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종성(자유기고가)

과연 근세 우리 역사의 후퇴가 농경민족 특성 때문일까?

그럼 중세 때까지 활개 쳤던 유목민족은 왜 근세 이후 소수민족 내지 야만부족으로 전락하고 말았을까?

결국 유목에 대한 호평은 엉뚱한 발상으로 분류해 놓고선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인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게다가 모든 번영을 초래한 긍정적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 몰락을 잉태한 부정적 이유로 변질됨을 고려할 때, 우리의 미래번영을 위한 실마리는 스스로 모색해야 할 것 같다.

건장한 체격의 몽고 씨름 선수. 몽고인의 체격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건장한 체격의 몽고 씨름 선수. 몽고인의 체격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몽고족의 세계지배는 그 당시 교통수준 때문

우리나라 사람들은 칭기즈칸을 들먹이면 대부분 아주 좋아한다. 왠지 같은 몽골리안으로서의 동질감에다 세계정복 위업이라는 자부심에 무임승차한 기분 때문이리라. 그리고 키 작은 동양인이 키 큰 서양인을 악다구니로 굴복시킨 그 투지에 대한 동경이리라 싶다.

그러나, 필자는 얼마 전에 기고한 글에서 중세 때는 몽고군이 웬만한 유럽인들보다 키와 덩치가 컸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아무리 활쏘기 가지고 절대우세라고 한들, 일단 화살의 수가 제한된 데다 최후의 위협을 대비한 최소한의 수량을 보존해야 하기에 비록 몸이 다소 위험에 노출되더라도 무한히 사용가능한 칼과 창으로 교전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런 칼과 창의 교전에선 체력이 절대적으로 판가름하고, 그 체력은 덩치와 무관할 수 없으며, 그 덩치는 키와 직결되기에 몽고군의 키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몽고인의 영양 상태는 1천 년 전과 거의 차이가 없는데 비해 농경민족은 대부분 1천년 전의 키가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힘과 덩치로 정복을 확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데, 그만한 이동수단과 보급능력이 담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몽고말이다. 체구는 작지만 힘이 세고 추위에 강하면서도 다른 말들과 달리 그냥 옆으로 눕는 것도 자연스러워 숨기는 것도 용이한 몽고말을 병사 1인당 몇 마리씩 몰고 다니다가 배고프면 암말의 젖을 짜먹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최후엔 그 말을 잡아먹으니 기동과 보급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다.

게다가 몽고군은 잘게 썰어 말린 고기 부스러기를 주머니에 휴대하고 다니다가 현지에서 약탈한 다른 음식물에다 뿌려 섞어서 프라이팬에 물을 부어 익혀먹었는데, 흑사병이 발생되기 전까지는 이런 조리방식의 살균효과 때문인지 점령지의 물이나 음식으로 인한 풍토병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요리가 바로 전골이며, 혹자는 전골이란 말이 칭기즈칸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등자와 박차
등자와 박차
로마시대 배경에 등자가 등장하는 건 엉터리다 
로마시대 배경에 등자가 등장하는 건 엉터리다 

또 한 가지 생각나는 건, 말을 탈 때 발을 거는 등자(鐙子)라는 것인데, 이는 몽고 외에는 그때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등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대단하다. 등자가 없으면 말을 타고 무기를 쓴다고 해도 겨우 한 팔만 사용할 수밖에 없고 그조차도 칼 한 자루를 간신히 휘두르거나 한손으로 창을 겨드랑이에 꼬나 쥐고는 앞으로 찌르는 것밖에 할 수 없으며, 활은 전혀 쏠 수 없다. 따라서 등자는 박차(Spur)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승마에 있어서 가장 혁신적인 산물이라고 봐야 한다. 그 당시 유럽엔 등자가 없었으니 기병간의 싸움에선 말을 탄 채로 뒤로 돌아 활까지 쏠 수 있는 몽고군에게 당연히 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생각컨대, 영화 같은데서 고대 로마를 묘사할 때 등자가 있는 말을 타는 화면도 문제가 있지만, 우리나라 사극에서 박차를 가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시대에 맞지 않는 말임을 생각해볼 일이다. 또한 원시야만의 게르만족이 차차 로마의 문물을 익혀서 로마를 쳤듯이, 몽고군의 등자도 유럽인에게 전파되면서 차차 몽고군의 비교우위도 사라졌음을 상기할 일이다.

이렇게 볼 때 몽고군의 우월성은 세계정복을 위해 미리 예상하여 준비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그들의 환경과 방식이 우연히 그 당시에 세계정복하기에 유리하도록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동과 보급의 용이함에다 그들의 잔인성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칭기즈칸 등장 이전에도 몽고지역 유목민은 가난 때문에 농경민족을 침략하여 약탈하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그 때문에 범죄에 대한 인식기준도 농경국가와 판이하게 달라 계속 공격근성이 배양되었던 것 같다. , 약탈과 파괴,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비도덕적 존재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도둑질과 살인을 두고 대자연의 법칙인양 그들 생존의 이유로 합리화하지만, 이는 그들의 정복성과에 경도된 착각의 합리화라고 본다.

생각건대 아직도 농경보다 유목을 우위로 인식하여 유목을 찬양하는 몽매함은 유목의 기동력은 중세 때까지만 먹혀든 것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초원을 벗어나면 무기력하고, 바다에선 젬병이요, 산업혁명 이후엔 야만적 거지족속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한 것을 감안하지 않은 오류라고 보아야 한다. 게다가 몽고제국을 제외하면 로마, 러시아, 대영제국, 미국 같은 세계적 대제국 대부분이 유목국가가 아닌 농경국가임을 간과한 오류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몽고인에 대한 호의적 동족애 또한 알고 보면 몽고침입에 따른 원한감정이 세월이 지나 망각되고 각종 현대학문에 의해 동일한 어족임을 인지한 20세기 들어서 형성된 가공적 동족애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게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민족의 미래 확장을 위하여 필요한 사안 아닌가.

대항해시대를 이끈 유럽의 범선 
대항해시대를 이끈 유럽의 범선 

바다를 장악한 자의 시대 

대항해시대 이후 번영을 구가한 유럽을 유목민족으로 분류하느냐 농경민족으로 분류하느냐에 따라 유목과 농경의 비교기준이 오락가락한다. 하지만 육식을 상대적으로 많이 했다고 하나, 그들은 유목국가가 아닌 농경국가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 대항해시대를 열게 된 단초는 뭘까? 몽고족에 의해 개통된 동서간의 육상무역이 이슬람의 등장 때문에 막혔기 때문이다. 게다가 몽고군에 의해 깔끔하게 포맷되어버리긴 해도 십자군전쟁을 통하여 이슬람세계로부터 유입된 수학을 비롯한 각종 지식과 예술에 충격을 받은 유럽이 중세적 암흑을 벗어나려는 강력한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르네상스라는 것 말이다.

대항해시대는 그 이전까지 지중해 내에만 한정되었던 항해를 지브롤터해협을 넘어 대서양으로 확대한 것인데, 여기에 따르는 근본적 변화는 범선(帆船)이다. 그 전까지는 내해인 지중해에 한정된 항해이므로 배 밑창의 노예에 의한 노젓기식 갤리선이 주축이었으나, 지중해를 벗어나 대양으로 진출하는데 있어선 노젓기로는 항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참고로 이순신 장군의 모함 원인도 바로 이 노젓기 때문이다. 거제도 남단을 돌아 북풍을 맞아가며 부산까지 노젓기로 공격하러 가기가 불가능해서 한산섬 수루에서 쉬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를 모르는 사람에겐 전공으로 늦게 초고속 승진까지 한 이순신의 휴식이 상당히 거만하게 비쳤다).

이러한 범선에 따른 지리적 발견과 식민지 개척, 그리고 산업혁명은 근세를 유럽의 시대로 만들었다. 유럽의 자원·영토·인력의 부족은 이러한 대항해와 산업혁명을 통해 발전한 유럽의 학문·산업·무기의 우위를 이용해 식민지로부터 전부 획득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불편한 것은 그들 간의 세력다툼뿐이었다.

이러한 시기가 무르익어가면서 그 이전에 그렇게 위대했었던 몽고는 바다에 접하지 않아 까마득히 아래로 추락하여, 세계의 중심국가에서 20세기 들어서는 공산화된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화되는 치욕을 맛보았다. 심지어 노몬한 전투처럼 남의 전쟁터가 되는 길목국가 신세로까지 전락했다가 이제야 겨우 깨어나는 지경이다. 정말이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무역을 지배하고, 세계의 무역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부를 지배하며, 마침내 세계 그 자체를 지배한다는 월터 롤리(1552~1618)의 역설은 맞는 말이었다.

◇ 하늘에서 우주로 

그러나 그러한 바다의 시대도 슬슬 변하고 있다.

패권의 무대가 바다에서 하늘로 바뀌는 것이다. 제해권(制海權)시대에서 제공권(制空權)시대로 말이다. 바다 없는 나라는 있어도 하늘 없는 나라는 없으니까 더더욱 그렇다.

항공시대는 전자기(電磁氣)의 사용에 이어 신의 영역에 대한 또 다른 인간의 도전이다. 감히 사람이 하늘을 날다니!

그런데, 이조차도 벗어나 우주를 지향하는 시대로 접어든지 오래다. 그 예로 많은 우주도전의 사례가 있지만 공개된 내용 중에 흥미를 끄는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에 대해 조금 떠들고자 한다.

우주망원경의 대표는 허블망원경이다. 우주에 위성처럼 띄워놓은 천체망원경인데 우주팽창이론을 주장한 허블의 이름은 딴 것이다. 원래 허블망원경 이전에도 1962년에 미국과 영국에서 우주망원경을 띄웠는데, 본격적으로 우주망원경 시대를 연 것은 1990년에 쏘아올린 허블망원경이 대명사 격이다. 너무 오래 쓰다 보니 수리도 자주 해야 하는데다 해상도를 높이는 업데이트도 자주 하다 보니 아예 20211225일에 발사된 제임스웹망원경으로 대체된다고 한다.

제임스웹망원경은 발사 한 달 만인 2022125일에 궤도에 안착했다고 한다. 전문가가 아니라 자세한 차이는 모르겠지만, 허블망원경이 렌즈 1개로 장시간 노출하여 합성하는데 비해 제임스웹은 18개의 렌즈로 합성한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이들의 궤도높이다.

허블망원경 이전엔 태양 주변을 공전하려는 시도까지 했지만 기술적으로 난관이 많아 인공위성처럼 지구주위를 공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며, 현재 지상에서 약 570km 상공에 그 궤도가 위치한다. 이는 일반 중저고도 인공위성 정도의 높이다. 공전의 각속도가 지구 자전의 각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그런데, 제임스웹망원경은 지상에서 무려 150km 상공에서 돈다. 지구에서 보낸 빛이 도달하는 데만도 5초나 걸리는 거리다. 공전속도가 지구자전 각속도와 일치하는 정지궤도가 36km상공이고, 달까지의 거리가 38km이니, 이는 허블 궤도의 2600, 지구의 정지궤도보다 42 거리이며,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보다 4나 먼 곳에서 지구주위가 아닌 태양주위를 공전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태양전지가 지구 그림자로 가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상의 라그랑주 점을 중심으로 헤일로 궤도를 느리게 그리며 공전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재미난 추측 두 가지를 추가해본다.

1. 만약, 제임스웹망원경에 우주로 향한 관찰기능 외에 지구로 향한 관찰기능도 탑재하고 있다면?

2. 만약, 제임스웹망원경이 1대가 아닌 3대 이상이라면?

이럴 경우 현재로는 지구를 가장 멀리서 감시할 수 있고, 달의 뒷면도 상시 감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2년 전에 중공이 지상에서 절대 관찰할 수 없는 달 뒷면에 무인우주선을 착륙시킨 이후 미국의 아무런 대응이 없었는데, 중공의 우주개발은 과학을 빙자하여 군사적 목적이 없을 수 없는 만큼, 미국의 제임스웹망원경도 군사적 목적이 있다고 본다면, 제임스웹망원경은 중공이 달 뒷면에서 무슨 꿍꿍이를 벌일 수 없도록 감시하게 된다. 이는 중공 우주항천국이 더 잘 알 것으로 본다.

허블망원경과 허블망원경으로 촬영한 천체
허블망원경과 허블망원경으로 촬영한 천체
제임스웹망원경 
제임스웹망원경 

<100년 후>라는 책에서 미국의 지구 최외곽 우주감시수단을 언급한 미래학자 조지 프리드먼의 예측을 실현시켜줄 지금 시점의 강력한 수단이 일단 제임스웹망원경이 아닐까 한다.

지구를 감시하는 것 같아 무속이나 민간신앙과 많이 연관 짓는 신의 영역인 달, 그 달이 뒤에서 감시당하는 것이다. 앞으론 무속을 넘어 종교조차 과학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가? 수학이나 과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무당도 못할 시대가 되는가? 이런 지경인데도 아직도 유목의 우월성을 논할 텐가? 케케묵은 감성몰입 같은 느낌이 안 드는가?

유목의 우월성은 정복의 결과에다 엉뚱하게 이동과 정착을 기준으로 분류한 이유를 갖다 붙인 해설에 불과하며, 그 해설이 성립하는 것도 그 중세시대에만 맞아떨어진 우연에 불과하다. 마치 요즈음 대박을 치고 있는 우리의 K방산이 엉뚱하게도 남북분단 때문에 생산라인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때문이듯이 말이다. 정말이지 21세기의 경제와 안보를 논하는데 이제는 Nomad 같은 감성편향적 용어와 논리는 그만 썼으면 한다.

덤으로, 역사적 결과에다 엉뚱한 해설을 갖다 붙여 프레임을 씌운 것 중에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겠다. 초패왕 항우의 패배 원인에 대한 이야기다. 모두들 항우의 머리가 나빠서라고 한다. 물론 사람에게는 자신의 힘이 세면 머리를 쓰기보단 힘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럼 항우는 정말 머리가 나쁠까?

머리가 나쁠 수도 있지만, 머리가 나빠서 패배한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결정적인 것은 유방과 항우의 나이 차이 때문이다. 20대 중반의 항우와 40대의 유방 중에 누구의 수가 더 높을까? , 인생경험에 의한 경우의 수가 유방에게 더 많이 축적되어 있었기에 젊은 항우가 이를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항우의 힘이 세다는 이유로 그의 사후에 호사가들에 의해 항우의 힘에다 온갖 패배이유를 갖다 붙이느라 머리가 나쁘고 인격이 모자라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건 그의 나이에 있다고 본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문명세계에서 20대가 왕조를 세운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말이다.

필자 김종성(자유기고가) 
글 김종성(자유기고가)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