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차의 고백

오늘도 우리는 달리고 또 달린다. 털 많은 원숭이에서 어쩌다, 정말 어쩌다 만물의 영장(그들의 주장이지만)이 된 인간과 달리 우리 잔차족은 지구별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태어났다. 기냥 대충족이 아니란 말씀이다. 
대지의 신 가이아의 실수로 터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재에 덮인 유럽은 생지옥이었다지. 2년째 계속되는 흉년에 식량이 동나자 유일한 운송수단인 말들은 마구간이 아닌 사람들의 뱃속으로 들어가야 했지. 1817년, 그 끔찍한 시기에 우리는 구세주처럼 나타났어.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허수아비같이 단순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우리의 대변인 인간 드라이스는 발바닥에 불이 나는 줄도 모르고 달려댔지. 독일 만하임 거리 12.8km를 1시간에 주파해 3시간 뒤에 달려온 역마차를 쥐구멍에 처박아 버린거야. 새로운 달리기 선수의 역사적 탄생이었지. 이런 기적을 보면서도 우둔 인간은 멀뚱멀뚱했지만 현명한 인간은 혁신적인 발명으로 우리를 숭배하기 시작했어.
자화자찬하면 쑥스러우니 타민족인 인간족의 말을 들어보자. 1893년 이탈리아 인간 학자인 파올로 만테가차는 우리를 ‘자유의 기계’라며 극찬했지. 좀 길지만 한번 들어 보시게. 
“자전거 스포츠는 물질의 관성을 고민한 인간의 사고가 얻어낸 승리다. 땅에 닿지도 않을 것 같은 두개의 바퀴, 채찍을 맞은 말이 흘리는 잔혹한 땀 한 방울 없어도, 증기를 뿜어대는 기계의 고막을 찢는 괴성이 없이도, 날개에 오른 듯 어질어질 취하게 만드는 속도로 그대로 멀리 데려가는 두 바퀴, 균형, 가벼움, 소박함의 기적, 최고의 힘과 최소의 마찰, 속도와 우아함의 기적, 천사가 되고 싶고 땅을 밟고 싶지 않은 인간. 그리스 무덤에서 부활해 우리 앞에 살아난 헤르메스, 그것이 자전거 타는 사람이다.” 벌써 100여 년 전에 우리가 헤르메스의 후손임을 눈치 챈 인간이 있었다니! 
인간은 보이는 것만 믿는 법! 그동안 우리는 잘 나간다는 역마차, 증기기관차와 결투하여 연전연승을 구가했지. 그래서 빠른 우리끼리 승부를 겨루기로 한 거야. 결전의 날은 코카콜라가 태어나기 18년 전인 1868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잔차족 경주가 열렸어. 앞바퀴 직경이 1.5m에 무게 25kg의 거구인 오디너리 선수는 영국에서 온 청년 토마스 무어를 어깨에 얹고 뼈가 흔들리는 소리를 내면서 30km의 울퉁불퉁한 길을 2시간35분만에 골인, 우승하여 섬나라의 체면을 살려 주었지. 

 

 

명불허전! 빠른 발이라는 ‘벨로시페드’가 인간들을 열광케 했고 그들은 우리와 절친이 되길 소망했어.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이의 나라 안에 재봉틀족이 사는 코벤트리라는 곳에 우리 잔차족이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었지. 1년 뒤 프랑스에서는 ‘라 벨로시페드 일리스트레’라는 잡지가 창간되어 우리 잔차족의 일거수일투족이 적나라하게 공개되었고. 우리와 한번 접한 인간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양 즐거워했지. 꼰대들은 위험한 족속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귀가 없는 척 얌전한 여자 인간들까지 지옥 같은 코르셋에서 해방시켜 버렸어. 잘했지?
역시 그 당시에도 프랑스는 문화, 예술의 옴파로스였어. 1903년 7월 1일은 로드바이크족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야. 바로 ‘투르 드 프랑스’가 열린 날이거든.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우리 족속들이 모여 인사하고 경쟁하고 격려하는 축제의 시작 날을 어찌 잊을 수 있겠냐고. 물론 그 전에 파리-루베 간의 경주도 열렸지만 20여일 동안 2,500여km를 달리는 초장거리, 초장시간 레이스는 처음이었어. 해바라기가 춤을 추는 들판을 달리며 같이 노래하고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올랐던 알프스의 산길에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격려의 미소를 주고받았지. 그렇게 우리는 파리의 개선문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는 거야. 
하지만 우승은 자유처럼 다 같이 나눌 수 없는 다이아몬드 같은 것! 전력질주, 질풍노도로 달려 한 벌뿐인 옐로저지를 차지해야 하거든. 아름답기 때문에 우승하는 것이 아니라 우승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 
우리 잔차족의 축제는 봄을 맞는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여름에는 프랑스, 가을의 초입에는 에스파냐로 이어지지. 경주는 세기를 넘기며 계속되어 세계 잔차족의 종교가 되었어. 우승한 종족을 찬양하고 숭배하여 그를 닮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지. 그래서 신공을 갈고 닦아 스피드를 올리는 게 최고의 미덕이야. 그래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으니.
그래서 스피드는 생존이다!

 

 

녹색 청소차의 로고송 ‘엘리제를 위하여’가 새벽을 연다. 그 시각 채 실장은 사무실 겸 샘플실에서 실밥 날리며 재봉질이다. 드르럭 드르럭. 대학 시절부터 드나들던 동대문에 터 잡은 지 10년이 지났는데 강산도 안 변하고 생활도 바뀔 기미가 없다. 
어릴 때 갖고 놀던 바비 인형이 “의상 디자이너가 되어라”고 했던가? 세계적 유행, Fast Fashion을 목표로 삼았지. 한국인의 후딱후딱 마른 성격에도 맞을 것 같고. 잘 나가는 ZARA는 자라목처럼 쳐버리고 uniqlo는 본국으로 쫓아주는 애국자도 많으니 조만간 채송화 밭이 될 것이다. 꿈은 이루어지라고 꾸지만 현실로의 변신 기술은 서툴다. 나오는 건 한숨이요, 느는 건 뱃살뿐인 그때, 그녀의 눈으로 우리 잔차족이 들어간 것이다. 
3년 전 봄, 친구 민들레와 만나 뚝섬에서 따릉이에 올랐대. 비틀비틀, 허우적허우적 한강을 헤엄치듯 가는 그녀들을 한 무리가 바람처럼 스쳐가더래. 멀리 남산타워가 보이는 성수대교의 황혼에 비치는 실루엣에서 그녀는 필이 딱 꽂히고 말았지. “저거야! 바람을 가르며 붉은 태양도 겁내지 않고 달려드는 저 사이클처럼 달려보자! 그래서 회사이름도 ‘빛보다 빠른 속도’ 타키온(tachyon)으로 짓지 않았던가! 
나는 그렇고 그런 NOM이 아니다. 우리 로드바이크족의 명예와 자존심을 한 몸에 진 ‘궁극의 사이클’이다. 미국의 명문가 기함이란 말이다. 프레임, 포크, 휠셋 등이 첨단 소재인 카본파이버라 가볍고 통통 튀는 탄성도 죽인다. 거기에 걸맞는 컴포넌트는 기꺼이 그녀의 엔진이 되어준다. 지난주에는 그녀가 출렁거리는 뱃살과 이별한 기념으로 바인딩 페달을 선물했다. 그녀가 좀 더 나에게 밀착한 기분이다.
스피드가 존심인 나와 스피드가 인생인 그녀와의 만남은 숙명이고 천생연분이다. 그래서 스피드는 생존이고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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