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 고분군, 대체 어떤 나라였길래

평지에 거대한 고분이 분포한 경주는 압권이지만, 그 다음으로 위용이 느껴지는 고분군은 단연 고령이다. 읍내 뒤에 솟은 주산(310m) 줄기를 따라 분포하는 수백 기의 고분군은 입체감과 규모감에서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봉분 자체는 그리 크지 않으나 능선 공제선에는 대형분이, 사면에는 중·소형분이 2km에 걸쳐 산재한다. 도대체 이 땅에 있던 대가야는 어떤 나라였길래 다른 가야연맹은 물론이고 신라에 버금가는 고분군을 축조한 것일까. 고대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원거주지로도 추정되는 고령, 그 신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주산 줄기를 따라 200여기가 분포하는 지산동고분군. 규모와 숫자, 입체감에서 실로 압도적이다  

전국에 수많은 고분군이 남아 있고, 큰 곳은 거의 다 가보았지만 고령처럼 인상적인 곳은 없었다. 봉토분의 규모는 경주가 단연 앞서지만 시가지 가운데에 있어서 시각적 규모감이나 입체감에서 다소 손해를 보는 측면이 있다. 고령은 읍내에 들어서는 순간, 뒷산 능선을 따라 수없이 돌출해 있는 고분에 입이 쩍 벌어진다. 처음 본다면 우리 땅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싶을 것이다.

6개의 소국으로 구성된 가야연맹에서 대가야는 5세기 이후 연맹을 주도했고 남원과 남해안까지 세력을 떨쳤다.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시대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가야연맹은 끝내 하나의 국가체제로 통합되지 못했고, 초기 연맹을 주도했던 금관가야가 532년 신라에 항복하고, 562년에는 대가야마저 신라의 공격에 멸망하면서 베일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대가야는 시조 이진아시(伊珍阿豉) 왕부터 도설지(道設智) 왕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했다고 한다. 금관가야(42~532, 490년간)보다 더 길다.

지산동고분군 중간에 자리한 대가야박물관. 왼쪽은 복원된 대가야시절의 건물 

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 입구. 뒤편 언덕에도 고분군이 보인다

지산동고분군 왕릉전시관 앞에 있는 대가야 시절의 중장기병. 말까지 철갑을 두르고 있어 전장에서는 무시무시한 존재였을 것이다   

대가야의 여정은 주산 줄기를 따라 분포하는 지산동고분군 중간에 있는 대가야박물관을 기점으로 삼는다. 박물관 맞은편에는 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가 있고 넓은 주차장도 마련되어 있다. 출발 전에 도보로 박물관과 고분군을 돌아보기에 좋다. 고분군과 역사테마관광지는 자전거 출입 금지다. 고지대의 고분군은 나중에 주산성과 함께 돌아보는 것이 낫다.

대가야박물관에서 서쪽으로 주산 줄기를 넘으면 한때 가야대학교가 있던 대가야CC다. 골프장 진입로 옆에 조금 남은 가야대 건물 앞에는 아주 특별한 비석 공원이 있다.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살았다는 고천원(高天原, 타카마가하라)이 바로 이곳이라는 기념비다. 고천원에 살던 신들이 신라 소시모리(거창 우두산으로 비정)를 거쳐 일본 열도로 건너갔고, 그 직계 후손이 초대 천황이 되었다는 신화는 일본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실려 있다. 일부 한일 학자들의 주장이지만 지금은 비석과 일본인이 쓴 시비까지 세워져 있어 사실처럼 느껴진다.

신화에 등장하는 남매 신이자 부부로서 일본 열도를 창조했다는 이자나기(伊邪那崎)와 이자나미(伊邪那美)는 대가야 건국신화에 나오는 초대왕 이진아시(伊珍阿鼓)와 이름이 유사해 동일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초기 일본 왕가는 가야계, 4세기 이후는 백제계라는 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이유로 한일 우호의 실마리는 고대사에서 찾는 것이 순리이고 합리적일 것이다.

비석을 보려면 가야대 구내로 진입해야 해서 관리인의 양해를 얻어야 한다.

옛 가야대 구내에 조성된 고천원공원.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고향이 이곳이라는 비석들이 여러 기 서 있다

김면 장군을 제향하는 도암서원의 취죽헌. 정면 5칸, 측면 2칸의 장중한 누각이다

김면 장군이 남긴 우국충정의 어록. "나라 있는 줄 알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노라"

가야대를 돌아 나와 쌍림농공단지를 거쳐 김면 장군 유적으로 향한다. 김면(金沔, 1541~1593) 장군은 임진왜란 때 고령, 거창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해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병사했다. 유적에는 장군의 위패를 모신 도암서원과 묘소가 있고, 장군이 남긴, “오로지 나라만이 있는 줄 알았고, 내 몸이 있는 줄은 몰랐다”는 말이 입구에 새겨져 있다. 당시 조총과 서슬퍼런 일본도로 무장한 전쟁귀신 대군 앞에 맞서는 것은,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는 살신성인이었다. 장군의 결기와 용기에 깊이 머리를 숙인다.

김면 장군 유적에서 나와 안림천을 건너 둑길 따라 잠시 상류로 가면 장뚝산(188m) 아래에 있는 안화리 암각화 앞이다. 동쪽으로 3km 떨어진 장기리에도 회천 옆에 암각화가 있는데 청동기에서 초기 철기시대 동일 집단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암각화는 육안으로는 겨우 알아볼 정도인데, 수천 년 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직접적인 흔적이라 감회가 크다. 물가 바위에 새긴 점으로 보아 수렵채집 시기에 풍요를 기원하던 제례용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오래 전부터 선주민이 살았다는 것은 이 땅의 특별함을 말해준다.

안화리 암각화는 마모가 심해서 육안으로는 알아보기가 어렵다. 오른쪽 아래 사각형 바위에 주로 모여있다 

회천 둑길을 따라가다 광주대구고속도로와 '대가야 고령' 입간판 전에 오른쪽 농로를 통해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 도로로 우회해야 한다. 고속도로 저편에는 강둑길이 없고 둔치 길은 수풀에 묻여 통행이 거의 불가능하다

억지로 돌파한 회천 둔치 길. 여기까지는 그나마 괜찮으나 이후에는 홍수에 길이 쓸려 나가고 잡초가 우거져 길이 아예 사라졌다. 오른쪽 언덕 위 도로로 미리 우회해야 한다    

안림천 둑길을 따라 회천으로 향한다. 회천변 둑길로 접어들면 광주대구고속도로가 강을 건넌다. 고속도로와 ‘대가야 고령’ 입간판 200m 쯤 전에 농로로 우회해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 좌회전해야 한다(지도 참조). 그대로 직진하면 회천대교 아래 둔치로 이어지지만 길이 홍수에 무너지고 수풀에 묻혀 통행이 거의 불가능하다(gpx 파일은 이쪽으로 되어 있으나 사전에 우회해야 한다).

내곡리의 작은 들판을 지나 속리로 넘어가는 속동고개 임도로 들어선다. 고개 높이는 165m밖에 되지 않으나 저지대 평지에서 시작해 꽤 높고 깊은 느낌을 준다. 지역에서 만든 자전거 코스가 지나고 ‘일월정 해맞이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고개를 내려서면 산줄기에 에워싸였지만 들판을 끼고 있어 아늑하고 여유로운 속리 마을이다. 독특하고 세련된 마을회관 건물이 단연 눈을 끈다. 그러고 보니 전국의 마을회관은 대체로 천편일률적인데 여기처럼 색다른 모습은 처음이라 더욱 눈이 간다.

속동고개(165m) 정상. '일월정 해맞이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노면이 좋고 아늑한 분위기의 속동고개길

 

속동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속리 마을. 세련된 마을회관이 인상적이다 

도진리 마을 언덕에 있는 남고정의 토담과 쪽문. 파동치는 토담이 정겹다  

속리에서 야정리 들판을 거쳐 회천을 건너면 우곡면소재지인 도진리다. 마을 뒤편으로는 청룡산(311m) 줄기가 길게 뻗어 있다. 산 너머에는 낙동강 본류가 흐른다. 도진리는 작은 마을이지만 고택과 정자가 있고 생활공간이 여유로워 오래된 마을 특유의 기품이 감돈다. 마을 뒤편 언덕에 고즈넉이 자리한 남고정(南皐亭)은 박응형(朴應衡, 1605~1658)이 1632년 예천에 처음 세운 것으로, 1963년 현위치로 이전했다. 차분한 조망과 작은 쪽문을 내느라 파동을 그리는 토담이 무한 정겹다.

이제 길은 포장되었으나 구절양장의 부례고개(140m)를 올라야 한다. 고갯길 도중에 북쪽 멀리 가야산(1433m)과 미숭산(755m)이 함께 보인다. 일대에서 가장 높아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가야산은 이름 그대로 ‘가야’의 산이고, 고대에도 신령시되었을 것이다.

높지는 않으나 경사가 심해 구절양장을 그리는 부례고개길  

부례고개 정상에서 바라본 낙동강. 바로 앞의 시설물은 자전거여행자 숙소인 '바이크텔'을 갖춘 부례관광지이고, 강 건너 도시는 대구 달성 구지면이다 

부례관광지 강변에 있는 낙강구곡 시비. 고령사람 박이곤(1730~1783)이 낙동강을 배로 여행하면서 주자의 무이구곡 운에 맞춰 낙강구곡을 지었다. 그 중 이 일대를 읊은 제1곡 

부례관광지 내에 있는 바이크텔. 아쉽게도 장기 휴장중이다. 운영 당시는 1박에 1만5000원이었다  

부례고개에서 본격적인 청룡산임도가 시작된다. 초기에는 낙동강 자전거길의 한 코스였으나 종주길이 낙동강 동안으로 지나면서 잊혀지고 있다  

부례고개 정상에는 임도가 지나는데 이 길은 한때 낙동강 자전거길의 한 코스였다. 오른쪽으로는 강변의 부례관광지까지 도로공사가 한창이고, 왼쪽은 임도 그대로 남아 있다. ‘바이크텔’을 갖추고 있는 부례관광지가 궁금해 공사 중인 도로를 내려간다. 하지만 부례관광지는 코로나로 인해 장기 휴장중이다(2022년 12월 현재). 캠핑장과 각종 레포츠시설을 갖춰 상당히 공을 들인 시설인데 외진 곳에서 휴장 중이니 유령도시처럼 더욱 삭막하다. 바로 아래로 낙동강이 흐르고, 건너편에는 달성의 낙동강 레포츠밸리가 보인다.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부례고개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도로공사 중이라 위험해서 완공 시까지는 이 길은 출입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제 국토종주길에서 특별한 임도코스로 알려진 청룡산 임도다. 부례고개에서 500m 가면 넓은 공터와 함께 청운각이 나온다. 전망대로 만들었을텐데 숲에 가려 조망은 신통치 않다.

임도는 가능하면 등고선을 따라가느라 좌우로 흔들리는 커브와 크지 않은 업다운이 연속된다. 가끔씩 조망이 트이면 낙동강과 달성 방면 산야가 펼쳐져 발길을 멈추게 된다. 그리 외진 곳이 아닌데도 주변에 마을이 없어 대단히 적요하다. 부례고개에서 개포리까지 임도는 7km 정도 이어진다.

청룡산임도 초입의 쉼터 겸 전망대인 청운각. 나무에 가려 조망은 시원하지 않다   

청룡산임도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맞은편 산은 달성 도동서원을 품고 있는 진등산(282m)이다 

길은 좋으나 민가가 멀어 심산의 느낌이 물씬한 청룡산임도 

남쪽으로 흘러가는 낙동강이 내려다보인다 

청룡산임도가 끝날 즈음 강 건너 멀리 대구의 명산인 비슬산(1087m)이 모습을 드러낸다 

개포리에서 강변으로 나서면 청룡산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개호정(開湖亭)이 있고 주변은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원래 개산포구(開山浦口)였으나 고려 때 몽골군 침략을 부처님의 가피로 막고자 강화도에서 제작한 팔만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길 때 이곳에 배를 대고 육상 운반을 시작해서 개경포(開經浦)가 되었다. 개호정은 고령현강 이형중(1745~1750 재임)이 축조했으며, 정자 아래에는 각종 배들이 오가는 포구로 물산이 오가는 장터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개호정 아래에는 특이한 비석이 하나 있는데, 앞에는 ‘천반좌(天磐座)’라고 새겨져 있고 일본식 훈독으로 ‘아마노이와구라’가 병기되어 있다. 비석 뒤편에는 서기 174년경 고천원에 살던 일본의 국조신 아마테라스오오미가미(天照大神)의 손자 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가 고천원을 떠나 일본으로 향할 때 이곳 바위에서 배를 탔다고 적혀 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대가야인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초기 국가를 건설한 것이 맞다면 이곳에서 배를 탔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개호정에서 1km 상류에는 별도로 개경포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팔만대장경을 옮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이운(移運) 행렬 조각상과 1237년 이규보가 구국을 염원하며 쓴 대장각판 군신기고문 기념비도 서 있다.

팔만대장경을 실은 배가 도착한 옛 개경포 언덕에는 개호정이 서 있다  

서기 174년경 고천원에 살던 일본의 국조신 아마테라스오오미가미(天照大神)의 손자 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가 고천원을 떠나 일본으로 향할 때 개경포에서 배를 탔다고 한다. 이를 기념한 비석이 서 있다  

개경포기념공원에 조성된, 팔만대장경을 옮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이운(移運) 행렬 조각상. 장경판을 머리에 인 여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개경포기념공원  

이제 읍내로 돌아가는 길이다. 개경포로를 따라 나지막한 열미재를 넘어 직리에서 다시 회천 강변으로 나가 둑길을 따른다. 맞은편으로 앞서 지나왔던 내곡리가 보이고, 토사가 쌓여 갈대와 잡초가 무성한 회천에는 짧은 동짓달 햇살이 어렸다.

광주대구고속도로가 지나는 회천대교 인근에 장기리 암각화가 있는데 안화리 암각화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그림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한국형 암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동심원과 석검 손잡이 형태인 검파형(劍把形) 그림이 여럿 보인다. 뭔가를 갈구하며 이런 그림을 새겼을텐데 당시에 가장 절박했던 것이 뭘까. 풍요와 다산일까 아니면 질병과 죽음 같은 원초적 절망의 해소일까.

이제 읍내가 가깝다. 회천 둔치에는 멋진 체육공원과 파크골프장,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고 노란색으로 칠한 우아한 현수교와 아치교의 복합교량인 대가야교(길이 305m, 자전거와 보행전용)가 걸려 있다. 대가야교를 건너 잠시 시내도로를 통과하면 작은 구릉지를 이룬 대가야궁성지에 도착한다. 구릉지 아래에는 성벽이 확인되었지만 정상부 평지가 길이 200m, 폭 50~70m로 좁아서 소규모 왕궁터로 추정된다. 지금은 고령향교가 들어서 있고 나머지는 잔디밭과 산책로가 있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주산에서 흘러내린 능선이라 만약의 경우 주산성으로 도피하기 쉬워 궁궐 입지로는 적당해 보인다.

늦은 오후 햇살이 비껴있는 회천 둑길 

장기리 암각화는 육안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동심원과 석검 손잡이 형태인 검파형(劍把形) 그림이 눈특히 눈에 띈다 

현수교와 아치교 복합교량인 대가야교(305m) 뒤로 주산과 지산동고분군이 보인다 

고령읍내 회천 둔치는 넓은 파크골프장과 자전거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대가야 왕궁터로 추정되는 언덕. 왼쪽에는 고령향교가 들어섰고 뒤쪽으로 주산성이 있는 주산이 가깝다. 비상시 주산성으로 도피하기 쉬운 입지여서 왕궁터로 적당해 보인다

궁성지 뒤쪽으로 주산체육관 옆으로 진입하면 주산성 가는 길이다. 경사가 매우 가파른데다 지산동고분군까지 보려면 자전거는 충혼탑 근처에 두고 도보로 다녀와야 한다.

잠시 숲길을 걸어오르면 거대한 주산성 성벽이 갑자기 시야를 가득 채운다. 석축이 허물어지긴 했으나 아래쪽 토축 부분까지 포함하면 10m가 넘는 엄청난 높이다. 주산 정상 일대에 쌓은 주산성은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1420m이다. 여기에 정상부만을 에워싼 내성 368m가 따로 있는 이중성이다. 성벽 바깥으로 돌출해 있어 성벽 아래의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치(雉)가 8개소, 건물지 8개소, 연못 2개소가 발견되었다. 축조연대는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며 백제, 신라에 못지않은 축성 능력으로 대가야의 역량과 위상을 말해준다. 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가파른 산세를 극복하고 이런 공역을 해낸 대가야인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다만 이 엄청난 유산을 수풀 속에 그냥 방치한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함안 성산산성처럼 성벽 주변의 수풀만 제거해도 원형이 한층 부각되고 보존에도 유리할 것이다.

대가야 지배층의 무덤인 지산동고분군은 주산성 최남단 성벽이 최고지점이다. 성벽 바로 앞에 있는 1호분이 가장 윗대의 선조 아닐까 생각해 본다. 주요 고분은 능선 위에, 능선 좌우의 중소규모 고분은 직·방계 왕족일 것이다.

아래쪽 토축과 석축을 합하면 10m를 넘어가는 거벽의 주산성. 그나마 성벽의 나무를 베어내어 원형이 드러났다 

지산동고분군은 주산성 남단과 바로 인접해서 시작된다(뒤쪽이 주산). 고도에 따라 윗세대부터 시작하는 배치가 아닐까 싶다  

능선을 따라 거대한 봉분이 도열해 있어 조망이 탁 트이고 규모감도 더해준다

고분군은 산줄기를 따라 장장 2km에 걸쳐 있다 

능선 아래의 중소규모 고분은 왕실의 방계나 귀족들 무덤일 것이다

고령읍내 뒤에 바로 붙어 있는 지산동고분군과 주산성. 미숭산(755m)과 가야산(1433m)이 외곽으로 보인다(안내판 사진)  

황혼의 지산동고분군은 실로 경이 그 자체다. 거대한 봉분들이 능선을 따라 아득히 도열한 모습은 단순한 장관이 아니라 고대 지배층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가 얽혀 있는 인간적 절대공간이다. 지난 1500년 간 이 모습을 유지했듯 앞으로 수천 년 간도 이 모습 그대로 전승될 것이다. 100년도 되지 않는 개인의 인생사는 짧고 허망하지만 특별한 죽음의 흔적과 상징은 이렇게도 장구하다.

지산동고분군은 5~6세기에 축조되었으며 대형고분은 10~40여명의 순장자를 함께 묻을 정도로 강력한 지배층임을 말해준다. 직경 20m 이상의 대형분만 72기가 있고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전체 고분 숫자는 200여기에 달한다. 고분에서는 백제, 신라, 일본 계통 유물이 출토되어 대가야의 활발했던 국제관계를 보여주고, 대가야 양식 귀걸이와 마구류는 지금도 일본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어 ‘고천원’과 더불어 대가야와 고대 일본의 특별한 관계를 엿보게 한다.

일몰을 등지고 하산하면서 등과 어깨에는 대가야의 엄청난 역사적 무게감이 짓누른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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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소개한 대로 안화리 암각화에서 내곡리 속동고개 방면으로 갈 때는 둑길을 따라 끝까지 가지 말고 광주대구고속도로 직전에서 농로로 우회전해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부례고개~부례관광지 간은 도로공사중이고 부례관광지는 장기 휴장 중이어서 코스에서 생략하는 것이 낫다. 읍내 외에는 도진리에 식당이 있다.

* 코스 gpx 파일은 자전거생활투어(www.bltour.net) 추천코스 중 '영남편'을 참조하세요 

고령 일주 5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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