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자유기고가)

 고대 그리스의 패각투표(도편추방제) 유물. 최고 권력을 가진 정치인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투표로 추방할 수 있는 납세자의 막강한 힘을 대변한다  
 고대 그리스의 패각투표(도편추방제) 유물. 최고 권력을 가진 정치인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투표로 추방할 수 있는 납세자의 막강한 힘을 말해준다  

 

보통선거라는 얇은 보호막이 벗겨지면, 강요된 관용은 없어진다

강호제현들 앞에 남 가르치는 소리나 떠들기엔 나는 아직 젊다. 어쩌면, 삐딱하게 생각하는 나의 습관 때문에 우러난 상상적 비관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각종 혜택이 영원히 발전하리란 믿음은 버려야 한다고 믿고 싶다. 고대보다 못한 중세가 있었고, 퇴보만 거듭해온 조선시대도 있었고, 20세기 때보다 지금 더 가난해진 나라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동산 가격이 상승만 하지 않았듯, 강자에게 강요된 관용도 영원히 확대되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그 경고로서 한 마디 하자면, 원래 선거권이라는 게 납세자에 한정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 길거리 소크라테스나 밀림의 타잔에게는 선거권이 없었다. 선거제도만 보통선거 방식에서 납세자투표 방식으로 살짝 바뀌어버리면, 선거공약도 유권자인 납세자를 의식하여 퍼주기식 말잔치가 나올 수 없게 되어, 지금 당연해 보이는 것처럼 범람하는 복지라는 이름의 관용들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관용은 도덕적 의무감에서 나오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여유에 바탕을 둔다. 살기 어려우면 관용이라는 도덕도 무너진다. 그런 관용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는가? 또한 그 관용을 철석같이 믿고 방치하기에는 보통선거에 따른 포퓰리즘이라는 얇은 보호막이 불안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가.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차세대의 부양부담이 과중해져서 지금 같은 관용과 배려를 베풀어주지 못할 경우를 생각하지 못하는가.

 

민심천심(民心天心)’이란 말의 뜻?

요즈음은 민주(民主)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그리고 개인(個人)이라는 말이 추가되면서 백성()의 인격적 가치를 높게 취급하지만, 민심천심(民心天心)이란 말에 대해 생각을 조금 달리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원래 고대 중국에선 신분을 나눌 때 왕()-()-()-()-() 순이었는데, 여기서 민()은 눈알을 빼버린 노예를 의미했다. , ()은 사람()보다 아래의 것을 의미했으니, 이는 영혼이 없는 자연물, ,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衆生)이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짐승'이라는 말이 중생에서 나온 거라고 할까. 따라서 민은 배고프면 먹을 것 찾고 때가 되면 번식하는, 영혼이 없는 자연물이니 이는 곧 하늘의 이치(본능)대로 논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인 것이다. , 민심천심(民心天心)에서 백성()이 높은()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영혼이 없는 자연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샛말로 개돼지란 뜻인가? 백성은 사회적 존재가 아닌 자연적 존재, , 개인이 아닌 숫자라는 말이었다. 그 좋은 민주주의라는 강자에게 강요된 관용이 저급하게 악용되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무책임한 자에겐 과다한 자유와 권리가 주어지고, 책임지는 자에겐 과도한 부담과 고통전담 의무만 지워지게 하는 모순을 만들어 낸 게 최고의 민주적 방식이라는 보통선거다. 개인 영역보다는 숫자 영역에 묻어가는 이 시스템을 보면, 정말이지 변질 속도가 참 빠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더불어 자유무역만 해도 그렇다.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볼 때, 실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요, 지극히 제한된 지역의 일이다. 오랜 역사기간을 통하여 비교할 때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거다.

 

보통선거의 종언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속도가 간접선거 시절에 더 빨랐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미국이 아직까지 간접선거를 실시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이는 현자(賢者)에 의한 투표의 일환이며, 보통선거와 납세자투표를 적절히 혼합한 방식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게다가 지금 우리나라 정당 내 경선에서 선거인단 방식이 쓰이는 것을 보면, 알게 모르게 보통선거의 예외가 자리를 잡아가려는 경향이 안 보이는가?

향후 저출산과 그에 따른 미래세대들의 우리세대에 대한 부양부담을 고려하면, 강요된 관용과 분에 넘치게 누리는 과잉복지의 보호막이라곤 보통선거라는 지극히 얇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보통선거가 빚어낸 강요된 관용의 종언을 생각해두어야 할 것으로 본다.

집단에 도움 되지 않는 무능한 자도 유능한 집단에 귀속된 덕택에 그의 인격을 짐승에서 개인으로 승격되어 누리는 지금의 혜택이 영원히 당연할 것이라고 보는가? 역사는 발전만 존재할 거라고 믿을 수 없듯, 강자의 관용과 정부의 통제에 기초한 평등주의적 복지가 영원할 수 없다.

21세기의 새로운 시대변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강요된 관용을 악용하여 누리는 데만 길든 배려 받아야 할 자들의 횡포라는 인식이 생기고, 강요된 관용으로 세뇌된 억지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지면, 이에 대비하지 않은 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래의 원시인으로 전락해간다. 비행기를 보고 신의 강림처럼 떠받드는 영화 속의 우스운 장면이 왠지 우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날아다니며 사는 미래 삶의 패턴을 맞춰가려면 아무래도 그 부담이 크기에 걸어 다니며 사는 자와 공유하기 싫어진다. 결국 생태계도 구분되어 버린다. 그러니 그나마 양극화란 구실로 가난과 무지에다 정직순수같은 억지 정당성을 덧씌워주고 마음에도 없는 나눔정신으로 억지로라도 떠 받들어줄 때, 진정성 따지며 값 올리지 말고 빨리 일어서라는 것이다. 미래사회에 아마존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영혼의 가치를 높이려는 의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목숨의 가치와 영혼의 가치는 다르다.

 

김종성(자유기고가)
김종성(자유기고가)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