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차의 고백⑰

 

나는 보통의 잔차족에 비해 바퀴가 한개 더 있다. 그래서 잔차족들이 우리를 기형족이라고 깔보고 무시한다. 하지만 우리도 잔차계의 역사에서 보면 나름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사실 두발로 걷는 인간은 불완전하고 겁이 많은 동물이다. 초창기 우리 두바퀴와 함께 할 때 땅바닥에서 두발을 떼지 못한 것은 극심한 균형공포 때문이다. 따라서 뒤뚱뒤뚱하다가 사고를 연발로 쳐서는 결국 도로에서 타는 걸 금지당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기도 했지. 더욱이 1825년에는 증기기관차가 영국 스탁턴에서 달링턴까지 사람들을 태우고 달렸어. 우왕좌왕 인간들은 철도로 우그르르 몰려가고 드라이지네족은 완전 무시당했대. 그때 ‘짜잔’ 하고 등장한 것이 바로 우리 세바퀴 잔차족이었어. 
런던의 핸콕 엔드 컴퍼니에서 탄생한 ‘필렌툼(Pilentum) 경’이 우리의 선조인 셈이지. 한껏 차려 입은 귀부인을 백조처럼 우아하고 안전하게 모셔가는 삼륜 잔차족은 잔차계의 명예를 살려주며 명맥을 유지하게 해주었지. 알고 있나? 두바퀴족들!
우리 삼륜 잔차족도 여러 계파가 있어. 대표적으로 앞바퀴 하나에 뒷바퀴가 두개인 삼각주 형태의 델타(Delta)계라 불리는 족속이 있지. 반대로 앞바퀴가 두개여서 가분수처럼 보이는 올챙이(Tadpole)계도 있고. 우리 같은 델타계는 흔히 릭샤(Rickshaw)라고 부르지. 이 말은 일본 도쿄 아사쿠사나 교토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인력거를 일본어로 진릭샤(人力車)라고 하는데 여기서 사람(人)을 빼고 릭샤(力車)라고 부른 것이 유래야. 
우리 릭샤족은 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데 중국에서는 큰 덩치로 우마차를 대신해서 화물을 실어 나르기도 하지. 인도에서는 여행객 커플을 뒷허리에 꿰차고 느릿느릿 소걸음으로 복잡하고 시끄러운 시장통을 거닐기도 하고. 캘커타에 사는 먼 친척 아저씨는 몇 번이고 허리가 끊어져 불찜질로 겨우 버티고 있다고 하네. 목숨이나 붙어 있을지. 쯧쯧
2002년 코렉스경의 손을 잡고 처음 한국에 온 우리 할배들은 릭샤족 중에서는 호빗족으로 덩치가 작은 편이야. 중국이나 인도 계열은 바퀴가 27인치인 거인족에 1단 기어만 가진 무식종이지. 처음엔 24인치 바퀴에 1단 기어였지만 점차 20인치로 바퀴가 작아지면서 타고 내리기 편해졌고 7단변 속의 내공으로 웬만한 오르막도 거뜬해. 
이런 나의 편안한 모습을 신체가 불안한 시니어들이 특히 좋아하지. 그래서 어린 인간들은 세발 잔차를 타고 늙은 인간들은 삼륜잔차족을 이용한다는 거야. 이것이 바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들을 책임지는 평생 서비스의 릭샤 정신이지. 20대의 건강한 치아를 80대까지 가져가는 2080 치약이 있다면 세 살 때 잔차와 함께 한 말랑말랑한 관절을 여든까지 책임지는 0380 잔차가 바로 우리 아니것어. 
근데 옥에도 잡티가 있기 마련. 우리는 커브만 나오면 솔직히 겁이 나. 저번에 급하게 간다고 홱 하고 고개를 돌렸더니 허무하게 확 쓰러지더라. 수박 팔러 갔다가 쪽만 팔고 왔지 않겠니. 그래서 자동차처럼 복잡하고 무거운 차동기어장치는 없지만 높다란 핸들 양쪽에 뒤쪽 좌우 브레이크가 있어서 조금만 신경 쓰고 숙련되면 문제가 없어. 자생! 뭐 급하게 살 필요 없잖아. 찬찬히만 가면 만사 오케이여.
그러고 보니 본관이 지금의 춘자 할미랑 만난 지가 벌써 10년이 훌쩍 넘어섰네 그려. 대륙에서 태어나 서울에 잠깐 살다가 땅끝 해남으로 들어온 게지. 춘자 할미의 칠순을 맞아 서울 면목동 사는 외손녀 랑뚜가 나를 딱 지목해서는 칠순 선물로 “니가 가라, 하와이?”라고 하더라. 할미는 몇 해 전 경동보일러 놓을 때처럼 싫다고,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지만, 나를 보는 순간 술병으로 돌아가신 영감님이 살아 돌아온 것 맹키로 덩실덩실 춤을 추었지. 얼매나 귀염뽀짝하던지. 
그날부터 우리는 신혼부부, 껌 딱지였어. 밭에 마늘을 심을 때는 내가 종자 마늘자루를 메고 나가고 고구마 캘 때 쓰는 호미와 소쿠리도 내가 다 챙기면 그녀는 내 허리에 올라타서는 천천히 페달을 밟아주지. 나만 옆에 있으면 쩔뚝걸음이 사라져 버려.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라면 나는 그녀의 ‘구르는 지팡이’인 셈이야. 읍내 장터에 갈 때는 친구 임실댁을 뒷허리에 태우고 가서 같이 주전부리도 즐기게 해주니 자가용이 따로 없지. 주차비도, 기름값도, 음주측정도 걱정 1도 없는 ‘황제의 탈것’ 아닌감. 
오늘은 모처럼 잔치가 열리는 동네회관에 벌써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와! 잔차 할미다. 어서 오세요.” 이제 춘자 씨는 ‘잔차 할미’로 통한다. 나를 만나 쏘다니다 보니 건강해졌고 기분이 좋아 표정이 밝아졌다. 자연히 이웃들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팍팍 쏘아주는 천사 반열에 올랐다. 그녀의 주민번호 뒷자리가 9988234인 걸 보면 출생신고 할 적부터 나를 만날 팔자가 정해진 게 틀림없다. 
BTS급 인기를 누리는 그녀의 파트너인 나도 정신이 없다. 너도 나도 와서 내 몸을 마구잡이로 만지고 올라타기까지 한다. 잔차 성희롱법은 없나? 
세월의 무게에 내 몸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반짝거리던 도금 핸들은 춘자 씨 등짝의 검버섯처럼 녹들이 피어나고 있다. 그녀의 관절 뼈마디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나의 크랭크 베어링도 찌그덕 찌그덕 거리고 있다. 그녀의 손등과 나의 신발은 거북등처럼 깊게 패이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춘자 씨와 함께 했기에 보람찬 추억이고 빛나는 훈장처럼 자랑스럽기만 하다. 어느 날 하늘이 그녀를 부를 때까지 나는 그녀의 깐부로서 구르는 지팡이가 되어 어디든 같이 갈 것이다. 훨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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