란다에서 ‘잘난 체 잔치’가 개막한다. 가늘고 날씬한 허리를 자랑하는 카본 로드, 웬만한 충격에도 상처입지 않는 강인 체력의 티탄 MTB, 공간의 마술사인 폴딩 미니벨로는 달빛에 모습을 비춘다. 나는 묵직한 몸무게와 함께 입을 다물고 있지만 우승을 자신한다. 사랑은 스킨십에서 시작해서 스킨십으로 마무리된다고 했던가. 매일 그와 함께 달리는 잔차는 바로 나다. 그의 손바닥을 애무하고 엉덩이를 매만지고 발가락을 마사지해주는 궁극의 스킨십에 몰입한다.

 

 

그는 가슴 깊이 나를 사랑하나 보다. 물려받은 고물의 째째한 내 모습이 안스러웠던지 이번에 완전 럭셔리하고 스타일리시한 컴포넌트를 사와서 대대적인 성형수술을 마쳤다. 무엇보다 기분이 짱인 것은 나의 아이덴티티에 딱 맞는 시마노 XT 투어링 버전이기 때문이다. 
48×36×26의 3단 체인링은 고속과 저속의 폭이 넓어서 좋다. 체인링 커버는 바짓단을 배려한다. 11-36T의 10단 스프라켓도 과학적 선택이다. 푸시풀 변속레버는 미풍처럼 부드럽고 인디게이터 숫자도 친절하다. 
디스크 로터를 완벽하게 잡아주는 유압 브레이크 레버는 리치가 길어 장시간 내리막을 쏠 때도 든든하다. 내친 김에 신발까지 1.75인치 새 타이어로 바꿔 신었다. 3시간 동안 분만실 의사처럼 조심조심 정성 가득한 그의 모습을 쳐다보면서 감동의 눈물이 흐른다. 그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구슬땀만큼이나!

호랑이에 날개를 달면 어떻게 될까? 그 호랑이는 뭘 하고 싶을까? 당장 그와 떠나고 싶다. 나의 날개를 저 푸른 창공에서 휘젓고 싶다. 의미 있고 멋진 여행을 떠나야지. 한반도에서 제일 긴 국도가 77번 국도란다. 부산에서 시작하여 남해안을 훑고 서해안을 구불구불 타고 올라가 임진각에서 끝난다는 77번 국도! 장장 1,258km의 독보적인 거리! 그의 별명은 樂, 나의 이름은 喜! 락희가 더블 럭키세븐을 달린다.
하늘은 높아 텐트치기 좋고 잔차는 튼실하여 여행하기 좋은 계절도 깔맞춤이다. 앞뒤 짐받이 랙에 패니어를 달고 그를 태우고 임진각을 뒤로 한다. 자기야, 우리 77(칠칠)하게 달려 볼까! 우리 둘만 갈 거야! 따라 오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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