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종성(자유기고가)

현대자동차가 개발 중인, 하늘을 나는 자동차. 가까운 미래에 이것이 현실화될까  
현대자동차가 개발 중인, 하늘을 나는 자동차. 가까운 미래에 이것이 현실화될까  

 

40년 전 세상과 지금 세상이 다른 건 뭘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건 휴대전화다. 걸어 다니면서 아무 곳에서나 통화할 수 있다니, 40년 전 같으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그것도 얼굴을 보면서까지 통화할 수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모르는 것이 생각나 검색하면 답을 찾을 수 있는 컴퓨터와 인터넷이다. 이 메일도 보낼 수 있다. 이게 확대 응용되어 모르는 곳에 처음 가보는 곳에서 길을 물어보지도 않고 운전할 수 있게 하는, 그야말로 지도가 필요 없게 만드는 내비게이션도 추가하고 싶다.

또한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암의 치료와 시력교정 수술, 임플란트 시술, 인공관절 등도 큰 차이로 본다. 40년 전에 과연 꿈이나 꿀 일인가 말이다. 저승세계에서 명부 수정하느라 바쁘다.

또 하나 떠오르는 건 화장실용 비데다. 비데를 한번 써보고 나면 푸세식 화장실에서 종이를 구깃구깃 구긴 다음 펼쳐서 뒤처리하던 일이 도저히 추억 같지 않고 그냥 잊고 싶은 악몽으로 여겨진다.

평판디스플레이 TV도 그렇다. 음극선관 방식에 비해 공간도 절약하고 화질도 훨씬 우수하다. 다만, 컬러화면이라는 사실에선 본질적 차이는 아닌 것 같고 그저 화질이 훨씬 세련된 것으로만 받아들이고 싶다.

나머지는 잘 안 떠오른다. 비행기와 자동차는 더 빨라진 것 같지는 않고, 그저 40년 전보다 세련된 것 정도다.

 

그럼 40년 후에는 어떤 일상이 펼쳐질까?

생각건대, 아마 땅이 아닌 하늘로 날아다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려면 인간의 신체도 비행체의 방향전환에 따른 관성이나 원심력으로부터의 충격과 압력을 이겨낼 정도로 노화를 저지하고 신체의 탄성을 업그레이드시켜야 할 텐데, 그러한 업그레이드를 따라가지 못하면 생물적 차원에서만 같은 인류일 뿐 사회적 차원에선 전혀 다른, 뒤처진 부류로 여겨질 수도 있다. 마치 우리가 지금 아마존의 벌거벗은 원주민을 보면서 생물적 동질감보다 더 강한 사회적 이질감을 동시에 가지듯이 말이다.

 

꿈의 차이, 인종문제로 비화될 단초

영산강처녀노래에 나오는 서울 색시 고운 얼굴 정이 들어 못 오시나~”란 부분, 미적 선택에서 배재된 용모에 대한 한()일까? 아니면 그러한 선택이 배재된 곳에서 태어난 원망일까? 어쩌면 이 가사가 젊은 농촌처녀가 사라지고 늙은 농촌총각이 남게 된 우리의 현실 속에 깊이 사무친 정서를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울 가서 신분상승의 선택을 받을 여지를 높이려고 촌닭들은 서울로 서울로 몰려가게 되었는데, 그나마 여자의 경우엔 직업능력 외에 조금이라도 도전의욕이 있다면 외모에도 큰 기대를 걸었나 보다. 그래서 자신을 낙점해줄 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생각하는 공장이나 식당에서의 근로보다는 외모에 대한 헛된 오만을 실현시켜줄 곳으로 몰려든 게 에레나가 된 순이들이 아닌가 싶다. ‘앵두나무 처녀도 그러했으리라.

이러한 도농 간 꿈의 차이는 지금도 여전하고, 그러한 꿈의 차이는 알게 모르게 신분의 차이로 인식이 박히게 되며, 이는 DNA 우열의 차이, 심하면 다른 인종으로까지 인식이 변질될 지경이다. 하긴 그런 관점에서 지금 농촌 지역은 개도국 불체자로 넘쳐나지 않는가.

아무리 농촌에 도로를 포장하고 차를 몰기 좋게 만들어도 여전히 출근길 막히는 도시가 더 좋은 현실, 정권 바뀐다고 하면 서울의 부동산 시세 전망을 제일 먼저 경제전망으로 내세우는 게 현실이다.

그나마 억지로 시골도 좀 살만한 곳처럼 인식시키려는 의도 때문에 맛집기행이나 골목기행 프로가 아련히 인기를 끄는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가서 살긴 싫으면서, 겉으론 마음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는 거짓위로를 보내는 심정이리라.

 

아직도 원시생활을 하는 아마존의 원주민. 이들을 보는 문명인의 관점은 간단치 않다  
아직도 원시생활을 하는 아마존의 원주민. 이들을 보는 문명인의 관점은 간단치 않다  

 

생물적 동질성보다 우선되는 사회적 이질성

이러한 위선 속에 내재된 경멸을 지구촌 차원으로 확대해 보면, 대표적인 게 아마존이나 호주의 원주민 내지 콩고의 피그미족 같은 비문명 종족의 경우이다. 분명 DNA 구조상으로는 같은 인류라고 하면서도 다큐멘터리 취재진이나 관광객들이 이들을 보는 시선은 같은 인류라기보다는 인간 모양의 동물을 구경하듯이 한층 낮은 시선으로 본다는 것이다. , DNA는 인간이지만 속으론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 기준에 있어서 문명수준의 차이는 DNA의 동질성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가령, 90년대 초반에 어느 여류 사진작가가 파푸아뉴기니에서 나체로 생활하는 원주민들이 남성의 성기 위에 고깔을 씌운 것을 취재한 것을 보았는데, 당시 신문에 그 사진을 그대로 게재했었고, 그 여류작가는 그 남성들과 당당히 어깨동무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은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인간남성으로 보기보다는 동물수컷으로 여기는 시선이 아니고는 실현되기 어려운 모습이다.

만일 그 원주민 남성이 영어로 국제시사를 지껄였다면 그렇게 했을까? 문명인이 일부러 자연인 생활이나 행위예술이라며 그렇게 했다면, 과연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생활수준이나 의식수준이 남보다 뒤쳐지면 안 된다고 본다. 그게 누적되면 미래에는 결국 생물학적 기준에선 인간으로 분류할지라도 사회적 시선에선 동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미래에 새로운 아마존 원주민이 되지 않으려면 자존감을 확보할 수단을 스스로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가난과 무지는 스스로의 분류기준을 낮춘다.

전술한 농촌처녀들의 도시로 향한 이촌향도(離村向都)에는 경제적 수준과 사회적 지위의 상승 목적도 있지만, 여기에는 신분상승 기준과 함께 알게 모르게 우생학적 기준도 배어든 것 같은 느낌이다. 현재의 처지가 나은 사람은 유전적으로도 우수한 것으로 보고, 결혼전선에서 높게 평가받는 경향을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는 아무리 유전자가 좋아도 사회적으로 증명되지 아니하면 유전자의 우수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 정체성의 분류에 있어 생물적 기준보다 사회적 기준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회적으로 실현된 유전적 우수성을 지속하는 게 어려운 모양이다.

예전처럼 반지하 단칸방이 아닌 번듯한 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하는 식으로 유전적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한 과도한 혼례비용 덕에 출발 당시에 이미 모든 조건을 갖춰버려서인지, 그에 따라 결혼 이후엔 누리는데 주력한 탓인지 몰라도, 결핍(缺乏)이라는 삶의 비타민을 가지고 이룸에 주력하는 사람들과 비교할 때 요란한 결혼만큼 찬란한 미래를 실현하는 건 아니더라는 것이다. 성현들이 경고한 소년등과(少年登科)의 위험성은 빈말이 아닌 모양이다. 이러한 누림에 빠지지 말고 이룸을 지향해야 하고, 그러한 의식이 바탕이 되어야 미래에 나락으로 빠지지 않는다.

필자가 누림이니 이룸이니 식으로 다소 건방지게 남 가르치는 소리를 떠드는 것은,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미래엔 인생실패가 사회적 매장을 넘어 인간의 범위에서도 퇴출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그나마 요즈음 '양극화' 어쩌고 하며 어루만져줄 때 빨리 일어서야 한다. 비록 지금은 억지 사랑이 담긴 위선적인 어루만짐일지언정 그마저도 나중엔 그 손길 속에 동정이 아닌 품질’(?) 관념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강자에게 강요된 관용을 당연하게 보지 말라는 거다.

 

값비싼 아파트에서 시작하는 신혼은 양날이 칼이 될 수도 있다   
값비싼 아파트에서 시작하는 신혼은 양날이 칼이 될 수도 있다   

 

 

부동산 분야에서 드러나는 경고 메시지

이러한 경고는 최근 부동산에서도 나타난다.

최근 금리인상으로 집값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전세값도 물론이다. 누구는 내년(2023)엔 금리가 오르지 않을 것이기에 집값이 내리지 않을 거란 소리를 하는데, 그건 기준금리라면 그럴 수 있을지 모르나, 시중금리라면 별개다. 이미 올라가는 금리 때문에 생긴 부도와 파산으로 인한 시중은행의 손해를 벌충하려면 기준금리가 오르지 않더라도 대출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년엔 집값이 더 곤두박질 칠 거라고 한다. “아직 대세하락으로 보기엔 이르다던 유명한 부동산전문가라는 작자들도 불과 반년 만에 제가 예전에도 언급했듯, 대세하락은 이제 막을 수 없다는 식으로 입놀림을 바꾸고, “그것보라. 그때 떨어질 거라는 내말이 맞잖아식의 신흥패널들이 범람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주장들 가운데서 스쳐지나가듯 무서운 얘기가 나왔다.

그것은, 정책적으로 집값을 조절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오류는 수요예측에 있어 무주택자를 잠재수요로 간주했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그 주장은 무주택자는 절대 잠재수요로 보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 집값이 오르면 비싸서 못 산다고 하여 주택구입을 안 하고, 집값이 떨어지면 집값이 떨어지는데 집을 왜 사냐는 식으로 생각하는 무주택자를 잠재수요로 판단하고 주택정책을 편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들은 말로는 주택보급율은 이미 100%가 넘은지 오래이고 주택보유율은 60% 정도라고 한다. , 40%의 무주택자는 다주택자에게 세를 살고 있는데, 그 수치는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집을 지어봐야 기존의 집을 비우고 새집 들어가는 거지, 진짜 집 없이 길바닥에서 노숙하다 새집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거다. , 무주택자라고 해서 주택이 아닌 곳에 거주하는 게 아니란 거다. 소유하지 않은 것이지 점유하지 않은 것은 아니란 거다. 결국 집이 모자란다는 소리는 차익을 노리고 몰리는 곳에 모자란 것에 불과했던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러니 다주택자가 집을 처분하려해도 무주택자가 집을 사주기보다는 다른 다주택자의 투자나 유주택자의 갈아타기 때문에 사주는 게 다반사로 봐야 한다는 거다.

이 때문일까? 몇 년 전에 유권자 중에 유주택자의 비율이 훨씬 더 높고, 납세액도 더 많으므로 선거공약도 유주택자에 맞춰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 적도 있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과연 무주택이 언제까지 보호대상일까? 또한 지방주택 2채보다 비싼 전세로 사는 무주택, 지방주택 3채 가진 다주택자보다 비싼 1가구 1주택을 언제까지 배려해야 할까? 아반떼 모는 사람이 BMW 모는 사람 동정해주란 얘긴가? 굳이 이런 심한 비약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강제된 관용에 대한 재검토는 반드시 생각해볼 일이다. 지나친 이타주의는 왜곡된 이기주의를 만들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요즈음 저출산으로 인해 미래세대의 복지 부담이 걱정되는 판국 아닌가.

김종성(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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