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별은 발목을 잡고
글/사진 김태진(전 코렉스스포츠 대표, 닉네임 '뽈락')

여명의 초원
여명의 초원

오늘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몽골 철수 작전은 여명의 5시 반에 개시된다. 어제 파견(?) 갔던 복남 씨와 별자 씨도 합류하여 열외 1명 없이 완전군장으로 호텔 앞 연병장에 집합했다. 비밀 작전이라 우리를 공개 환송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버스는 시내를 빠져 나와 고속도로에 접어든다. 왕복 6차선 도로는 시원하게 뻗어 있고 베드(best driver)의 작위를 하사받은 쿠릴은 신나게 액셀을 밟고 있다. 어제 울란바토르의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을 티코처럼 잘 빠져 나가는 운전 솜씨에 예의 작위와 물개 박수를 받은 것이다. 외모 또한 미남 배우 토니 커티스를 닮았다. 운전뿐만 아니라 버스의 탄창에서 뽈락의 잔차 수납도 척척해준 고마운 친구다.
다시 초원은 펼쳐지고 기차를 타고 가듯이 풍경은 느릿느릿이다. 야트막한 언덕에는 게르 촌락이 형성되어 있다. 수도 주변의 빈민가인가? 도시에도 초원에도 가지 못하는 어중간한 인생들인지 모르겠다. 1시간을 거침없이 달려 칭기즈칸 공항에 도착한다. 넓지 않은 공항인데 어째 비행기가 안 보인다. 앙꼬 없는 찐빵이요, 고무줄 없는 팬티요, 잔차 없는 뽈락이다^^

칭기즈칸 공항
칭기즈칸 공항

버스에 내려 잔차의 관절을 꺾고 접어서 가방에 넣고 억지 잠을 재운다. 그렇게 교도소처럼 한산하던 공항 내부는 나이트클럽처럼 시끌벅적 사람들로 꽉꽉이다. 인천행 840분발 몽골 국적기 탑승을 위해 우리 팀도 티켓팅 대열에 합류한다. 뽈락의 여권으로 몇 번이고 컴퓨터 좌판 상단 홈을 긁어 댄다. 다른 직원을 부르고는 지들끼리 궁시렁대고 있다. 불길한 조짐이 뽈락의 휑한 두상을 감돈다.

잔차는 다시 가방 속으로 들어가고
잔차는 다시 가방 속으로 들어가고

훈누 투어 신사장이 나서서 확인해보니 20명 중 18명은 정상이고 송사장과 뽈락은 84일 출국 티켓팅이 된 실수가 확인되었다. 그것도 모른 채 우리는 신나게 초원과 도시를 달리고 있었다는 얘기다. 큰 덩치의 신사장은 미안한지 태풍속의 나무처럼 몸을 흔들고 있다. 새벽이면 해가 뜨고 시간이 되면 비행기는 뜰텐데... 우연인지 당연인지 친해진 룸메 송사장도 같은 처지다. 만약 우리가 탄 타이타닉이 침몰하여 구명조끼가 딱 18개뿐이라면 송사장과 내가 분명 양보했을 것이다. 일행들은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 길을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입 다물고 안 돌아보는 게 남은 이들에 대한 예의이고 교육이다? 거친 파도가 강한 사공을 만들듯이 섭섭함이 역경을 헤쳐 나가는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켜주려나. 암튼 님들 덕분에 뽈락의 인생 노트에 행복을 새 길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일식집 석정(세키타이)
일식집 석정(세키타이)
시간 죽이기 
시간 죽이기 

신사장의 손가락이 동분서주 움직여서 오후 310분 티켓을 구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사장과 이제 진짜 작별을 나눈다. 이별이 아쉬워 비행기 날개를 꺾었지만 우리네 인생사는 회자정리다.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을 잘 지켜달라고 신사임당 두 분을 봉투에 모셔서 건네주었다. 우리 대신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애국 열사들의 삶을 생각하면 신사임당 백만대군을 파견해도 조족지혈일 것이다.

이제 시간 죽이기모드에 돌입해야 한다. 혼자라면 잠을 자든지 책을 보든지, 아니면 책을 보다가 잠을 자든지이다. 연인들이라면 양봉장의 꿀벌을 세고 있을 것이고 결혼 30년차 부부는 먼지 퀴퀴한 옛 섭섭함을 탈탈 털면서 시간을 보내리라.

공항 1층 라운지의 일식집 石庭에 들어갔다. 먼저 병맥주 두병으로 뜻밖의 행운을 축하한다. 이어서 니폰스런 복음밥을 곁들인 돈꼬츠 라멘을 주문한다. 몽골의 초원에서 일본 라멘을 먹을 수 있다니. 고비사막에서 매운탕을 먹는 기분이다. 일본 본토 발음으로 다꼬앙 쿠다사이가 바로 통한다.

드디어 탑승이다
드디어 탑승이다

생각해보니 참 신기하다. 룸메 송문수 사장과의 만남 말이다. 잔차의 인연도 아니고 연배도 아닌데 나비처럼 날아와 내 마음에 앉았다. 이런 찰라 같은 시간에도 절친이 된 것에 하늘이 질투하여 빨리 헤어지게 했을텐데, 오히려 우리 둘을 더 묶어주고 있다. 동아줄로 칭칭!

티웨이 TW422 편이 1시간 지연되었다는 기내 방송이다. 케세라세라! 초원의 양들처럼 한가로운 검색대 직원은 옷가지 밖에 없는 가방을 열고 장닭처럼 쪼아댄다. 건너편 송사장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탑승 라운지 우동집에서 맥주를 시켰다. 맥주는 햇볕에서 일광욕을 하고 왔는지 미지근하다. 다른 승객이 와서 우동을 주문해보지만 재료가 이미 떨어졌단다. 그래도 명색이 공항내 최고의 서비스 구간이라 레스토랑을 기대했는데 딱 포장마차 클라스다. 그래도 애띤 얼굴과 착한 가격에 참았다.

양떼구름 
양떼구름 
뭉게구름 
뭉게구름 

드디어 탑승이 시작된단다. 급한 성질에 일어섰더니 송사장 왈 아서라! 이 시점에서는 천천히 여유롭게 adagio란다. 반신반의? 맨꼴찌로 올랐다. 에어버스 A330350여석 좌석은 70여명의 탑승객으로 듬성듬성이다. 우리는 46번 좌석을 모르쇠하고 비지니스석 뒤쪽 자리를 차지했다. 높은 곳에 오르면 멀리 볼 수 있고 천천히 가면 넓게 보이는가 보다. 남미, 유럽 등 세계를 마실 산보하듯 다닌 송사장의 경험과 노하우를 배웠다.

올 때처럼 창가에 앉아 초원에서 벌어지는 바람과 하얀 구름의 희롱을 감상하고 있다. 막대기만 들이대면 솜사탕 뭉치를 건질 수 있을 것 같다. 초원은 한겹으로 대지를 뒤덮고 있지만 구름은 몇 겹으로 층을 이루고 쉴 새 없이 모양을 바꾸고 있다. 또 맥주에 시간을 담가서 죽여보기로 한다. 비빕밥 8천원, 캔맥주 5천원 등 자칭 저가항공은 얄짤없이 돈을 요구한다.

맥주를 5병째 시키니 1인당 3병 이상 금지가 하늘나라의 룰이란다. 그럼 빈 자리로 옮기고 모자 벗고 술을 주문해 볼까나. 깜빡 조는 사이에 흰 구름 카펫에 누가 잉크를 엎질렀나. 터널에 들어가듯 사위가 어두워진다. 해가 지는 타임도 한몫 하나보다.

석양의 은빛 날개 
석양의 은빛 날개 

2천여km의 비행을 마치고 활주로에 내려앉은 비행기는 불빛을 따라 건물로 이동한다. 터미널과 이어지는 통로가 사각형 자바라 입술을 구부려 동체에 입을 맞춘다. 뱅뱅 도는 수하물 벨트 앞에 있어도 뽈락 물건은 깜깜 무소식이다. 40여 분만에 잔차 가방은 마빡에 노란 딱지를 달고 나타났다. 세관에 들렀더니 파란색 대형 박스 자전거 팀이 여러 명 보인다. 꽃게 잡는 그물에 새우가 걸린 꼴이다.

가방 자크를 열어 보여주니 바로 가시란다. 출구에서는 몇 시간 전에 도착한 박대표가 기다리고 있다. 으리의 김보성 아니 으리 박선영이다. 저런 으리가 인정받아 키클로스가 어서 으리으리해졌으면 좋겠다. 셋이서 공항철도로 이동하면서 인터넷 다음이 아닌 진짜 다음을 약속한다. 집에 도착하니 시계 바늘은 타미르의 모습처럼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57일이 될 뻔한 여행이었다. 수고한 잔차도, 무거운 가방도 일단 한숨 자고 내일 아침에 만나기로 한다. 뻑적지근한 하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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