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차(4/30)
뽈락은 민간인이다
글-김태진(전 코렉스스포츠 대표, 닉네임 '뽈락')

길고 험하기로 악명 높은 해산령에 올라 
길고 험하기로 악명 높은 해산령에 올라 

 

방산면소재지 현리마을의 부흥모텔에 묵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06~7년 여름에 두어번 왔던 곳이다. 당시 여름방학이면 청소년들과 자전거 국토순례를 참 많이 다녔다. 인천에서 오하마나호를 타고 제주도를 일주하는 코스, 제주도에서 장흥으로 이동하여 내륙 국도를 따라 서울로 회귀하는 코스, 정동진에서 강화 석모도를 잇는 3841코스 등이 있었지. 30명에서 50여명의 대군사가 자전거로 이동하다보니 진행도 복잡했지만 숙식 또한 군사작전처럼 완벽해야 했다. 특히 여름 성수기의 동해안 코스는 대형천막과 취사도구를 준비해 스카우트 체험을 할수밖에 없었다.

초딩 3학년이 선두에 서고 중고생 대학생 순으로 일렬로 달리면 장관이었다. 게다가 깃발까지 달았으니 폼이 좀 난 게 아니었다. 그때 뽈락은 단장으로서 항상 뒤에서 챙기는 역할을 했다. 민통선 코스는 청소년들에게는 난코스라 힘들어 했지만 끝나고 나서는 철조망의 역사와 의미를 몸으로 느꼈다고들 했다. 百聞不如一見이다. 이곳 부흥모텔은 사막 입구에 있는 용문객잔이다. 50km의 화천시내 구간에 숙박처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 머물다 아침에 출발해야 한다. 특히 중간에 있는 해산령을 오후 늦게 오르는 것은 외나무다리에서 좀비를 만나는 격이다. 해산령 비석이 있는 뒷간엔 붙박이 귀신이 있단다. 아이고 무시버라!

독특한 모양의 오천터널 입구 
독특한 모양의 오천터널 입구 

 

떠날 때는 흔적 없이

우루사와 원비 디가 피로야 가라고 외쳐대지만 역시 잘 먹고 잘 자는 게 최고 아닐까. 어제 저녁 돌솥비빔밥에 밥을 한 그릇 더 넣어 비벼먹고 8시에 따뜻한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파스도 붙이고 안약도 챙기고. 휴대폰과 뽈락은 동시 충전 만땅 상태로 새벽 4시에 기상한다. 어제 여행 사진 정리, 일기 쓰고 오늘 갈길 챙기고, 6시에 출발이다. 방을 나서기 전에 수건, 쓰레기, 이불, 칫솔 등 정리정돈은 잔차인들의 기본 에티켓이다. 5분이면 주인장을 몇 시간 기분좋게 할 수 있다. 떠날 때는 말 없이가 아니라 떠날 때는 흔적 없이!

모를 심을 논들에 아직도 흙무더기가 보인다. 부족한 비를 보충해 주려는 듯 먹구름이 대기중이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긴장갑으로 바꿔 끼웠다. 양구에서 화천으로 넘어가는 오천고개를 오르기 시작한다. 삼척 원덕 근덕의 여덟고개가 힘들다고 한 것은 초딩 엄살이었다. 날씨는 추우면서도 등짝에는 땀이 찬다. 하마나 저 모퉁이를 돌면 평지려니를 백치처럼 반복한다. 아무도 없는 길바닥에서 혼자 낑낑대고 있다. 기존의 말굽형 터널입구가 아닌 사다리꼴 모양의 오천터널에 들어가는 것은 로보트 태권V의 왼쪽 눈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터널이 끝날 즈음 뒤따라 온 RV 차 창문이 열린다. 영감님 두 분이다. 어디까지 가쇼? 그냥 여기 타! 우리랑 같이 산에나 가자구! 선하고 좋은 인상에 웃음까지 곁들였다. 정상에 오르니 산책 나온 신선을 만나는구나

 

평화의 댐 지킴이 탱크와 한판
평화의 댐 지킴이 탱크와 한판

 

평화의 댐, 길은 막히고

오른 만큼 내려가고 있다. 헉헉대며 오를 때는 내리막이 천국이라 생각했는데 황진이 여덟폭 치마같이 가파르고 미끄러운 내리막은 입에서 입김이 하얗게 나오고 땀은 금세 식어 추울 따름이다. 게다가 시린 손가락은 브레이킹에 치를 떨고 있다.

 

평화의 댐 
평화의 댐 

 

드디어 평화의 댐에 도착했다. 자기들이 무슨 살수대첩의 강감찬 장군이라도 되듯 임남댐으로 水攻을 펼치겠다 해서 1988년 전후 만들어진 게 평화의 댐이다. 당시 올림픽을 앞둔 시기라 국민들의 관심은 성금으로 이어졌다. 이곳에 와보는 것이 부곡하와이처럼 소박한 버킷리스트가 되기도 한 적이 있었지. 오늘도 바다미는 탱크와 작업 중이다. 지 할배 뻘인 줄도 모르고. 평화의 댐을 병풍삼고 파로호를 집안 연못으로 끌어들였다.

널따란 거실에서 먹는 라면 국물은 천상의 스프다.

비목공원을 통해 가는 민통선안의 평화누리길 자전거도로는 갈수 없단다. 예전에는 화천군 공무원이 단체객을 상대로 안내를 해줬는데 그나마 코로나 때문에 중단되었다고 한다.

천상의 수프, 라면 국물 
천상의 수프, 라면 국물 

 

안장 위 명상의 시간

오늘의 하이라이트, 해산령이 시작된다. 양구 해안면의 돌산령과 더불어 진부령과 맞장 뜨는 유명한 고개다. 공식명칭 아흔아홉 구비길에서 보여주듯 구절양장이다. 초식동물인 양의 내장은 길고도 꼬불꼬불하다. 임신부가 해산의 고통을 느껴야 새 생명을 잉태하듯 잔차인이라면 해산령에서 숨이 끊어지는 고통을 맛보면서 매니아의 반열에 오른다.

 

해산령은 수리중 
해산령은 수리중 

 

이번 여행의 귀인은 단연 날씨다. 춥다고 흐리다고 비가 온다고 걱정들 해주지만 오르막 오르기에는 더 없는 조건이다. 게다가 최신 투어링 XT를 탑재한 바다미가 있지 않은가? 기어를 최대한 가볍게 놓고 천천히 밟으면 된다. 조바심 낼 필요 없다. 뒤에 빚쟁이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정상에서 브룩실즈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이때야 말로 안장위에서 명상하기 가장 좋은 순간이다. 페달질 따로, 머리 따로 놀면 된다. 바보야! 그게 맘대로 되냐!

전망대 쉼터에서 수고한 내 몸에게 한턱 쐈다.이 집의 최상품인 마 더덕즙은 불로초 벌떡주다. 해산령 탑 앞에 주말 라이더가 모여 있다. 2km 남짓의 해산령 터널은 어두침침, 음산한 기운이 배어있다. 하지만 오르막의 끝 아니던가. 훈장처럼 시작되는 내리막에서 마주치는 단체 라이더들이 애처럽게 보인다. 내리막 끝자락엔 딴산 폭포가 다이빙하고 있는 북한강이 보이고 자전거도로가 시작된다. 차르르르

고생 끝자락 딴산폭포 입구
고생 끝자락 딴산폭포 입구

 

출입증명서 보여주세요

화천읍내에서 5번 국도를 따라 철원 김화 쪽으로 간다. 터널을 지나니 화천천을 거슬러 골짜기로 이어진다. 오른쪽 왼쪽 군부대가 즐비하다. 축사도 많은지 바다미가 코를 막는다. 왕복 2차로 도로는 평탄하고 한적하다. 일찍 시작해서 오늘의 과제인 고개 두개를 넘고 나니 한결 여유롭다. 간간이 뿌리는 비도 개의치 않는다.

삶은 계란?
삶은 계란?
호텔식 버스정류장
호텔식 버스정류장
화천 칠성전망대 입구
화천 칠성전망대 입구

 

길가의 정류장에 눈길이 간다. 태양광 패널을 지붕삼고 알루미늄 샤시로 벽을 만들고 유리 출입문도 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전등과 에어컨도 있다. 비상시 노숙으로 딱이다. 바다미와 합방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도 오늘 숙제는 남아 있다. 내일 넘을 말고개는 민통선 안에 있기 때문에 확인이 필요하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마현리 윗마을을 지나 검문소에 다가갔다. 위병이 가로 막으며 출입증명서를 보여 달란다. 여기가 무슨 공항 게이트냐?

말고개를 넘을 수 있을까
말고개를 넘을 수 있을까

 

여길 통과하려면 이틀 전에 00사단에 신청을 해야 한단다. 대략난감이다. 일단 후퇴하여 작전을 짜봐야겠다. 다시 5km를 내려와 사방거리 마을의 모텔에 작전본부를 차렸다. 교도소에는 간수와 죄수가 있고 병원에는 의사와 환자가 있다. 이곳 전방에는 군인과 민간인으로 구분된다. 민간인 통제구역 즉 민통선이다. 하지만 싸나이 가는 길을 누가 막으랴! 내일 꼭 진격하리라?

오늘은 이번 여행의 고비 중 하나인 해산령 등 큰 고개 두개를 넘어 97km를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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