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인 장대 고분군, 웅장한 산성의 나라

함안은 가야연맹의 하나인 아라가야(阿羅伽倻)의 옛터로 안라국(安羅國)으로도 불렸다. 아라가야는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와 함께 초기 가야연맹을 이끌던 중심세력이었으나 400년 고구려의 침공으로 힘을 잃고 중심세력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국가 건설을 이끈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일본 각지에서 아라가야 계통의 토기가 출토되고 ‘아라’라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이후 가야연맹의 패권은 고령의 대가야로 넘어가고 아라가야는 백제와 왜의 사신들을 불러 국제회의까지 열어 신라의 공격에 대비했으나 결국 실패, 561년 경 신라에 항복하고 만다. 패망한 역사는 잊혀지기 마련이지만 융성했던 왕국의 실체는 거대 고분들과 속속 발굴되고 있는 유적과 유물들이 웅변하고 있다

아라가야 지배층의 무덤인 말이산고분군. 긴 구릉지를 따라 160여기의 고분이 분포한다

한때 가야연맹을 주도했지만 지금의 함안은 인구 6만6천 명의 작은 전원도시로 남았다. 군의 중심지이자 아라가야의 유적이 가장 많이 남은 가야읍은 인구가 2만명에 불과해도 아라가야 시대 왕과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이 언덕에 줄지은 말이산고분군은 경주 못지않은 고대국가의 저력과 위용을 보여준다. 가야읍을 중심으로 주변에 산재한 산성들도 만만치 않았을 아라가야 힘을 말해주고 있다.

아라가야 이후 함안은 왕국의 수도에서 이름 없는 지방으로 격하된 것이 사실이지만 고려 이후에는 격조 있는 사대부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은거와 풍류의 문화정신은 수많은 정자와 사당으로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근대 이전 함안의 중심지는 지금의 읍내에서 남쪽으로 4㎞ 정도 떨어진 함안면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함안면’이고 향교와 읍성, 함안의 명물인 ‘함안읍성 낙화놀이’도 함안면의 무진정에서 진행된다.

성산산성에서 바라본 말이산고분군과 가야읍 

낙동강을 끼고 있는 들판은 넓고 비옥하고, 남쪽을 장중하게 막아선 여항산(770m)~서북산(739m) 줄기는 하늘을 찌를 듯 위엄이 넘친다. 남쪽의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강줄기들이 낙동강으로 흘러들면서 많은 하천들이 생겨났는데, 범람을 막기 위해 낙동강 본류는 물론 하천 변에도 긴 둑을 쌓으면서 함안은 둑이 많은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함안의 둑길은 단순히 홍수를 막는 방재의 기능뿐 아니라 로맨틱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산책로로 단장되어 사람들을 부른다.

이렇게 함안 여행은 고분들 사이에서 역사를 사색하고, 정자를 찾아 풍류를 되새기며, 들길을 돌아 둑길을 거닐며 자유와 낭만을 만끽하는 ‘길 위의 충만’이다.

충의공원 언덕에서 발견된 초대형 건물지. 초석이 아니라 땅에 박는 굴립식 지주를 세웠으며 건물 길이는 39.9m나 된다. 529년 신라, 백제, 왜 대표가 참석한 안라회의가 열린 곳으로 추정된다 

읍내 북단에 조성된 함주공원을 기점으로 잡는다. 공설운동장과 문화원, 문화예술회관 등이 모여 있는 대규모 공원으로 공간이 넉넉하고 넓은 주차장도 있다.

신음천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천변 언덕에 자리한 충의공원이 나온다. 입구에는 함안 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와 6·25 참전 희생자를 기리는 충의탑이 하얀 대리석으로 웅장하다. 충의탑 뒤편 언덕은 폭 15.2m, 길이 39.9m의 초대형 건물지가 발견된 곳이다. 가야리 왕궁터, 말이산고분군과 삼각형을 이루는 지점에 있어 제사 관련 유적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안라회의(安羅會議)가 열린 고당(高堂)으로 추정되기도 하다. 안라회의는 529년 당시 신라의 복속위협을 느낀 안라국(아라가야)이 신라, 백제, 왜 사신을 초청해 수개월 간 연 국제회의다.

고분이 자리한 구릉지 경사면은 단층을 이뤄 마치 성채 같은 느낌을 주는 말이산고분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2호분이 마치 원형 피라미드처럼 하늘 높이 아득하다

왼쪽의 주능선에는 대형분이, 가지능선에는 중소형분이 주로 분포한다고분 사이로 구비치는 환상적인 여로. 젊은층은 고분군의 역사성보다는 멋진 풍경에 매료되어 많이 찾는다  

잠시 읍내를 통과해 말이산고분군으로 올라선다. 고령의 지산동고분군이 산 능선을 따라 고저차를 이루며 고분이 분포한다면, 말이산고분군은 평지에 돌출한 높이 30~40m의 구릉지를 따라 길이 1.6km에 걸쳐 113기의 고분이 늘어서 있다. 확인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일대의 고분은 1000기를 넘는다고 한다. 해발 기준으로 말이산 최고지점은 68m이다. 일제시대에 처음 조사됐는데, 가장 큰 제34호분은 봉분 지름이 39.3m, 높이가 9.7m에 달한다. 최근에는 북쪽 끝자락에 있는 마갑총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것과 같은 중장기병의 말갑옷이 출토되고, 제8호분에서는 5명의 순장 인골이 확인되어 아라가야의 강대했던 군사력과 권력구조를 보여준다.

이 장대한 고분군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일대 장관이다. 고분 주위의 수풀을 제거하고 잔디밭으로 보존해 봉분이 한층 도드라지고 입체적으로 보인다. 가만히 보면 고분군 아래 언덕은 단층을 이루고 있어 인공적 삭토와 축조 흔적이 역력하다.

고분 사이를 걷는 기분과 풍광은 참으로 기이하다. 근래에 생겨난 묘지를 걸을 때는 생사의 문제가 나의 실감으로 다가와 서글픔이 앞선다면, 1500년 전 고분 사이에서 죽음은 저 멀리 객관화되고, 인생사 총합으로서 역사의 통시적 무게감이 적막한 잔디밭과 허공 사이에 분산되어 가벼운 설렘으로 바뀐다. 누구의 무덤일까 어떤 시대였을까 하는 이성적 의문과, 장구한 세월 버티고 선 봉토분에서 느껴지는 감성적 호기심도 교차한다.

고분군 저편으로 성긴 나무가 도열한 성산산성이 가깝다. 오른쪽 멀리 보이는 고봉은 여항산(770m)

고인돌의도 곳곳에 있다. 함안은 구석기 유적도 발견되어 사람이 거주한 지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말이산을 내려와 광정리 들판을 가로질러 검암교를 통해 함안천을 건넌다. 강변 언덕 높직이 고목에 싸여 있는 동산정을 지나칠 수 없다. 세종연간에 활동한 이호성(李好誠)이 1459년경 지어 은거했고, 그의 손자 이희조가 초정(草亭)으로 단장하고 이호성의 호를 따서 동산정(東山亭)으로 명명했다. 두 칸짜리 방을 갖춘 정자는 함안천 너머 들판을 바라보는 좋은 입지다. 마당에는 일부러 암석을 방치해 자연을 뜰 안으로 끌어들였다. 정자 아래에 있는 느티나무 노거수는 이호성이 심은 것이라고 하는데 수령이 700년이라 시기가 더 앞선다. 생전의 이호성을 보았을 느티나무는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서 21세기를 사는 나를 보고 있구나.

함안천을 따라 북상해 검암리를 지나 작은 고개를 넘으면 경전선 폐철로에 조성된 아라가야 자전거길이 나온다. 현재의 경전선은 복선전철화되면서 3km 이상 남쪽을 지나가 함안역은 읍내에서 동떨어져 있다. 폐철로 자전거길은 2km밖에 되지 않으나 기찻길 특유의 아련한 추억과 향수가 어려 있다.

강변 언덕에 높직이 앉은 동산정. 세종 때 활동한 이호성(李好誠)이 1459년경 지어 은거했다  동산정 아래에 있는 느티나무 노거수는 이호성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수령이 700년 이상으로 추정되어 시대를 더 앞선다. 15세기 중엽, 생전의 이호성을 보았을 나무는 아직 성성하게 살아 있다

경전선 폐철로를 재단장한 아라가야 자전거길. 길이가 2km 밖에 되지 않지만 시골 단선 철길 특유의 정겨움과 향수가 어려 있다 

폐철로길을 벗어나 검암천을 따라 북서향해 가산마을에서 산길로 접어든다. 아라가야 외곽의 방어성이던 문암산성 가는 길이다. 문암산성은 마산 방면으로 이어진 협곡을 감제하는 전략적 위치에 있다. 함안읍 방면으로 마지막 봉우리인 168m봉과 바로 옆의 197m봉 두 곳에 쌍성으로 남아있으나, 168m봉은 둘레 330m의 소규모여서 둘레 1100m의 상당한 규모를 갖춘 197m봉 쪽을 문암산성으로 통칭한다.

197m봉 문암산성도 보존이나 안내 조치가 전혀 없어 수풀에 묻혀가고 있고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졌다. 성 한켠에 있는 무허가 건물로 이어지는 길만 남았을 뿐 성벽과 내부 전체가 수풀에 뒤덮여 답사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엄청난 유적을 이렇게 버려두다니… 참으로 안타깝다. 나중에 들릴 성산산성처럼 발굴을 거쳐 수풀이라도 제거하면 한층 보존과 답사에 좋을 것이다. 힘겹게 오른 길을 허전한 마음만 안고 내려선다. 딱히 볼것이 없으므로 성곽에 관심이 없다면 통과를 추천한다.

문암산성에서 내려다본 가야읍 방면. 아래의 도로는 남해고속도로다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되어 허물어진 문암산성 성벽. 아무리 튼튼한 석축이라도 나무가 자라면서 뿌리가 내리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수풀 제거가 시급하다   

고려동 입구의 고려교. 고대도 아닌데 잊혀진 시대, 그래서 더 반가운 그 이름 高麗구나  

고려동을 에워싼 긴 담장 옆에 춤추듯 빼곡히 가지를 뻗치고 있는 자미화(백일홍)

문암산성을 동쪽으로 내려와 대천마을에서 고개를 넘으면 꽤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양지바른 산자락에는 예쁜 전원주택들이 즐비한 모곡리가 나온다. 그 한쪽에 한옥이 밀집해 있는 고려동유적지가 있다. 남부지방에 이처럼 큰 고려 유적지는 드물 것이다.

고려후기 성균관 진사였던 이오(李午)는 고려가 망하자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고려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밭을 일구며 자급자족 생활을 했다. 아들에게도 조선에서 벼슬하지 말고, 자신의 사후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을 남겼다. 이 같은 유지를 받든 후손들은 600여년 간 이곳을 떠나지 않고 고려동을 지키고 있다. 대부분의 건물은 6·25때 소실되어 재건한 것이지만 이오 선생이 이곳에 터 잡은 계기가 된 자미화(백일홍)는 여전히 수많은 가지를 퍼뜨리며 생생하게 남아 있다. 건물로 남은 유산이라면 조선일색인데 여기서 고려를 보다니… 그 의기가 참으로 존경스럽다.

입곡저수지의 현수교 출렁다리(길이 112m). 맞은편 암벽 위 정자와 어우러져 현대적 선경을 이룬다   

입곡저수지 호반길은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는 꽃길이 된다. 반면 겨울에는 응달이 지는 곳이 많다 

북단에서 바라본 입곡저수지. 호반을 따라 데크 산책로가 잘 나 있다 

1021번 지방도를 타고 팔미당고개를 넘으면 입곡저수지 상류로 이어진다. 길이 1km 정도로 협곡을 따라 길쭉한 저수지는 호반에는 벚꽃길과 산책로가, 외곽에는 공원이 들어서서 유원지로 꾸며졌다. 하지만 겨울에는 응달이 져 차갑고 어두운 분위기다.

저수지 북단에서 가파른 언덕을 따라 동지산고개(120m)를 오른다. 고개를 넘으면 내리막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탄한 고원지대가 펼쳐져 놀라게 된다. 이 정도 높이로 고원이라고 부르기는 무엇 하지만 주변이 저지대여서 평지와 동떨어진 고원 느낌이 확연하다. 일반 세상에서 한발 물러난 고원지대에 터 잡은 동지산 마을과 주민들은 뭔가 달라 보인다.

동지산 마을에서 남쪽의 대산리까지는 시원한 내리막이라 가히 쾌속의 하산감(下山感)이다. 대산리 마을 중간에는 석조삼존상이 남아 있다. 예전에는 아무런 가림막 없이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보호전각이 생겨 다행이다. 삼존상을 보면 주위에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다는 뜻이다.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여러 번 증축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삼존상을 에워싸고 있는 마을 전체가 절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조각기법은 다소 조악해서 고려시대에 지방화된 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검암산(217m) 남쪽 고원지대에 있는 동지산마을. 고지대 답게 하늘이 활짝 열렸다 

동지산마을을 내려서면 있는 대산리 석조삼존상. 주변은 원래 절터였다가 폐사되고 삼존상만 남았다. 허술한 조가기법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 모습이다

함안지역을 다니다 보면 마을마다 이런 기념비가 특히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전통을 보존하고 위인을 존중하는 문화를 잘 지켜가고 있다   

고목과 연못이 어우러진 무진정. 낙화놀이를 위한 줄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바로 뒷산에 성산산성이 있다  

대산리에서 함안천을 건너면 바로 무진정(無盡亭)이 나온다. 함안의 절경 중 하나인 무진정은 1542년 조삼(趙參)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었다. 바위 언덕 위에 높직이 자리한 입지와, 그 아래 둥글게 판 연못이 풍류정신 만발한 선경을 이룬다. 평지 도로변에서 이런 아취를 발산하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무진정의 매혹은 정말 무진장이다. 매년 4월초파일에는 전통 불꽃놀이인 ‘무진정 낙화놀이’까지 열려 더욱 이채롭다.

무진정 바로 뒷산에는 말이산고분군과 더불어 함안 역사여행의 클라이막스 중 하나인 성산산성이 있다. 무진정 뒤편으로 가파른 진입로를 500m 정도 올라가면 성벽이 나온다.

아, 이렇게 웅장할 수가! 발굴 전 수풀에 묻힌 상태를 본 적이 있는데 발굴을 위해 수풀을 걷어내 전모를 드러낸 성곽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장관이다. 성벽은 많이 허물어졌지만 든든한 석축이 완연히 남아 있고, 내부는 저지대부터 고지대까지 복잡한 단층을 이뤄 인공 흔적이 선연하다. 낮은 골짜기를 오목하게 감싼 성곽은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서 위용이 한층 더하다. 둘레는 1.4km로 짧지만 7만평에 달하는 내부 전체에 수많은 건물 터가 분포하고, 원래부터 전지역을 활용해 마치 거대한 원형극장처럼 집중도와 웅장미가 극대화된다. 현존 산성 중 가장 웅장한 보은 삼년산성에 필적할 만한 입지와 스케일이다. 건물이 서 있고 병사들이 배치된 그 옛날의 산성은 그야말로 철옹성이고 서슬 퍼런 병장기가 뿜어내는 살기까지 더해 이 성벽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것이다.

발굴은 19년 12월부터 시작해 23년 7월까지 예정되어 있으며, 중간의 건물터 위주로 진행되고 있어 성벽 일주 길은 열어놓았다. 성벽은 안쪽에서는 완만하고 바깥으로는 수직을 이루었고, 역시 석축 아래 토축까지 포함하면 총높이가 10m를 넘는 가공할 방어선이다. 사방으로 조망이 탁 트여 전술적으로 최적의 입지지만 연계 산줄기 없이 들판 중에 홀로 솟은 독산이라 적군의 포위 고사작전에는 다소 불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신라군에게 패배한 가야의 장군 전설이 전해지는 걸 보면, 아라가야 최후의 날 이곳이 마지막 보루였던 것 같다.

발굴중인 성산산성 동문 일대. 성벽 중 가장 저지대로 성내의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가 있고 안쪽에는 용수를 위한 저수지가 있었을 것이다. 잘 다듬은 돌을 맞물려 쌓은 성벽의 기저부는 1500년 풍상에도 잘 남아 있다   

성 안으로 들어서면 내부 전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심부에는 많은 건물 흔적이 발견되었고 오른쪽 최고지점으로는 수많은 단층이 져있어 막사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수풀을 제거한 덕분에 성곽의 전모가 잘 드러났다. 실물로 보면 훨씬 더 웅장하고 멋지다

   바깥쪽 성벽은 수직 석축이고, 안쪽은 비스듬한 경사로 토석혼축을 이룬, 전형적인 내탁식(內托式) 축성법을 보여준다. 성벽 따라 둘레길이 잘 나 있다 

정상부 근처의 성벽길. 나무를 베어내 성벽 구조와 주변이 훤히 드러나 성곽 답사와 조망을 함께 즐기기 좋다

공제선에 걸린 성벽 위에 용케 살아남은 고목이 하늘로 가지를 뻗치고 있다

성벽은 많이 허물어지고 경사가 무뎌졌지만 왼쪽 저 아래로 산비탈을 가공한 토축까지 포함하면 10m 이상의 가공할 높이였다 

성산산성에서 내려와 함안천을 따라 남하하면 새로 생긴 함안역을 지나 함안면으로 접어든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함안의 중심지여서 함안면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아라가야의 중심지였던 읍내는 가야읍이다.

함안면에서는 함안향교를 들러야 한다. 비탈진 산기슭에 장중하게 자리한 건물도 볼 만하지만 향교 입구에 서 있는 은행나무 거목은 굉장하다. 수령은 580년 정도인데 둘레 6.3m 높이는 32m에 달한다. 국내최고의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수령 1100년, 둘레 14m, 높이 42m)와 비슷한 위압감과 웅자를 보여준다.

급경사지에 건물들이 단을 이뤄 한층 웅장하고 근엄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함안향교  

함안향교 입구의 은행나무 고목. 수령 580년, 높이 32m의 거목이다

토기 가운데 불꽃 모양이 들어간 아라가야 특유의 불꽃무늬토기를 앞세운 함안박물관. 바로 뒤편에 말이산고분군이 있다 

읍내를 양분하는 신음천에 걸려 있는, 예쁜 사장교인 공원교. 다리를 건너면 출발지인 함주공원이다

함주공원 서편 가야리에 있는 추정 왕궁터에서 바라본 가야읍내. 충의공원, 말이산고분군과 함께 삼각형을 이루는 지점이다. 발굴이 진행중이다    

이제 성산산성 서편을 돌아 읍내를 향해 간다. 말이산고분군 서편을 따라가면 아라가야 특유의 불꽃무늬토기를 앞세운 함안박물관이다. 고령 대가야박물관과 마찬가지로 박물관 바로 옆에 고분이 있고 말이산 줄기가 뒤를 감싼다.

광성천을 따라 북상하면 읍내를 우회해 다시 신음천과 합류하고, 예쁜 사장교인 공원교를 건너면 출발지인 함주공원이다. 공원교에서 서쪽으로 800m 가면 아라가야 시대 왕궁터로 추정되는 언덕이 있다. 딱히 유적은 없고 발굴이 진행 중이지만 외부의 성곽형태는 남아 있다. 대형 건물지가 발견되고는 있지만 이곳이 왕궁터였는 지는 분명치 않다. 함안지역 전설에는 이곳이 왕궁터라고 오랫동안 전해져 왔다. 다만 왕궁이 있기에는 터가 너무 좁고 말이산고분군과 강으로 분리된 입지도 좀 애매하다. 과연 왕은 어디에 살았을까. 사라진 왕국의 터전에 차가운 겨울 석양이 어린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tip

말이산고분군은 산책로가 잘 나 있으나 안전과 보행자 보호를 위해 도보로 이동하길 권한다. 천천히 걸으면서 고분과 주변을 살펴야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문암산성은 보존이나 안내 조치가 전혀 없어 그냥 통과하는 것이 낫다. 성산산성은 말이산고분군과 더불어 반드시 봐야할 가야 유적이다. 도보로 천천히 산책하듯이 돌아보면 좋다.

함안 일주 3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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