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익진’으로 이룬 ‘한산도 대첩’, 임진왜란의 변곡점이 되다
일본, 더 이상의 ‘해전’을 금지시키며 ‘서해 바다’ 진출 포기
두 차례의 출정, 일곱 번의 해전을 통하여 조선과 일본은 대조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조선은 연속적인 승리를 통해 남해의 ‘제해권’을 점점 굳혀나가는 반면, 일본군은 연속적인 패배로 말미암아 기본 전략인 ‘수륙병진전략’ 추진이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일본군은 꽉 막힌 ‘보급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지게 된다. 가용한 인원∙부대를 총 동원해 ‘대(大) 함대’를 편성하여 조선 수군과 일전을 벌이는 한편, 수군의 공세와 연계하여 육지에서도 ‘전주’를 공략한 다음 ‘전라도’로 진출을 기도하게 된다.
일본군의 ‘해∙육상 동시 결전’ 기도를 감지한 이순신은 ‘거제도’ 일원에 출몰하며 서진을 시도하는 일본군을 맞아 일전을 펼치기 위해 출정을 결행한다. ‘3도 연합함대’를 편성한 조선 수군은 한산도 앞 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쳐 일본 함대를 격멸함으로써 역사에 길이 남을 ‘대첩’을 이룬다.
현재의 임진왜란 전체 전황(戰況)은 이렇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이후 파죽지세로 밀어붙여 5월 3일 수도 ‘한양’을 점령하고 이어서 북진을 계속했다. 6월이 되면서 1군(고니시軍)은 평양까지, 2군(가토軍)은 함경도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조선 조정은 ‘평양’으로 밀려오는 일본군에 쫓겨, 6월 11일 평양을 떠나 한반도 최북단 ‘의주’로 향했다. 중국 땅을 눈앞에 둔 국왕(선조)은 ‘천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놈 손에 죽을 수는 없다’며, ‘명(明)’나라로 망명하기 위해 ‘안달’을 냈다. 조선 지상군은 대동강이라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평양성’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말았다(6월 14일). 조선 조정이 나라의 끝 ‘의주’까지 내몰렸으니 조선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린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선조’를 붙잡고 전쟁을 끝낼 수 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는 평양에서 멈춰 서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됐다. 그들의 발목을 잡는 ‘복병’이 나타난 것이다. 일본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요인은 여럿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전쟁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동력(動力) ‘보급’에 적신호가 들어온 것이다. 서해바다를 통해 추진하려던 보급은 ‘조선 수군’에 의해, 육로를 통해 추진하려던 보급은 ‘의병’들의 게릴라전, 점차 기력을 찾기 시작한 ‘관군’의 저항에 막혀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규모 ‘해∙육상(海∙陸上) 공세’를 감행하여 보급문제를 해결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해상에서는 ‘대 함대’를 편성∙투입하여 서해 바닷길을 개척하고, 동시에 육군을 투입해 ‘전라도 침공’을 병행하는 ‘승부수’를 던지게 된다.
일본군의 대 공세에 맞선 조선 수군은 ‘3차 출정’을 감행하고, 육군은 일본 육군을 맞아 ‘호남방어전(이치∙웅치전투)’을 펼치게 된 것이다.
한산도 해전
* 1592년 6월 11일 ~ 8월 23일 사이의 난중일기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해전’에 관한 사항은 이순신이 3차 출정 후 선조에게 보고한 ‘견내량에서 왜적을 쳐부순 일을 임금님께 보고하는 장계(見乃梁破倭兵狀. 1592. 7. 15)’를 기준으로 작성한 것이다.
○ 전투 준비 및 해전 전(前) 상황
1∙2차 출정에서 조선 수군에 참패한 일본군은, ‘용인전투’(1592. 6. 6)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수군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을 보강하여 조선 수군과의 ‘일전’을 도모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전쟁 초기부터 육군에 편성되어 육상전투에 참가했던 많은 수군 부대들을 다시 수군으로 원대 복귀시켜 부산∙김해 등지에서 대규모 반격 준비에 돌입한다.
2차 출정을 마치고 본영으로 복귀한 조선 수군은, 머지않아 일본군들이 ‘수∙륙합동’으로 총공세를 펼쳐 전라도 공격을 기도할 것임을 감지하고 출정준비에 매진한다. 이순신은 ‘거제도’ 일원에 출몰하며 ‘전라도’ 진출을 기도하는 일본 수군을 격퇴하기 위해 ‘경상도’ 바다를 향한 ‘제3차 출정’에 나서게 된다. 7월 4일 전라 우도 수군이 합류하여 ‘연합함대’를 편성한 이순신은 7월 6일 새벽에 여수를 출항한다. 중간에, ‘노량’에서 원균의 함대까지 합류함으로써 명실공이 100척이 넘는 대규모 ‘3도 연합함대’가 편성됐다(거북선 2. 대선 57. 소선 50여 척).
출전 이튿날인 7월 7일, 경상도 바닷길의 요충지 ‘당포’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미륵도에 거주하는 ‘목자’(목장에서 군마 軍馬 먹이를 담당하는 사람) ‘김천손’으로부터 일본군 함대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70여 척의 왜선들이 거제도 북쪽으로부터 이동해 와서 견내량 일대에 머물고 있다’라는 최신 정보를 획득했다. 70여 척이라면 그간 상대했던 적과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의 ‘대 함대’인 것이다.
해전 하루 전날, 바로 코앞까지 진출해있는 적에 관한 세부 정보(위치, 규모 등)를 입수하게 된 것은 ‘천운(天運)’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피∙아(彼我) 간의 거리는 직선으로 채 15km가 되지 않는다. 조선은 왜군에 관한 정보를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는 반면, 왜군은 조선 수군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몰랐던 것 같다.
‘견내량’까지 진출한 일본함대의 지휘관은 ‘와키자카 야스하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해상보급로 개척’의 특명을 받은 3명의 지휘관 중 가장 많은 ‘전선’을 보유한 장수다. 일본 수군은 3개 함대가 대규모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출전할 계획이었으나, ‘전공(戰功)’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와키자카’가 ‘과욕’을 부린 나머지, 준비가 덜 된 다른 함대를 제쳐놓고 ‘단독’으로 출전하여 이곳 견내량까지 진출해온 것이다.
* ‘와키자카’가 거느린 함대는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73척으로, 지금까지 해전에 참가한 일본 함대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함대였다. ‘와키자카’는 한 달 전에 있었던 ‘용인전투’에서 1,600명의 병력으로 6만여 명이나 되는 조선군 대 부대를 해산시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과분할 정도의 칭찬을 받았다.
‘와키자카’가 이렇게 단독으로 출전한 것은 이순신과 조선 수군으로서는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일본군이 보유한 110척이 넘는 대 규모의 연합함대를 구성해 출동했다면 ‘3차 출정’ 때의 전투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3차 출정을 통해 조선 수군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상황에 빠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견내량은 좁고, 암초가 많고, 물살이 빠른 곳이다(수로의 폭이 제일 좁은 곳은 200m 내외, 최소 수심은 2m내외, 수로의 길이는 약 4km정도이다). 견내량을 벗어나 남쪽으로 내려오면 크고 작은 섬들이 많다.
이제까지의 전투는 양국군 모두를 합쳐야 50여 척 내외의 전선들이, 대부분 포구·항만 등 협소한 장소에서 ‘기동’이 거의 없는 정박상태에서 싸웠다. 그러나 이번 전투는 양상이 완전히 딴판이다. 두 나라의 전선 모두를 합하면 대선(大船)만 하여도 100여 척, 나머지 선박까지 합치면 150척에 이르는 대 함대가 직접 ‘기동’하며 싸우는 대규모 전투인 것이다. 견내량 일대는 양국의 대형 전선들이 ‘진’을 형성하여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기에도, 조선 수군의 총통공격을 실시하기에도 제한사항이 많은 곳이었다. 견내량으로부터 왜선들을 유인하여 한산도 앞 넓은 바다에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 지금까지의 전투는 이순신함대가 일본 전선을 찾아다니며 벌인 전투였다면, 이번 전투는 반대가 된 것이다. ‘히데요시’로부터 인정받은 부대라 사기도 높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공격해오는 것이다. 그간의 패전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앞선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의 전투방식을 파악한 상태에서 출전하였을 것이다. 전투의지 또한 높은 상태라, 결코 만만한 전투가 아닐 것이다.
○ 한산도 해전의 경과
‘3도 연합함대’는 더욱 확실해진 정보(적의 규모, 편성, 위치. 싸울 장소 등)를 바탕으로 더욱 세밀하게 ‘작전’을 수립했다. 이번 작전에서는, 먼저 일본함대가 육지로 도주하는 것을 막고, 대 함대의 기동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넓은 바다로 끌어내는 ‘유인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그런 다음, 유인한 적 함대를 포위하여 격멸하기 위해 ‘학익진 전법’을 구사하기로 했다. 이순신이 이번 전투에서 사용하려는 ‘학익진’ 진법은 매우 복잡하여 주로 육상에서 사용하는 진법이다. 해상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고 이번에 처음 사용하는 것이다.
이순신장군은 방답첨사 ‘이순신’(방답진 : 여수 돌산도 소재)으로 하여금 판옥선 5~6척을 끌고 ‘견내량 북단’으로 가서 왜선들을 유인해 오게 했다. 유인부대가 견내량에 다다라 총통사격을 가하며 공격태세를 갖추자 왜선들이 곧장 추격해왔다. 조선 수군의 계획된 ‘유인작전’에 걸린 ‘와키자카’ 함대는 조선 수군을 얕잡아 보고 한산도 앞바다까지 곧장 쫓아온 것이다. 앞선 전투에서 당한 패배를 설욕하고픈 심정에 앞뒤 가리지 않고 따라 나왔을 것이다. 앞서 있었던 ‘7번’의 해전에서 단 한척의 조선 판옥선도 격침시키지 못하고 패전만 당한 일본군 입장에서는 ‘안달’이 나고도 남을 만 했을 것이다.
* 견내량 북쪽 바다로 유인작전에 투입된 판옥선은 5~6척이었다. 일본군 수군은 그간의 전투에서도 조선 수군의 유인작전에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순신장군은 이번 전투에서도 유인 부대를 적 진영에 투입했다. 왜군의 ‘소굴’로 들어가는 유인부대 ‘장졸’들의 기분도, 보내는 이순신장군의 마음도 착잡하였을 것이다. ‘유인작전’은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에서 던진 승부수 ‘학익진’에 못지않은 또 다른 ‘승부수’였던 것이다.
유인작전 간 쫓아오는 왜선은 10배가 넘는 대 함대이다. 게다가, 일본의 전선들은 조선 판옥선보다 훨씬 빠르다. 적의 대 함대를 유인하여 ‘아군’이 있는 ‘한산도’ 앞 바다까지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 나오는 동안 얼마나 위기감을 느꼈을까. 혹시나 했던 ‘유인작전’은 성공했고, 이로써 역사적인 ‘한산도 해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1단계 ‘유인작전’은 일단 성공했다. ‘화도’ 주변의 섬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연합함대’는 유인부대 판옥선을 추격해온 왜선에 대해 일사불란하게 ‘학익진’을 펼쳐 섬멸 작전을 구사하게 된다. 학익진에 의해 형성된 포위망을 서서히 좁히며 왜선들과 교전 가능한 거리까지 접근해 들어갔다. 그런 다음 제일 먼저, 비장의 돌격무기인 ‘거북선’을 적진 속으로 돌진시켜 ‘적의 진형’을 분리∙와해시켰다. 거북선의 돌진으로 진형이 와해되고 우왕좌왕하는 왜군 진영에 대해 주력 전투함인 ‘판옥선’을 돌진시켜 총통공격으로 왜선에 ‘집중포화’를 가했다. ‘총통’ 사격은 근접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계속 실시하였으며, 더욱 근거리로 접근하게 되면서 ‘활’(불화살)과 ‘신기전’도 공격에 가담하게 했다.
왜군들도 빠른 속도를 십분 활용하여 조선 수군과의 거리를 좁혀 ‘조총’으로 대응하면서 판옥선에 ‘등선 육박전투’를 시도했다. 이때부터 양국의 전선들이 거의 붙을 정도의 거리에서 ‘혼전’이 펼쳐졌다. 왜군들은 조선 수군의 우세한 총통 공격 앞에 조총을 쏘며 저항하였지만 등선을 하지 못하면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한산도 해전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명의 왜군도 조선 수군의 전함에 등선하지 못했다).
조선 수군의 유인전술에 말려 넓은 바다로 달려 나온 일본 함대는, 대 함대끼리의 전투에서 ‘학익진’을 펼친 조선 수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거북선에 의한 ‘돌격’과 판옥선에 의한 ‘총통공격’으로 말미암아 전투는 단 시간에 조선 연합함대의 ‘압승’으로 끝났다.
‘와키자카’ 함대는 59척이 분멸∙격침되고, 14척 만이 전멸을 모면하고 부산 쪽으로 도주했다. 지휘관 ‘와키자카’는 구사일생으로 도주했으나 많은 부하 장수들과 장졸들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사했다. 조선수군은 단 한 척의 전선도 손상당하지 않고 적의 대 함대를 분멸∙격침시켰다.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해전이었다. 그래서 ‘동양의 살라미스해전’이라고 불리게 됐다.
* 한산도 대첩이 주목받는 이유는 ‘학익진’(기동전)이다. 해상에서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전술을 선택한 것이다. 3도 수군의 훈련 수준은 일정하지 않았다. 함께 ‘진법 훈련’을 익힐 여건이 되지 않아 ‘작전회의(모의훈련)’만 실시한 상태로 전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50척이 넘는 조선 함대가 70척이 넘는 왜군 함대를 맞아 ‘학익진’ 형태로 기동하면서 ‘포격전’을 펼친 것이다. 바다의 ‘조건’(파도, 조류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앞서 있었던 7번의 해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다음 ‘전투(해전)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조선 수군은 이번 3차 출정에 보유한 ‘전선’ 모두를 투입했다. 만약, 이 해전에서 패배할 경우 조선 수군의 전멸을 넘어, 조선의 멸망과 직결될 수도 있는 전투였다. 이순신은 이번 전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겠지만, 노심초사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해전에서 처음 사용하는 ‘진법(학익진)’이었기에 일대 ‘도박(?)’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었다.
* 임진왜란 전후 조선 수군의 해상훈련지침서인 ‘수조규식(水操規式)’에 의하면 ‘총통’은 200보(약 140, 150m), ‘활’은 30보(약 20m) 이내에서 쏘도록 명시되어 있다. 총통의 경우는 왜선에 최대한 접근하면서 ‘직사사격’을 실시함으로써 명중률과 파괴력을 증대시키고, ‘화약’을 절약하기 위해 철저히 통제했다고 한다.
☞ 한산도 해전이 있었던 1592년 7월 8일, 같은 날 ‘전라도’를 공략하려는 일본군 육군을 맞아 펼친 육군의 ‘호남방어전’(이치∙웅치전투)에 관한 내용은 별지#1을 참고 바랍니다.
안골포 해전
‘와키자카 함대’가 한산도 해전에서 참패하면서, 남은 14척의 전선은 부산 쪽 일본군 진영으로 도망쳤다. ‘와키자카’와 함께 연합함대를 꾸려 한산도 바다로 출전하기로 했던 두 장수(‘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는 한산도 바다에서 빠져나온 수군들로부터 한산도 전투 상황을 전해 들었다. 그들은 ‘부산’ 본영에서 가까운 기지 ‘안골포’로 숨어들었다.
한산도 해전이 끝나고 그 다음 날인 7월 9일, ‘칠천도’까지 진출한 이순신은 ‘대 함대’가 안골포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칠천도에서 하루를 지낸 다음 날 새벽에 출항하여 이른 아침 안골포 앞바다에 도착했다.
'안골포'는 가덕도 건너 육지에 위치한 좁은 '만'이다. 이곳은 수심이 얕아 썰물 때는 갯벌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포구가 깊어서 해상에서 공격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또한,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으로부터 멀지 않아 전투 간 본영으로부터의 배후공격도 예상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왜선들은 안골포 깊숙한 곳에 42척의 배를 매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포구에 정박해 있는 왜선들이 육지로 도주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왜선들을 바다 바깥으로 ‘유인’하려 했다. ‘한산도 해전’에서 ‘와키자카’ 함대가 이순신의 ‘유인작전’에 걸려 참패당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왜군들은 포구에서 한 발짝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왜군들이 유인작전에 말려들지 않고 시간만 흐르자, 오후 물 때(만조)에 맞춰 작전을 변경해 왜선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안골포를 공격할 때 가덕도 일대에 배치했던 이억기 함대까지 합류시켰다(일부 전선은 가덕도 일대에 계속 매복 조치했다). 연합함대는 2~3척씩 ‘조’를 편성하여 교대로 ‘포구’를 드나들며 ‘맹공’을 펼쳤다.
조선 수군의 공세가 격해지자, 왜군들도 조선 수군의 공세에 맞서 전선(戰船)을 지키기 위해 ‘돌격조’를 운영하여 저항하기 시작했다. ‘만’ 안에 정박해있던 왜선에 대한 공격은 밤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왜군은 많은 전선이 격침되고 사상자도 많이 발생했다.
밤이 깊어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이순신은 함대를 안골포 밖으로 물렸다. 조선 연합함대가 물러난 틈을 타, ‘구키’와 ‘가토’는 남은 전선들을 이끌고 야음을 이용해 감시망을 뚫고 밤중에 ‘부산’ 쪽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다음 날 새벽, 연합함대가 안골포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만’ 내에는 도망친 일본군의 흔적만 있을 뿐이었다. 안골포해전은 이렇게 싱겁게, 어처구니없이 끝이 나고 말았다.
이순신 연합함대는 한산도해전에 이어 이곳 안골포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야심차게 투입한 ‘일본 정예 함대’를 연달아 격파하는 전과를 거뒀다. 그러나 작전의 ‘미숙’으로 왜선 모두를 분멸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전투가 아닐 수 없다.
* 결과적으로 이순신은 일본군 함대 일부 세력을 놓치고 말았다. 야간이라 더 이상의 피해 발생을 우려하여 공격을 중지하고 물러난 것을 적절했지만, 경계대책을 제대로 강구하지 않아 일본군의 도주를 허용하고 만 것은 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궤멸시키며 거뒀던 전과를 극대화하지 못한 면이 있다. 이제까지 이순신이 펼쳤던 작전 지휘를 감안한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연합 함대의 ‘무력시위’, 일본군의 심리에 타격을 주다
안골포해전이 끝나고, 연합함대는 귀환을 하루 늦추고 ‘몰운대’(부산 다대포 일대)까지 ‘해상 시위’를 펼쳤다. 전투 현장 ‘안골포’를 출발하여 적의 본거지가 있는 ‘부산’ 쪽으로 전 함대를 움직였다. 부산 쪽으로 향하는 이동로 주변의 김해∙낙동강 요소요소에는 적의 소규모함대들이 정박하고 있던 곳이고, 본거지인 부산과는 지척의 거리다. 자칫 협공∙기습의 우려도 있는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다.
‘몰운대’까지 이동하며 한편으로는 정탐활동을 펼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탄을 쏘며 조선 함대의 위용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는 왜군에게는 대적(對敵)할 생각을 아예 포기하게 하는 ‘경고’가 되고, 조선 수군에겐 ‘사기’를 올릴 수 있는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정탐한 결과, ‘양산∙김해강’(낙동강) 깊숙한 곳에 왜선 100여척이 정박하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부산 쪽으로 도주한 것으로 확인됐다.
부산 쪽 '몰운대'까지의 해상시위를 마친 7월 11일 야간, 가덕도(천성포구)에 들러 이곳에 오래 동안 주둔할 것처럼 기만한 다음, 밤을 틈타 귀환 길에 올랐다. 통영에 도착한 연합함대는 이미 '군량'이 떨어지고 있고, 또한 '금산(충남)' 일대에 적(일본 육군)의 형세가 사납게 날뛰고, 적이 이미 전주에 이르렀다'는 전통(傳通)이 잇따르고 있어 7월 13일 각 수영으로 귀환했다.
< 별지 #1. ‘이치.웅치전투’의 승리, 전라도 보급기지 확보 기도를 막다 >
개전 후 연속적인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일본군의 기본전략인 ‘수륙병진전략’이 심한 타격을 입자, 심각한 ‘보급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초강수’를 두게 된다. 육전에 참가 중이던 수군 장수들(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3명)까지 남쪽으로 불러내려 해전에 투입하여 바닷길 개척을 추진한다. 또한, 대규모 지상군을 전라도 지역에 투입하여 ‘보급기지’ 확보를 추진한다.
일본 지상군 중 전라도 담당 부대인 ‘제6번대’(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지휘. 15,700명)로 하여금, ‘금산’을 발판으로 삼아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를 공격하게 한다. ‘대둔산’ 자락의 ‘이치(梨峙)’를 경유하는 길과, ‘진안’에서 ‘웅치(熊峙)’와 ‘완주’를 거치는 두 길을 통해 ‘전주’로 진출을 시도한다. ‘전주’에 이르는 두 접근로를 통한 일본군의 공세를 차단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으니 ‘웅치∙이치전투’이다.
일본군의 ‘전주’ 진출을 방어해야 할 부대는 임진왜란 최악의 패전인 ‘용인전투’에서 패한 나머지, 기껏 3천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부대였다. 전라도 도절제사 ‘권율’ 장군은 3천명도 되지 않는 적은 병력을 나눠 두 접근로에서 일본군을 방어해야만 했다. 권율장군은 적 주력의 접근이 예상되는 ‘이치’ 고개에 동복현감 ‘황진’장군과 함께 1,500의 병력으로 막고, 또 다른 예상 접근로인 ‘웅치’에는 김제군수 ‘정담’ 장군 등 1천여 명으로 막기로 했다.
일본군 주장(主將) ‘고바야카 타카카게’는 권율장군과 정반대의 방책을 채택했다. ‘고바야카’ 자신은 2천여 병력으로 권율장군이 방어 중인 ‘이치’를 공격하고, 1만 명의 주력군은 ‘웅치’를 공격하기로 했다. 또한 3천여 명으로 하여금 배후기지인 ‘금산’을 지키게 했다. 일본군은 ‘웅치’를 먼저 무너뜨리면 ‘이치’도 쉽게 무너질 것으로 판단했고, 그런 다음에 합세하여 ‘전주’로 공격할 계획이었다.
‘이치전투’는 대둔산 자락의 험준한 지형에 기댄 조선군이 지형을 십분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피∙아의 전력 또한 비등하여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권율장군은 적은 병력이지만 직접 전투를 독려하며 일본군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일본군은 많은 피해를 입고 ‘금산’ 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웅치’는 적을 맞아 싸우기에 적합한 지형이었지만, 1,500명의 병력으로 1만 명의 대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버거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군은 이곳 ‘웅치’에서 이틀간 치열한 전투를 치르느라 화살이 떨어지고 백병전까지 실시해야만 했다. 마침내, 방어선 전체가 돌파당해 많은 장졸이 전사하면서 전투에서 지고 말았다. 하지만, 1:10에 가까운 병력 차에도 불구하고 이틀간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안겨, 일본군의 다음 전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웅치’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일본군 ‘안코쿠지’ 부대는 ‘전주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전주성’에는 이미 ‘군∙민’이 총동원되어 완벽한 방비태세를 갖춰놓은 상황이라 공략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또한, 의병장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과 전라도 관군 연합의 6~7천의 대 병력이 일본군의 배후 본영인 ‘금산’으로 접근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전주성’을 공략하려던 일본군은 계획을 접고 본영 ‘금산’으로 후퇴하려 했다. 그러나 ‘금산’으로 후퇴하던 과정에서, 일본군은 ‘웅치’전투에서 퇴패한 조선군 잔여 병력과 ‘이치’로부터 증원해온 ‘황진’ 장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다음에야 ‘금산’으로 물러날 수 있었다(안덕원 전투).
이렇게 ‘전주’와 ‘전라도’를 방호하기 위한 일련의 전투(웅치∙이치전투-전주성의 농성-안덕원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조선군 지상군이 이긴 값진 승리로 전쟁 수행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전라도’를 지켜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전라로’를 점령해서 보급문제를 해결하려던 일본군의 기도가 실패하고, 일본군의 전체 작전은 더욱 어려움에 봉착하게 됐다.
‘이치∙웅치’에서 거둔 ‘지상전’의 승리는 ‘한산도 해전’과 함께 임진왜란의 큰 흐름을 바꾼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또한, 그간 관군과 의병이 분리되어 별도로 전투를 실시하여 큰 성과를 내지 못했으나, 이후에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관군과 의병이 ‘합동부대’를 편성하여 싸워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후일, 권율장군은 자신이 참가한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행주대첩’보다 이곳 ‘웅치(이치)전투’를 더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이 전투들이 중요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 별지#2. 시대(時代)와 국적(國籍)을 뛰어넘어 추앙받는 이순신장군 >
우리 역사를 통틀어 누란의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했던 가장 위대했던 인물로 ‘이순신장군’이 꼽히고, 그를 기리고 뜻을 이어받기 위해 서울 한 복판에 ‘충무공 이순신장군 상’을 세웠다(1968년. 광화문광장). 이보다 앞서, 6.25전쟁 중이던 1952년 전란 극복의 의지를 담아 첫 대형 ‘충무공 이순신 상’이 이승만대통령 주관으로 진해에 세워졌다(해군 정비창에서 제작). 그 후 이순신장군을 기리는 동상들이 학교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줄줄이 세워진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해군에 입대하는 장병들은 ‘우리는 영예스러운 충무공의 후예이다’라고 시작하는 ‘해군의 다짐’이란 것을 접하게 된다. 충무공의 후예가 된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며 군복무를 시작하는 것이다.
해군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기리는 의식이 많다. 그 중, 해군의 전 장병들은 훈련∙교육 기간 중 통영에 있는 ‘제승당’과 ‘충렬사’를 찾아 이순신장군을 참배하고, 해군의 일원이 된 것을 아뢰는 ‘신고 의식’이 있다.
이 의식은 1948년부터 ‘신병’을 대상으로 시작한 이래, 전 교육과정으로 확대하여 해군의 구성원이 되는 모든 장병들을 대상으로 시행해오고 있다. 그러던 중, 1974년도에 있었던 ‘YTL(예인선 : 대형 함정이 항구에 출∙입항할 때 함정을 끌어주거나 밀어주기 위한 특수목적 선박) 전복사고’가 발생하여 한 동안 중단되기도 했으나, 다시 재개한 이래 현재까지 해군 전 장병들은 훈련(교육)과정 수료하기 전에 참배 의식을 빠짐없이 실시하고 있다.
* YTL 전복사고 : 1974년 2월, 통영(충무) 앞바다에서 해군 소속 ‘항내 예인선’(YTL)이 침몰해 해군∙해양경찰(전투경찰) 훈련병 159명이 숨진 사고이다. 해군 역사상 최악의 해난사고였다. ‘제승당’과 ‘충렬사’ 참배를 마친 훈련병들이 YTL에 승선하여 통영항에 대기 중인 전차상륙함(LST)으로 복귀하던 중 기상악화로 인해 전복하면서 발생한 사고이다.
임진왜란의 적국인 일본 내에서도 이순신장군을 존경하는 사람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보다 더 많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 중 한명이 러일전쟁 때 ‘쓰시마해전’에서 일본 해군사령관이었던 ‘도고 헤이하지로’ 제독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다음 ‘군신(軍神)’으로 칭송받는 영웅이 되었다. 러일전쟁 전승축하연에서 있었던 일화, 『넬슨 vs 도고 헤이하지로 vs 이순신』의 비교와 관련하여 ‘도고’ 제독이 이순신을 존경했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쓰시마 해전 당시 일본 해군이 사용한 진법인 ‘정자(丁字) 진법’이 ‘학익진’의 응용이었다.’라는 얘기를 포함해서 기분 좋은 이야기는 진위(眞僞)를 떠나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국내에 주둔하던 ‘일본 해군 장병’들이 이순신장군에 대한 ‘참배행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일본인 사학자 ‘후지이 노부오’가 쓴 ‘이순신 각서(李舜臣 覺書)’에는 ‘도고’가 ‘이순신장군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말한 내용이 있다. 또 하나, ‘일본 해군들은 매년 한산싸움이 벌어졌던 통영으로 갔다. 그리고 300년 전의 적장 이순신에게 ‘예(禮)’(진혼제.鎭魂祭)를 올렸다. 이곳에서 있었던 싸움(한산도해전)이 이순신의 훈공 중에서 가장 눈부셨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또 다른 작가 ‘시바 료타료’가 쓴 ‘가도(街道)를 가다’(한국 편)에서 ‘일본 해군은 창설 초기, 이순신에 관해 많은 연구를 했다. 연구를 통해 300년 전의 조선 적장(이순신)에 대해 존경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해군의 전통이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일본 해군들은 ‘적국’의 수장이었던 ‘이순신장군’에 대해 매우 존경했던 것 같다. 일제 강점기 때 진해에 주둔했던 일본 해군들이 진해에서 가까운 여러 전장들을 두고 먼 ‘통영’까지 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산도 해전에 대한 일본군의 ‘평가’와 그 해전을 지휘한 ‘이순신장군’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의 발로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신들의 선조들에게 수많은 피해를 안겼던 ‘적장’에 대한 태도를 보면서 오히려 섬뜩한 기분이 든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장군’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갖는 존경심은 어떠한지 새겨볼 만한 일이다.
3차 출정(한산도 해전, 안골포 해전)의 의의와 영향
새로운 진법 ‘학익진’을 사용한 ‘한산도’에서 있었던 조선과 일본 대(大) 함대끼리의 결전은 조선 수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앞선 2차례 출정의 성과와 견줄 수 없는 대승을 이뤘다. 무엇보다 일본군의 본영인 ‘부산’의 코앞까지 진출하며 ‘해상시위’를 펼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일본군 수뇌부의 심리에 크나큰 타격을 줬다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보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본군의 또 다른 시도(試圖), ‘전주’를 점령하여 ‘육로’로 전라도를 공략하려던 기도마저 조선 육군(민∙관군)에 의해 전주를 향하는 요지인 ‘웅치∙이치’에서 막히고 말았다. 이로써, 해∙육상을 통한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이 모두 끊긴 일본군은 ‘평양’에서 발이 묶인 나머지, ‘의주’를 공략할 동력을 잃고 말았다. 이후 전쟁은 침체기에 접어들고 만다.
별지 #1. ‘이치∙웅치전투’의 승리, 전라도 보급기지 확보를 향한 몸부림을 꺾었다.
한산도 해전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전환점’이 됐다. ‘히데요시’는 해상 보급로를 뚫기 위해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의 해상 지휘관’들 모두를 한산도 해전에 투입하고도 완패했다. ‘히데요시’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더 이상 해전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라는 ‘해전 금지령’까지 내리게 됐다. 조선 침략 전략인 ‘수륙병진책’은 완벽하게 좌절되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 수군이 ‘제해권(制海權)’을 완전히 장악함에 따라 일본 수군은 본거지 ‘부산’ 일대에 고립되고 말았다. 낙동강 이서(以西) 해역으로의 진출을 포기한 채 바다 주변의 섬과 육지를 연하여 ‘왜성’을 축성하는 등 ‘전략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조선 수군이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함에 따라, 의주의 ‘조선 피난 조정’은 제한적이나마 ‘나라’를 운영할 수 있게 됐다. 서해 해로를 통해 한반도 서부와 제주도에 대해 피난 조정의 ‘행정력’이 미칠 수 있게 됐고, 전라도에서 생산된 각종 물자를 평안도의 피난 조정과 한반도 서부 지역에 공급할 수 있게 됐다. 마침내 선조는 '명(明)' 나라로 망명하려던 계획을 접고 국내 잔류하는 방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또한,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졌던 조선 육군에게 승리에 대한 ‘자극제’가 되고, ‘용기’를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전라도를 보전해 이를 바탕으로 조선이 중흥(中興)을 이룩한 것도 한산대첩의 승리 때문이었다.’라고 한산도 해전을 극찬했다.
통영지역을 자전거로 답사여행을 하려면
‘3차 출정’ 때는 두 번의 해전이 있었다. 너무나 잘 알려진 통영의 ‘한산도 해전’이고 다른 전투는 진해와 부산의 경계에서 있었던 ‘안골포 해전’이다. 안골포 해전은 전사(戰史)적 가치가 매우 큰 전투이지만 그렇게 널리 알려진 전투는 아니다.
두 해전지 간의 거리는 직선으로 40km가 넘는다. 동시에 답사하려면 거제도나 창원 쪽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두 곳을 연계하는 코스 설정은 결코 쉽지 않다.
통영지역을 자전거로 답사한다면 크게 통영 시가지, 미륵도, 한산도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임진왜란 관련 전∙사적지는 통영시내와 한산도에 집중되어 있다.
통영 시가지에서 널리 알려진 곳은 세병관과 충렬사이다. 그 외의 장소로는 이순신공원, 한산대첩광장, 남망산 공원, 착량묘(해저터널) 정도가 될 것이다. 한산도에서는 제승당(운주당)과 충무사(사당), 한산정(활터), 수루 등이 있다. 한산도와 추봉도를 연결하는 코스 역시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한산도에 가기 위해서는 통영 항에서 배편을 이용해야 한다.(이번 취재 여행 때 한산도를 방문하지 않고 과거 방문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미륵도에는 당포해전이 있었던 ‘당포항(성)’이 있다. 미륵도를 일주하는 코스는 어느 한곳도 그냥 ‘질주’해 지나가기엔 너무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미륵도 일주는 적절한 업-다운이 있는 약 50km 코스로 하루가 즐거울 정도이다.
통영시내에는 그 외에도 동피랑 마을, 통영케이블카(미륵산), 박경리기념관, 중앙어시장, 해병대통영상륙작전기념관(최초의 한국군 단독 상륙작전) 등을 연결하면 더욱 알찬 자전거 답사 여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여건이 좀 더 가용하다면 ‘견내량’(거제대교)을 건너 ‘거제도’로 넘어가면 더욱 풍성한 볼거리가 있다. 거제도 자전거 여행은, 앞선 여행기 ‘메멘토벨로 시즌2 / 불멸의 전승, 이순신 ’23전 23승‘의 바다를 가다(4)’ 『불멸의 ‘전승 신화’의 시작, ‘옥포 대승첩’』(2022. 11. 19)을 참고하면 좋다.
< 참고 자료 >
*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8
*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7
* 황현필, <이순신의 바다>, 역박연, 2021
* 제장명, <이순신 백의종군>, 행복한 나무, 2011
* 박종평, <난중일기> 글 항아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