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차(4/22)
해변을 꿰면서 달린다
글-김태진(전 코렉스스포츠 대표, 닉네임 '뽈락')

장생포 가는 길. 포경은 멈췄어도 '고래도시' 명성은 여전하다 
장생포 가는 길. 포경은 멈췄어도 '고래도시' 명성은 여전하다 

 

오늘은 사월 둘둘데이 잔차의 날이다. 모르고 지나가는 잔차 매니아도 있겠지만, 암튼 의미를 부여하면 나름 특별한 날이 된다. 허만 멜빌의 소설 백경에서 모비딕과 외발 선장의 전투에 푹 빠진 것은 초딩 때였다. 그리고 대학에선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따라 불렀지. 포경수술도^^

 

장생포의 고래 조형물. 의 모비딕을 떠올리게 한다  
장생포의 고래 조형물. <백경>의 모비딕을 떠올리게 한다  
장생포에 보존된 포경선
장생포에 보존된 포경선

 

어제 내린 비로 시야가 좋고 도로도 깔끔하다. 햇님은 생글거리고 해발 제로 선창길은 룰루랄라다. 게다가 뽈락의 마음을 아는지 길가에는 고래들이 춤추고 있다. 누가 칭찬을 좀 해줬나 보다. 사양길의 고래잡이처럼 새벽의 장생포항은 고요하고 쓸쓸하다. 저게 포경선이야 하면서 바다미를 앞세워 기념촬영을 한다. 광장 한구석에 장생포타령과 윤수일의 노래비가 있다. 가요기행작가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조용연 선배님 덕분에 이제는 노래비가 보인다.

출출한 배를 채우고는 싶은데 온통 고래고기집이다. 아침부터 고래고기를 씹을 수는 없고 등뼈 해장국도 내키질 않는다. 고래등뼈 해장국이면 몰라도. 누가 한번 개발해 보시라! 해장은 물론이고 골골한 척추를 세워주는 고래 등뼈해장국을. 그럴듯하지 않은가? 나만 그런가?

세계최대 조선소인 현대중공업 외곽의 돌담길. 거대한 공장의 이질감을 줄여주는 친근한 발상이다 
세계최대 조선소인 현대중공업 외곽의 돌담길. 거대한 공장의 이질감을 줄여주는 친근한 발상이다 

 

현대공화국

아나콘다처럼 크고 긴 울산대교는 꼬리를 부두 저 멀리까지 걸치고는 태화강을 건너 바로 염포산 터널에 코를 박는다. 바다미가, 우릴 태워주지도 않는데 왜 쳐다보냐고 나에게 지청구를 한다. 오르지 못할 나무다.

다시 태화강역까지 올라가서 명촌교를 건너 태화강 뚝방길을 달린다. 현대 글로비스 앞 부두에는 해외로 시집가는 자동차가 열병식 중이다. 도로명도 아산로이다. 역시 울산은 현대공화국이다. 미포조선소도 보인다. 나중에 지나치는 현대중공업은 기와를 쓰고 있는 돌담에 둘러싸여 있다. 마치 궁궐처럼.

햇볕 좋은 방어진 부두에는 생선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가자미, 문어가 꼬들꼬들하다. 참가자미는 살이 통통하고 물가자미는 홀쪽해도 맛이 있단다. 참자만 들어가면 인줄 알았는데. 코 베인 가오리와 귀가 잘린 미역은 바다의 추억에 잠겨있다.

일광욕 중인 오징어와 가자미 
일광욕 중인 오징어와 가자미 
코 베인 가오리도 햇살에 맛있게 말라간다  
코 베인 가오리도 햇살에 맛있게 말라간다  

 

대왕암으로 향한다. 감포에 있는 문무대왕 수중릉과 헷갈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게 아닐까했는데 그 자태에 오리지널티를 인정한다. 아까 보니까 의 쉼터가 있던데 혹시 그 용이 문무대왕의 변신용은 아닐까.

어제 등대에 대한 초딩 의문에 해병대 사령관님의 대학원 답변 덕분에 등대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 울산의 끝이라는 울기등대는 1906년 울산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건설 되었단다. 1904년에 터진 러일전쟁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일산해수욕장은 건너뛰고 이제 해변과 바다를 꿰매는 잔차 바늘 여행이 시작된다. 착착~ 착착~

울산 방어진의 대왕암. 문무대왕의 왕비가 죽은 후 호국룡이 되어 이곳에 잠겼다는 전설이 있다     
울산 방어진의 대왕암. 문무대왕의 왕비가 죽은 후 호국룡이 되어 이곳에 잠겼다는 전설이 있다     

 

순간의 인연, 숨겨진 은혜

현대왕국의 그늘을 벗어나려면 남목고개를 넘어야 한다. 계곡을 단숨에 뛰어 넘는 신축 다리 밑으로 옛길이 보인다. 도로 중앙에는 황매화와 바베가시가 아담하게 줄을 서서 반긴다. 내려서 바다미와 손을 잡고 오른다. 허리 굵은 왕벚나무의 성근 그늘 밑에 머리 듬성듬성한 할배가 옛날 길을 느리게 가고 있다. 노곤한 봄날도 하품을 한다. 중간 쉼터에서 동년배를 만났다. 현대중공업 도장반에서 40년 근무하고 정년퇴직한 지 5년 되었단다. 카본 자전거를 처분하고 티타늄에 전기를 달고 나서 동호회의 설움에서 벗어났단다. 전기가 세상을 밝히고 전기가 인생도 밝히나 보다. 한 고개 넘어 주전까지 배웅을 해준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지만 뭉클하다.

툭 트인 바다의 파도는 흰 거품인지 게거품인지 오늘도 힘들게 뾰족한 바위를 다듬고 있다. 쏴아 하고 왔다가 챠르르 하는 주전 몽돌해수욕장에는 텐트가 여러 동 뿌리를 내렸다. 한 더위는 아직이니 피서객은 아닐 테고 그럼 피처족(避妻族)이신지? 암튼 나오면 좋은 건 팩트다.

대왕암 부근에 있는 울기등대 
대왕암 부근에 있는 울기등대 

 

이번 여행은 원래 서해안 77국도에 이어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가기로 했다. 하지만 7번 국도는 바다와 별로 친하지 않고 이미 자동차전용도로가 많은 4차선 귀족으로 변모해 우리와 격이 맞지 않다. 아쉽지만 서로 멀리서 사모하기로 하고 31번 국도와 자전거 길을 택하게 되었다. 정식명칭인 국토종주 동해안 자전거길은 잔차인들에겐 축복이다. 특히 어촌마을로 연결된 길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지역경제도 살리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의 커플처럼 길들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 거창한 조형물보다는 쭉 이어진 파란색 페인트길이 더 반갑고 소중하다. 억지로 마을을 연결하다보니 절벽 같은 계단 길도 나온다. 그래서인지 불평의 뽈락을 뒷바람이 세차게 어루만져 준다.

월성 원자력단지를 우회하는 봉길터널을 통과하기 위해 테일라이트를 쌍으로 켰다. 터널은 놀이공원의 공포코스처럼 오싹하다. 2,430m라는 팻말을 보면서 잠수하듯 숨을 참고 들어간다. 노면 상태는 좋은데 2차로 중간에 폴대가 줄을 이었다. 추월 차를 위해 최대한 바깥으로 페달질이다. 다행히 추월하는 차가 없다. 터널을 나와 뒤를 보니 차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거북이 걸음이다. 이렇게 나도 모르게 남들의 배려와 은혜를 입고 산다. 입은 성은을 죽기 전에 다 퍼주고 가야할건데.

바다와 백사장, 어촌을 오락가락 하는 동해안자전거길. 자동차전용도로가 많고 자주 내륙으로 들어가는 7번 국도 대신 동해안길을 주로 달렸다  
바다와 백사장, 어촌을 오락가락 하는 동해안자전거길. 자동차전용도로가 많고 자주 내륙으로 들어가는 7번 국도 대신 동해안길을 주로 달렸다  

 

방생과 횟감의 차이(?)

고마움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문무대왕 해중릉이 보인다. 대왕암을 괜히 보고 왔다. 문무대왕암이 초라하게 보여서 안타깝다. 상가들도 노점상처럼 허접해 보인다. 해변에서 파도소리를 배경으로 굿소리가 들린다. 막걸리 몇 병만 앞세운 제단에 평상복 무당이 보인다. 무당협회 비회원 야메 무당인 듯하다. 제주인 어머니와 아들은 바람에 휘날리는 천조각 제단을 잡고 있다. 자신들의 불안한 팔자처럼 횟집 수족관은 천당과 지옥이 공존히는 카오스다. 방생하는 고기와 횟감용 생선이 따로 없다. 물칸에서 대기하는 장어, 숭어, 부시리는 주인의 손끝에서 운명이 결정된다. 아니 손님에 따라 달라진다. 바다 속으로 갈 건지 사람 뱃속으로 갈 건지. 살벌하고도 처량한 신세다.

공터의 1톤 화물차에서 젊은 부부가 자전거를 내리고 있다. 근수가 제법 나갈듯한 남편은 전기 MTB이고 날씬한 여성은 미니벨로이다. 물건도 주인 닮는 건가?

날씨가 좋아서인지 코로나가 끝물이라 그런지 잔차족을 심심찮게 만난다. 모두들 바다미의 덩치에 엄지 척을 해준다. 포항까지는 100km가 넘는 거리다. 과메기는 끝났지만 구룡포는 늘 가고 싶은 곳이다.

 

오랜만에 112km를 달렸다. 허벅지가 뻐근하다. 해서 오늘은 취침점호다. 아참! 녹색 등대도 찾았고 노란색 등대도 보았으니 미션 성공이죠? 사령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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