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전승, 이순신 ‘23전 23승’의 바다를 가다(1)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연재를 시작하면서…

 

인류의 역사는 대부분 전쟁의 역사다. 야망과 욕망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전쟁을 통해 역사는 변곡점을 맞고 영웅이 출현하며 새 시대가 열린다. 평화는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지나간 역사를 오늘의 교훈으로 삼는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을 걸고 분투했던 전쟁을 제대로 평가하고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제29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이홍희 편집위원이 '전쟁을 기억하라, 메멘토벨로(Memento bello)' 시즌2로 임진왜란 격전의 현장, 그 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 신화의 바다를 매월 답사한다. 6.25 70주년을 기념해 <자전거생활> 20년 6월호부터 1년간 연재한, '포성이 멈춘 격전의 현장을 찾아서'에 이은 2번째 전적지 답사 시리즈다. 3성 장군을 지낸 경륜을 바탕으로 전쟁과 전투를 보는, 보다 폭 넓고 깊은 안목을 제시한다 (편집자)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해군의 요람 진해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상’. 6.25전쟁 중이던 1952년 이승만대통령 주관으로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충무공 동상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충무공 상 건립에 대한 이은상 시인의 헌시. 이은상 시인은 1968년 광화문 ‘충무공 이순신 장군 상’ 건립 시에도 헌시를 올렸다

 

반만 년 우리 역사 전체를 통틀어 역사를 크게 변화시킨 ‘그날’과 ‘그때’는 언제일까를 생각해본다. 결정적인 ‘그날’과 ‘그때’는 시대에 따라, 기준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필자는 가깝게는 70여 년 전에 있었던 ‘6.25전쟁’,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400여 년 전의 ‘임진왜란’이나 그 후에 있었던 ‘병자호란’ 정도를 우리 역사의 결정적인 ‘그날’로 보고 있다.

그 ‘그날’들은 분명 우리 역사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엄청난 아픔을 안겨주었지만,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수많은 고비 중의 하나 정도로 기억되고 있는 경우도 더러 있는 듯하다.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그날’들 중 이번 답사의 대상은 지금으로부터 430년 전에 있었던 ‘임진왜란’이다. 조선이 건국된 지 꼭 200년 만이던 1592년에 조선을 침범한 일본군과 2차에 걸쳐 7년 동안 싸운 전쟁이다. ‘항왜원조(抗倭援朝)’라지만, 내막은 중국 본토 밖에서 전쟁을 종식하겠다고 중국(명)까지 이 전쟁에 참가했으니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든 미증유의 국제전쟁임에 틀림없다. (이 전쟁은 ‘임진왜란’ 외 ‘7년 조·일전쟁’ ‘임진·정유전쟁’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지만, 본 연재에서는 가장 널리 인식되고 통용되는 ‘임진왜란’으로 칭하기로 한다.)

이 전쟁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부강해지고 100여 년 간 진행된 일본의 통일다툼에서 승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결집된 힘을 과신하면서 시작되었다. 견해의 차이가 많겠지만, 일본의 공격 목표는 중국 ‘명’나라였고 조선은 그 과정에서 거치는 중간 목표였다고 생각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언급한 야심의 종착점은 중국이 아니라, 중국을 넘어 멀리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진출하려는데 있었다고도 알려지고 있다.

 

해군사관학교에 세워진 ‘충무공 이순신 상’. 국내 최초로 활과 실전용 ‘쌍룡검’을 휴대하고 지휘봉인 ‘등채’로 전투를 지휘하는 모습이다 (해군사관학교 제공)

해군사관학교에 전시 중인 ‘거북선’. 뒤로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보인다

 

임진왜란의 대략적 전체 흐름은 다음과 같다.

1592년 4월, 20여 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700여 척이 넘는 대(大) 선단을 형성하여 한반도 최남단 부산에 상륙, 공격하면서 시작된 이 전쟁은 7년이 지난 1598년 11월에 종결되었다.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지 20여일 만에 수도 한양이 피탈되는 등 개전 초기전투에서 연패를 거듭하자, 국왕 ‘선조’와 조정(朝廷)은 개성과 평양을 거쳐 명나라 땅이 멀지 않은 평안도 ‘의주’까지 피난해야만 했다.

그칠 것 같지 않던 일본군의 공세로 말미암아 전쟁은 조선의 항복으로 쉽게 종결될 조짐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조선 수군과 의병의 빛나는 활약으로 인해 일본군의 공세는 고전을 겪은 나머지, 의주까지 밀린 피난 조정(朝廷)을 더 이상은 밀어붙이지 못했다.

조선 수군이 옥포·당항포·한산도·사천 등지의 경상도 바다에서 연승하자 일본군은 서해로 진출하려던 최초 계획을 접어야만 했다. 거기에다 전국 각지에서 발의한 의병들의 항쟁으로 말미암아 일본군의 후방은 여기저기서 위협을 받았고, 이로 인한 보급의 불안으로 말미암아 일본군의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전세는 조·명연합군 쪽으로 역전되기 시작하면서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는가 싶었다. 그러나 명나라와 일본 간에 비밀리에 진행된 강화협상으로 인해 전쟁은 4년 동안 휴전 아닌 휴전을 해야만 했다. 이렇게 4년 이상 진행해오던 강화협상도 양국 간 강화조건의 차이로 인해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결렬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순신장군과 거북선을 새긴 1973년에 발행된 ‘오백원 권’

 

정유년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강화회담에 대한 미련을 접고, 협상 기간을 이용해 증강했던 막강한 전력을 바탕으로 대규모의 전쟁을 다시 일으켰다. 그 시작점은 칠천량(거제도 북부)이었다. 서해 쪽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군의 총공세에 대항하여 이곳 칠천량에서 맞섰던 조선 수군이 전멸하면서 조선은 다시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조정은 파직되어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여 ‘수군을 다시 일으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것’을 명령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즉시 수군을 재건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선다. 칠천량 해전에서 살아남아 뿔뿔이 흩어졌던 병사들을 다시 모으고, 군량을 확보하며, 싸울 무기와 화약을 끌어 모으고, 행방을 알 수 없던 판옥선 12척까지 찾아냈다. 이순신은 반전의 기회를 노리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을 옮겨가면서 일본군의 서진(西進)에 대비한다. 서진을 계속하던 이순신은 몰려오는 일본군을 맞아 싸울 최적의 장소로 ‘명량(울돌목)’을 선정하고, 보잘 것 없는 전력이나마 조선 수군의 모든 것을 이곳에 걸기로 한다. 전선의 숫자만 비교하면 누구라도 이미 승부가 난 전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싸워 이겼다. 이순신은 이곳 명량에서의 승리를 “실로 천운(天運)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명량해전의 기적 같은 승리는 정유재란 전쟁 양상을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된다. 명량해전 이후 조선 수군은 수군통제영을 적의 본거지 쪽으로 조금씩 이전해 가면서 전세(戰勢)를 증강하기 시작한다. 고하도(목포)를 거쳐 마지막 통제영인 고금도(완도)에 이르러서는 한산도 통제영 당시의 수군에 버금가는 막강한 부대로 부활할 수 있었고, 명나라 수군도 이때 이곳에서 합류하였다.

마침내, 한반도 남해안에 왜성을 쌓고 칩거하던 일본군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으로 복귀를 서두르게 된다. 순천 왜성에 갇혀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은 ‘뇌물 거래’를 통해 사천에 있는 지원 부대(시마즈)와 연락이 닿았다. 이후 조·명 연합 수군과 일본군은 일전을 벌이게 된다. 이것이 양측에서 1,000여 척의 함대가 사투를 벌인 세계 해전사에 기록될 ‘노량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 함대 500여 척 중 겨우 50여 척 만이 부산으로 도망할 정도의 전과를 올렸지만, 이순신을 비롯한 몇몇 수군 장수들이 전사하고 7년 전쟁은 끝이 난다.

7년 간 계속된 전쟁을 통해 조선, 일본, 명나라 모두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이후 크나큰 변화를 겪게 된다. 명나라는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쇠퇴하면서 중원을 노리던 만주족에 의해 멸망되고, 중원에는 새로운 왕조 ‘청’이 건국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 역시 패전으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붕괴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수립되어 근대 일본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무능한 선조가 이끄는 조선 조정만 전란 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수도 서울 한복판에 세워진 ‘충무공 이순신장군 상’.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작업이 최근에 종료됐다. 주변에 임진왜란 12개 해전 전투 내용과 난중일기 주요 내용을 돌에 새겨 놓았다 

 

1968년 광화문 ‘충무공 이순신 장군 상’ 건립 시 이은상 시인이 올린 헌시

 

이순신장군 상 앞에 ‘명량분수’로 불리는 공간이 마련됐다. 세종대왕 상 앞에 조성된 ‘한글분수’와 함께 어린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곳이다(서울시설공단 제공)

 

세종로 공원 앞에 조성된 조선건국부터 2022년 현재까지의 주요 역사를 새긴 ‘역사물길’. 임진왜란 전 정여립 모반사건, 통신사 파견, 동인의 남인.북인 분화 등이 눈길을 끈다

 

격전의 현장, 그 바다로 가고자 한다

우리나라 수도 서울의 한복판은 어디일까? 그곳은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대표 공간으로,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축제와 화합의 공간으로 발전해온 ‘광화문 광장’ 일대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 상’이 우뚝 서있다. 누란의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했던 우리 역사 상 가장 위대했던 인물로 생각해서 서울 한복판 광화문광장에다 세웠지 않았을까. 1968년 4월에 동상을 세웠으니 벌써 54년이나 됐다.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순국할 당시의 나이가 54세였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수군이 펼쳤던 해전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전쟁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크게 패한 지상전투는 물론, 불비한 여건 속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했던 의병에 의한 전투 모두도 포함되는 매우 광범위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답사는 이순신장군 중심으로 실시됐던 해상전투 현장으로 한정하여 그 바다로 가고자 한다.

430년 전의 그 싸움터는 바다였고 섬이었다. 거기에는 당시의 전투를 기리는 탑과 비석, 기념 동상 및 기념관, 사당(祠堂), 간략하게 설명하는 안내판들만이 치열했던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찾더라도 그 당시를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전투 상황을 머릿속에 창의적으로 상상해보면 그나마 어렴풋이 그려지지 않을까. 천지를 뒤흔들던 총포 소리와 조총 소리, 판옥선과 왜선이 충돌하는 소리, 쓰러지는 왜군들의 아우성, 조선 수군의 승리의 함성 등을 종합적으로 상상해보면 전투 상황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여행기는 2020년 6월부터 게재했던, 6·25전쟁 70년 주년 기념 ‘포성이 멈춘 격전의 현장을 찾아서’의 후속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두 전쟁이 우리 역사 속에서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필자는 임진왜란이나 충무공 이순신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도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단지, 오랜 군 생활을 하는 동안 관심을 두었던 곳을 자전거로 답사여행을 하면서 느낀 바를 공유하고자 할 뿐이다.

마침, 역대 박스오피스 1위 영화인 <명량>의 후속 작으로 <한산, 용의 출현>이 개봉되어 절찬리에 상영 중이라 참으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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