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차(4/24)
환상의 S라인에 파고들다
글-김태진(전 코렉스스포츠 대표, 닉네임 '뽈락')

월포의 일출 
월포의 일출 

 

일출, 해오름, 해맞이, 해돋이! 이곳 동해의 상징이자 필수 이벤트이다. 호미곶은 늦게 도착해서 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은 코앞에 두고도 일출광경을 놓쳐 버렸다. 이런 절호의 찬스를 지나치는 배짱 늦잠이라니. 하룻밤 묵은 월포해수욕장의 소나무 아래 작은 텐트는 편안하고 포근했지만 어둠이 내리자 시작된 폭죽과 파도와의 싸움에 설친 잠이다. 서로의 목소리가 자꾸 커져가는 선술집 술고래의 딜레마처럼 뒤척거리는 잠자리를 누가 훔쳐보는 것 같아 퍼뜩 깼더니 글쎄 햇님이 빙그레 웃고 있다. 그래도 상쾌한 아침이다.

 

아침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빨간 교회당(화진해수욕장 부근)
아침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빨간 교회당(화진해수욕장 부근)

 

포항에서 31번 국도와 7번 국도는 교차한다. 31번은 청송 등 내륙으로,7번 국도는 이제 바닷가 쪽으로 와서 우리에게 손을 뻗어 보지만 그저 바라만 보는 당신이다. 이미 뽈락과 바다미는 잔차도로와 썸 타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잊혀진 영웅들

영덕 블루로드에 들어서니 멀리 회색빛 군함이 보인다. 장사 상륙작전 전승공원에서 모처럼 호국영령께 인사를 드린다. 바다미와 함께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문산함으로 빨려 들어간다. 잊혀진 영웅들! 어린 학도병들이 부산에서 문산함을 타고 이곳으로 와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몸을 던졌다는 가슴 뭉클한 전쟁사다.

장사상륙작전의 기념관을 겸한 문산함 
장사상륙작전의 기념관을 겸한 문산함 
장사 전투의 흔적
장사 전투의 흔적

 

역사는 1등만 기억하고 관객들은 히어로에만 열광한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에는 패턴 장군의 칼레 상륙작전의 도움이 있었고 적벽대전의 화공술은 황개장군의 목숨과 맞바꾸었다. 기만술은 최고 두뇌와 실행력 그리고 희생이 따라야 한다. 맥아더 장군이 선글라스와 파이프로 폼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여기 청춘들의 백그라운드 덕분이리라. 어두컴컴한 실내에 울려 퍼지는 학도병 군가에 허리가 곧추서고 그날의 흑백사진에 한숨이 절로 난다.

 

어선들로 가득한 강구항 
어선들로 가득한 강구항 
동해안 자전거길이 지나는 강구교 입구. 강구항의 역사가 깃든 곳인데 어느 키 큰 놈이 지나다 머리를 박았나보다 
동해안 자전거길이 지나는 강구교 입구. 강구항의 역사가 깃든 곳인데 어느 키 큰 놈이 지나다 머리를 박았나보다 

 

아름다운 강구항

강구항은 다녀본 포구 중에 가장 아름답다. 방파제를 쌓아 만든 인공적인 일반적인 포구는 답답한 느낌이 든다. 오십천이 바다와 만나면서 넓어진 끝자락에 형성되어 푸른빛이 길게 이어진다. 강을 건너는 옛다리의 굵직한 철핀이 박힌 사다리꼴 난간은 인민군 전차를 잊지 않고 있다. 다만 건물 전체를 장악한 빨간 대게는 흉측해 보이기도 하지만 키가 닿을락 말락한 재래시장은 물칸에 물이 넘치듯 손님들도 넘친다.

바다미, 너가 게맛을 알아?
바다미, 너가 게맛을 알아?

 

홍게, 대게, 박달대게, 황금대게 이곳 영덕은 그야말로 게판이다. 너희가 게맛을 알아? 신구 선생님은 건강하신가 모르것네. 시끌벅적한 시장통을 벗어나 포구 끝자락에 있는 식당에서 포항에서 건너뛴 물회를 시켰다. 불그스름한 고추장 육수 속에서 지가 놀던 바다 속인양 생선살이 헤엄친다. 천천히 꼭꼭 한 점 남김없이 뱃속으로 옮기는데 성공했다.

바다를 보고 있는 팔각정에 한 가족이 이미 자리를 잡았지만 식곤증에 취한 풍류객을 마다 할리 없다. 자리 깔고 누워보니 여기가 무릉도원, 파라다이스다. 쿨쿨

 

 

서해 vs 동해

초딩 지리시간에 그리는 우리나라 지도는 서해, 남해는 복잡해서 짜증나지만 동해는 약간 볼록하게 내려오다가 호미곶 들창코를 그리면 끝이다. 그리고 동고서저라서 깎아지른 절벽만 있을 거라 생각했다. 빠삐용의 그 절벽처럼 말이다. 7번 국도만 이용했을 때도 그냥 쭉 가는 길이 연상되었다. 작년 서해안 77을 가게 된 것은 출렁거리는 파도에 발 담그며 달리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동해안 잔차길은 바다와 더 가깝다.

서해가 흔히 리아스식 해안이라 한다면 동해는 보디빌더의 몸매처럼 S라인이 연속된다. 특히 포구와 포구는 비밀통로처럼 끊임없이 이어진다. 해안선을 따라가니 평탄하면서도 구불구불해서 지루할 틈이 없다. 이제는 우리를 안내하는 파란선도 제법 잘 보인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만 취급하는 '두발병원' (후포) 
자전거와 오토바이만 취급하는 '두발병원' (후포) 

 

낚시꾼들이 만세를 부른 이유

잔차 전용길에는 가끔 자가용이 엉덩이를 들이밀고 있고 미역 말리는 덕장이 침범해 있지만 이미 이런 불편은 달관한지 오래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개통된 상주영덕간 고속도로 덕분에 강구항, 후포항이 활기를 띠고 땅값도 뛰었다고 안동 낚시꾼 할배는 얘기를 계속한다. 노태우 정권 때는 이곳 철조망이 철거되어 낚시꾼들이 만세를 불렀다한다. 먼지 쌓인 초소에는 군인은 간데없고 아랫녘 마당바위에는 꾼들만 가득하다.

후포항은 포구라기보다는 도회지 풍경이다. 길은 해안선을 따라 마을 골목도 누빈다. 두발병원! 당근 자전거와 오토바이 수리점이다. 사진만 찍고 돌아서다 주인장 인상이 궁금하여 다시 보니 금일휴업이다.

갈대에 홀려 
갈대에 홀려 
죽변항을 지나는 바닷길. 경치도 길도 참 아름답고 정갈하다 
죽변항을 지나는 바닷길. 경치도 길도 참 아름답고 정갈하다 

 

서산에 해는 떨어지는데 울진공항 옆 오르막은 뽈락의 구슬땀을 내 놓으라 어깃장이다. 기성항 근처 면소재지에 허름한 모텔이 보인다. 그래도 이름은 베니스다. 주인은 한시간 뒤에 온단다. 마을을 다 뒤졌는데 일요일은 죄다 휴업이다.

 

식당이 다 문을 닫아 모텔방에서 라면과 막걸리로 때운다. 일명 '홀애비 청승라면'   
식당이 다 문을 닫아 모텔방에서 라면과 막걸리로 때운다. 일명 '홀애비 청승라면'   

 

오늘은 라면 날이다. 아침 해변의 후라이드 치킨 라면은 필수 낭만이지만 저녁의 여관방 라면은 홀애비 청승이다. 비닐장판이 발바닥에 쩍쩍 달라붙는다. 더 처량할 것 같아 싸구려 커피는 사양한다. 그래도 햇반과 소시지를 넣은 걸쭉한 라면정식은 파스타와 리조또의 환상조합이다. 더불어 하이얀 코리아 와인도 한병 구했으니 행복이 파르르 내려앉는다. 94km를 달렸다.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