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의 무기 ‘거북선’의 출전, 해전(海戰)의 판도를 바꾸다

- 사천∙당포∙당항포∙율포 해전 -

거북선이 처녀 출전하여 승리를 거뒀던 ‘사천 바다’. 거북선의 참전으로 해전의 페러다임이 바뀌게 되었다. ‘선진리 성’ 아래 바닷가에 세워진 ‘거북선’(용머리)이 430년 전에 있었던 전투를 기억하고 있다(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1592년 5월 7일∙8일에 실시한 ‘1차 출정’(옥포∙합포∙적진포해전)을 통하여 일본군과의 첫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구상했던 수륙병진전략은 전쟁 초기부터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수륙병진전략 : 육군이 지상으로 공격할 때 수군이 남해∙서해를 병행 전진하면서 전쟁에 필요한 물자∙병력을 지원해주는 개념)

이순신은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옵니다’로 시작하는 장계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을 올려 첫 출정에서 거둔 ‘승전보’를 ‘선조’에게 보고했다. 지상전에서 참패 소식만 듣던 조정은 처음 접하는 ‘승전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들이 언제 국왕을 쫓아 몰려올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받은 승전보라 더욱 귀하게 여겨졌다.

‘1차 출정’에서 돌아온 이순신으로서는, 서전(緖戰)에서 참패한 일본군의 다음 기도가 과연 어떻게 될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선은, 첫 싸움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으로서는 ‘만회’를 위한 ‘복수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었다. 서전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1차 출정을 통한 교전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증강된 모습으로 나올 것이다. 그때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가 될 것이다. 그 다음의 목표는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전라도 쪽’ 바다로의 진출을 계속 시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려 때부터 연안을 침범하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설치한 군항시설 ‘사천 대방진 굴항’. 임진왜란 때 수군기지로 이용하였으며, 전선(2척)과 수군을 배치했던 곳이다(사천시 대방동)

1차 출정에서 복귀한 후의 활동

‘제1차 출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본영으로 복귀한 이순신 함대는 당장 내일이 될지도 모를 다음 출정을 염두에 두고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낯선 경상도 바다에서 10여 일 동안의 전투를 치루며 쌓인 전투피로를 씻고, 재충전하는데 집중해 나갔다. 전투 후의 가장 큰 보상은 적절한 휴식의 보장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는 한편, 1차 출정 중 전투 간 미흡했던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보강 훈련’을 실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번 출정에서는 ‘거북선’이 처녀 출전하는 만큼 실전을 방불케 하는 ‘합동훈련’을 통해 전투 절차를 숙달해야만 했다.

1차 출정 때보다 더 강한 모습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본 수군을 전라좌수영 함대 전력만으로 대적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수의 ‘함선’을 동원하여 세력(勢力)을 확충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1차 출정 때 합류했던 경상우도의 원균 함대(판옥선 4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전라우도 수군의 합류가 필수적인 것으로 결론짓고, 긴밀한 협의를 통해 동반 출정하기로 ‘확답’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 출정에서는 1차 출정에 비해 보다 웅장한 모습의 ‘연합 함대’를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아울러, 무엇보다도 총통(銃筒) 공격에 필요한 ‘화약’과 ‘활’을 우선적으로 준비하고, 일정 기간 동안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적절한 양’의 식량 등의 보급 물자를 확보해야만 한다.

정유재란 당시(1598년 9월) ‘조∙명연합군’이 ‘사천읍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성을 탈환했다. 이후 ‘선진리 성’으로 공세를 이어간 조∙명연합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참패했다(사천읍 선인리)

현재의 임진왜란 전체 전황(戰況)은 이렇다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하기 이틀 전(1592년 4월 30일) 새벽에 시작된 국왕(선조)의 몽진 행렬은 5월 1일 ‘개성’에 도착했고, 사흘 후 ‘개성’을 떠난 몽진 행렬은 조선 수군이 ‘옥포’에서 첫 승전고를 올린 5월 7일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 도착한 국왕과 조정은 일본군의 ‘진출(추격)’ 상황 파악에 관심을 집중하며 계속 전쟁을 지휘해야만 했다.

부산에 상륙한지 20일 만(1592년 5월 3일)에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당황스런 상황을 맞았다. 한양을 점령하여 조선 ‘국왕’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전쟁을 끝내리라 생각했는데, 국왕 선조가 한양을 떠나 몽진 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일본군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후, 도주 중인 국왕을 잡기 위해 평양 쪽으로 숨 가쁜 ‘추격전’을 전개해 나갔다. 

당항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선두에서 일본군의 진형의 균형을 와해시키고 전선 파괴를 주도했던 돌격대장 ‘거북선’

선조를 추격하던 ‘일본군’(1∙2군)은 ‘임진강’에서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됐다. 일본군의 ‘도강’(渡江)을 저지하기 위해 도하 때 활용할 수 있는 선박은 물론 목재들을 제거한 상황이라 양국 군대는 기나긴 ‘대치’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양국군의 팽팽한 대치는, 일본군이 한양을 점령한 날로부터 거의 ‘한 달’(23일)이 지난 5월 26일이 되어서야 ‘임진강 방어선’을 넘어설 수 있었다(이는,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한양을 점령하는데 20일 걸린 것에 비하면 엄청난 기간이 아닐 수 없다).

임진강을 돌파하여 ‘선조’를 추격하는 일본군은 후방 보급기지인 ‘부산’으로부터의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보급 추진 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로써 임진강 이북으로 진출하는 일본군의 공세작전은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시도한 일본군의 ‘서해 바다로의 진출’은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 의해, 또한 낙동강을 이용하려던 ‘수운(水運)’은 들불처럼 창의한 ‘경상도 의병’들의 게릴라전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순신의 2차 출정 : 1592. 5. 29 ~ 6. 10

조선 수군의 2차 출정

임진강을 넘어 평양을 향해 진격의 속도를 높이던 일본군은 남쪽에서의 큰 저항(‘수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인해 전쟁 수행능력은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일본군의 확실한 방법은 육군과 수군이 ‘합동작전’으로 전라도를 수중에 넣는 것이다. 일본군이 전라도를 확보할 경우 곡창지대의 풍부한 물자를 확보함으로써 보급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전쟁 배후기지를 없애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일본 수군은 지난 5월 초(조선 수군의 1차 출정)에 치른 세 번의 전투에서 참패당했다. 하지만, 안정된 보급로 확보를 위해서는 희생이 따르더라도 또 다시 조선 수군과 일전을 치르지 않을 수 없게됐다. 

‘선진리 성’과 ‘사천 선창’에 정박 중이던 왜선에서 저항하던 일본군을 격파한 ‘사천해전’ 후 물러나서 숙영했던 곳 ‘모자랑포’(사천시 노룡동)

6월 4일에 전라우수영 함대와 함께 경상도 바다로 출정하기로 확정한 후 출전준비에 매진 중이던 5월 27일, 경상우수사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급보’가 왔다. ‘왜선 10여척이 사천과 곤양 일대에 출현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천’ 일대에 일본군이 나타났다면 보통 상황이 아니다. ‘1차 출정’이 끝나고 조선 수군이 물러난 경상도 바다를 일본 수군들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야금야금 서진해 온 것이다.

‘사천’이라면 경상도 바다의 서쪽 끝으로 여수의 좌수영 본영까지 너덧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다. 이곳에 일본군의 ‘기지’가 구축된다면 ‘여수’는 물론, ‘전라도’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출발진지’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육상 접근로를 이용하여 전라도로 진출을 기도하려는 일본군을 저지할 수 있는 핵심 거점인 ‘진주’가 15km 남짓한 거리라 ‘급소지역’이 아닐 수 없다.

상황의 심각성을 판단한 이순신은 출정을 서둘렀다. 전라우수영 함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5월 29일 전라좌수영 단독으로 출동하기로 했다. 남해 ‘노량’에서 경상우수영(원균) 함대를 만나 곧장 사천만으로 기동해갔다.

 

< 사천 해전 >

사천만 입구에 당도하여 확인한 결과 왜군들이 ‘사천 선창’에 정박한 채 ‘왜성’을 쌓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저지로 일본군의 ‘서해 진출’이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자, 일본군은 이를 타개하기 위한 ‘거점’으로 운용하기 위해 ‘왜성’을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진리 성(천수각. 충령비) : 신라 말 고려 초에 쌓았던 ‘토성’이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쪽’으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이 이곳에 상륙하여 ‘기지’를 설치했다. 선진리 성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의 ‘사천해전’에서 패배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은 기존의 토성에 ‘왜성’을 쌓았다. 1598년 10월 조.명연합군이 선진리 성을 공격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왜성의 제일 높은 곳에 사령부 격인 ‘천수각’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천수각이 있던 곳에 ‘충령비(忠靈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6.25전쟁 발발 때부터 1958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간 산화한 66명의 영령과, 2003년까지 공군 사천기지에서 임무 수행 중 순직한 47명의 영령을 추가 봉안하여 113명의 영령을 모시고 있다(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이순신 함대가 ‘사천만’으로 접근하려 했으나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포구가 좁고 조수가 ‘썰물’이어서 선체가 큰 ‘거북선’과 판옥선 등의 작전 전개가 용이하지 않았다. 자칫 개펄이나 암초에 얹힐 수 있는 형국이었다. 이순신 함대는 후퇴하는 채 하며 왜선을 ‘사천만’ 한 가운데 넓은 곳으로 유인하여 전투를 펼치려했으나 일본군이 말려들지 않았다. 일본군의 절반은 배에 승선한 채, 나머지는 절벽 위에서 조총을 쏘면서 조선 수군에 대항했다. 그러나 조총의 사거리를 벗어난 상황이라 조선 수군에게는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한참을 대치하다, 조수(潮水)가 ‘밀물’로 바뀌어 바닷물이 ‘선창’ 방향으로 흐르면서 조선 수군은 포구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이순신 함대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돌진해 들어가자, 왜군도 조선 수군에 대응하여 돌진해왔다. 조선 수군은 일차적으로, 처녀 출전하는 비장의 무기 ‘거북선’을 투입하여 ‘총통 공격’을 가하여 적의 진형을 ‘와해’시킨 다음, 전 함대를 돌진시켜 총통과 불화살 공격을 가하여 왜선을 모두 분멸하면서 전투는 쉽게 끝이 났다. 일부 왜군들은 육지로 도주했다. 

사천에 ‘전진기지’를 설치하여 ‘전라도 쪽’ 바다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기도를 분쇄한 ‘사천해전’. 이를 기리기 위한 ‘이충무공 사천 해전 승첩 기념비’

이로써 2차 출정 첫 번째 전투인 ‘사천해전’에서 왜선 13척을 격파하고 2,600여 명을 사살한 승전보를 올렸다. 하지만, 전투 중 왜선에서 쏜 ‘조총’에 의해 이순신과 군관 나대용이 총상을 입었고, 다수의 사수와 격군들도 부상을 입었다.

사천 바다에서 전투가 끝난 다음 날(6월 1일),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 연합함대는 남해도 옆 ‘사량도’(통영 사량면)에 정박하여 함대를 재정비하면서 주변에 대한 ‘수색작전’을 전개했다.

이와 같이 일본군이 수륙병진으로 전라도를 향하는 데 대한 적극적인 대응에서 시작된 제2차 출정은, ‘사천’에서 시작하여 함대를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일본 수군을 격파해 가는 작전을 펼치게 된 것이었다. 

‘사천해전’ 후 왜적을 찾아 동진하던 전라좌수영함대가 정박하며 전투를 준비했던 ‘사량도’(통영시 사량면 )

 

< 당포 해전 >

사천해전을 끝내고 ‘사량도’에서 부대를 정비하며 이틀 간 휴식을 취한 이순신 함대는 동쪽으로 기동을 시작했다. 전라도 바다를 넘보는 적을 한 발이라도 더 동쪽으로 나아가서 막기 위해 ‘수색’과 ‘격멸’을 병행하며 부산 쪽으로 기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쪽으로 기동하던 6월 2일 아침, ‘당포’(통영 산양읍)에 왜선이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포’는 통영 미륵도 서쪽에 위치한 포구로, 통제영 직할의 ‘만호진’이 있던 곳이다. 전라도 쪽에서 경상도 바다로 진출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간 기착지’이기도 하다. 포구 일대의 수심이 깊고, 크고 작은 섬으로 둘러싸여 외해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천혜의 항구이다. 

‘당포해전’이 있었던 ‘당포항’과 ‘당포성지’. 섬들로 완전히 둘러싸인 천혜의 기지다. 전적지라기 보다는 ‘명승지’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답다. 이곳 당포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영 함대’와 합류해 ‘연합함대’를 구성했다(통영시 산양읍)

‘당포’를 점령한 왜군은 여타 포구∙선창에서와 같이 일부 병력이 전선을 지키는 가운데, 대부분은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거북선’까지 편성된 강력한 함대로 정박 중인 왜선에 대해 정면 승부를 실시하기로 했다. 거북선을 초전에 투입하여 적선 중에서 가장 화려하게 치장한 ‘대장선(안택선)’을 집중 공격했다. 적의 ‘허(虛)’를 찌른 작전으로, 이는 거북선이 있어서 가능한 작전이었다.

일본군은 근접전을 벌이며 조선 함선에 ‘등선’하려 시도했지만, 거북선을 이용한 선제공격으로 인해 일본 ‘대장선’이 침몰하고 대장의 ‘목’까지 내걸리면서 전투는 결판이 나고 말았다. 대장의 전사로 인해 전의(戰意)를 잃은 적들은 전투를 포기하고 육지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주한 많은 일본군들이 조선 백성들에게 저지를 만행이 어떨지 그게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당포해전이 마무리될 즈음에 ‘일본군 대선 20여 척이 거제도로부터 당포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전투 중인 이순신 함대의 배후를 칠 의도였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당포에서 왜선과의 전투를 끝내고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이순신 함대를 보고는 오던 길을 돌려 도주하고 말았다. 

‘당포해전’ 후 물러나 하루를 정박하며 왜적을 찾아 동진할 준비를 한 ‘고둔포’ 앞 바다(통영시 산양읍)

당포해전 후 이순신 함대는 당포 북쪽(고둔포 ; 통영 산양읍)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6월 4일 일본함대를 찾아서 수색하면서 동쪽으로 기동하기 시작했다. 동진하던 중간에, 2차 출정에 동참하기로 약속했던 ‘전라좌수영 함대’(판옥선 25척)를 당포 앞바다에서 만나 합류했다. 실질적인 ‘연합함대’가 구성된 것이다.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아닐 수 없다. 단번에 50척이 넘는 대 함대가 꾸려지고 의기양양하게 적을 찾아 ‘동진’을 계속할 수 있었다.

 

< 당항포 해전 >

동진을 계속하던 6월 5일, ‘거제’ 백성들로부터 ‘당포 일대에서 이순신 함대에 쫓긴 왜선들이 고성 땅 당항포에 정박하고 있다’라는 첩보를 받고, 단걸음에 당항포로 달려갔다.

적이 있다는 ‘당항 만’은 폭이 좁고 길이가 매우 긴 특이한 지형이라 궁금한 것이 많다. ‘만’ 안에 있는 왜적이 어느 규모인지, 연합함대가 ‘만’ 내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 ‘정찰선’을 투입했다. 투입한지 한참이 지나 ‘신기전’ 신호가 올라오자, 만약의 경우에 대비할 수 있는 ‘경계부대’를 ‘만’ 입구 바깥에 배치한 다음 연합함대는 ‘당항만’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정찰 결과 ‘만’의 전체 길이는 15km 정도이고, ‘폭’은 넓은 곳이 약 2km이지만 제일 좁은 곳인 ‘만’ 입구는 300m가 될까 말까할 정도였다) 

임진왜란 중 두 차례의 해전을 통해 왜선 ‘57척’을 전멸시킨 것을 기념하고 있는 ‘당항포대첩기념지’. 전승기념비와 기념사당(숭충사), 기념관, 거북선 체험관 등이 있다. 인접하여 다목적 관광지인 ‘당항포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고성군 회화면)

‘당항 만’ 내에는 ‘아다케(안택선)’ 4척을 포함하여 26척의 왜선이 정박해 있었다. (군대는 항상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여 퇴로를 갖추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일본군이 서쪽으로 진격할 요량이었다면 ‘통영, 고성’ 쪽으로 진출해야 했을 텐데 왜 ‘퇴로’가 막힌 깊숙한 ‘만’ 안에 있게 됐는지 알 수 없다. ‘당항포’가 사천, 당포와 같이 해전을 치루거나 ‘전진기지’를 건설할 정도의 요충지는 아닌 것이다. 혹, 전해오는 ‘월이 설화’와 같이 ‘당항 만’에서 ‘고성 만’까지 물길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들어왔던 것은 아닐까)

연합함대가 당항 만 내의 일본 함대 쪽으로 접근해 가자 왜군들이 즉각 응전해왔다. 응전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해야 ‘활’과 ‘조총’이 전부였지만. 이순신도 ‘총통’ 공격은 자제한 체 ‘활’로만 왜군에 대응하게 했다.

왜군들이 조선 수군을 향해 조총, 불화살을 쏘며 공세를 가해오자, 조선 수군은 ‘퇴각 명령’을 내려 물러나게 했다. 왜선들이 정박하던 곳이 ‘민가’와 가까워 백성들의 피해 발생을 감안하여 왜선들을 보다 넓은 곳으로 ‘유인’한 것이었다. 이순신의 의도대로 왜선들이 조선 수군을 따라 ‘만’의 넓은 곳까지 나오자마자 총통공격을 가하면서 ‘반격작전’을 감행했다.

‘거북선’이 적 대장선을 맡아서 제압함은 물론 진영을 흩트리고, 전라좌수영 세력까지 증강된 ‘연합함대’의 총 공세로 인해 순식간에 전세가 반전되었다. 당항 만 내에 있던 왜선이 모두 격멸되면 서 전투가 종결됐다.

전투가 종료되자, 생존한 왜군들이 육로를 이용해 후퇴하면서 조선 백성들에게 저지를 ‘만행’을 막기 위해 전선 1척을 ‘만’에 남겨놓은 채 퇴각했다. 생존한 왜적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남겨둔 전선을 타고 다음날 새벽 ‘당항 만’ 입구로 빠져나오다가, 매복해있던 조선 수군에 의해 전원 수장되고 말았다. 이로써, 전라우도 이억기 함대가 합류하여 명실공이 ‘조선 연합함대’를 형성한 후 치른 최초의 전투인 ‘당항포해전’에서 왜선 26척 모두를 격침하고 2,720명을 사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항포 해전 관련 영상물과 각종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는 ‘당항포해전관’. 입구에 ‘이순신’과 ‘월이’ 모형이 나란히 서서 방문객을 맞는다. 기생 ‘월이’가 임진왜란 전, 당항포 지역을 정탐하러 온 ‘밀정’의 ‘지도’를 조작한 결과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이 퇴로가 없는 이곳 당항만으로 들어왔다가 조선 수군에게 참패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 율포 해전 >

당항포 해전에서 승리한 연합함대는 6월 7일 ‘부산’ 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던 중, 가덕도 일대에서 정탐하던 척후선이 돌아와서 보고를 했다. ‘적 소형 선박을 만나 추격하여 승선했던 왜인 3명의 목을 베고 배를 격침시켰다. 그런데, '우수사의 군관이 수급 1개를 강제로 빼앗아 갔다’고 했다. ‘척후병’들에게 ‘술’을 먹여 격려한 다음 돌려보냈다. (이 내용은 이순신이 임금께 올린 장계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후일, 이순신과 원균 간 갈등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동진을 계속하던 연합함대가 거제도 북단 ‘영등포’(거제시 장목면)에 도착했을 때, ‘율포’(거제 장목면)에서 나와 부산으로 향하던 왜선 7척을 발견하여 역풍을 뚫고 노질을 재촉하여 따라잡았다. 왜선들은 배에 실었던 물건들을 바다에 버리고 육지로 도망하므로 빈 배를 모두 격침시켰다. 수급도 30여 개를 베었다. 

2차 출정 마지막 해전 ‘율포해전’이 있었던 포구에 인접한 ‘구(舊) 율포진성’. 조선 초기에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율포진’이 있었던 곳이다

이후, 연합함대는 부산 쪽의 가덕도 일대는 물론 부산포에 가까운 ‘몰운대’(부산 사하구 다대동)까지 진출하며 수색했으나 왜선을 찾지 못하였다. 연합함대는 오랜 출동∙전투로 인해 군사들이 매우 지쳤고 다친 자들도 많으며, 배후인 양산강(낙동강) 깊숙한 곳에 배치된 왜선으로부터의 공격 가능성 등을 감안하여 철수하기로 한다.

연합함대는 정탐선을 운영하여 진해만 일대에 대한 수색활동을 강화하며 거제도, 당포를 거쳐 남해 ‘미조항’에 도착한 다음 진(陳)을 파하고 각 본영(本營)으로 복귀했다. 

2차 출정에서 완승을 이룬 연합함대는 이곳 ‘남해 미조항’에서 각 수영으로 복귀했다. 이곳은 ‘국도 3, 19호선’의 출발점이다

 

참고#1. 처녀 출전한 거북선에 대하여...

임진왜란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많겠지만, ‘거북선’도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거북선은 15세기 초반 태종 때 창안했던 ‘귀선’(龜船)을 참고하여 제작한 특수 목적의 선박이다. 제작 목적은 무엇보다 일본군의 ‘등선육박전술’을 불가능하게 하여 함선 내의 병력을 보호하고, 왜선에 최대한 접근하여 ‘근접전투’를 실시하여 ‘포’의 명중률을 높이고 적의 진형을 흩트리기 위해 만든 선박이다. (거북선은 ‘돌격선’으로 활용하여 적의 진형을 흩트리고 적의 선봉∙대장선을 공격하는데 주로 운용했고, 왜선들을 섬멸(殲滅)하는 임무는 주로 ‘판옥선’이 수행했다. 태종 때의 ‘귀선’은 ‘맹선’(1층 갑판 구조)을 기본으로 했지만, 거북선은 ‘판옥선’(2층 갑판 구조)을 기본으로 건조된 함선이기에 1.5배 정도로 크고 화포까지 장착했다)

난중일기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발발 이틀 전, 일본군이 대한해협 바다를 건너 접근해오던 1592년 4월 12일에 완성됐다(전라좌수영 관할 선소에서 3척의 거북선이 건조됐다). 이렇게 완성된 거북선은 ‘제1차 출정’(옥포∙합포∙적진포해전) 때에는 참가하지 않았고, ‘제2차 출정’(사천∙당포∙당항포∙율포해전) 때부터 참가했다. ‘사천해전’에 처녀 출전하여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임진왜란 당시 운용했던 ‘거북선’.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당시 실제 해전에서 활용한 임진왜란기 거북선이 공개됐다(2022. 12. 6). ‘이충무공전서(1795년)’에 있는 ‘통제영 귀선’을 근거로 하고, 충무공의 ‘장계’(당포파왜병장, 1592년), 충무공의 조카 이분이 쓴 ‘행록’ 등 각종 사료와 문헌을 참고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모습으로 건조했다고 한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용두’이다. 종전은 ‘긴 목’에 용머리가 달려 선체보다 높았으나, 새로 건조한 거북선의 ‘용두’는 ‘뱃머리’ 부분에 일자형이고 용두에서 ‘총통’ 발사까지 가능하다(종전의 거북선은 총통 발사 불가. 연막만 발사 가능). 거북 ‘등’에 해당하는 개판(덮개)은 철갑 대신 목판으로 대체되고 ‘철첨(쇠못)’을 꽂았다. 종전의 거북선과 비교가 된다. 해군사관학교에 정박 중이다.

거북선이 완성됐다고 하지만 곧바로 ‘전투(작전)’에 투입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북선을 운용할 요원들을 선발하여 운용∙조함술을 익히고, 포사격 훈련을 포함한 제반 훈련을 실시함은 물론, 무장(武裝)과 필요한 군수물자도 확보하는 등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절차는 오늘날에도 유사하게 이뤄지고 있다. 함정은 ‘진수식’을 통해서 함정의 외형적인 모습은 갖추지만 곧바로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수식을 마친 후에도 대략 1년 내∙외의 ‘전력화(戰力化)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전력화 기간 동안에는 ‘인수∙평가팀’을 운용하여 함 승조원의 편성, 직책∙부서별 교육훈련(사격, 기동훈련 포함), 운용자(해군) 입장에서의 점검 및 하자(瑕疵) 정비∙보수 등을 실시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다음 ‘취역식(就役式)’을 해야만 정식 함정이 되고 작전에 투입하여 임무를 수행할 할 수 있게 된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건조한 다음, 작전에 투입하는 과정도 오늘날의 절차와 거의 유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월 12일에 건조한 거북선을 5월 29일부터 시작된 ‘제2차 출정’에 투입해 조선 수군의 ‘주역’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한 것이다.

거북선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 거북선을 ‘철갑선(鐵甲船)’으로 오인하고 있는데 분명한 ‘목선(木船)’이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국내 어느 자료에도 철갑선으로 기록된 곳이 없다’라고 한다. ‘철갑선’이란 명칭의 사용은 ‘일본’ 쪽에서 나왔을 것이라 얘기한다.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다음, 그 이유를 보고하면서 ‘엄청난 배’ 때문에, ‘불가항력적’이었음을 밝히는 과정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많은 영화에서처럼 적선을 ‘충돌∙격침’시키데 활용한 전선은 아니다.

      당항포대첩 기념탑 전면에 함께 세워진 ‘조선 수군 상(像)’. 23전 전승(全勝)의 주역이었다

 

참고#2. 임진왜란 당시 전공(戰功)은 어떻게 평가하였나

조선 수군의 ‘제2차 출정’을 끝낸 후 선조에게 올린 이순신의 장계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1592. 6. 14)에 ‘가덕 바다 가운데서 왜인 3명의 수급 중 1급은 경상 우수사 군관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소선을 타고 강제로 빼앗아 갔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더 많은 수급을 차지하기 위해 다퉜다는 것이다. 당시 적군의 ‘수급’은 전투 중의 ‘전공(군공)’을 증명하는 최고의 물증이라, 전투 중 하나의 수급이라도 더 얻기 위해 ‘혈안’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관행’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 자료인 ‘난중잡록’(1592. 남원 의병장 ‘조경남’)에는 ‘각기 힘써서 왜놈을 베어 공을 바치라. 왜장(倭將) 한 놈을 베는 자는 신분은 물론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시킬 것이오, 머리 한 개를 베는 자는 공신이 되고...(후략)’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임금이 전지(傳旨)를 내려, 적의 머리 숫자로 군사의 공로를 평가한다는 포상기준을 공포하자, 굶주린 백성이나 도망갔다 돌아온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 적의 머리라고 속여 바치고 관직이나 상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라는 기록도 있다. 이런 분위기로 말미암아, 전투에 임하는 장졸들은 전투는 뒷전이고 적의 수급(머리)을 베는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어 전투에 미친 영향이 많았다고 한다. 

일본 교토에 있는 ‘코(귀)무덤’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전공’의 표식으로 ‘목’ 대신에 베어간 조선∙명나라 군사와 조선 백성의 코(귀)를 묻은 곳이다. 조선인 2만 명 이상, 명 군사 수백 명에 해당되는 분량이란다. ‘코(귀) 무덤’은 교토 외에도 후쿠오카 현, 오카야마 현에도 있다고 한다. 타국(他國) 사람들에게 일본인의 야만성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설명은 일본어와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고, ‘영어’로 된 설명은 아예 없다

‘제1차 출정’의 진행 경과를 국왕(선조)에게 보고한 장계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1592.5.15.)에는‘왜선 40여 척을 불태워 없앴으나, 머리를 벤 왜적은 단지 2급뿐입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왜선 40여 척을 불태웠는데 수급이 ‘2급’이라면 궁금할 수밖에 없다(당시 사살된 왜군은 7,000명 이상이었다).

이러던 것이 ‘제2차 출정’ 때 벤 일본군의 ‘수급(首級)’ 수는 ‘1차 출정’에 비해 급증했다.(사천해전 - ‘적의 머리를 많이 베었다.’ 당포해전 - ‘왜장을 포함하여 7급을 베었다.’ 당항포해전 - ‘왜장을 포함하여 50여 급을 베었다.’ 율포해전 - ‘40여 급을 베었다’)

1차 출정 이후 원균은 싸움터마다 쫓아다니며 죽은 적병의 수급을 베는 일에 집중했다고 전한다. (‘당포파왜병장’에 의하면 ‘당항포 해전에서 왜선을 공격할 때 원균과 남해 현령이 뒤쫓아 와서 물에 빠진 왜적을 찾아 머리 50여 급을 벴다’라는 기록이 있다. 사천해전에서도 이와 유사한 행동이 있었다)

반면, 이순신은 휘하 장졸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너희는 적의 수급을 베기 위해 노력하지 마라. 적의 배를 1척이라도 더 부수고 적군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노력하라. 너희들의 공로는 내가 다 보고, 알고 있노라.’라고 매 전투시마다 강조했다 한다. 이순신은 휘하 장졸들이 어떻게 전투에 임했는지를 ‘장계’를 통해 매우 소상하게 선조에게 보고했다(옥포해전의 유일한 부상자에 대해, ‘순천의 궁수 ‘이선지’로 팔에 부상을 입었다’처럼 전투 중 장졸들의 공적을 ‘실명(實名)’을 포함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있어 매우 신뢰할 수가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올린 장계에 비해 매우 세부적이고 ‘분량’이 길었다.

전투 중 죽은 적의 목을 베는 것은 분명 전투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 할 수 있지만, 당시까지도 이러한 행위는 ‘관행’으로 통했다. 2차 출정 때 ‘원균’은 물론 ‘이순신’도 많은 수의 수급을 벴다라고 기록은 전한다. 이렇게 ‘제2차 출정’ 중의 전투에서 ‘수급’의 수가 급증한 것이 난중잡록의 기록처럼 선조가 ‘수급’을 강조한 시점과 연관성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조명군총(朝明軍塚)과 이총(耳塚). 정유재란 때(1598년) 선진리 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공격하던 ‘조∙명연합군’ 병영 내 화약고 폭발로 인해 화재가 일어나면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참패했다. 왜군은 ‘전공’을 보고하기 위해 전사한 군사들의 귀와 코를 베어 일본으로 보냈다. 전투 후, 귀와 코, 목이 베어진 전사자들을 수습하여 한데 모아 만든 집단무덤이 ‘조명군총’이다. 1992년 4월 사천시는 이역만리에서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고자 교토에 있는 ‘이총’의 흙 일부를 가져와서 ‘조명군총’ 옆에 안치한 것이 ‘이총’이다

  

참고#3. 낙동강 ‘수운(水運)’을 차단한 경상도 의병의 활동

임진왜란 중에 있었던 ‘의병’의 기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의병’의 뿌리는 매우 깊다. 백제∙고구려의 부흥군이나 고려 때 거란∙몽골과 맞서 싸운 ‘초적’들도 의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은 물론 구한말까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에는 항상 ‘의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들이 창의했다. 경상우도 지역 의병(곽재우.정인홍.김면 등)은 임진왜란 내내 ‘향토방위’에 충실하며 가장 많은 전투를 치러 많은 전과를 세웠다. 호남(전라도)과 호서(충청도)의 의병(고경명, 김천일, 조헌 등)들은 관군이 활약하는 지역에서 창의한 관계로 ‘근왕(勤王)’이라는 대의, 국왕에 대한 강한 충성과 명분을 중시한 활동을 했다. 그 외에도 ‘북관대첩’을 성공한 함경도의 의병 ‘정문부’가 있는가 하면, 호국불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큰 역할을 했던 ‘의승군’(義僧軍)도 있었다(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대사 등).

임진강을 지나 평양으로 북상하던 일본군은 보급선(線)이 길어져 작전수행 상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마차에 의존하는 ‘육로’ 보급 추진 방법은 애로점이 많아, 보다 안전하고 많은 물량을 빨리 수송할 수 있는 ‘해로(海路)’와 ‘수로(수운.水運)’를 이용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남해와 서해를 돌아 ‘해로’로 북상하려던 일본군의 기도는 ‘수군’에 의해 초기부터 좌절되고 말았다. 차선책으로, ‘내륙의 수운’을 이용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일본군의 후방 보급기지인 ‘부산’으로부터 문경에 이르는 ‘낙동강’이 경상우도 의병의 작전무대가 된 것이었다.

조선의 의병은 일본군에 비해 병력도 많지 않고 무기도 보잘 것 없는 수준이라(‘활’이 최고이고 괭이, 도끼 등의 농기구와 죽창 등) 전투력이 약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 지역에 오래 살아 현지 사정에 훤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의병들은 매복과 기습 등 ‘비정규전’ 방식의 전투를 통해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적에게 최대의 피해는 가할 수 있었다. 

의병의 고장 의령 입구 ‘의령관문 공원’ 일대. 이곳에서 남강을 건너려던 왜군을 맞아 싸운 ‘정암진전투’가 있었다. 홍의장군 ‘곽재우장군’ 동상과 남강을 끼고 조성된 성곽이 난공불락이었을 것 같다(의령읍 정암리)

 

낙동강 유역에서 있었던 의병의 주요 전투는 ‘기강전투’(5월 18일. 의령군 지정면), ‘정암진전투’(5월 18일. 의령군 의령읍), ‘무계전투’(6월 6일. 고령군 성산면) 등이 있다. 낙동강을 이용해 ‘수운’을 시도하는 일본군의 보급선단을 공격하여 병력을 사살하고 선박을 파괴하거나 탈취하기도 했다.

강물 수면 아래 ‘말뚝’을 박아놓아 일본 선단의 항행을 막고, 강변에 매복한 의병들이 기습 공격으로 선단을 타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또한, 일본군이 안전한 도강지점으로 선정해 설치한 ‘표시 말뚝’(조선 포로로부터 알아낸 안전한 장소에 설치)을 ‘위험지역’(늪지대와 수심이 깊은 지역)으로 옮겨 설치하고, 그곳으로 일본군을 유인하여 매복한 의병들이 공격하여 격퇴했다. 낙동강과 남강을 연한 여러 곳에서

일본군의 발목을 잡았다.

이렇듯 왜란 초기 전국적으로 창의한 ‘의병’들은 많은 전투에서 전과를 올려 임진왜란 전투에 크게 기여하였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의병 부대들을 재편하여 관군에 ‘편입’함으로써 관군의 전투 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명군(明軍)’이 참전하고 ‘관군(官軍)’이 제 기능을 갖추게 되면서, 의병들은 ‘전투 임무’에서 ‘후방지원 임무’로 전환되는 등 ‘의병’의 역할과 기능이 점차 약화되어갔다.

 

참고#4. 2차 당항포해전 (1594. 3. 4 – 3. 5)

전쟁이 일어나고 한 해 뒤인 1593년 4월부터 조선과 명(明), 일본 사이에서는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 수군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해상작전은 계속되었다.

‘마동방조제’에서 보는 당항포 해전지 ‘당항 만’ 끝단. ‘월이’ 설화에 의하면 저 멀리 ‘고성 만’과 이곳이 물길로 연결됐다고 했다. ‘당항 만’이 워낙 깊어(약 15km) 중간에 있는 ‘마동방조제’가 남북을 연결하고 있다

1594년(선조 27년) 3월 3일, 일본의 군선이 ‘당항포’ 일대로 향한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삼도수군통제사)은 함대를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였다. 이순신은 ‘견내량’에 전선 20여 척을 남겨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고, 칠천도(거제도) 주변 바다에 ‘학익진’을 펴 왜선의 당항포 쪽으로의 진로를 봉쇄한 상태에서 ‘어영담’을 인솔 장수로 삼아 전선 30척을 ‘당항포’ 지역으로 급파했다.

어영담의 정예함대는 당항포로 기동하는 중간에 만난 왜선 10척을 격파하였다. 당시 ‘당항 만’에는 21척의 왜선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왜군들은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육지에 올라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은 효율적인 ‘수∙륙합동작전’을 위해 ‘육군’의 지원을 독촉하는 공문을 보냈다.

육군으로부터 소식이 없자, 3월 5일 어영담이 이끄는 군선을 당항만 안으로 진격하게 하였으나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주한 뒤였다. 이순신함대는 정박하고 있는 왜선 21척을 모두 불태우고, 모든 출동 병력을 모아 바다를 가득 메운 채 위력을 과시한 뒤 본영으로 되돌아왔다.

‘바다와 육지에서 서로 호응해 한꺼번에 합동으로 공격했다면 거의 다 죽여 없앨 수 있었다. 서로가 멀리 떨어져 있어 쉽게 소통하기 어려워 새장 속에 같인 ‘적’을 완전히 붙잡지 못해서 아주 원통하고 분했다’라고 장계 ‘당항포파왜병장’(唐項浦破倭兵狀. 1594. 3. 10)에 전한다.

 

2차 출정의 전승(戰勝)이 남긴 것....

‘2차 출정’에 조선 수군의 비장의 무기인 ‘거북선’을 최초로 투입하여, 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그 ‘효용성’이 입증되었고, 해전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또한, 2차 출정 후반 ‘당항포해전’을 계기로 전라 ‘좌∙우도 연합함대’가 구성되어 두 배로 강력해 ‘전력의 우세’로 일본군을 대적할 수 있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은 2차례의 출정을 통해 일본 수군을 상대할 경우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차 출정에서 얻은 전과(네 차례 해전. 왜선 72척 분멸, 수급 수백)는 1차 출정 때의 전과(세 차례 해전. 44척 분멸, 수급 2)에 비하면 엄청나게 증가했다. 2차례의 출정에서 만난 일본 함대는 항구에 정박해 있었거나(상륙하여 약탈 실시), 해상을 이동하다가 조선 수군의 일방적인 공격을 받아 참패당한 것이다.

두 번의 출정에서 조선 수군이 ‘완승’을 거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두 번의 출정에서 입은 ‘피해’를 비교해보면 뭔가 도출할 수 있는 교훈이 있을 것 같다. 1차 출정 당시에는 ‘수병(1명)’ 부상이 전부였는데, 2차 출정 때는 최고 지휘관(이순신)의 총상을 비롯해서 전사자 13명, 부상자 34명이 발생했다(이순신∙나대용은 사천해전에서 총상을 입었다고 기록. 나머지 인원은 일괄 기록되어 해전별 세부사항은 알 수 없다).

이런 피해의 차이가 혹, 조선 수군이 1차 출정 때보다 일본 수군을 ‘더 쉽게’ 생각하고 전투에 임한 것은 아닌지, 일본 수군이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는 등 더 강한 모습으로 나왔던 것은 아닌지 모른다. 이에 대한 세부 기록은 현재까지 보이지 않는다(최고 지휘관 이순신과 나대용이 총상을 입었다는 것은 일본군 ‘조총’ 사거리까지 접근해서 전투를 실시했다는 의미한다). 이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한 것 같다.

당항포해전관 내부. 당항포 해전 상황을 영상과 함께 실전감 있게 보여준다

전투를 거듭하면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능력(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었듯이, 일본 수군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조선 수군의 능력을 파악한 일본군들이 차후 전투에서는 또 어떤 모습으로, 어떤 규모로 공격해올지 모른다. 분명, 함대의 규모와 전술을 달리하는 ‘정예 함대’를 투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일본군의 본거지 ‘부산’에는 수백 척의 전선이 집결 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조선 수군이 연승(連勝)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사천-통영-고성지역을 자전거로 답사여행을 하려면

‘2차 출정’ 중에는 네 번의 해전이 있었는데, 그 전적지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크게 ‘사천’ 일대와 ‘통영(미륵도)’ 일대, 고성 ‘당항포’ 일대로 구분된다. 세 곳을 연결하는 경로는 120km가넘는다. ‘율포해전’이 있었던 전적지는 거제도에 있어서 ‘옥포해전(1차 출정. 연재 4회차 참조)’이나 ‘칠천량해전’(2023년 2월 연재 예정)과 연계시키면 효과적일 수 있다. 또한 ‘당포해전’ 전적지 또한 ‘한산도대첩’(3차 출정. 2023년 1월 연재 예정)이 있었던 ‘통영’과 연계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거북선을 앞세우고 싸웠던 ‘2차 출정 지역’ 요도. ‘전적지’가 서로 멀리 이격되어 거리가 먼 편이다. 라이딩에 어려움이 없고 얻는 것이 많은 코스다. 사천에서 남해안을 따라 통영(미륵도)까지, 당항만 일주 도로는 꼭 한번 달려볼 것을 추천한다

사천 ‘선진공원’에는 ‘이충무공 사천해전승첩기념비’가 있고 ‘사천선진리성’(왜성)도 있다. 이곳 일대는 벚꽃 명승지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이곳으로부터 사천만을 따라 삼천포대교까지 남진하여 ‘사천바다케이블카’를 탑승하면 ‘산-섬-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삼천포에서 77번 국도와 일부 지방도를 따라 해안을 달리면 ‘상족암군립공원·고성공룡박물관’을 들릴 수 있고, 계속 진행하면 ‘고성’을 거쳐 ‘통영’에 다다를 수 있다. 사천-삼천포-고성-통영에 이르는 해안도로는 남해 바다의 진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코스이다.

여기에 못지않게, ‘당항 만’을 일주하는 도로와 ‘동해면 해안도로’와 연결하는 코스는 남해 최고의 명코스이다. 거류면에서 동해면을 한 바퀴 돈 다음, 당항만 일주 도로와 연결하면50km 정도 된다. 당항만 일주도로 상에 있는 ‘당항포대첩지’는 2회의 당항포해전을 기리고 있고, 이웃해있는 ‘당항포관광지’는 ‘공룡세계엑스포’의 주행사장이었던 곳으로 공룡에 관한 볼거리가 많다.

 

참고 자료

*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8

*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7

* 황현필, <이순신의 바다>, 역박연, 2021

* 제장명, <이순신 백의종군 >, 행복한 나무, 2011

* 박종평, <난중일기>, 글 항아리, 2018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