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7년 전쟁은 1591년 ‘여수’에서 시작됐다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최무선 과학관. 고려 말, 군선에 화포를 장착하여 최초로 함포공격작전을 감행한 ‘진포대첩’을 비롯하여 고려, 조선시대의 화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임진왜란 200여 년 전에 있었던 고려 수군의 ‘진포대첩 역사’를 조선의 조정은 까맣게 잊었다. 오로지 이순신만이 그렇게 싸울 줄 알고 대처했다(영천시 금호읍 창산길 100-29 소재)

 

임진왜란 당시 조선 판옥선과 거북선이 해전에서 전장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화포(총통)’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화포의 활약은 ‘최무선’(고려말 조선초 무기 발명가이며 장군)에 의해 개발된 ‘화약’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화약 제조의 핵심은 ‘염초’의 생산이다. 최무선은 중국인으로부터 화약 제조의 핵심인 ‘염초’ 제조 핵심기술을 알아낸 후, 숱한 실험을 거쳐 ‘염초’를 자체 생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문종 때는 ‘생산기술’을 지방의 군현에까지 보급시키고, 중앙에서 파견한 관원의 철저한 감독 하에 염초와 화약 생산을 계속해 나갔다.

이러던 화기 개발이 세조 대 이후 침체기를 맞았으나, 을묘왜변(1555)을 겪는 과정을 통해 화기 개발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명종 대에 이르러 해전에서 운용할 전선들을 건조하면서, 전선에서 운용할 다양한 종류의 ‘화포’와 ‘화약’을 생산했다. 임진왜란 전승(全勝)의 유공자로서 고려시대의 발명가이며 장군인 ‘최무선’을 포함시킨다고 조금도 어색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을까 싶다.

최무선 과학관에 전시된 각종 화기. 조선 전기에 개발된 천자총통용 화살이자 포탄인 ‘대장군전’을 비롯한 다양한 총통과 화살, 철환(탄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임진왜란을 전승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무기들이다

 

전라좌수영, 난공불락의 기지로 만들다

전라좌수영은 전라도 해안에 왜구의 침범이 급증하자, 1479년(성종 10년) ‘전라도수영’을 좌·우수영으로 분리하면서 여수에 축조된 수영으로(당시 ‘순천 내례포 만호진’ 철폐 후 설치) 약 6년에 걸쳐 완성됐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둘레가 1,200m 정도 되고 성 둘레를 따라 총혈 1302개, 몸을 숨길 수 있는 여첩 437좌, 치(雉)와 포루(鋪樓) 6개소씩을 설치했다. 성내에는 민가가 2024호 있었고 우물도 7개 소 있었다고 전한다.

좌수영성은 정유재란 때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조선 후기까지 ‘수군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 대부분이 폐허가 되고 일부 남은 성터와, 임진왜란 이후(1599) 축조된 객사 건물인 ‘진남관’(1718년 다시 지었다)만이 전라좌수영 터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

진남관 보수정비 공사 모습. 2015년에 시작한 공사가 2023년을 목표로 진행 중에 있다(여수 박근세님 제공)

 

이순신이 좌수사로 부임할 당시는, 전라좌수영은 축조한지 100여 년이 경과된 때였다. 축조 당시 아무리 튼튼하게 잘 구축했다 하더라도 100년이란 세월이 지나다 보면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이순신이 부임하여 가장 크게 관심을 보인 방어시설 보강분야는 성(城)과 해자(垓字), 연대(煙臺, 봉화시설)이다.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해자가 많이 무너졌으므로 석수장이를 벌주고 다시 쌓게 했다.’ ‘서문 밖에 해자와 성벽을 더 올려 쌓는 곳을 둘러봤다’ 등 ‘성(城)’과 ‘해자’ 보수와 관련된 기록이 많이 나온다. 해자는 ‘좌수영성’에 대한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시설이며, 중점적으로 설치한 장소는 좌수영 서쪽을 관통하는 ‘연등천’ 일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진남관 입구에 ‘임란유물전시관’이 있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관련하여 다양한 유물과 전란 기록 중 ‘수중장애물(철쇄 방비시설)’ 모형이 눈길을 끈다. 좌수영의 동쪽 ‘소포’(지금의 종포)에서 건너편 돌산도까지 쇠사슬을 걸쳐 매어 적선의 통행을 막는 기능을 했다(거북선대교 아래로 추정)

 

이순신이 ‘수중장애물’을 설치했던 ‘거북선대교’ 일대. 건너편 해상케이블카 출발지점이 여수 ‘자산공원’이고 더 뒤편으로 ‘오동도’가 보인다. 대교 아래로는 ‘하멜등대와 전시관’, 여수 낭만포차거리가 보인다.

 

이순신은 ‘좌수영 본영’이 적의 해상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수중 장애물’도 구축했다. 남해도 쪽에서 오동도를 거쳐 전라좌수영을 공격해올 것에 대비하여 ‘종포’(거북선대교 아래)와 돌산도 사이에 설치한 장애물이다. 난중일기에는 ‘수중 쇠사슬’ 설치와 관련된 과정을 매우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수중 쇠사슬’은 연산군 때 장군섬과 돌산도 사이에 쌓은 ‘수중성’과 상호 보완관계에 있다. 연산군 때(1497년)의 전라좌수사 ‘이량장군’이 여수 서쪽의 ‘가막만’을 통한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좌수영을 방호하기 위해 ‘장군섬’과 돌산도 사이의 바다에 바윗돌로 ‘성’을 쌓은 것이다. 이처럼 ‘수중 쇠사슬’과 ‘수중성’은 해상을 통한 좌수영 공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노력한 결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0여 년 전에 좌수영으로의 왜구 공격을 막기 위해 ‘장군도’와 ‘돌산도’ 사이에 국내 유일의 수중성인 ‘장군성’을 쌓았다. 섬에는 이를 기리기 위해 ‘장군성’이라는 비석과 ‘방왜축제비(防倭築堤碑)’가 설치되어 있다. 일년 중 바닷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영등사리, 백중사리 때는 걸어서 장군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여수시 중앙동 산 1. 여수 박근세님 제공)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뒤쪽 종고산의 ‘북봉 연대’와 돌산도에 있는 ‘방답진 봉수대’를 수리하여 연락체계를 구축했다. ‘봉수’(烽燧, 烽은 횃불, 燧는 연기)는 전국을 통틀어 5개 노선의 봉수대들과 연계하여 횃불이나 연기로 약정된 신호전달 체계에 의해 ‘연경과 해안의 안위 여부’를 주변 고을에 알리고, ‘도성’(병조)에까지 전달하던 군사통신 수단이었다. 좌수영 지역의 봉수체계인 ‘전라도 봉수망(제5로)’은 최일선 봉수대인 돌산도의 ‘방답진 봉수대’에서 시작하여 서·남해안을 거쳐서 서울 남산까지 전달되었다.

진남관 뒤쪽 종고산에 있는 ‘북봉연대(北煙臺)’. 옛날부터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산이 울었다 하여 ‘종고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하늘에 제를 올리던 ‘제단’ 역할을 하기도 했다. 종고산 정상에 연대가 있어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봉수를 통해 전라좌수영 관할은 물론 전국적인 연대망과 연계하여 상항을 전파했다(여수시 연등동 산 99)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사실은 4월 14일에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4월 17일이 되어서야 전쟁 발발 보고를 접수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정도의 ‘기간’이면 ‘말(馬)’을 달려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이다. 봉수 체계에 무슨 사연이 있어서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군(지상)은 한양을 향해 파죽지세로 공격하였고, 부산에 상륙한지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점령당했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부대, 부하를 만들다

이순신이 부하들과 함께 싸워야 할 ‘전장(戰場)’은 기상 여건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 ‘바다’이다. 바다에서 치르는 전투의 특징은 ‘개인 단위 전투’가 아닌, 함선에 승선한 모든 구성원이 힘을 합쳐서 ‘팀 단위’로 함께 싸워야 하는 특성을 갖는다.

난중일기에는 특수목적 선박인 거북선과 관련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해봤다’, ‘거북선에서 지자포, 현자포를 쏘아보았다(1592년. 4월 12일)’ 등 주요 훈련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판옥선에 대한 훈련 내용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력선인 ‘판옥선’에 대한 훈련을 실시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순신장군을 도운 사람들을 15개 ‘모형 북’에 새겼다. 의승수군과 해상의병도 빠짐없이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주변 인물들과 호흡하며 전쟁을 치르고 승리할 수 있었다

 

난중일기에 제일 많이 기록된 훈련 내용은 ‘활쏘기’에 관한 사항이다. 무기체계가 고도로 현대화된 현재에도 ‘모든 군인은 소총수가 되어야 한다’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로 개인화기 사격술을 강조하며 연마시키고 있다. 당시 활쏘기는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을 비롯하여 상하 없이 전투원 모두가 갖춰야 할 ‘개인 전투기술’로서 평소에 부단히 숙달했다. 임진왜란 발발 전 3개월 동안에는 무려 30회 정도의 활쏘기 대회를 실시했을 만큼 강도 높게 훈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돌산도 거북선체험관의 거북선 선내 모습

 

판옥선이든 거북선이든 전선(戰船)의 지휘(군관), 기동(격군), 사격(포수, 사수) 등의 제 기능을 유기적으로 통합해서 ‘팀 단위’로 훈련해야 한다. 당시 전선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바람과 인력(人力)’뿐이었다. 전투 현장까지 접근하는 동안은 ‘돛’과 ‘바람’을 이용하면 된다. 하지만, 근거리까지 접근한 다음에는 적의 화공(火攻)에 대비해야 하므로 더 이상 돛을 사용할 수 없다. 격군의 힘(노, 櫓)에 의존하여 배를 기동시켜야 한다.

전장 상황은 수시로 변속·변침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부응하여 전선을 일사분란하게 기동시키려면 격군들의 체력이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평소부터 격군을 강하게 훈련시켜야 하고, 군관들은 격군들의 피로도를 고려하여 함대를 지휘·기동시켜야 한다.

또한, ‘포수’는 파도로 흔들리는 전선(戰船) 위에서 ‘화포’를 쏴서 적선을 파괴할 수 있는 기술(요령)을 숙달해야만 했다. 당시엔 어떠한 ‘사격조준장치’도 없었기 때문에 다양한 해양조건(파도, 바람) 속에서 부단한 훈련을 통해서 일정 수준 이상의 명중률을 유지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승조원들은 전투 간 해상에 추락했을 경우에 대비하여 파도치는 바다에서 헤엄쳐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 생존할 수 있는 능력도 키워야만 했다. 

거북선 내부 장병들의 생활 모습(진남관 임란유물전시관 전시 내용)

 

전라좌수영 휘하의 수군 부대들은 평상시에는 해당 책임지역의 바닷길을 지키며 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전 부대가 통합된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동원·통합훈련’을 실시해야만 했다. 이를 통해 전라좌수영의 ‘전투준비태세’를 완비해 나갔다.

임진왜란 직전인 선조 25년(1592년) 2월에 들어 9일 동안 주요 군진(軍陣)의 전선 및 무기 준비상태, 성곽 및 해자 등의 방비상태, 화포 시험 발사 등 전반적인 분야에 걸쳐 ‘순회 점검’을 실시했다. 이 순회 점검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부임 직후에 실시한 초도순시 때 미흡하다고 현지에서 지적한 사항, 1년여 동안 현지방문 간 지시사항, 평소 강조사항에 대한 이행 실태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주기적인 출동태세 점검을 통해 전장감각을 유지시키고, 부족한 부분을 해결해나가고자 했다(여수시청 홍보 책자 사진) 

 

또한, 부하들과 전술토의를 한 기록도 많다. 일기에는 ‘좌의정 유성룡이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 싸우고 지키는 방법을 더하거나 뺀 전법서> 책을 보내 왔다. 수전, 육전, 화공전 등 모든 싸움의 전술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는데, 참으로 만고의 훌륭한 책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순신은 ‘부하들과 밤늦게 공부하고 토론했다’라고도 적고 있다.

전장 상황을 상정하여 많은 토론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고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는 긴박한 전투 상황에서 서로 ‘눈’만 봐도 서로의 의도(意圖)를 알 수 있는 역량으로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투 준비 끝! 우리에겐 ‘승리’를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후 14개월 동안 전쟁에 대비하여 한시도 소홀함이 없이 준비해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기간 동안 휘하의 5관 5포 전 부대를 나의 부대로, 휘하 장졸들을 내가 원하는 수준의 전사로 키울 수 있었다는데 있었다. 

이순신은 주기적으로 휘하의 5관 5포 수군들을 소집한 ‘종합훈련’을 통해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부대로 만들어 나갔다(여수시청 홍보 책자 사진)

 

이순신은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일본군이 출현한 사항을, 임진왜란 발발 이틀 후인 4월 15일 경상우수사 원균의 구원요청을 통해 알게 됐다. 경상좌·우수영이 무너진 지금, 전라좌수영이 조선 바다의 최전방임을 직감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관할 5관 5포에 비상경계령을 내려 장비를 점검하고 전투준비태세를 강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출동대기명령을 내려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그리하여 26일에 경상도 바다로 출전할 것을 명령 받은 다음, 4월 29일 일제히 여수 앞바다에 집결했다. 그리고 5월 4일 새벽 2시, 이순신의 출전명령에 따라 전라좌수영 함대는 미지(未知)의 경상도 바다, ‘옥포’ 바다를 향해 역사적인 첫 출정의 북을 울리고 여수항을 빠져나갔다. 위대한 임진왜란 23전 전승 해전사의 출발점이었다.

 

여수 지역을 자전거로 여행한다면...

여수는 타 지역에 비해 임진왜란 관련 명소도 많지만, 낭만적이고 화려한 ‘여수 밤바다’와 풍부한 해산물 등으로 너무나 널리 알려진 먹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은 도시다. 

여수시 돌산도와 고흥군(영남면)을 연결하는 약 40km의 ‘백리섬섬길’. 총 11개 교량 중 2/3정도인 7개는 이미 연결되었고, 나머지는 2028년에 완공 목표로 건설 중이다. 더 멋진 자전거 여행이 기대된다

 

여수 시 일대에 집중된 ‘전적지 답사’가 지루한 기분이 든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일출 명소이자 4대 관음기도처인 ‘향일암’이 있는 돌산도 일주 라이딩을 추천한다. 일주코스는 약 60km로 다소 부담되는 거리지만 투자에 비해 얻는 것이 더 많은, 명 코스이다.

한편, 여수 서쪽에 있는 ‘여자만(汝自灣)’을 따라 북쪽으로 약 25km 이동하면 ‘순천만 국가정원’과 ‘순천만 습지(갈대밭)’를 만날 수 있다. 여자만의 석양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또 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백리섬섬길’을 연결하는 5개의 아름다운 교량들 중 ‘둔병대교’의 모습

 

또한, 여수와 ‘고흥’ 사이의 섬들을 교량으로 잇는 ‘섬섬 백리길’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최고의 자전거 코스다. 세계적인 자전거 명소로 널리 알져진 일본 세토내해(瀨戶內海) 중 ‘세토우치 시마나미해도’ 코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게다가, 앞으로 2028년까지 ‘백야도’와 ‘돌산도’ 사이의 섬들도 연결시킨다니 정말로 기대되는 코스가 될 것이다.

 

< 참고 자료 >

*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8

*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7

* 황현필, <이순신의 바다>, 역박연, 2021

* 이봉수, <이순신이 지킨 바다>, 시루, 2021

* 제장명, <이순신 백의종군 >, 행복한 나무,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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