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7년 전쟁은 1591년 ‘여수’에서 시작됐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있었던 모든 해전(海戰)은 한반도의 남쪽 바다에서 있었고, 칠천량 전투를 제외한 모든 전투에서 조선 수군이 이겼다. 대부분의 전투를 전라좌·우도수군과 경상우도수군이 합동으로 치렀지만, 그 주력은 이순신이 지휘했던 전라좌도수군이었다. ‘원인 없는 결과 없다’라는 격언이 있다. 임진왜란 23전의 전투에서 조선 수군이 전승(全勝)할 수 있었던 데는 분명한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해상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라좌도수군과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이 어떻게 전쟁을 준비했는지에 대해 먼저 살펴봐야 한다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선조 24년(1591년 2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취임한 이순신이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전쟁을 준비한 곳이 ‘여수’이다. 그리고 1592년부터 1593년까지의 5차례의 출정(11회의 해전)을 실제로 ‘지휘’했고, 삼도수군통제영이 한산도에 설치된 이후의 모든 해상전투를 후방에서 ‘지원’했던 곳이 이곳 여수인 것이다. 그래서 임진왜란(해상) 격전지 답사 여행을 전라좌수영의 도시 ‘여수’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돌산도에서 바라보는, 물이 아름답다는 ‘여수(麗水)’ 시가지 모습. 거북선의 고향이자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불린다. 여수가 있었기에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

 

여객선으로 여수항에 들어서면서 느끼는 첫 인상은, ‘오래 전부터 이곳이 천혜의 요새였구나’라는 직감이다. 종고산, 장군산, 구봉산 등이 ‘진남관’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전방으로는 돌산도와 ‘대·소경도’가 방파제 역할을 하며 외해로부터 완벽하게 막고 있다. 오늘날의 함대사령부에 해당하는 ‘전라좌수영’이 위치하고 있었겠지만, 적의 입장에서는 짐작조차도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전라좌수사 부임 당시, 조선 수군과 전라좌수영의 상황은 이랬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남해안 일대는 왜구의 출몰이 잦아 피해가 엄청났었다. 이런 왜구에 대응하면서 조선 수군은 어려움 속에서 발전과 성장을 계속해 나갔다.

조선은 태종과 세종 대가 되면서 병력 5만여 명, 군선 800여 척을 보유한 막강한 수군으로 성장했다. 더 나아가, 태종 때에는 ‘거북선’의 전신인 ‘귀선’(龜船)을 처음으로 건조하였으며, 세종 때에는 군선 227척과 17,285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쓰시마(對馬島) 정벌’을 실시할 정도로 강한 수군을 유지하였다. 

전라좌수영 최전방 ‘발포진성’. 이순신은 이곳에서 ‘발포만호’로 18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수군 장수로서 필요한 많은 경험을 쌓으며 바다를 배웠다(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586)

 

16세기에 접어들어, 조선의 전반적인 국방태세가 해이해지면서 상비군 부재 상황이 발생했다. 다른 군역에 비해 열악한 근무 여건이었던 수군은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 있었던 세 번의 왜변(1510년 삼포왜변, 1544년 사량진왜변, 1555년 을묘왜변)을 겪으면서 조선 수군은 ‘군선’과 ‘무기체계’를 혁신하는 등 수군을 전반적으로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특히, 사량진왜변(1544년) 때에는 왜구의 선박이 대형화되어서 토벌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대응하여 조선은 ‘판옥선’과 ‘천·지·현·황’ 총통 등을 새로이 개발하였다. 이렇게 개발된 판옥선과 총통은 ‘을묘왜변(1555년)’ 때에 70여 척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왜구를 격퇴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30여 년 후에 있었던 임진왜란 때 주력무기로 활약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론, 전라좌수영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선조 20년(1587년) 왜선 18척이 전라도 ‘흥양’지역(현, 전남 고흥군)에 침입했을 때, 격퇴하는 과정에서 녹도권관 ‘이대원’이 전사하는 사건(정해외변)이 발생했다. 뒤이어 ‘가리포’(전남 완도 소재)를 침략한 왜구에게 병선 4척을 탈취당한 사건도 발생했다. 이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좌수사 ‘심엄’이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녹도권관(이대원)을 구원하지 않은 것이 드러나 처형(處刑)당하는 중벌을 받았고, 당시 현장에서 도망치거나 ‘이대원’ 권관을 구원하지 않은 장수들도 ‘파직’되는 처벌을 받았다. 

진남관. 전라좌수영의 객사로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기지의 중심이었다. 이순신이 좌수사로 재직할 때 지휘본부로 활용한 ‘진해루’가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1718년에 ‘이제면’ 좌수사가 다시 그 자리에 다시 지었다. 현존하는 지방 관아 중 최대 규모이다(여수시 동문로 11)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전라좌수사로 새로 부임한 ‘이천’은 전라좌수영의 군기 확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합동훈련을 위해 예하 수군을 소집했는데, 일부 부대가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때, 신임 수사는 휘하 5관의 지방관에게 장벌(杖罰)을 실시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보성군수가 곤장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상의 사건들은 전라좌도 수군들이 ‘실전’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들을 처리하는 과정은 전라좌도의 ‘군기’를 다른 곳보다 더 엄정하게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나갔다. 이로부터 4년이 경과한 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게 된다.

충민사. 충무공 이순신 관련 최초의 ‘사액(賜額) 사당’으로, 통영 충렬사와 아산 현충사보다 60~106년 전에 건립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전라우수사 의민공 ‘이억기’장군과, 충현공 ‘안홍국’(보성군수)도 같이 모셨다. 이순신장군과 참전했던 승장(僧將) ‘옥형’스님과 ‘자운’스님이 충무공의 인격과 충절을 기려 곁에 암자(석천사)를 세워 충민사를 관리하고 장군에 대한 제사를 모셨다

 

복잡한 상황의 연속 - 이순신 장군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다

임진왜란 발생 직전, 조선 조정은 남해안의 수비태세 강화를 위해 새로운 인재들을 발탁하여 배치하였는데, 이때 이순신과 이억기가 전라좌·우수사로 임명되어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경상좌수사 박홍의 부임 시기는 불명확하나 경상우수사 원균은 1592년 2월에 부임했음).

여수의 중심 이순신광장에 있는 ‘이순신장군 동상’. ‘북채’를 들고 거북선을 지휘하며 전투를 독려하고 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이 파격적인 인사란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조정 신료들과 대간이 지나친 승진이라며 반대했지만 유성룡으로부터 추천받은 선조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앉힌다. 임명에 반대하는 대간들에게 선조는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지나친 승진이란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하였다<‘선조실록(선조 24년. 2월 16일)’>. 선조에 의한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은 후일 조선을 살리는 ‘신의 한수’였다고 평가되며, 임진왜란 중 유성룡의 가장 큰 공로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것이라고 전한다(이익. 성호사설).

발포의 내력과 이충무공의 얼을 선양하기 위해 1953년 고흥군 교육회 주관으로 세운 ‘이충무공 유적 기념비’. ‘이충무공 머무르신 곳’이라 적혀 있다(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586)

 

한편,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기 11년 전인 1580년 7월부터 1582년 1월까지 약 18개월 동안 전라좌수영 관내의 ‘발포(전남 고흥군)’ 만호를 역임했었다. 이순신은 만호를 역임하면서 수군 장수로서 필요한 경험을 쌓게 됨은 물론, 전라좌수영 관내 인접 만호의 상황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때 체득한 모든 경험들이 이후 전라좌수사 직책을 수행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14개월 전에 좌수사로 부임했다. 그로부터 관할 지역의 바다와 지형, 주력 전함인 판옥선 운용, 천자총통 등 화포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고 연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부족한 전선(판옥선)을 추가로 건조하고 거북선을 새로 건조할 수 있는 시간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진남관에서 바라보는 여수항

 

이순신은 부임 직후부터 전쟁에 대비하여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1592년 1월 1일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부임한 첫해인 1591년 한 해 동안 전쟁에 대비하여 세부적으로 어떻게 추진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전쟁 준비’ 관련 기록은 100일 치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쟁 대비의 최우선 과제는 부족한 병력을 충원하는 것

시대를 막론하고 군역(軍役)은 달갑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국방을 위한 병력 유지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근무환경이 열악한 ‘수군역(水軍役)’에 대한 기피현상은 더욱 심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순신은 병역(兵役)의 의무가 없는 ‘천인계층’이나 ‘죄를 지은 사람’까지도 병력으로 충당하기까지 했다. 급기야, 성종(1469∼1494년 재위) 대에 들어서는 ‘수군세전(水軍世傳)의 원칙’(한번 수군으로 충원되면 자신의 자식에게도 물려줘야 하는 원칙)까지 법제화하여 수군 병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시행하는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고소대. 여수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좌수영의 포루(砲壘)로서 전라좌수영 성채의 ‘장대(將臺)’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이순신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군령을 내리던 곳이다. 고소대에는 ‘대첩비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비각 안에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좌수영 대첩비), 타루비, 동령소갈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여수시 고소3길 13. 여수 박근세님 제공)

 

이런 실정인데도 불구하고, 조정의 국방 책임자들은 일본군은 해전에 능하고 조선은 육전에 능한 것으로 오판하여, 왜적이 쳐들어올 경우 그들을 육지로 끌어올려 대적하면 된다고 찰떡같이 믿고 육상방어에 주력할 것을 고집했다.

국왕 선조 또한, ‘해도(海道, 하삼도)의 주사(舟師, 조선시대 바다를 담당하던 군대)를 없애고 장사(將士)들은 육지에 올라와 전수(戰守, 싸워서 지킴)하도록 명하였는데, 전라수사 이순신이 급히 아뢰기를 “수륙(水陸)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고 하여 호남의 주사만은 온전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4일>. 

1597년(선조30) 명량해전 직전,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금신전선 상유십이 今臣戰船 尙有十二”란 장계 내용은 대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수군을 해체하여 육군에 합류할 것’을 지시한 선조의 발언에 대해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 나온 것이다. 위 ‘선조수정실록’의 내용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도 전에 선조가 ‘수군을 해체할 것’을 지시한 내용이다.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해상방위를 전담하는 ‘수영’에서는 기본 병력 채우기에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전쟁을 대비한 훈련을 실시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통제이공 수군대첩비(統制李公 水軍大捷碑)’는 이순신장군의 활약상과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국내 최대 규모의 대첩비다. ‘타루비’(墮淚碑)는 충무공 이순신의 순국 후 휘하 장졸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타루(墮淚)’는 눈물을 흘린다 또는 눈물이 떨어진다는 뜻인데, 이는 곧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하여 세운 비석이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타루비는 일제의 박해로 서울로 압송되어 행방을 알 수 없었으나, 광복 후에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 묻혀 있던 것을 되찾아 보물로 지정하여 이곳 고소대에 함께 세워져 있다(여수시 고소3길 13. 여수 박근세님 제공)

 

한편, 조선 중기 때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과 관련된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세조 때부터 제도화되어 국방체제의 근간이 되어온 ‘진관체제(鎭管體制)’가 을묘왜변(1555)을 전후한 시기에 ‘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새로운 제도로 바뀐 것이다.

과거의 진관체제 하에서는 ‘연해지역의 중요 요지’에 설치된 ‘수군진(水軍陣)’에 소속된 ‘포(浦) 수군’만으로 수군 조직을 편제하였다. 그러나 제승방략체제로 변환됨에 따라 ‘연해지역의 각 '군·현’ 소속의 ‘읍(邑)수군’까지 수사가 관할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해방체제(海防體制)는 종전에 비해 크게 향상되었다. 삼포왜란 이후 왜변에 대비한 조치로 시행하였지만, 연해지역 전체를 수군 관할지역으로 조정함에 따라 바다와 선박에 익숙한 주민들을 현지의 수군으로 편성한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돌산 군관청(軍官廳). 조선 전기 전라좌수영을 방호하기 위해 외적이 침입해올 길목인 돌산도 남서쪽에 설치한 유일한 수군기지가 ‘방답진’이며, 방답진의 해안방비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 ‘돌산 군관청’이다. 인근에 거북선을 건조한 ‘방답진 선소’가 있다(돌산읍 군내리 322-2. 여수 박근세님 제공)

 

난중일기를 쓰기 시작한 1591년 1월(선조 25년)부터 ‘동헌에 나가 별방군(별도로 모은 군사)을 점검하고...’를 비롯하여 ‘배에 나가서 새로 뽑은 군사들을 검열하였다’ 등 병력 동원 과정을 직접 관장하고, 군사를 점검한 내용들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16세기 말, 군역 회피 현상이 심하여 실제 군역을 담당하는 병력의 수가 군적(軍籍)에 등록된 병력의 수에 훨씬 못 미치는 경우가 허다하였기 때문이다.

발포만호 시절부터 ‘일선’의 이런 병력 운용의 실상을 잘 알고 있던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가 되자마자, 본영은 물론 휘하의 ‘5관 5포’ 지역에 대해서도 원칙에 따라 모든 병력을 징발하도록 지시하고 이를 철저히 감독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전라좌도 수군은 다른 수영 보다 높은 수준의 상비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흥국사. 임진왜란 때 스님들로 조직한 ‘의승 수군’의 근거지로 ‘호국 불교의 성지’라 불린다. 경내에는 당시 승병을 훈련시키던 ‘훈련장’이 남아 있으며(현재 정비 중), 의승들의 참전을 전해주는 ‘의승 수군 유물 전시관’도 있다. 옥천사는 보물 10점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또한, 이순신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각 사찰의 ‘승려’들도 전투에 나설 것을 독려했다. 스님들이 기꺼이 응소함으로써 400여명으로 ‘의승(義僧) 수군’을 편성할 수 있게 되어 부족한 병력 해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이순신으로부터 전투임무를 하달 받았지만, 승려들 중에 선발된 승장(僧將)의 직접 지휘 하에 돌격대나 유격대 역할을 수행했다.

의승 수군의 본영은 ‘흥국사’(여수시 중흥동 소재)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라좌수영이 폐지될 때가지 300년 간 전라좌수영 산하 상설조직으로 기능하면서 소임을 다했다. 또한, 의승수군 외에도 다양한 신분으로 구성된 ‘해상(海上) 의병’도 좌수영의 부족 병력을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흥국사 의승 수군들의 훈련 모습. 일반 육지 의병들은 관군과 별도로 의병대장을 중심으로 작전을 실시했지만, 의승 수군들은 몇 개의 부대로 나눠서 관군(이순신)의 지시를 받으며 해상전투에 직접 참여하거나 유격전 등에 투입했다 한다(여수시청 홍보 책자 사진)

 

전장을 주도할 화포(火砲)를 장착한 전선(戰船) 건조에 주력하다

이순신이 수사로 부임한 직후 관할 ‘관·포(官浦)’를 점검한 결과 장부 상 30척 중 겨우 5척 만이 쓸 만하고, 나머지는 거의 폐선 수준임을 파악했다. 이에,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판옥선’을 최상의 상태로 정비하고, 부족한 전선은 추가로 건조하였다. 또한, 해상전투 개념에 입각하여 돌격선인 ‘거북선’을 건조하였다. 

여수선소 유적(옛 여천선소).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제작했던 곳 중의 하나이다. 거북선, 판옥선 등 함선을 제작·수리하거나 배를 대피시키던 굴강, 칼과 창을 갈고 닦았던 세검정, 무기를 보관하던 수군기, 대장간 등이 복원되어 있다. 배를 매어두던 ‘계선주’와 유적 주변에 벅수(石人) 3개가 세워져 있다. 여수선소 유적은 고려시대부터 선박을 제작, 수리하는 조선소가 있던 곳이다(여수시 시전동 708)

 

조선 후기에는 수군 지휘관별로 거느려야 할 전선(판옥선)의 척수가 정해져 있었다. 이순신의 직속인 본영이 전선 건조에 앞장섰음은 물론이고, 휘하 ‘5관 5포’의 전선 정비·건조를 감독하고 독려하였다. 난중일기엔 ‘병선을 제대로 고치지 않은 군관과 색리들에 대해 곤장을 때렸다’라는 기록은 물론, ‘아침밥을 먹은 뒤 부두로 나가 선박을 점검하였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최고 수준의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판옥선이나 거북선을 매어두던 ‘계선주’. 굴강 입구에 설치하여 ‘야간 경계병(보초)’ 역할도 했다

 

1400년대까지는 출현이 많지 않던 왜구가 1500년대로 넘어오면서 침범 활동이 활발해지고 그 규모도 커졌다. 조선 수군은 이런 왜구의 침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함선과 함포를 개량해 나가야만 했다. 16세기 중반까지 조선의 주력 함선은 ‘맹선’이었다. 을묘왜변(1555)을 거치면서 왜구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도록 개량하여, ‘판옥선’ 시대로 전환하였다. 판옥선은 맹선에 비해 약 1.5배로 커진 2층 갑판 구조로 개량하고, 왜구를 원거리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화포’를 장착했다. 판옥선이 2층 구조로 개선됨에 따라 노군과 화포운용 요원들이 내부 갑판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배가 커지고 무거워짐에 따른 기동의 어려움은 감수해야만 했다. 전라좌수영은 타 수영과 비교하여 관할 지역이 좁은 불리한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판옥선 추가 건조에 매진하여 결코 적지 않은 수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이순신 광장에 있는 ‘거북선 모형’(제작한지 오래되어 정비 중이라 내부를 볼 수 없다)

 

판옥선의 신규 건조 및 정비와 병행하여 특수 목적선인 ‘거북선’도 창제하였다. 거북선은 판옥선에 덮개를 덮고 그 위에 철판과 송곳 등을 설치하여 일본군의 ‘등선육박전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만든 함선이다. 조선 수군의 ‘전투개념’은 먼저 화포를 ‘주(主) 무장’으로 갖춘 거북선이 ‘돌격’하여 적 진영을 와해시킨 다음에, 판옥선이 돌격하여 적선을 파괴하는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명확히 정립해야 할 것은, 거북선에 의한 ‘돌격’이란 개념이 적 진영을 흩트리는 개념이지 ‘당파개념’(적선과 충돌하여 격파하는 전술)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거북선 체험관. 통제영 거북선과 같은 크기로 건조하여 천자총통 등 당시의 무기를 복제하여 배치하고, 당시 수병들의 전투 모습을 130개의 인형으로 재현하고 있다. 당시 거북선 내에서의 장병들의 전투 모습과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여수시 돌산읍 돌산로 3617-38)

 

15세기 전반 태종 때 한강에서 ‘귀선(龜船)’을 시험운행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왜구의 활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태종 때에 건조했던 ‘귀선’에 관한 사항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기록도 없어졌다. 그러다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개념의 거북선을 완성한 것이다.

귀선과 거북선은 ‘개념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전투수행능력 면’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태종 때의 ‘귀선’은 ‘맹선’을 기본으로 했지만(1층 구조의 귀선), 판옥선을 혁신한 새로운 ‘거북선’은 크기가 1.5배로 증가했다(2층 갑판 구조에 화포를 장착한 거북선).

난중일기에 의하면 ‘거북선 돛에 사용할 ‘베(무명)’ 29필을 받았다’, ‘베로 돛을 만들었다’, ‘실제 거북선을 타고 나아가 화포를 쏘는 연습을 실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포 사격에 대한 점검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불과 이틀 전인 4월 12일에 실시했다는 것이다. 마치 전쟁 개전 날짜를 미리 알고 준비한 것과 같아서 정말로 놀랍다. 조선수군이 보유했던 거북선은 총 3척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여수 일대에 있는 전라좌수영 선소(진남관 앞), 방답진 선소(돌산도), 순천부 선소(여천선소유적)에서 각 1척씩 만들었다고 한다. 

(하편에 계속)

 

본문 등장 주요 지점 위치도(여수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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