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을 돌아 남해로, 섬들을 돌아 부산으로

본지에 ‘잔차의 고백’을 연재하는 ‘뽈락’ 김태진 편집위원
(전 코렉스스포츠 대표)이 16박17일간 국내 최장의 77번 국도를 완주했다. 파주 임진각에서 서해안과 남해안을 따라 부산까지 1600km를 달린 바닷길 대장정이다 

 

9일 째  
길은 점선이 아닌 실선을 소망한다
나그네는 다시 떠날 준비에 바쁘다. 밤에는 이슬에 취했다가 아침이면 이슬처럼 사라져야 한다. 나오다가 대구팀 대군사를 다시 만났다. 어제 저녁 뽈락을 통해 자전거 여행에 불을 댕기고 평소 본인의 자전거 예찬이 이 땅의 진리임을 친구들에게 보여준 이대우 회장의 표정이 유난히 밝다. 그래서 그냥 헤어질 순 없지. 어깨에 손을 얹고 수학여행 단체사진 포즈를 취한다. 김치! 찰칵찰칵! 잔차여 영원하라! 
오늘은 끝을 보러 가는 날이라 더 설렌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책 제목처럼 지도에 점선으로 표기된 77을 향한다. 4차선 김대중대교를 건너온 77은 어느새 섬에 어울리게 다이어트를 했다. 압해읍사무소를 거쳐 선착장으로 가는 도중 왼편에 신안군청을 한참 지나다가 멈췄다. 현장주의도 좋지만 생각하고 따져보고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특히나 이곳 군청은 1004개 섬의 속살을 꿰뚫고 있는 지식in아닌가. 
여차저차, 이러쿵저러쿵 뽈락의 얘기는 매뉴얼에 전혀 없는 내용이라 공무원은 ‘잔차를 탄 부시맨’을 만난 표정이다. “이게 국토정보지리원에서 발행한 최신판 종이지도인데, 여기 분명히 나와 있잖아요.” 군청 앞의 도로가 77인 것도 모른다. 하지만 지도에 표시된 그 점선은 아직 다리가 안 놓였고 율도와 달리도를 이어주는 도선도 없단다. 결론은 목포 땅을 밟아야 77이 있는 해남으로 갈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앞에 있는 압해대교는 길이 3,563m로 2008년에 개통되어 2011년 신안군청 이전 등 신안 발전의 일등공신이지만 딱 한 가지 흠은 자전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 김대중대교를 넘어서 무안으로 가야 되는겨?” 바다미가 고개를 흔든다. 반복은 지옥이며 시지포스의 형벌이다. 상대가 망설일 때는 결정의 한방을 먹여야 한다. 파란색 ‘BL 카드’(본지 명함=편집자 주)’의 마법이 통했다. 트럭이 대령한다. 압해대교! 니가 나를 거부해도 나는 너를 넘는다!
궤도를 벗어나면 그리움이 보이나 보다. 항구 목포다. 강산은 변해도 사람은 변치 않는다? 2009년 혼자 떠난 잔차 여행 때 만나고 강산이 변한 12년 만에 고주환 사장을 만난 것이다. 코렉스 시절 출장을 가면 가장 반겨주던 곳이 목포의 대리점 사장님들이었다. 그땐 그랬다.

 

영암에서 17세에 목포로 와서 회갑을 넘긴 지금까지 오로지 잔차에 일생을 바친 이라 더욱 존경스럽고 애정이 간다. 드디어 건물도 지어 아내는 위층에서 반찬을 만들고 본인은 1층에서 자전거를 만든다. 그 힘든 소용돌이 속에서도 2남2녀를 두었다니 그야말로 生産의 달인이다. 목포는 탕탕이다. 꿈틀꿈틀 탈출하려는 낚지 탕탕이를 쇠고기 육회가 성곽처럼 둘러싸고 있다. 간은 상해도 친구 간 우정이 상하면 안 되는 법! 生막걸리가 그간의 세월을 메꿔주고 마음을 이어준다. 걱정스런 바다미의 눈길을 모른 체 한다. 깡달이, 황석어 찜 국물은 도둑처럼 흰 쌀밥에 스며들어 뽈락의 파워 에너지가 된다. 매월 11일 모임을 한다니 그날에 맞춰 목포행 완행열차, 아니 KTX를 타자. 목포는 항구다! 그 항구를 통째로 마음속에 넣었다!
영산강하구둑을 지나서 영암 대불공단을 통과한다. 공단의 길이 모스크바 광장 같이 넓어 우리는 바퀴벌레가 된 기분이다. 삼포대교를 건너 해남 땅에 들어선다. 바다에 막혀 멈춰선 77은 다시 의젓한 4차선으로 변해 달리고 있다.
구지 교차로에서 오른쪽 2차선 77을 탄다. 10여km를 달려 매월리 양화마을에 도착했다. 여기가 바로 앞의 달리도와 연결되는 77 연결점인 셈이다. 포구도 없고 표식도 없어 허무하다. 희미하게 목포대교가 보인다. 돌아 나오는 삼거리 이정표에 ‘목포구등대’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동네 어르신 몇 분이 모여 있길래 길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가고 싶은 뽈락의 맘을 읽었는지 “좋아! 좋지!” 하면서 가보라고 손짓까지 하신다. 충고 한마디, ‘절대 현지 영감님께 길을 묻지 말라’ 그리고 ‘포기는 빠를수록 좋다.’ 
계속되는 깔딱고개길은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 오르막에서는 ‘돌아가자’, 내리막에서는 ‘가보자’ 하고 두 놈이 싸우고 있다. 등대에 사는 사이렌에 홀려서 가긴 갔지만 업힐을 즐기는 사이클리스트라면 가보시든지! 15km짜리 도돌이표에 온몸의 땀샘 공장은 풀가동했지만 우수영으로 달리는 77은 비단길이다. 
오늘 바다미가 달린 길은 93km. 누워서 온 압해대교길 8km해서 100km를 넘겼다. 내일은 또 어떤 길을 달릴 지 누굴 만날지 설렌다. 꿈속에서도 페달질이다! 쉭쉭!

 

 

10일 째  
땅끝에 이르다, 이제 남해로!
아침 7시가 되기 전에 호텔을 나왔다. 아침 공기가 제법 써늘해져서 반바지도 이제 장롱 신세가 될 때가 되었나 싶다. 77은 우수영 교차로에서 동쪽으로 가겠다고 고집한다. 진도를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릴 수는 없다. 18번 국도를 따라 제2진도대교에 올라 아래를 보니 울돌목 바다는 400여년 전과 변함없이 펄펄 끊어 오르고 있다. 오른쪽 공원에 계시는 장군을 알현한다. 뭍의 장군보다 진도에 계시는 장군이 섬처럼 외로워 보여서다. 
“장군! 비록 미천한 몸이지만 장군의 12척에 힘을 보태고자 천리길을 달려 왔소이다. 안타깝게도 소인은 선박 울렁증이 있어 거북선은 물론 여인의 배도 오를 수가 없습니다. 허나 저희는 바퀴가 있어 달리는 재주는 특출납니다. 장군! 천기누설입니다만 저기 서있는 파란색 쇠말은 전생에 ‘적토마’였답니다. 하니 저희를 육로 전령으로 삼아주시면 장군의 뜻을 빛의 속도로 전달하겠습니다. 참, 德이 아씨한테 줄 戀書도 주시면….”
“뽈락과 바다미라 하였는가? 기특하고 맹랑하도다. 오늘 가는 완도는 200리가 넘는 장도이니 잘 준비하시게. 저기 길옆 병영 식당에 한식뷔페로 거하게 차려 놨을 테니 든든히 들고 가시게. 식대 8천냥은 내 앞으로, 아니 균이, 원균이 앞으로 달아 놓으면 될 걸세!”
우수영 교차로에서 다시 77을 만난다. 뱃속이 더부룩하고 뒤가 무겁다. 장군의 명을 너무 충실히 이행했나 보다. 주유소로 들어갔다. 아메리카를 잔차로 횡단한 홍은택 기자는 주유소를 ‘적(?)들의 보급기지’라 했던가. 주유소는 넣는 곳만 아니고 빼는 곳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인생은 덧셈뺄셈의 연속이다. 중생들은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큰 스님은 다 내려놓으라 하신다. 번뇌는 물욕의 필수 부산물인줄 알면서도 욕심을 낸다. 이제 뽈락도 올드 모델로 취급되는바 버리기를 습관화해야겠다. 그래서 빼기, 더하기라 하지 않고 더하기, 빼기라고 하는 모양이다. 주유소 뒷간에서 잡념이 많다. 이래서야 해우소에 들렀다고 할 수 있겠나. 끄응!
오늘 가는 길은 해남에서 지정한 ‘경치 좋은 해안도로’이다. 그동안 서해안을 따라 오면서 익히 보아온 풍경이지만 짙어가는 산야의 가을색을 바다도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 77은 영화감독이다. 푸른 바다를 보여 주었다가는 어느새 황금색 들판으로 카메라를 비춘다. 무화과의 달콤한 향기도 담아낸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만은 아니다. 마늘을 심느라 농부들은 꿩처럼 모여 앉아 땅을 파고 있다. 트랜지스터도 옆에서 바쁘다. 국산 트로트가 아니고 재즈 풍의 동남아 노래가 흘러나온다. 마늘 자루를 지고 나르는 청년은 ‘싸장님 나빠요 2’다. 삼거리 슈퍼 앞에 트럭이 섰다. 짐칸에는 물통과 약치는 기계가 실려 있다. 그 좁은 틈에서 “안녕하세요” 한다. 새까만 눈동자가 웃고 있다. 사탕을 건네준다. “고맙습니다.” 그래, 외국에 가면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이 세 단어만 잘 구사하면 된다. 뽈락도 5천km 일본열도를 세 단어로 버텼다. 거기에 ‘미소’라는 웃음 조미료를 치면 ‘만사 오케이’다! 팍팍 쳐라! 팍팍!
농담은 여유로운 자의 하품인가! 해바라기 밭을 가꾸는 아저씨들을 만났다. “어디서 왔쏘?” “서울서 왔는데 집 쫓겨난 지 열흘째네요.” “엥! 서울서 이곳 땅끝까지 피난 왔다요. 마누라가 겁나 무섭나 보네. 북한 괴뢰군이나 되는 갑쏘이.” 그러면서 해남 도로는 얌전하고 특히 신호등이 없어 버스 기사가 좋아한다고 했다. 특히나 장군님의 전령으로 달리는 길은 경쾌하다. 오늘의 목표, 땅끝으로 가기에 바다미도 신이 났다. 

 

상쾌한 바람, 따스한 햇볕, 초록과 파란색의 프리즘이 함께 하는 길은 그야말로 칠칠하다. 하지만 땅끝 7~8km 전부터 오르막 내리막이 시작된다. 강원도 길에 비하면 과속방지턱 수준이지만 평지에 맛들인 근육들은 어쩔 줄 모른다. 
송호해수욕장의 높은 포토라인에 올라섰지만 주변에 사람이 없다. ‘기다려라 때가 온다. 그 때 밀어라’는 어느 때밀이의 말을 믿어본다. 땅끝은 ‘뒤끝 작렬 A형’임이 분명하다. 마지막 오르막은 클라이막스인 양 벌떡 서 있다. 앞 22T, 뒤 36T의 최대 변속 조합으로 대처한다. 무게 중심을 앞으로 하고 머리도 콕 숙인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절대 위를 보면 안 된다’이다. 쳐다보는 순간 정상은 멀어지고 오르막은 늘어나서 계속 멀어져 간다. 
드디어 땅끝에 도착이다. 하긴 땅끝 가는 길이 평지라면, 멀리서도 보이는 땅끝은 그리 감동적이지 않으리라. 이것도 감독님의 깊은 뜻이 숨겨진 세트장인가?
땅끝에서 바다를 본다. 임진각을 출발하여 서해안 이곳저곳을 보고 오느라 열흘이 걸렸다. 매일을 합산해보니 951km이다. 직선거리는 당연히 짧을 것이고, 자동차로는 휭하니 몇 시간이면 도착할 것이다. 무엇이든 ‘빨리’가 선이고 권위인 사회에서 ‘느림’은 구닥다리에 불편함인지 모른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이지만 이번 느린 여행을 통해 나름 상념에 빠진 시간들이 고맙고 뿌듯하다. 
이제 서해와 이별하고 좌향좌하여 남해로 향한다. 오면서 기념 퍼포먼스를 어떻게 할까 생각도 했다. 통속적인 레퍼토리, 손을 흔드는 건 아니다 싶다. 시원하게 오줌을 갈겨줄까 하는 유치찬란한 발상도 했다. 그냥 앉아 있다 일어선다. 無言이 無限이다. ‘땅끝! 희망의 시작!’이란 표지석 앞이다.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는 희망! 뽈락과 바다미는 서해의 ‘희망’을 품고 남해로 향한다!
(완도에 도착, 81km, 일찍 마무리하고 자축 및 빨래)

 

11일 째  
좁은 길로 가리라!
해남땅의 남창교차로에서 우회전하면 완도군이다. 완도의 디딤돌인 달도에 다달았다. 세살배기 바다미나 육순의 뽈락이나 생전 처음 밟아 보는 땅이라 더욱 설렌다. ‘청정 바다 수도’ 완도의 커다란 아치가 개선문인양 섰지만 ‘전방 1.6km 자동차전용도로’라는 팻말에 띵한다. 완도군청으로 가는 두 갈래 길 중 13번은 자동차전용도로이고 77은 역시 누구나 갈 수 있는 착한 도로다. 우리는 완도대교 옆구리에 붙은 보도를 따라 간다. 웬수라도 만나면 난감한 외나무다리다. 옆의 자동차는 보란 듯이 내달린다. 으이고! A. 지드가 ‘좁은 문’을 통해 그렇게 강조했건만 불쌍한 인간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서쪽 77의 새벽길은 그늘이라 시원하고 한적하여 마실 나온 기분이다. 바다에 일찍 나온 배들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空手來 空手去’ 비석이 커다랗게 서있는 서쪽 사면에 볼록 볼록한 공동묘지는 메멘토모리를 상기시킨다. 완만한 내리막에서는 소나무 숲에 걸린 수평선을 보면서 바다미의 경쾌한 라쳇 소나타를 감상한다. 생각해보니 슬로모션 모드로 전환된 이 행복 타임을 준 은인은 바로 자동차전용도로다.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간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한적함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걸 만들어낸 국토부 공무원에게 잔차 무공훈장이라도 드려야 하나? 그렇다고 77을 ‘자전거전용도로’로 만들어 달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우리는 누구처럼 독선적이고 이기적이지 않다. 공존의 덕목을 200년 전에 이미 깨닫고 실천 중이다. 

 

청해진 촬영장 입구에서 핸들을 꺾어 더 좁은 길로 들어선다. 저수지 뚝방길 옆 갈대는 가을 꽃을 피우고 있다. 무슨 고민이 저리 많아 오색은 묻어두고 밤 새워 흰색 꽃만 뽑아내는지. 77과 다시 만나는 5km의 짧은 구간은 꿈속의 꿈처럼 달콤하다.
완도군청으로 빠질까 망설이다가 77을 그대로 따라간다. 땅끝 해남에서 보길도의 유혹에 흔들렸기 때문이다. 완도군청으로 가면 이번에는 청산도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연식이 더해지면서 푸를 靑자가 무조건 좋아진다. 이름 좋고 경치 좋은 청산도가 손가락만 가딱해도 무작정 달려갈 판이다.
77을 따라 왼쪽으로 돈다. 급 내리막의 중간쯤에 학교가 보인다. 제한속도 30km를 초과한 35km다. 큰일이네 벌금도 따블인데 끙! 바다미 왈, 걱정들 말어! 우린 군번 없는 용사요 번지 없는 주막이여! 고상틱한 말로 아우트로우, 무법자란 말이여. 
할아버지가 타고 가는 잔차의 옆구리에 삽이 비스듬히 꽂혀있다. 서부의 악당, 리반 클립이 타고 가는 말 궁둥이에 걸쳐진 장총처럼! 우리는 태양을 등지고 마을에 들어서고 있다.
어디선가 칼림바로 연주되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OST가 흘러나온다. 띠디딩~~
신지대교, 장보고대교, 고금대교, 노력교 등 하루에 이렇게 많은 다리를 건너보는 것도 처음이다. 섬들이 합종연횡하여 우리를 반겨주는 건 고마운데 고개 비늘을 세우고 있다. 그래, 작은 섬이라고 얕봐서는 절대 안 되지. 잔고기가 가시가 많고 쨉도 자꾸 허용하면 멍이 깊어지는 법. 체력테스트장 정도인줄 알았는데 유격훈련장이다.
장흥땅에 들어서서 아점을 먹으면서 지도를 살피다가 무릎을 친다. 내륙 깊숙이 들어가는 77에서 탈출할 수 있는 묘안이 생긴 것이다. 지도에 희미한 뱃길을 보니 땅끝에서 가져온 희망이 보인다. 못 먹어도 go라고 돈키형이 부추긴다. 연지 교차로에서 819번을 따라 노력항 쪽으로 향한다. 배가 있을지, 몇 시에 있을지도 모르면서 간다.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올텐데? 모르면서 가는 조마조마 스릴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인생도 다 알고 가면 재미 1도 없다. 神은 그래서 지루해 한다. 무한 긍정의 염원은 현실로 보답한다. 노력항에서 20여분 만에 금당도 가학항에 도착하여 반대편에 있는 울포항으로 가야 한다. 이곳도 두 갈래 길이다. 12km 돌아가는 해변길은 환타스틱 자체다. 혼자 가기 아까워서 몇 번이고 가다서다를 반복한다. 
배는 50분정도 걸려 거금도 소록도를 지나 고흥 녹동항에 돛을 내린다. 배 울렁증은 개가 물고 간 모양이다. (바다미 달린 거리 86km, 배가 실어준 거리 26km 도합 112km)

 

12일 째  
천상의 길을 달린다!
오늘은 녹동에서 소록도를 건너는 구름다리 앞에서 출발이다. 녹동항에서 77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가는 길은 외길이라 내비의 그녀를 쉬게 하고 고흥평야의 황금 들녘에 몸을 맡긴다. 77은 한적하지만 S라인으로 지루하지 않고 평탄한 길의 페달링은 가볍다. 
오르막 ‘벌떡이’가 안 보이는 이때야 말로 진도 나가기 찬스인 것이다. 허나 수업 방해꾼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맞바람 ‘동풍이’는 장풍 신공을 쉬지 않고 펼쳐댄다. 남해안 ‘풍경이’는 사진 찍어 달라 발목을 잡는다. 더욱이 퇴학당한 ‘여름이’가 되돌아 와서 목덜미에 불화살을 쏘아댄다. 풍남항에 이르러 잠시 바뀐 시멘트 도로는 몇 년 전 천연두를 세게 앓았는지 울퉁불퉁이다. 오후가 되니 교실의 천장에서 비까지 몇 방울 뚝뚝이다. ‘벌떡이’마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그러나 잔차는 멈추면 쓰러진다! 
길은 쉴 새 없이 주절주절 스토리를 토해낸다. 영감 할멈 마주 앉아 뭐가 즐거운지 웃으며 깨를 털고 있다. 할미가 방귀라도 뀌셨남? 나그네는 “안녕하세요. 건강하세요”를 지불하고 참깨향기를 온 몸에 두른다. 
색색의 이빨 사이로 모락모락 김을 피우고 있는 찰옥수수를 파는 아낙의 인생도 찰졌으면 좋겠다. 갑자기 뒤에서 농사 트럭이 빵빵하면서 옆에 스르르 멈춘다. 처녀 농사꾼인가? “방금 왜 사진을 찍었냐?”고 묻는다. 길가의  쟁기 같은 농기계 사진을 찍은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웃으면서 “대형 피자 커터를 처음 봐서요”했더니 부시맨을 본 신안군청의 그 공무원 표정이다. 3초 후, “우하하! 난 또 우리 농기구가 도로에 너무 나와서 신고하는 줄 알았죠.”  

 

길가에서 굼벵이족과 달팽이족이 해후했다. 천연기념물을 만나 영광이란 소리에 도보 여행자들은 아까 그 옥수수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젊은 커플은 눈에 확 띄는 외모와 스타일에 탤런트 같아 보여 혹시 예능 프로그램을 찍는가 살펴봐도 주변에 아무도 없다. 여수에서 출발해 백패킹 여행 중이란다. 여행 3일째인데 어제는 낭도에서 야영했단다. 어젯밤 낭도의 슈퍼를 습격(?)하여 막걸리를 동을 냈단다. 우리 옆동네 광진구에 산다는 말에 급친구가 되었다. 젊은 친구들이지만 넉넉하고 여유가 있어서 나도 에너지를 듬뿍 받았다. 수염을 멋지게 기른 젊은 친구! 좋은 추억 많이 만들어서 결혼 골인하길 빌겠네, 결혼할 때 초대해 줄 거지? 
가는 길, 오른 쪽에 장군의 흔적이 보인다. 당연 장군의 육로 전령으로서 보고하러 가야지. 차선 치장도 없는 소박한 길의 언덕을 넘으니 발포항이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이곳은 장군께서 처음 임관하여 부임한 곳이라고 한다. 바닷가에 자리한 기념관을 둘러보며 초딩 때 통영 한산도로 간 수학여행이 생각나기도 하고 영화 ‘명량’의 장면도 떠오른다. 특히 충파(衝破)라 하여 왜적의 세키부네(關船)가 침몰하는 장면은 너무나 통쾌했다. 히데요시의 마빡을 박살내는 짜릿함! 삼나무와 느티나무의 물성을 장군은 꿰고 있었지. 
“근데 장군께서는 36세의 늦은 연세에 관직에 오르셨는지요?” 하는 학생의 우문에 학예사는 “글쎄요”다. 바다미를 끌고 언덕에 있는 충무사에 들렀다. 아니 들어가지 못했다. 문을 지키는 보초병 ‘코로나’가 장군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명하셨단다. 발길을 돌리려 앞을 보니 십자가 건물이 감히 장군의 시야를 흐리고 있는 건지 지키는 건지 아리송하다. 우주선이 발사되는 나로도 근처에 있는 발포항.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지능력을 가진 조상님이라 여겼다. 하지만 發砲가 아니라 鉢浦였다. 스님의 공양 그릇 같이 생긴 지형이란 뜻이다. 이래서 현장학습이 중요하고 발품을 판 산교육은 유통기간도 엄청 길다는 것이다. 장군, 무식엉뚱 소생은 이제 그만 총총 사라집니다.
팔영산을 돌아서니 백리섬섬길의 시작을 알리는 팔영대교의 높다란 기둥이 보인다. 여수 돌산도까지 이어지는 총 39.1km 즉 백리 바닷길이 백리섬섬길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했던가. 神이 섬을 만들었다면 인간은 다리로 보물섬을 만들었다. 다리 위는 너무 높아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이다. 바다는 푸른색과 은빛의 향연을 펼치는 은하수이고 섬은 하늘에서 떨어진 녹색별이다. 말 그대로 천상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4년 전 가 봤던 일본의 시마나미카이도의 70km보다는 거리가 짧고 자전거 인프라도 부족하지만 툭 트인 풍광과 해풍은 단연 압권이다. 앞으로 시마나미카이도와 같은 명실상부한 ‘잔차의 성지’가 되려면 잔차의 오아시스, 즉 정비소와 주변 마을을 둘러볼 수 있는 자전거길 조성 등 잔차족의 의견을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다. 자동차족의 굉음에 잘 들릴지는 몰라도!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가듯이 맞바람이 불어도 바다미는 달려서 여수시청까지 왔다. (106km 달리다)

13일 째  
잃어버린 77을 찾아서
어제 100여km를 내달려 여수시내에 들어 왔지만 뭔가 허전하고 찜찜하다. 여기서 17번과 겹치는 77과 함께 북서쪽 순천을 향하든지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순신대교를 넘어 광양으로 가는 지름길도 보인다. 이탈리아 반도가 긴 말장화 모양이라면 여수반도는 헐렁한 바지처럼 보인다. 백리섬섬길을 따라 오다가 오른쪽 바지 끝단인 세포 삼거리에서 77은 백야도로 흘러 바다에 빠져 버렸다. 4차선으로 넓게 단장한 지방도 22의 유혹에 빠져서 왼쪽으로 내달려 명치쯤인 여수시로 온 것이다. 나홀로 여행은 청개구리가 갖고 노는 럭비공이다. 맘대로 엿장수 가위치기란 얘기다. 이번엔 반대로 튄다. 그래서 이번엔 왼쪽 바지를 타고 내려가 화태도에 가서 77을 만나 보기로 한다.
월요일 아침의 도심은 아수라판이다. 게다가 여수는 성남 구도심처럼 오르막이 많고 길도 좁다. 이럴 때 잠이 덜 깬 페달과 술에 덜 깬 운전자가 랑데뷰라도 하면 바로 집(?)에 갈 수 있다. 차들에 밀려 보도로 올라섰지만 보도블록도 아우성을 치면서 이방인을 몰아낸다. 보행로가 분리된 짧은 터널은 가끔 용돈 챙겨 주는 딸처럼 고맙고 이쁘다. 15km 시내 길을 벗어나는데 1시간 반이 걸렸다. 
돌산대교 앞 슈퍼 어르신의 향일암 강의가 시작된다. 예고편이 길면 본편은 김이 팍팍 샌다. 가위로 싹둑, 인사드리고 돌아선다. 돌산대교에 올라서니 바다를 품고 있는 시내가 훤하게 보인다. 카메라 앵글에 출연료 없이 뛰어든 한척 배가 고맙다. 지도상 내려가는 길이라 마음도 편하고 실제의 길도 약내리막이라 바다미도 편하다. 

 

반도의 끝에서 화태대교를 건너 백야도에 머물고 있는 77을 불러본다. 지금은 바다가 길을 막아 만날 순 없지만 언젠가는 개도, 금오도를 잇는 다리가 완성되어 견우직녀처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에고! 그때까지 목숨이 붙어 있을랑가.
이제 향일암으로 기수를 돌린다. 77과는 인연이 없지만 여기까지 와서 안 뵙고 가면 부처님이 돌아앉으실 것이다. 특히 전국 4대 관음사찰이라고 하지 않는가. 쉽게 말해 기도빨이 백퍼라는 거지. 향일암 가는 길은 12km 정도의 짧은 구간이지만 예사 길이 아니라고 신기항 앞, 허름식당 주인장이 사천왕상처럼 겁을 준다. 
막국수 곱배기에 막걸리 한통으로 단단히 무장했다. 향일암이 보통 사찰이 아니듯 가는 길도 장난이 아니다. 이화령이 행님! 할 수준이다. 결국 오르막에 치욕의 무릎을 꿇었다. 바다미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아니 기어 올라갔다. 내비는 아직도 5km 남았다고 약을 올린다. 내리막이 보이는데 전혀 반갑지가 않다. 잠시 후면 저 길을 다시 올라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고개 이름이 율림치다. 오늘부로 그대를 율림령으로 승격하노라! 그리고 담에 만날 때는 어깨 힘도 좀 빼기 바라노라. 마침 오른쪽을 보니 향일암 등산로 팻말이 있다. 녹초가 된 바다미를 전망대 옆 그늘에서 쉬게 하고 등산로에 들어선다.
경전을 등에 업고 바다로 향하는 거북이, 금오산의 등짝에 오른다. 우리 동네 용마산 높이인 321m의 주먹만 한 산에서 뽈락은 땀으로 염장질 당했다. 3km 정도의 산길은 외길인데다 넓적돌을 깔아 걷기 좋게 했지만 이길 또한 돌아올 걸 생각하니 이쯤에서 합장하면서 ‘부처님, 저 왔다갑니다’ 하고 싶다. 높고 펑퍼짐한 바위에 걸터앉아 멀리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생각한다. 영구암의 별칭처럼 주변의 바위가 거북등처럼 얼기설기한 문양이다. 내려가는 길은 더 가팔라서 철계단을 타도록 되어 있다. 
드디어 고운 단청이 보인다. 전에 분명히 와봤는데 모든 게 생소한 모습이다. 내 기억은 2009년 이곳이 불타면서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일까? 구석구석 둘러보며 재부팅한다. 이윽고 부처님 전에 절을 올린다. 마루 바닥에 양팔의 땀 도장이 절로 찍힌다. 
“부처님! 왜 이렇게 멀고도 험난한 곳에 계십니까? 다른 중생들 생각도 좀 하셔야지요.” 
“내가 그렇게, 더하기보다는 뺄셈이 찐이라고! 비움을 항상 강조했건만, 아까 보니까 엄청 쳐 드시더만. 그래서 오르막을 몇개 맹글어 놨지. 비워야 되느니라! 여기 온 김에 다 비우고 가게나! 자네 지갑도 싹 비우고 가시게!” 
“헐! 부처님! 지갑이 탐이 나시면 드리겠습니다마는 내용물은 속세 잡놈들의 손때가 묻은 불경스런 것이옵니다. 그럼 소생은 배편이 급하여 이만 뿅 하고 사라질랍니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이보시게! 험한 산길로 가지 말고 내가 1004호 운전 보살(여수 사는 젊은 부부)에게 일러 놨으니 율림치, 아니 율림령까지 타고 가시게!”
“역쉬 대자대비 우리 부처님! 건강하십시오. 특히 코로나 조심하시구요!”
바다미 고생거리 61km, 뽈락 고생산행 3km, 차량이동 5km 도합 69km의 이동 성적표를 뒷주머니에 차고 신기항 여객터미널 앞 예의 허름주막에 들린다. 면상만한 해물파전, 텁텁한 방풍 탁배기 그리고 주인장 특별 서비스 토실토실 생새우가 뽈락의 뱃속을 채우고 있다. 
이누~움! 내가 그렇게 비우라 했거늘! 

 

14일 째 
점프의 여왕, 바다미
신기항과 지척인 화태대교가 새벽안개로 희미하다. 여행은 이런 안개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놀이가 아닐까? 오늘도 처음 가보는 길이라 두근두근하고, 불확실한 정보는 조마조마한 서스펜스를 준다. 남에게 들릴까 콩닥거리는 가슴을 싸안고 7시45분발 금오도행 배에 오른다. 어제 싸온 파전에 갓김치를 먹는 사이 성질 급한 배는 벌써 금오도 여천항을 들이민다. 
어제는 금오산, 오늘은 금오도라! 황금 거북이든 황금 자라든 골드 일색의 빛나는 하루가 기대된다. 하지만 자라는 자기 등 대신 9시 여수행 배에 오르기를 재촉한다. 이곳의 비릉길(벼랑길)을 둘러본다고 오후 3시경에 있는 다음 배를 탔다간 일정이 꼬일 판이다. 그 사이 살살 주저앉기 시작한 바다미의 뒷바퀴 펑크를 손봐줬다. 이제 금오열도의 맏형격인 금오도 주민들도 연륙교 건설에 찬성한다고 하니 죽기 전에 백야도에서 길을 잃은 77이 돌산도를 통과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란다(다음에는 세포 삼거리에서 백야도로 빠져 그곳에서 배를 타고 금오도, 신기항으로 해서 여수로 가야겠다). 연도에서 출발한 여수행 배는 섬 주민들을 가득 싣고 금오도를 거쳐 10시경 여수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한다. 이로써 상상했던 1차 점프의 성공이다.

 

21세기에 미신을 믿는 바보는 없지만 아직도 미신 같은 정보는 돌아다닌다. 뽈락은 여수에서 남해 서상항으로 가는 배편이 있다고 믿는 자기도취형이다. 여수 여객터미널의 담당자도 고개를 흔들고 거의 폐항 수준인 오동도항(엑스포항)까지 와서도 믿지 못하겠다. 모두가 짜고 치는 고스톱판, 몰래 카메라에 속는 기분이다. 골초 호랑이 때인 여수엑스포 시절의 뉴스를 본 것이다. 그래서 2차 점프는 실패다. 
이제 이순신대교를 향한다. 장군만 믿소이다. 77을 따라 순천 가는 길은 몇 번 가본 길이라 탐탁치가 않다는 핑계다. 하긴 지맘대로 튀는 럭비공을 누가 말릴까. 엑스포역에서 오른쪽 17번을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놈이 뒤통수를 친다. “나는 네바퀴랑만 놀란다. 니는 A.지드랑 놀거라.” 여수 돌산 일주도로가 손짓한다. 옛 철로길이다. 신호등이 있는 말굽형태의 터널에 들어선다. 쪼아놓은 정 자국투성이인 뾰죡뾰족 벽과 천장이 신기하다. 말하는 토끼라도 한 마리 튀어나올 분위기다. 레일 바이크족의 집성촌도 나온다. 검은 모래로 유명한 만성리 해변을 지나 메타세쿼이아가 도열해서 박수쳐주는 살짝 오르막에서 상큼 바람이 폐에 훅 들어온다. 자동차전용도로라 우리를 괄시한 17번이 되려 고맙다. 마치 집에서 쫓겨나 이모를 만나 돼지 갈비 얻어먹는 기분이다. 냠냠.
상암 삼거리에서 4차선 17과 화해했다. 이제 장군을 뵈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멘토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부정 쪽에 가까운 ‘글세’이다. 주변에는 흔한 배달의 민족조차 보이지 않고 전부 다리가 네 개 이상의 것들만 휙휙 뛰어 다닌다. 드디어 결전의 때가 왔다. 거인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조그마하고 동그란 방패에 사선을 그리고는 바리게이트처럼 우리를 막고 있다. 
오른쪽에 세상에서 젤 큰 쥐(엘쥐)가 웅크리고 있다. 그 정문에 작전본부를 설치한다. 이이제이 전술이다. 적을 잡기 위해 살펴보니 지나가는 차는 너무 빨라 낚아챌 수가 없다. LG에서 나오는 트럭은 정문에 들러서 출고 확인을 받는다. 이제는 세치 혀, 썰장군이 나서더니 전광석화 승전보를 올린다. 20분이면 차가 채 식기기도 전에 적장의 수급을 베어오는 관운장의 속도다. 
묘도대교를 지나 장군의 어깨에 올라탔다. 포스코 광양제철을 제우스처럼 내려본다. 봐라! 무겁고 철없는 철도 이렇게 하늘을 날 수 있단다! 열공하시게들! 이순신대교의 길이는 장군이 태어나신 연도를 기념하여 1,545m로 지었단다. 만약 이걸 불기나 단기로 했으면 공사비가 엄청 더 들지 않았을까? 대전에서 왔다는 그 운송 귀인은 커피 값이라도 챙겨 드리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 무법자가 주머니에서 리볼버라도 꺼내는 줄 알았나. 바다미의 3차 점프를 성공시켜주신 그 분! 안전운행! 운수대통하시길!
광양제철소에서 하동으로 가는 59번은 그야말로 순항의 길이다 조금 더 위쪽 내륙에서 고생하는 77은 고향 친구가 나보다 소중하냐며 토라진 건 아닌지 모르겠다. 섬진대교를 건너면 경남 하동땅이다. 그동안 건너온 다리에 비해 평범하고 초라해서 대교란 이름이 무색하다. 계천 사거리에서 59와 이별하고 19와 77을 만나 남쪽을 향한다. 노량대교를 건너는데 원노량대교(남해대교)가 우릴 바라본다. 중학교 때 여름방학이면 남해읍에 사시는 고모님께 가던 시절이 떠오른다. 
진주에서 출발한 털털이 버스는 이곳 하동 노량에서 남해 노량을 도선으로 건너 비포장도로를 꽁무니에 먼지를 달고 달렸지. 그뒤 처음 본 너의 모습에 넋을 노량 바다에 빠트리고 말았어. 사진으로 봤던 미쿡의 금문교보다 더 산뜻한 오렌지 컬러의 너는 앞집 여학생 종아리보다 훨씬 예쁜 다리였지. 비록 지금은 덩치 큰 이놈 때문에 쫄은 모습이지만 형만한 아우가 있겠어. 문득 장군의 서거일(음 11월 19일)에 1545명이 대교에 올라 추모의 꽃이라도 바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대교를 지나니 용머리가 뚫고 나온 터널이 보인다. 입구에 ‘어서 오시라’ 아니, ‘어서 오시다’라는 비석글이 반긴다. ‘오시다 가시다’는 보물섬 남해 사투리다. 남해 여수 간 해저터널 건설을 반기는 현수막이 펄럭인다. 뽈락의 망상이 현실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혹시 자동차전용 해저터널은 설마 아니겠지? 일본 본토와 큐슈를 잇는 칸몬대교를 잔차는 건널 수 없지만 뽈락과 바다미가 지나갈 수 있는 해저터널이 있더라.
내일은 비가 온단다. 하루를 머문다면 추억이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남해읍이고 싶다. 남해읍의 수산물 시장통에 있는 오복식당에서 서상 막걸리를 마신다. 오동도-서상항의 실패한 점프의 위로주다. 오랜만에 들려오는 시끌벅적 모국어에 술잔은 이내 바닥을 보인다. 크으윽!

 

15일 째 
보물섬은 탈출했지만…
여행은 새 나라의 어린이를 양성한다. 일찌감치 저녁 8시경에 쓰러지니 새벽 4시쯤이면 자동 기상이다. 장거리 여행에 아랫입술이 피곤하다고 봉기한다. 그동안 그런 반란의 기억이 없는 걸 보니 태평성대를 구가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의 발자취를 대충 정리하고 비주얼을 첨가하는데 와이파이가 계속 맴만 돈다. 이러다가 백만대군(?)의 조간이 석간이 될 판이다. 
하늘은 흐리고 갈 길은 멀다. 개문발차가 답이다. 어르신들이 노란 깃발을 들고 학교 앞 건널목에서 노랑부리들의 총총걸음을 도와주고 있다. 둥근 로터리를 돌아 나오니 77은 안개 속에서 반겨준다. 보물섬 일주가 시작된다. 비 소식에 우의를 체크하고 마음도 다진 터라 비교적 상쾌한 출발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것도 기왕이면 즐겁게! 멋지게! 오지게!
애써 경쾌한 출발은 이내 오르막이 초를 치고 하늘은 검은 장막을 두르고 있다. 국산판 드라큘라 시리즈인 전설의 고향은 궂은 날의 소복 차림이 레퍼토리다. 맑은 날의 보물섬 탐험은 앙꼬 없는 찐빵이다. 파란 하늘이 사라진 바다의 파란색은 녹색 숲의 섬 그림자에 짙푸르다. 곡선의 하얀 해안선이 끝나면 오렌지색 지붕의 집들이 겸손하게 엎드려 있다. 한 폭의 그림이다. 만약 77 버스의 부산발 임진각착 상행선 운임이 5만원이라면 바다를 보는 하행선은 50만원을 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포구의 넓은 선착장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손보고 있다. 그 옆 할머니는 손을 귀에 붙이고 서울 딸네와 전통중이다. 핸드폰은 잘 터져야 살고 그물은 잘 터지면 허탕이다. 하얀 바탕에 연분홍이 첨가된 교회 앞에 바다미가 멈췄다. 소품처럼 서 있는 할머니께 “교회가 참 이쁩니다” 했더니 “우리는 안 이뿌오?” “죄송합니다. 제가 사팔뜨기라 미쳐 미인들을 못 알아봤어요.”  연분홍 취향의 목사님이 보고 싶다.
상주가 가까운 금산 자락 고개가 잔뜩 힘을 주고 있다. 아이는 울고 전화벨은 울리고 냄비는 넘치고 하는 머피의 법칙이 작동할까 두렵다. 고개는 가파르고 비는 내리고 펑크는 나고 하는 예감을 무사히 넘겼다. 내리막 왼쪽 보리암 입구에 부처님이 부르신다. 고개만 꾸벅하고 브레이크가 고장난 듯 내 달린다. “이놈! 10여 년 전에 왔던 니를 내 알고 있건만 그리 내뺀단 말이냐. 그 험한 향일암은 가면서 여기는 왜 안 들리고 가냐구. 건축주가 같은 원효대사요, 기도빨도 엇비슷한데, 이건 순전히 지역차별이요 부처차별이여!” 부처님! 용서하소서! 합장하다가 핸들을 놓치니 대자대비 부처님께서 바람보살을 급히 파견하여 윈드 브레이크로 보살펴 주신다. 감사합니다, 부처님! 
상주해수욕장 입구 대중식당의 김치찌개는 꿀 바른 돼지비계가 들어있다. 찌개 따로 밥 따로 양반식으로 먹다가 추가한 밥은 말아서 먹고 남은 밥은 나머지 반찬으로 비벼서 먹었다. 폭풍흡입에 감탄한 주인장은 얼른 부추무침을 만들어 온다. “여기서는 소풀이라 카지예.” “하모예, 우리 고향 진주에서도 소풀이라 캄니더.” 소풀 귀인의 잔잔한 미소가 다음 고개를 거뜬히 오르게 한다.
이곳 남해 보물섬은 멸치족의 본거지다. 동해의 오징어족, 목포의 세발낚지족, 여수의 돌문어족이 촉수로 세상을 움켜쥘 때도 굴하지 않는 족속이 멸치족이다. 신체는 비록 비쩍 마르고 왜소하지만 흐물흐물족에 비해 뼈대 있는 집안이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인간에게 사육당하는 걸 거부한다. 체포되는 즉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다. 뜨거운 물에서 고문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고고한 은백색으로 변하여 세상 국물 맛의 원천이 된다. 스스로 부패하기를 수치로 알고 소금과 친구맺기를 하여 젖갈로 변신한 후 배추에 숨어들어 밥도둑이란 애칭도 얻고 칼슘의 여왕이란 로얄 네임도 획득했다. 애석한 점은 이런 위대한 멸치족을 알현하려면 두 명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혼자 왔다가 낙담한 이가 천만이라 하니 부디 멸치족장께서는 살피시길 바란다. 홀로 왔던 과객은 입맛만 다시고 갑니다. 쯥.
창선을 향해 가던 77이 미조항 근처에서 신발 끈을 매고 있는 3번 국도를 만났다. 목포에서 출발하는 1번 국도와 더불어 한반도를 종단하여 서울을 거쳐 평북 초산까지 이어지는 3번 국도의 시작점이 여기다. 3년 전 바다미와 함께 일본을 탈출할 때 도쿄에서 오사카까지는 국도 1호로, 오사카에서 시모노세키까지는 국도 2호를 이용했다. 따라서 부산에서 3번 국도를 찾지 못해 헤맨 적이 있다. 오늘에야 헝클어진 실마리의 실끝을 잡은 것이다. 이렇게 77은 뜻밖의 선물도 준다. 
창선을 지나 늑도대교에 들어서면 이번 섬여행은 끝이 나는 셈이다. 자연스럽게 위치한 섬들을 연결하느라 다리들은 멀리서 보면 뒤엉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 지나온 백리섬섬길에 비하면 앙증맞은 미니어처를 보는 기분이다. 옆 하늘에는 성낭갑만 한 케이블카가 왔다갔다한다. 이 연륙교는 삼천포의 이미지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잘 나가다 삼천포’는 잘 안가는 이도 다 아는 재수 옴 붙는 얘기였다. 이제는 삼천포로 와서 남해로 여수로 세계로 뻗어 쭉쭉 나간다. 
다리를 건너 3번은 왼쪽의 진주로 향하고 77은 오른쪽 고성 해안을 향한다. 계속 참고 있는 비에게 미안해서 오후 3시에 마감한다. 시외터미널 근처 모텔 주인은 센스장이다. 바다미와 합방하라고 1층 넓은 방으로 안내한다. 바다미가 잠든 사이에 진주 어머님께 다녀오려고 준비한다. 근데 요양원 면회가 까다롭다. 하루 전 신청에 코로나 검사까지 받아야 한단다. 보리암 부처님처럼 먼발치에서 어머니! 어무이! 부르고 만다. 
추적추적 비에는 홀짝홀짝 포장마차가 제격이다. 오늘의 메뉴중 장어 내장 조림과 소맥을 주문한다. 여주인이 태진이? 한다. 아니 조만간 지공거사의 반열에 오를 뽈락의 본명을 대놓고 부를 사람이 지구상에 몇 없는데? 초딩 동기인가? 형광등 뽈락! 착각덩어리 뽈락이다. 서울의 테슬라를 아래 녘에서는 테진이라고 한단다. 암튼 태진아, 수고했다! 건배! 비야 밤새 내려라! 그리고 아침이면 멈추어 다오!
(오늘 주행거리 67km)

 

16일 째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바다!
새벽 6시 바다미의 체인에 오일도 뿌려주고 타이어 바람도 보충해준다. 오늘은 창원까지 꼭 가야한다. 기다리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은 들뜨고 설렌다. 하지만 100km가 넘는 장도다. 무엇보다 뽈락의 발을 잡는 것은 아직도 내리고 있는 비다. 기상 정보만 계속 검색하고 있다. 12시에 비가 물러간다는 다음보다는 9시부터 갠다는 네이버를 믿기로 하고 정각 9시에 출발이다. 밤새 비를 맞은 77은 촉촉이 젖어 있지만 비는 비켜섰다. 
남일대해수욕장으로 가는 화살표가 보인다. 코끼리 바위는 옛날 그대로인지 궁금하다. 지금은 폐선되고 철로마저 사라졌지만 그 당시 진삼선 열차의 객실은 터져 나가고 사람으로 지붕을 덮었다. 여름이면 남일대로, 가을이면 개천예술제가 열리는 남강으로! 
화력발전소 입구를 지나면 고성군 하이면이다. 서서히 77은 가팔라진다. 비는 오지 않지만 습한 기운은 거미줄처럼 온 몸을 휘감는다. 하일면으로 가는 오르막은 뽈락에게 쌓인 게 많은지 초반부터 어퍼컷이다. 어제밤 ‘여름이’가 심어놓은 빨치산 모기와의 전투 때문에 몸은 천근만근이다. 군대모포 3장을 뚫는다는 전설의 바닷가 깜장 모기는 베트콩처럼 작으면서도 날쌔고 맹렬하다. 결국 피를 나눈 웬수 같은 동족이 되고 말았다.

 

바다미의 타이어는 3M 접착제를 붙였는지 땅에 달라붙고 뒤에서는 처녀귀신이 잡아당기고 있다. 헬멧과 저지는 땀폭포 속이고 들숨과 날숨은 허파에서 전쟁 중이며 입에서는 단내가 폴폴 거린다. 
역시 네이버는 맞고 다음은 틀렸다. 가끔 검은 구름이 인상을 쓰긴 했지만 행동에 옮기진 않았다. 달리면서 선거운동원처럼 “안녕하세요”를 외친다. 무표정이 살아나서 화답을 한다. 속도를 낮추고 눈을 맞추며 미소를 보낼 수 있는 이동수단은 잔차밖에 없다. 비록 짧은 말 한토막이지만 복을 담아 보내드린다. 어떤 어르신은 “고맙다”고 한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설마 3일만에 처음 듣는 인사는 아니겠지. 순간이지만 그분들의 밝은 리액션에서 뽈락은 에너지를 추출한다. 일급기밀이지만. 
잘 나가던 77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통영 도산 쪽으로 가면 길이 없다. 결국 또 잠수하고 만다. 지가 무슨 바다의 용이라도 되나보다. 지방도 1009를 달려 당동 삼거리 길목에서 통영바다에서 올라오는 77을 기다리기로 한다. 근데 1009는 기대와는 달리 4차선으로 곱게 단장하고 있다. 안심공단덕분이다. 덕분에 안심하고 달렸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은 77의 진면목이다. 서해안, 남해안의 바다 옆을 지나다가 아예 바다에 풍덩한 적도 있는 77은 또 바다가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다. 해안선을 따라 굽이치는 길은 용이 하늘을 나는 모습이다. 산허리를 타다가 골짜기 포구에 윙크를 날리고는 야트막한 산허리를 감싸고돈다. 포구의 앞마당까지 놀러온 바다는 강아지처럼 얌전히 앉아 거울을 만들어 섬들을 데칼코마니한다. 
길의 높낮이는 적당해서 바다미는 생글생글, 가을 바다의 수려한 풍광에 뽈락은 으흥으흥! 가끔 분위기 깨는 조선소의 굉음도 들리지만 거대한 구조물도 좋게 봐주면 그것도 하나의 풍경이다. 그들 또한 잭 스패로의 해적선을 만드는 불법업체가 아닌, 조선 강국을 이끄는 산업역군들 아니겠는가. 어느새 내륙 깊숙이 숨어 있는 당항만을 건너는 동진교에 다다랐다. 고성군에서 창원시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어디냐? 데릴러 갈까?” 때론 친구가 애인보다  간절하고 살갑다. 길은 오롯하고 그림자는 앞장서서 우리를 이끈다.
진동 사거리에서 77은 자동차전용도로로 변신한 후 마창대교를 건너 진해로 직행이다. 그래 내일 봐! 2번 국도를 따라 낯익은 옛 국도에 오른다. 새동전 터널을 지나 맹종죽이 울창한 밤밭고개를 넘어서 경남대가 있는 신마산에 도착한다. 퇴근시간 복잡한 시내지만 평지이고 훤한 길이다. 마산 앞바다에는 추억의 돝섬이 둥실 떠 있다. 
해안도로를 가다가 마산 자유수출단지를 가로지른다. 급한 마음에 신호무시, 보행자 무시하고 달린다. 이러다가 무시무시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바다미가 점잖게 한마디 한다. 그래! 잠시 멈추고 창원만 노을을 가슴에 담는다. 
오후 6시40분, 114km를 달려 드디어 창원 봉곡동 선재네 잔차 가게에 도착했다. 젊은 날 만난 코렉스 동지들이 모였다. 횟집으로 직행이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다. 삼천포 앞바다 전어는 예쁜 모습으로 치장하고 우리의 30년 우정에 힘을 보태고 있다. 칭구야! 우리가 남이가!!

 

17일 째 
77은 동해를 꿈꾼다
밤새 딱지도 떼지 않은 신입 잔차들에게 여행담 자랑질하느라 입술까지 부르튼 바다미는 길 떠날 준비에 바쁘다. 오늘 가는 길은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빤한 코스다. 하지만 이름을 불렀을 때 비로소 꽃이 되듯이 의미가 부여된 길은 새롭고 마무리의 길은 보람차다. 늘 맞이하는 해도 새해 일출이 더 크고 찬란해 보이듯이 말이다. 
정병산 자락에 자리 잡은 경남도청의 하얀 건물은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다. 뽈락의 그 시절처럼. 성주사역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안민고개 입구다. MTB 초보 때 진해 쪽에서 이 고개를 올라오고 있었지. 힘들어 내릴까 하는데 밀리는 차에서 보내는 박수와 응원 소리에 낑낑대며 올랐지. 가슴이 터져 ‘축 사망’ 하는 줄 알았다. 당신의 ‘좋아요’가 뽈락의 명줄을 끊어 놓아요. 
버스가 지나가면 택시가 선다. 고개를 패스하고 안민터널로 접어든다. 보행·잔차 도로를 품고 있는 터널은 이름처럼 편안하게 우리를 모신다. 터널 끝 진해의 환한 모습이 보이자 국도 25번은 이슬처럼 사라진다.

 

멋진 세일러복 해군들이 활보하는 군항 진해다. 롯데마트 사거리에서 2번국도와 함께 오는 77을 만난다. 길가에 늘어선 벚나무들은 내년 군항제에 선 보일 벚꽃을 탐스럽게 만들기 위해 파란 손으로 연신 햇볕을 낚아 채 광합성 하느라 여념이 없다. 
천자봉 공원묘원에 들린다. 오랜만에 들린 장인어른의 묘소가 가물가물하다. 드넓은 녹색바다에 떠 있는 비석 부표는 석재 공장에서 찍어낸 규격 동일, 색상 일률이라 그야말로 각주구검이다. 기억속의 동백나무도 없어져 까마귀처럼 헤매고 있다. 
“장인어른 한 잔 하시지요. 좋아하시는 대선쏘주입니다.” “응, 자네도 한잔 혀. 보아하니 우리 딸 숙이보다 두꺼비 슬이를 더 좋아 하더만.” “그럴리가요. 저는 술 마시는 게 창피해서 술을 마실 뿐입니다요.” “허허, 간만에 웃어보네.”
웅천 고개가 길게 이어진다. 머리는 콕 처박고 페달을 꾹꾹 누른다. 장인어른의 길게 뻗은 손이 바람 되어 무정 사위를 밀어 올리고 있다. 감사합니다.
곡창지대 김해는 공단으로 변한지 오래다. 또 그 공단을 출입하는 차들을 위해 논밭을 아스팔트로 덮어버렸다. 이제 그들이 주인이다. 철모르는 뽈락은 그저 평평해서, 넓어서 좋다고 내 달릴 뿐이다. 
낙동강의 마지막 눈물 같은 을숙도에 들렀다. 잔차족들의 聖地이자 자전거 국토종주의 출발점이다. 이곳에서 아라뱃길 정서진으로 가는 길이 이른바 ‘자전거국도 1호’라고 불린다. 그러고 보니 이번 77여행 첫날 정서진을 찍었으니 16일만에 그 종점에 온 것이다. 끝을 보러가는 마지막 날에 또 다른 끝을 대하고 있다. 아니 누군가에겐 새로운 시작이겠지. 
낙동강하구둑 다리를 건넌 77은 계속 직진이다. 괴정 사거리, 대티터널을 빠져나와 비린내 나는 자갈치시장을 지나면서 마지막 숨을 몰아쉰다. 남포동역 근처 중구 구덕로 8-1 건물 앞 도로에 77의 시작점이 있다. 교과서에는 1,300km로 나와 있지만 뽈락과 바다미의 호기심 여행길은 더 길어졌다. 서해안길 951km, 남해안길 613km 도합 1,564km를 17일간 쉬지 않고 달렸다. 인생이 마지막인 죽음을 보려고 살아오는 게 아니듯이 이번 여행도 77의 끝을 보려고 달려온 것은 분명 아니다. 그저 이정표이고 나침판으로 삼아 왔을 뿐인데도 표지판이 너무 초라해서 실망에 화도 섞인다. 
복병산 꼭대기에 있는 중구청에 기를 쓰고 올랐다. 살인적인 부산의 산복도로다. “남해 미조에는 3번 국도 표시석이 이렇게 있다.” 사진까지 보여주는데도 공무원은 시큰둥이다. 없는 스펙도 만들어 내는 판에 숨겨진 재능을 깔아뭉개고 있다. 77번과 7번이 만나는 곳은 천하의 명당이다. 이 얼마나 멋진 스토리텔링인가. “우물안 개구리 되지 말라 높은 곳에 구청을 세웠더니 그네들은 멀리 볼 줄 모르네. 꿈을 잃은 小年은 老年이고 안목 없는 사무관은 고문관이다. 오호 통재라.” 
이제부터는 동해로 나아가는 7번 국도의 시작이다. 용두산공원과 영도다리가 보이는 옛 시청 자리 즉 롯데백화점 앞이 7번의 시점이다. 일단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가기 위해 노포동으로 이동한다. 부산 도로는 좁고 운전자는 와일드하기로 유명하다. 서면로터리에 들어간 왕초보 운전자는 삼일째 뺑뺑 돌고 있다. 포장이라고 해 놓은 길은 파지고 헤지고 덧씌운 누더기길이다. 고글을 벗고 눈을 크게 뜬다. 정신 차리게 해준 형준 시장님이 고마울 따름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들릴 때 뽈락은 잔차 대리점에 들린다. 동래 MTB랜드의 진홍 사장과 사모는 언제 봐도 서글서글하다. 달도 차면 기울고 용광로도 시간이 가면 식기 마련인데 두 분의 청춘은 시들 줄 모르고 잔차 열정도 식을 줄 모른다. 얼굴만 보고 간다는 게 2시간을 넘고, 지친 나그네 앞에 장어가 분신자살하여 기력을 보충해주며 노란 잔에 들어앉은 부산 생탁은 건배를 기다린다. 
3년 전 힘들었던 범어사 고개길은 세월에 깎였는가? 우정에 기죽었나? 그냥 스르륵 올라선다. 고개 들어 살펴보니 국도 7번이 웃고 있다. 동해도 가보고 싶다던 77의 소망을 등에 지고 달린다. 노포동 버스터미널 안방까지 주행이다. 
이제는 잘 시간이다. 바다미는 아래침대에, 뽈락은 안락의자에서 편안히 자리잡는다. 심야버스에 탄 인원도 딱 7명이다. 럭키 세븐이다. 인생 자체가 樂喜하다. oh! happy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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