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금강 강경포구

평야 한가운데, 내륙 포구의 정취

 

비단처럼 아름답다는 금강(錦江)의 상징적 경관을 세 가지로 대별하면, 극심한 구불거림으로 사행(蛇行)하는 대청호 상류의 산악지대, 공주~부여 간 야산지대를 지나는 역사의 울림 그리고 논산평야와 호남평야 북단을 통과하는 광야지대다. 개인의 기질과 취향에 따라 선호 지역이 다르겠지만 상대적으로 평야지대의 매력이 덜 알려져 있어 여기에 주목하고자 한다. 평야지대를 흐르는 금강이 지형적·인문적으로 한 절정에 이르는 곳은 강경이다. 강경(江景)은 지명 자체가 강변 경치일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고 예전에는 금강 수운의 거점이어서 지금도 등대가 남아 있다. 그래서 내륙이지만 강경에는 포구를 붙여야 지명의 특색과 멋과 맛이 살아난다. 강경포구는 해발 30~50m의 낮은 언덕 몇 곳에 기대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한 입지다. 언덕에 오르면 일망무제의 들판이 펼쳐지고 강변에 나서면 조붓한 산책로와 옛 포구의 흔적에 감흥이 새롭다. 논산천 합수점 바로 옆에 솟은 옥녀봉(44m) 정상은 부여에서 정면으로 닥쳐오는 금강 본류와 평야 속에 모세혈관처럼 가녀린 논산천의 대비를 볼 수 있다. 시큼하지만 향수(鄕愁)가 응고된 젓갈냄새 어른거리는 골목도 방황을 부추긴다. 어떤 나그네도 강경은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으리.

 

 

7. 섬진강 고리봉-동악산 협곡

산도 강도 빼어난데 인적마저 없네

 

대하(大河) 중에 가장 맑고 빼어나다는 섬진강의 대표적 경관은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를 지나는 웅장한 협곡이다. 강변 구비마다 모래톱이 하얗고, 고개를 들어도 정상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산줄기가 하늘과 바람과 근심을 가려준다. 지리산(1915m)과 백운산(1222m)은 높기는 하지만 돌출바위 하나 보기 힘든 육산(肉山)이어서 거대한 스케일에 비해 위압감이나 경관의 강렬함은 덜한 편이다. 남원 고리봉(710m)과 곡성 동악산(737m) 지경에서 섬진강은 또 한 번 극적인 산간협곡을 지난다. 지리산-백운산보다 스케일은 훨씬 작지만 암봉과 암릉이 양안으로 줄지어 있고 기암괴석이 가득한 산자락은 선풍이 감도는 골산(骨山)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곳의 하늘은 뾰족한 첨봉에 찔려 터지기 직전의 풍선 같은 팽만감이 맴돈다. 골산의 선풍은 인간의 범접을 거부하고 하늘마저 긴장케 만드는 예봉에서 우러난다. 예봉(銳鋒)과 첨봉(尖峯)은 거의 같은 뜻이다. 바위가 지천인 골산이되 강물과는 부드럽게 만나서 양안으로는 도로가 나 있고 둔치길도 여유롭다. 산협 구간은 6km로 길지 않고 절경의 연속인데도 사람이 살기에는 토지가 마땅치 않아서 마을은 물론 민가도 드물다. 실현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곳에 깃들어 살아볼까하는 강렬한 충동을 떨칠 수 없다.

 

 

8. 영산강 구수봉 자락

산모롱이 돌 때마다 탄식과 감탄이

 

나주에서 목포 사이, 이 점이지대에서는 도시와 평야, 강물 모두 한숨을 돌리고 휴식모드로 들어간다. 딱히 특별할 것도, 급할 것도 없다. 없음의 연속이 공허가 되어 눈과 가슴을 격동시키니 이윽고 감탄사로 내뱉고 때로는 탄식의 눈물이 맺힌다. 우리가 막연히 품고 있는 한국적 강변 서정의 원형적 이미지랄까, 그런 것이 무덤덤한 산야에 맺혀 있고, 경관에서 슬며시 스며나는 감흥은 공감각으로 격동시킨다. 우주까지 머리를 들이민 알프스와 지구적 스케일의 거대 균열인 그랜드캐년에 익숙하다면 결코 공감할 수 없을 한국적 서정풍경이다. 이 매혹의 길은 전국 16개 보 중에서 가장 한적한 죽산보를 지나 구수봉(151m) 자락에 붙으면서 시작된다. 낮지만 강고한 산줄기는 용케도 강물을 막아내며 서로 합을 겨루듯 북서향으로 굽이친다. 강물에 바짝 밀려난 길은 용케도 틈새를 찾아냈다. 문명의 소음이 거세된 강변에는 황야가 된 둔치가 널찍하고 저편 산자락으로 훌쩍 물러난 강마을은 세트장처럼 고요하다. 진짜 세트장인 나주영상테마파크가 절벽 위에 중세의 성채처럼 우뚝하다. 강 건너 뾰족한 속금산을 배경으로 황포돛배라도 성채 옆을 지나면 시대가 헷갈리는 몽환경 속으로 빠져든다.

 

9. 새재길 달천

들판은 유유자적, 산협은 달콤 청정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새재길은 두 강 사이를 가로막는 백두대간을 넘는다. 한강 쪽에서 백두대간으로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물길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이다. 속리산에서 발원해 충주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합류하는 달천은 길이가 123km나 되어 영산강보다 길다. 물이 달다는 뜻에서 감천(甘川), 달래강이라고도 한 것을 보면 원래부터 달콤한 강이다. 새재길에서 달천의 진풍경은 탄금대에서 수주팔봉에 이르는 15km 구간이다. 탄금대 부근은 충주호 조정지댐으로 인해 생겨난 탄금호의 여운으로 호수 같이 광대하고, 충주분지도 일목요연해서 춘천 의암호를 닮았다. 분지를 벗어나면 곧장 협곡으로 들어선다. 대림산성이 있는 대림산(489m)과 수주팔봉을 안은 두룽산(493m) 자락에서 달천은 섬진강 같은 맑은 계류로 흐르고 인가는 불현듯 사라져 산과 숲은 원시 그대로의 날것으로 되살아난다. 향산리 강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식당가는 자연의 일부가 된 듯 정겹다. 이즈음의 강물은 마시면 달콤할 것만 같다. 협곡은 이윽고 수주팔봉에서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10. 오천길 정북동토성

시공의 벽을 허무는 고색창연

 

 

오천길은 새재길과 금강길을 연결하며 괴산~세종 간 105km이다. 아기자기한 전원풍경의 괴산과 증평을 지나 청주로 들어서면 갑자기 광야가 펼쳐지며 금강줄기 미호천은 한없이 유장해진다. 이 들판에서 자전거길은 미호천 둑길로 장대하게 이어지며 봄이면 벚꽃이 터널을 이루는 꽃길로 변신한다. 이 기나긴 꽃길은 오창에서 무심천 합수점까지 20리나 이어지고, 도중에 청주국제공항 옆을 지나 운 좋으면 최신예 전투기들의 에어쇼를 감상할 수 있다. 이 기나긴 꽃길과 들판의 중심에 기이한 유적이 남아 있으니 바로 정북동토성이다. 강변 평지에 한 변의 길이가 160~180m인 사각형을 이룬 토성은 대단히 드문 형태다. 후삼국시대 때 견훤이 쌓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형식으로 보아 백제 초기에 처음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 성벽은 잘 남아 있고 현재 높이는 2.7~4.5m이지만 원래는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총길이 675m의 소규모 성이다(사적 415). 성벽에는 소나무가 듬성듬성 하고 내부는 텅 빈 채 고분 같은 벽체만 남은 고성은 시공에 혼란을 주는 비현실적 자극이다. 지역의 거성인 상당산성과 연계된 시설로 추정되며 강물을 향해 모서리가 돌출한 입지는 홍수 때를 대비한 설계다. 둑길에 벚꽃이 흐드러지고 하늘에는 F-35가 창공을 가를 때 이 고색창연한 성벽은 시공의 벽을 허무는 환상의 통로로 돌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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