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가파름, 초호화 조망

망운산은 억울하다. 국내의 섬 산 중에 제주도 한라산(1950m), 울릉도 성인봉(984m) 다음 가는 3위에 들지만 이웃한 금산(705m)의 명성에 가려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존재감도 없다. 높이로만 보면 내륙에서는 별것 아니지만 해안에서 솟아오른 786m는 온전히 산 덩치를 이뤄 눈으로 보는 고도감과 웅장미는 대단하다. 정상에 자리한 방송사 중계탑과 9부 능선의 망운사까지 진입도로가 나 있어 자전거로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경사가 아주 급해서 업힐에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한다

산불감시초소(활공장)에서 바라본 남봉(중계탑)과 능선 저편의 북봉. 남봉이 1m 더 높으나 출입이 금지되어 북봉에 정상석이 서 있다

이왕 힘든 것, 아예 바닷가에서 출발하자. 망운산 서쪽 해변에 있는 유포어촌체험마을을 기점으로 잡는다. 해변에 바로 붙어 있어 해발 2m쯤 될까. 주차장과 화장실이 갖춰져 있어 거점으로 적절하다. 이제부터 정상 중계소까지 고도차 770m를 꼬박 극복해야 한다. 국내에서 고도차 700m 이상의 업힐은 드물어서 실로 거대한 오르막이다.

섬 산이 해발고도에 비해 더 높고 웅장하게 느껴지는 것은 표고 0m의 해안에서 바로 솟아올라 해발이 곧 비고(比高)가 되기 때문이다. 내륙의 1000m급 산도 산 아래에서 보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해발 400~500m의 고지대에 솟아 있어 실제 산체의 비고는 600m 정도에 불과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포어촌체험마을에서 올려다본 망운산. 높이 786m가 꼬박 산덩치를 이뤄 매우 웅장하다. 가운데 둔중한 봉우리가 남봉, 왼쪽 뒤로 물러난 것이 북봉. 남봉으로 올라 북봉을 거쳐 하산하게 된다   

출발 전의 유포어촌체험마을. 해발 2m 재확인. 자전거야, 저 엄청난 업힐 앞에 너도 긴장했니?

남상리 가는 길목의 계단식 밭. 짙푸른 것은 온통 시금치로 막 수확 중이다  

섬 산만 볼 때 망운산(786m)은 무려 한라산, 성인봉 다음 가는 국내 3위다. 이런 특별한 산이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딱히 명소가 없고 이웃한 금산의 명성에 가려서다. 하지만 자전거에게는 정말 매력적인 산이다. 정상의 방송중계탑까지 길이 나있고 9부 능선의 망운사까지도 연계되어 엄청난 스케일의 산악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

망운산 진입로는 산 서편의 노구리와 남상리 두 곳이 있다. 어느 한쪽으로 올라 다른 쪽으로 하산하면 되는데, 노구리는 경사가 덜 심한 대신 거리가 멀고, 남상리는 거리가 짧은 대신 급경사를 각오해야 한다. 그렇다면 노구리로 올라 남상리로 내려오는 것이 합리적일텐데 나는 남상리 업힐을 택한다. 경사가 심하면 고도가 쑥쑥 높아져 조망이 빨리 트이고, 성취감도 한층 높다. 하지만 이 선택을 후회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상리 중리마을에서 산으로 올라붙어 숲속으로 들어서자 말자 “헉~!” 신음이 나올 정도로 급사면이 떡 버티고 섰다. 20%를 넘는 경사는 eMTB로도 만만치 않다.

사진으로는 잘 표현되지 않으나 경사도 20%를 훌쩍 넘는 어마어마한 업힐이다. eMTB라도 자주 쉬어야 할 정도

해발 600m 너덜지대를 지나면 길이 조금 온순해 진다. 저 아래로 남상리와 해안선이 희미하다 

가혹한 업힐은 끝이 없이 이어진다. 해발 400m 정도에서는 아예 능선 줄기를 타고 오르는데 숲이 없고 조망이 트인다면 고도감이 정말 아찔할 것이다. 600m 지점에서 너덜을 만나며 길은 비로소 살짝 온순해진다. 뒤쪽으로는 작은 통신탑 일부가 보이고, 발밑으로는 남상리와 앞바다가 미세먼지 사이로 희미하다. 해안선을 낀 600m 고도감은 역시 엄청나다.

몇 굽이를 돌아 작은 통신탑을 지나면 북봉 삼거리가 나오면서 중계소가 터 잡은 정상 입구에 닿는다. 망운산에는 이 남봉과 북동쪽 1.1km 지점의 북봉의 높이가 서로 비슷해서 각자 정상으로 혼동된다. 남봉은 중계소 때문에 출입이 어려워 북봉에 정상석이 서 있고 등산객도 북봉을 목표로 오르지만, 실제 높이는 남봉이 1m 정도 더 높다. 자전거로 오를 수 있는 최고지점인 중계소 정문은 770m 정도 될 것이다. 남봉에서 북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마치 초원처럼 키 작은 관목으로 덮여 있는데 봄에는 천상의 철쭉밭으로 변하는 매혹의 산줄기다.

남봉 정상에 자리한 방송 중계탑. 건물 뒤편에 정상이 있다. 해발 770m 정도가 자전거로 진입할 수 있는 최고 높이다

남봉에서 북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봄이면 철쭉밭으로 변하는 천상의 화원 길이다. 왼쪽 두번째, 돌출한 봉우리가 정상석이 세워져 있는 북봉 

남봉 바로 남쪽에는 2층으로 높다랗게 축조한 산불감시초소와 행글라이더 이륙장이 있다(이륙장은 왼편). 여기서 이륙하면 엄청난 고도차 덕분에 한참을 비행할 수 있겠다

남봉에서 북봉 가는 길목에 뜻밖에도 ‘미공군 전공기념비’ 이정표가 서 있다. 남해안의 산 속에 무슨 일일까 싶은데 여기에는 뜻깊은 사연이 있었다. 남해군청이 소개한 내용을 보자.

[1945년 8월 7일 밤 경남 남해 망운산에 미 육군 항공대 소속 B24 폭격기 레이디럭 2호가 떨어졌다. 일본군에 피격돼 오키나와 기지로 돌아가던 중 추락한 비행기에는 에드워드 밀스 대위 등 11명의 미군이 탑승하고 있었다. 전원 사망. 다음날 일본군이 현장을 확인했지만 비행기의 잔해만 수거하고 시신은 방치한 채 돌아갔다. 당시 31세의 김덕형옹은 진주농업학교를 졸업한 공무원 신분이었지만 이들의 사체를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적군의 시체를 돌본 일은 헌병대 압송과 고문이라는 대가를 가져왔다. 김덕형옹은 1956년 사재를 털어 사건 현장에 '미공군 전공기념비'를 세웠고 1968년에는 남해읍에 '미공군 전공기념관'을 건립했다. 또 매년 추념행사를 개최해 유엔군사령관 감사장, 미육군장관 미국시민공로 최고훈장을 받았다. 2006년에는 주한미군사령부로부터 '좋은 이웃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일본이 항복하기 겨우 일주일 전에 이역만리 산꼭대기에서 산화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죽음인가. 김덕형옹의 헌신으로 작은 빚이나마 갚았으니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남봉에서 북봉 가는 길목에 있는 '미공군 전공 기념비' 이정표. 1945년 작전 중 일본군에 격추당한 미공군 시신을 김덕형 옹이 수습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영문 설명과 더불어 소박하게 세워져 있는 미공군 전공기념비. 위쪽 십자가 아래 '미공군 전공기념비' 한자는 이승만 대통령 글씨다  

북봉은 따로 등산을 해야 하고 미세먼지로 어차피 조망도 막혀서 그냥 통과해 망운사로 직행한다. 주능선 안부 삼거리고개(635m)에서 우회전, 동쪽 사면을 600m 가면 급사면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망운사가 나온다. 고도 630m로 북봉이 바로 뒤쪽에 절벽처럼 솟아 있고, 앞으로는 남해읍 방면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천상의 입지다. 절벽 위에 아슬아슬한 요사채는 허공에 뜬 듯 더욱 극적이다. 고려 때인 1213년 진각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니 역사가 800년이 넘는다. 당시 이런 험지에 처음 터를 잡고 건물을 세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삶과 기복 문제에 답을 주는 종교시설과 죽음을 다투는 전쟁시설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산에는 사찰과 함께 산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절 입구에 돌기둥으로 만든 일주문이 너무나 소박하고 정겹다. 경내에는 아예 인적이 없어 모두 외출 중인 모양이다. 딱히 볼 것도, 할 일도 없지만 이 매혹적인 고찰을 금방 떠날 수가 없다. 텅 빈 산사를 한참 서성이다 발길을 돌린다. 언젠가 저 허공의 요사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구나.

북봉 바로 아래 해발 630m 지점에 있는 망운사. 거의 절벽 같은 급사면이지만 방향을 기막히게 잡아서 남향을 하고 있다. 밤이면 남해읍내에서도 아롱거리는 절의 불빛이 잘 보인다 

절벽에 세워진 요사채.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 조망이 탁월하다     

대충 다듬은 돌기둥으로 만든 일주문이 정겨우면서도 탈속적이다  

노구리로 내려가는 하산길은 부드러운 편이다. 남상리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안락하다는 뜻은 아니다. 노구리 77번 국도까지 5.5km의 다운힐이 순식간에 지나갈 정도로 적절한 경사도는 중력을 잘 안배해 준다.

다운힐 막바지, 협곡 하류에 자리한 노구저수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워낙 급경사 협곡에 저수지를 만드느라 둑 높이가 75m에 달한다. 장폭이 300m도 되지 않는 작은 저수지에 비해 엄청난 둑 높이로 웬만한 댐과 맞먹는다. 남상리의 남상저수지도 마찬가지. 망운산은 “내 영역에서 물을 가두려면 이 정도 둑은 쌓아야 한다”고 위세를 부리는 것만 같다.

하산 도중 돌아본 북봉. 응달진 북사면에는 잔설이 남아 있다. 오른쪽 길 아래에 노구저수지가 있다 

1월의 짧은 해는 어느덧 해수면에 낙조 무드를 드리우고 있다  

노구마을 언덕에 든든히 뿌리박고 있는 '가직대사 삼송'. 300살이 채 되지 않았는데 허리둘레 4.5m의 노거수로 성장해 영기어린 위용을 발한다  

하얀 교회당과 일렁이는 길이 예쁜 노구마을 언덕   

노구마을로 내려오면 마을 뒤편 언덕에 넓게 퍼진 소나무 고목(가직대사 삼송)이 반겨준다. 조선 중기, 망운산 북동쪽 화방사에 주석하던 가직대사는 일대의 주민들에게 선행을 많이 베풀었는데 1748년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300살이 채 되지 않았으나 가슴둘레가 4.5m나 되고 마치 용트림하듯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가 영기롭다. 소나무 서편으로는 언덕 위 교회당이 아름다운 구릉지가 바다를 향해 줄달음치고, 출발지인 유포어촌체험마을은 그 아래 어디쯤이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tip

여기서 소개한 반시계방향 일주는, 남상리 업힐이 너무 가혹해서 노구리로 올라 남상리로 내려오는 시계방향 코스를 추천한다. eMTB이거나 극한의 업힐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남상리 업힐에 도전해볼 수도 있겠다. 남상리 길은 중계탑 관리차량이, 노구리 길은 망운사 왕래 차량이 간혹 있어 블라인드 코너에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남해 망운산 19km 

* 코스 gpx 파일은 자전거생활투어(www.bltour.net) 추천코스 중 '영남편'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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