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익진’으로 이룬 ‘한산도 대첩’, 임진왜란의 변곡점이 되다
일본, 더 이상의 ‘해전’을 금지시키며 ‘서해 바다’ 진출 포기

430년 전 한산도 해전이 벌어졌던 ‘한산도 앞바다’. 이 바다에서 100여척이 넘는 전선들이 서로 뒤엉켜 총통과 조총 사격으로 인한 포연과 굉음으로 일대를 감쌌을 것이다. ‘학익진’ 전법을 펼쳐 임진왜란 최초의 ‘전면전’에서 일본군의 정예함대를 격퇴했다. 전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군의 작전 수행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 전투였다. 이충무공 탄신 460주년이던 2005년에 이순신공원을 만들었다
430년 전 한산도 해전이 벌어졌던 ‘한산도 앞바다’. 이 바다에서 100여척이 넘는 전선들이 서로 뒤엉켜 총통과 조총 사격으로 인한 포연과 굉음으로 일대를 감쌌을 것이다. ‘학익진’ 전법을 펼쳐 임진왜란 최초의 ‘전면전’에서 일본군의 정예함대를 격퇴했다. 전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군의 작전 수행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 전투였다. 이충무공 탄신 460주년이던 2005년에 이순신공원을 만들었다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두 차례의 출정, 일곱 번의 해전을 통하여 조선과 일본은 대조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조선은 연속적인 승리를 통해 남해의 제해권을 점점 굳혀나가는 반면, 일본군은 연속적인 패배로 말미암아 기본 전략인 수륙병진전략추진이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일본군은 꽉 막힌 보급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지게 된다. 가용한 인원부대를 총 동원해 () 함대를 편성하여 조선 수군과 일전을 벌이는 한편, 수군의 공세와 연계하여 육지에서도 전주를 공략한 다음 전라도로 진출을 기도하게 된다.

일본군의 육상 동시 결전기도를 감지한 이순신은 거제도일원에 출몰하며 서진을 시도하는 일본군을 맞아 일전을 펼치기 위해 출정을 결행한다. ‘3도 연합함대를 편성한 조선 수군은 한산도 앞 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쳐 일본 함대를 격멸함으로써 역사에 길이 남을 대첩을 이룬다.

현재의 임진왜란 전체 전황(戰況)은 이렇다

15924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이후 파죽지세로 밀어붙여 53일 수도 한양을 점령하고 이어서 북진을 계속했다. 6월이 되면서 1(고니시)은 평양까지, 2(가토)은 함경도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조선 조정은 평양으로 밀려오는 일본군에 쫓겨, 611일 평양을 떠나 한반도 최북단 의주로 향했다. 중국 땅을 눈앞에 둔 국왕(선조)천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놈 손에 죽을 수는 없다, ‘()나라로 망명하기 위해 안달을 냈다. 조선 지상군은 대동강이라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평양성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말았다(614). 조선 조정이 나라의 끝 의주까지 내몰렸으니 조선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린 형국이 되고 말았다

삼도수군 통제영 : 1593년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장군이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됐다. 전란 중이라 별도의 ‘통제영’을 설치할 수 없어서 ‘전진기지’ 형태의 최초의 통제영을 한산도에 설치했다(‘본영’은 그대로 ‘여수’에 있었다). 정유재란 때(칠천량 해전) 한산도의 통제영이 파괴되고, 이후 해전(海戰)의 향방에 따라 고하도와 고금도로 옮겨 다녔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잠시 여수에 설치했다가, 1605년에 현재의 위치에 새로 지어 옮겨와서 1895년 통제영이 폐지될 때까지 약 300년간 조선 수군의 총본산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에는 100여 동의 건물로 지어졌으나, 일제 강점기 때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모두 사라지고, 현재 남아있는 당시의 건물은 ‘세병관’(국보 305호) 뿐이다
삼도수군 통제영 : 1593년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장군이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됐다. 전란 중이라 별도의 ‘통제영’을 설치할 수 없어서 ‘전진기지’ 형태의 최초의 통제영을 한산도에 설치했다(‘본영’은 그대로 ‘여수’에 있었다). 정유재란 때(칠천량 해전) 한산도의 통제영이 파괴되고, 이후 해전(海戰)의 향방에 따라 고하도와 고금도로 옮겨 다녔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잠시 여수에 설치했다가, 1605년에 현재의 위치에 새로 지어 옮겨와서 1895년 통제영이 폐지될 때까지 약 300년간 조선 수군의 총본산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에는 100여 동의 건물로 지어졌으나, 일제 강점기 때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모두 사라지고, 현재 남아있는 당시의 건물은 ‘세병관’(국보 305호) 뿐이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선조를 붙잡고 전쟁을 끝낼 수 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군대는 평양에서 멈춰 서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됐다. 그들의 발목을 잡는 복병이 나타난 것이다. 일본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요인은 여럿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전쟁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동력(動力) 보급에 적신호가 들어온 것이다. 서해바다를 통해 추진하려던 보급은 조선 수군에 의해, 육로를 통해 추진하려던 보급은 의병들의 게릴라전, 점차 기력을 찾기 시작한 관군의 저항에 막혀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규모 육상(陸上) 공세를 감행하여 보급문제를 해결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해상에서는 대 함대를 편성투입하여 서해 바닷길을 개척하고, 동시에 육군을 투입해 전라도 침공을 병행하는 승부수를 던지게 된다.

일본군의 대 공세에 맞선 조선 수군은 ‘3차 출정을 감행하고, 육군은 일본 육군을 맞아 호남방어전(이치웅치전투)을 펼치게 된 것이다.

한산도 해전

* 1592611~ 823일 사이의 난중일기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산도 해전안골포 해전에 관한 사항은 이순신이 3차 출정 후 선조에게 보고한 견내량에서 왜적을 쳐부순 일을 임금님께 보고하는 장계(見乃梁破倭兵狀. 1592. 7. 15)’를 기준으로 작성한 것이다.

전투 준비 및 해전 전() 상황

충무공 동상 서열 2위 통영 ‘충무공 이순신 상’ : 1952년 11월에 통영바다가 내려 보이는 ‘남망산 공원’ 정상에 세워졌다(1위는 1952년 4월 진해에 세워진 동상임). 항구 건너에 이순신공원(2005년)이 조성되기 전까지는 ‘세병관’과 함께 이순신과 ‘한산대첩’ 관련 행사의 중심 공간이었다. 70년이 지난 동상이라 세월감을 느낄 수 있다. 당시 동상을 만든 작가(김경승)는 부산 용두산공원의 ‘이 충무공 동상’과 쌍둥이로 만들었다고 한다(정말 많이 닮았다)  = 해병대 통영상륙작전기념관 제공 
충무공 동상 서열 2위 통영 ‘충무공 이순신 상’ : 1952년 11월에 통영바다가 내려 보이는 ‘남망산 공원’ 정상에 세워졌다(1위는 1952년 4월 진해에 세워진 동상임). 항구 건너에 이순신공원(2005년)이 조성되기 전까지는 ‘세병관’과 함께 이순신과 ‘한산대첩’ 관련 행사의 중심 공간이었다. 70년이 지난 동상이라 세월감을 느낄 수 있다. 당시 동상을 만든 작가(김경승)는 부산 용두산공원의 ‘이 충무공 동상’과 쌍둥이로 만들었다고 한다(정말 많이 닮았다)  = 해병대 통영상륙작전기념관 제공 

12차 출정에서 조선 수군에 참패한 일본군은, ‘용인전투(1592. 6. 6)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수군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등을 보강하여 조선 수군과의 일전을 도모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전쟁 초기부터 육군에 편성되어 육상전투에 참가했던 많은 수군 부대들을 다시 수군으로 원대 복귀시켜 부산김해 등지에서 대규모 반격 준비에 돌입한다.

2차 출정을 마치고 본영으로 복귀한 조선 수군은, 머지않아 일본군들이 륙합동으로 총공세를 펼쳐 전라도 공격을 기도할 것임을 감지하고 출정준비에 매진한다. 이순신은 거제도일원에 출몰하며 전라도진출을 기도하는 일본 수군을 격퇴하기 위해 경상도바다를 향한 3차 출정에 나서게 된다. 74일 전라 우도 수군이 합류하여 연합함대를 편성한 이순신은 76일 새벽에 여수를 출항한다. 중간에, ‘노량에서 원균의 함대까지 합류함으로써 명실공이 100척이 넘는 대규모 ‘3도 연합함대가 편성됐다(거북선 2. 대선 57. 소선 50여 척).

2차 출정 당시 ‘당포해전’ 승리의 현장 ‘당포 앞바다’. 남해안 바닷길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한산도 해전을 앞두고 일본군 함대에 관한 첩보를 바탕으로 ‘싸울 방법’을 세웠다. 그리고 역사에 남을 ‘대첩’을 기획한 곳이다
2차 출정 당시 ‘당포해전’ 승리의 현장 ‘당포 앞바다’. 남해안 바닷길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한산도 해전을 앞두고 일본군 함대에 관한 첩보를 바탕으로 ‘싸울 방법’을 세웠다. 그리고 역사에 남을 ‘대첩’을 기획한 곳이다

출전 이튿날인 77, 경상도 바닷길의 요충지 당포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미륵도에 거주하는 목자(목장에서 군마 軍馬 먹이를 담당하는 사람) 김천손으로부터 일본군 함대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 ‘70여 척의 왜선들이 거제도 북쪽으로부터 이동해 와서 견내량 일대에 머물고 있다라는 최신 정보를 획득했다. 70여 척이라면 그간 상대했던 적과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의 대 함대인 것이다.

해전 하루 전날, 바로 코앞까지 진출해있는 적에 관한 세부 정보(위치, 규모 등)를 입수하게 된 것은 천운(天運)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彼我) 간의 거리는 직선으로 채 15km가 되지 않는다. 조선은 왜군에 관한 정보를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는 반면, 왜군은 조선 수군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몰랐던 것 같다.

견내량까지 진출한 일본함대의 지휘관은 와키자카 야스하루.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해상보급로 개척의 특명을 받은 3명의 지휘관 중 가장 많은 전선을 보유한 장수다. 일본 수군은 3개 함대가 대규모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출전할 계획이었으나, ‘전공(戰功)’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와키자카과욕을 부린 나머지, 준비가 덜 된 다른 함대를 제쳐놓고 단독으로 출전하여 이곳 견내량까지 진출해온 것이다.

* ‘와키자카가 거느린 함대는 대선 36, 중선 24, 소선 13척 등 73척으로, 지금까지 해전에 참가한 일본 함대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함대였다. ‘와키자카는 한 달 전에 있었던 용인전투에서 1,600명의 병력으로 6만여 명이나 되는 조선군 대 부대를 해산시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과분할 정도의 칭찬을 받았다.

와키자카가 이렇게 단독으로 출전한 것은 이순신과 조선 수군으로서는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일본군이 보유한 110척이 넘는 대 규모의 연합함대를 구성해 출동했다면 ‘3차 출정때의 전투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3차 출정을 통해 조선 수군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상황에 빠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견내량(見乃梁)은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위치한 좁은 해협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 방면으로부터 ‘진해만’을 거쳐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반드시 뚫고 지나가야 하는 ‘통로’였다. 반면, 조선 수군으로선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목진지(관문)’였다. 임진왜란 23번의 해전 모두는 이곳 ‘견내량’을 통과하면서 시작됐다. 이순신은 이곳 견내량을 더 확실히 지키기 위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1593년 ‘통제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겨와 설치했다
견내량(見乃梁)은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위치한 좁은 해협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 방면으로부터 ‘진해만’을 거쳐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반드시 뚫고 지나가야 하는 ‘통로’였다. 반면, 조선 수군으로선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목진지(관문)’였다. 임진왜란 23번의 해전 모두는 이곳 ‘견내량’을 통과하면서 시작됐다. 이순신은 이곳 견내량을 더 확실히 지키기 위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1593년 ‘통제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겨와 설치했다

견내량은 좁고, 암초가 많고, 물살이 빠른 곳이다(수로의 폭이 제일 좁은 곳은 200m 내외, 최소 수심은 2m내외, 수로의 길이는 약 4km정도이다). 견내량을 벗어나 남쪽으로 내려오면 크고 작은 섬들이 많다.

이제까지의 전투는 양국군 모두를 합쳐야 50여 척 내외의 전선들이, 대부분 포구·항만 등 협소한 장소에서 기동이 거의 없는 정박상태에서 싸웠다. 그러나 이번 전투는 양상이 완전히 딴판이다. 두 나라의 전선 모두를 합하면 대선(大船)만 하여도 100여 척, 나머지 선박까지 합치면 150척에 이르는 대 함대가 직접 기동하며 싸우는 대규모 전투인 것이다. 견내량 일대는 양국의 대형 전선들이 을 형성하여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기에도, 조선 수군의 총통공격을 실시하기에도 제한사항이 많은 곳이었다. 견내량으로부터 왜선들을 유인하여 한산도 앞 넓은 바다에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 지금까지의 전투는 이순신함대가 일본 전선을 찾아다니며 벌인 전투였다면, 이번 전투는 반대가 된 것이다. ‘히데요시로부터 인정받은 부대라 사기도 높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공격해오는 것이다. 그간의 패전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앞선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의 전투방식을 파악한 상태에서 출전하였을 것이다. 전투의지 또한 높은 상태라, 결코 만만한 전투가 아닐 것이다.

한산도 해전의 경과

서울(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게시되어 있는 ‘한산도 대첩’ 전투도
서울(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게시되어 있는 ‘한산도 대첩’ 전투도

‘3도 연합함대는 더욱 확실해진 정보(적의 규모, 편성, 위치. 싸울 장소 등)를 바탕으로 더욱 세밀하게 작전을 수립했다. 이번 작전에서는, 먼저 일본함대가 육지로 도주하는 것을 막고, 대 함대의 기동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넓은 바다로 끌어내는 유인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그런 다음, 유인한 적 함대를 포위하여 격멸하기 위해 학익진 전법을 구사하기로 했다. 이순신이 이번 전투에서 사용하려는 학익진진법은 매우 복잡하여 주로 육상에서 사용하는 진법이다. 해상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고 이번에 처음 사용하는 것이다.

이순신장군은 방답첨사 이순신(방답진 : 여수 돌산도 소재)으로 하여금 판옥선 5~6척을 끌고 견내량 북단으로 가서 왜선들을 유인해 오게 했다. 유인부대가 견내량에 다다라 총통사격을 가하며 공격태세를 갖추자 왜선들이 곧장 추격해왔다. 조선 수군의 계획된 유인작전에 걸린 와키자카함대는 조선 수군을 얕잡아 보고 한산도 앞바다까지 곧장 쫓아온 것이다. 앞선 전투에서 당한 패배를 설욕하고픈 심정에 앞뒤 가리지 않고 따라 나왔을 것이다. 앞서 있었던 ‘7의 해전에서 단 한척의 조선 판옥선도 격침시키지 못하고 패전만 당한 일본군 입장에서는 안달이 나고도 남을 만 했을 것이다.

* 견내량 북쪽 바다로 유인작전에 투입된 판옥선은 5~6척이었다. 일본군 수군은 그간의 전투에서도 조선 수군의 유인작전에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순신장군은 이번 전투에서도 유인 부대를 적 진영에 투입했다. 왜군의 소굴로 들어가는 유인부대 장졸들의 기분도, 보내는 이순신장군의 마음도 착잡하였을 것이다. ‘유인작전은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에서 던진 승부수 학익진에 못지않은 또 다른 승부수였던 것이다.

유인작전 간 쫓아오는 왜선은 10배가 넘는 대 함대이다. 게다가, 일본의 전선들은 조선 판옥선보다 훨씬 빠르다. 적의 대 함대를 유인하여 아군이 있는 한산도앞 바다까지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 나오는 동안 얼마나 위기감을 느꼈을까. 혹시나 했던 유인작전은 성공했고, 이로써 역사적인 한산도 해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43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전이 전쟁기념관에서 있었다. 조선 수군의 ‘비장의 무기’인 거북선이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모습으로 새로이 등장했다. 학생들과 어린이 관람객들에게 최고로 인기있는 코너가 됐다
‘임진왜란 43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전이 전쟁기념관에서 있었다. 조선 수군의 ‘비장의 무기’인 거북선이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모습으로 새로이 등장했다. 학생들과 어린이 관람객들에게 최고로 인기있는 코너가 됐다

1단계 유인작전은 일단 성공했다. ‘화도주변의 섬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연합함대는 유인부대 판옥선을 추격해온 왜선에 대해 일사불란하게 학익진을 펼쳐 섬멸 작전을 구사하게 된다. 학익진에 의해 형성된 포위망을 서서히 좁히며 왜선들과 교전 가능한 거리까지 접근해 들어갔다. 그런 다음 제일 먼저, 비장의 돌격무기인 거북선을 적진 속으로 돌진시켜 적의 진형을 분리와해시켰다. 거북선의 돌진으로 진형이 와해되고 우왕좌왕하는 왜군 진영에 대해 주력 전투함인 판옥선을 돌진시켜 총통공격으로 왜선에 집중포화를 가했다. ‘총통사격은 근접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계속 실시하였으며, 더욱 근거리로 접근하게 되면서 (불화살)신기전도 공격에 가담하게 했다.

왜군들도 빠른 속도를 십분 활용하여 조선 수군과의 거리를 좁혀 조총으로 대응하면서 판옥선에 등선 육박전투를 시도했다. 이때부터 양국의 전선들이 거의 붙을 정도의 거리에서 혼전이 펼쳐졌다. 왜군들은 조선 수군의 우세한 총통 공격 앞에 조총을 쏘며 저항하였지만 등선을 하지 못하면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한산도 해전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명의 왜군도 조선 수군의 전함에 등선하지 못했다).

한산대첩광장에 있는 ‘한산대첩 전투 군상’(현지 설명글) : 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 전투장면을 판옥선 위에 재구성한 수군 군상 조형물이다. 조형물은 이순신장군을 중심으로 우국충정으로 전투에 참가한 사부, 포수, 기수, 나팔수, 고수, 격군 등 각자의 자리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나라를 지키고 사투를 벌였던 수군들의 활약상을 기리고자 하였다
한산대첩광장에 있는 ‘한산대첩 전투 군상’(현지 설명글) : 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 전투장면을 판옥선 위에 재구성한 수군 군상 조형물이다. 조형물은 이순신장군을 중심으로 우국충정으로 전투에 참가한 사부, 포수, 기수, 나팔수, 고수, 격군 등 각자의 자리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나라를 지키고 사투를 벌였던 수군들의 활약상을 기리고자 하였다

조선 수군의 유인전술에 말려 넓은 바다로 달려 나온 일본 함대는, 대 함대끼리의 전투에서 학익진을 펼친 조선 수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거북선에 의한 돌격과 판옥선에 의한 총통공격으로 말미암아 전투는 단 시간에 조선 연합함대의 압승으로 끝났다.

와키자카함대는 59척이 분멸격침되고, 14척 만이 전멸을 모면하고 부산 쪽으로 도주했다. 지휘관 와키자카는 구사일생으로 도주했으나 많은 부하 장수들과 장졸들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사했다. 조선수군은 단 한 척의 전선도 손상당하지 않고 적의 대 함대를 분멸격침시켰다.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해전이었다. 그래서 동양의 살라미스해전이라고 불리게 됐다.

* 한산도 대첩이 주목받는 이유는 학익진’(기동전)이다. 해상에서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전술을 선택한 것이다. 3도 수군의 훈련 수준은 일정하지 않았다. 함께 진법 훈련을 익힐 여건이 되지 않아 작전회의(모의훈련)’만 실시한 상태로 전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50척이 넘는 조선 함대가 70척이 넘는 왜군 함대를 맞아 학익진형태로 기동하면서 포격전을 펼친 것이다. 바다의 조건’(파도, 조류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앞서 있었던 7번의 해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다음 전투(해전)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조선 수군은 이번 3차 출정에 보유한 전선모두를 투입했다. 만약, 이 해전에서 패배할 경우 조선 수군의 전멸을 넘어, 조선의 멸망과 직결될 수도 있는 전투였다. 이순신은 이번 전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겠지만, 노심초사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해전에서 처음 사용하는 진법(학익진)’이었기에 일대 도박(?)’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었다.

* 임진왜란 전후 조선 수군의 해상훈련지침서인 수조규식(水操規式)’에 의하면 총통200(140, 150m), ‘30(20m) 이내에서 쏘도록 명시되어 있다. 총통의 경우는 왜선에 최대한 접근하면서 직사사격을 실시함으로써 명중률과 파괴력을 증대시키고, ‘화약을 절약하기 위해 철저히 통제했다고 한다.

한산도 해전이 있었던 159278, 같은 날 전라도를 공략하려는 일본군 육군을 맞아 펼친 육군의 호남방어전(이치웅치전투)에 관한 내용은 별지#1을 참고 바랍니다.

1592년 7월 8일 조선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73척의 왜선 중 59척을 분멸∙나포하며 대승한 것을 기념하는 ‘한산도대첩 기념비’. 430년 전의 한산도 대첩 현장을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설치했다. 거북선 모습의 ‘좌대’가 이색적이고, 높이가 무려 20m에 이른다. 제승당 바로 옆에는 충무공이 적군의 동태를 살피던 망루인 ‘수루(戍樓)’가 있다
1592년 7월 8일 조선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73척의 왜선 중 59척을 분멸∙나포하며 대승한 것을 기념하는 ‘한산도대첩 기념비’. 430년 전의 한산도 대첩 현장을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설치했다. 거북선 모습의 ‘좌대’가 이색적이고, 높이가 무려 20m에 이른다. 제승당 바로 옆에는 충무공이 적군의 동태를 살피던 망루인 ‘수루(戍樓)’가 있다

안골포 해전

와키자카 함대가 한산도 해전에서 참패하면서, 남은 14척의 전선은 부산 쪽 일본군 진영으로 도망쳤다. ‘와키자카와 함께 연합함대를 꾸려 한산도 바다로 출전하기로 했던 두 장수(‘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는 한산도 바다에서 빠져나온 수군들로부터 한산도 전투 상황을 전해 들었다. 그들은 부산본영에서 가까운 기지 안골포로 숨어들었다.

한산도 해전이 끝나고 그 다음 날인 79, ‘칠천도까지 진출한 이순신은 대 함대가 안골포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칠천도에서 하루를 지낸 다음 날 새벽에 출항하여 이른 아침 안골포 앞바다에 도착했다.

'안골포'는 가덕도 건너 육지에 위치한 좁은 '만'이다. 이곳은 수심이 얕아 썰물 때는 갯벌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포구가 깊어서 해상에서 공격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또한,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으로부터 멀지 않아 전투 간 본영으로부터의 배후공격도 예상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산도 해전의 주력군인 ‘와기자카’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이동 중 안골포로 숨어든 지원세력(가토, 구키 연합함대 42척)을 공략하는 ‘안골포 해전’을 치렀다. 포구가 좁고 수심이 얕아 제대로 공격할 수 없어 물때를 이용해 교대로 야간공격까지 실시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한산도 전투의 여세를 몰아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군의 ‘전진기지’인 ‘웅포’가 손에 잡힐 듯하다
한산도 해전의 주력군인 ‘와기자카’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이동 중 안골포로 숨어든 지원세력(가토, 구키 연합함대 42척)을 공략하는 ‘안골포 해전’을 치렀다. 포구가 좁고 수심이 얕아 제대로 공격할 수 없어 물때를 이용해 교대로 야간공격까지 실시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한산도 전투의 여세를 몰아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군의 ‘전진기지’인 ‘웅포’가 손에 잡힐 듯하다

왜선들은 안골포 깊숙한 곳에 42척의 배를 매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포구에 정박해 있는 왜선들이 육지로 도주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왜선들을 바다 바깥으로 유인하려 했다. ‘한산도 해전에서 와키자카함대가 이순신의 유인작전에 걸려 참패당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왜군들은 포구에서 한 발짝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왜군들이 유인작전에 말려들지 않고 시간만 흐르자, 오후 물 때(만조)에 맞춰 작전을 변경해 왜선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안골포를 공격할 때 가덕도 일대에 배치했던 이억기 함대까지 합류시켰다(일부 전선은 가덕도 일대에 계속 매복 조치했다). 연합함대는 2~3척씩 를 편성하여 교대로 포구를 드나들며 맹공을 펼쳤다.

안골왜성 : 원래 조선수군의 석성이 있던 곳에 왜군들이 일본식 성으로 다시 쌓았다. 안골포해전 이듬해. 1593년 일본군들이 장기전에 대비하여 남해안에 축조한 성들 중의 하나로, 거제도∙웅천 쪽 왜성들과 통합하여 부산에서 서진하는 ‘항로’를 방호하고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쌓았다
안골왜성 : 원래 조선수군의 석성이 있던 곳에 왜군들이 일본식 성으로 다시 쌓았다. 안골포해전 이듬해. 1593년 일본군들이 장기전에 대비하여 남해안에 축조한 성들 중의 하나로, 거제도∙웅천 쪽 왜성들과 통합하여 부산에서 서진하는 ‘항로’를 방호하고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쌓았다

조선 수군의 공세가 격해지자, 왜군들도 조선 수군의 공세에 맞서 전선(戰船)을 지키기 위해 돌격조를 운영하여 저항하기 시작했다. ‘안에 정박해있던 왜선에 대한 공격은 밤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왜군은 많은 전선이 격침되고 사상자도 많이 발생했다.

밤이 깊어 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이순신은 함대를 안골포 밖으로 물렸다. 조선 연합함대가 물러난 틈을 타, ‘구키가토는 남은 전선들을 이끌고 야음을 이용해 감시망을 뚫고 밤중에 부산쪽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다음 날 새벽, 연합함대가 안골포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내에는 도망친 일본군의 흔적만 있을 뿐이었다. 안골포해전은 이렇게 싱겁게, 어처구니없이 끝이 나고 말았다.

이순신 연합함대는 한산도해전에 이어 이곳 안골포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야심차게 투입한 일본 정예 함대를 연달아 격파하는 전과를 거뒀다. 그러나 작전의 미숙으로 왜선 모두를 분멸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전투가 아닐 수 없다.

* 결과적으로 이순신은 일본군 함대 일부 세력을 놓치고 말았다. 야간이라 더 이상의 피해 발생을 우려하여 공격을 중지하고 물러난 것을 적절했지만, 경계대책을 제대로 강구하지 않아 일본군의 도주를 허용하고 만 것은 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궤멸시키며 거뒀던 전과를 극대화하지 못한 면이 있. 이제까지 이순신이 펼쳤던 작전 지휘를 감안한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연합 함대의 무력시위’, 일본군의 심리에 타격을 주다

경상좌수영 바다의 서쪽 끝 ‘낙동강 하구’. 안골포 해전이 끝나고, 협선과 포작선의 호위를 받은 ‘3도 연합함대’ 판옥선 60여 척이 무려 3km의 대형을 이루고 무력시위를 펼쳤던 곳이다. 낙동강 하구에는 조선의 연합함대로 완전히 뒤덮였을 것이다. ‘몰운대, 여기까지가 조선 순군의 관할이야...!’라고 선포하며 일본군을 위협했다. 이곳을 지나면 일본군의 본영이 있는 ‘부산포’다
경상좌수영 바다의 서쪽 끝 ‘낙동강 하구’. 안골포 해전이 끝나고, 협선과 포작선의 호위를 받은 ‘3도 연합함대’ 판옥선 60여 척이 무려 3km의 대형을 이루고 무력시위를 펼쳤던 곳이다. 낙동강 하구에는 조선의 연합함대로 완전히 뒤덮였을 것이다. ‘몰운대, 여기까지가 조선 순군의 관할이야...!’라고 선포하며 일본군을 위협했다. 이곳을 지나면 일본군의 본영이 있는 ‘부산포’다

안골포해전이 끝나고, 연합함대는 귀환을 하루 늦추고 몰운대(부산 다대포 일대)까지 해상 시위를 펼쳤다. 전투 현장 안골포를 출발하여 적의 본거지가 있는 부산쪽으로 전 함대를 움직였다. 부산 쪽으로 향하는 이동로 주변의 김해낙동강 요소요소에는 적의 소규모함대들이 정박하고 있던 곳이고, 본거지인 부산과는 지척의 거리다. 자칫 협공기습의 우려도 있는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다.

몰운대까지 이동하며 한편으로는 정탐활동을 펼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탄을 쏘며 조선 함대의 위용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는 왜군에게는 대적(對敵)할 생각을 아예 포기하게 하는 경고가 되고, 조선 수군에겐 사기를 올릴 수 있는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정탐한 결과, ‘양산김해강(낙동강) 깊숙한 곳에 왜선 100여척이 정박하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부산 쪽으로 도주한 것으로 확인됐다. 

부산 쪽 '몰운대'까지의 해상시위를 마친 7월 11일 야간, 가덕도(천성포구)에 들러 이곳에 오래 동안 주둔할 것처럼 기만한 다음, 밤을 틈타 귀환 길에 올랐다. 통영에 도착한 연합함대는 이미 '군량'이 떨어지고 있고, 또한 '금산(충남)' 일대에 적(일본 육군)의 형세가 사납게 날뛰고, 적이 이미 전주에 이르렀다'는 전통(傳通)이 잇따르고 있어 7월 13일 각 수영으로 귀환했다. 

낙동강 하구 ‘몰운대’까지의 무력 해상시위를 실시함으로써 제3차 출정을 마무리했다. 가덕도 ‘천성포구’에서 장기 주둔할 것처럼 기만작전을 펼쳤다. 그러고는 견내량과 한산도 쪽으로 복귀해갔다
낙동강 하구 ‘몰운대’까지의 무력 해상시위를 실시함으로써 제3차 출정을 마무리했다. 가덕도 ‘천성포구’에서 장기 주둔할 것처럼 기만작전을 펼쳤다. 그러고는 견내량과 한산도 쪽으로 복귀해갔다

 

< 별지 #1. ‘이치.웅치전투의 승리, 전라도 보급기지 확보 기도를 막다 >

개전 후 연속적인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일본군의 기본전략인 수륙병진전략이 심한 타격을 입자, 심각한 보급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초강수를 두게 된다. 육전에 참가 중이던 수군 장수들(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3)까지 남쪽으로 불러내려 해전에 투입하여 바닷길 개척을 추진한다. 또한, 대규모 지상군을 전라도 지역에 투입하여 보급기지확보를 추진한다.

일본 지상군 중 전라도 담당 부대인 6번대(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지휘. 15,700)로 하여금, ‘금산을 발판으로 삼아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를 공격하게 한다. ‘대둔산자락의 이치(梨峙)를 경유하는 길과, ‘진안에서 웅치(熊峙)완주를 거치는 두 길을 통해 전주로 진출을 시도한다. ‘전주에 이르는 두 접근로를 통한 일본군의 공세를 차단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으니 웅치이치전투이다.

전주와 전라도를 공략하는 일본군의 공세를 이틀 동안 지연시킨 ‘웅치전투’ 전적지. 1:10에 가까운 병력 차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어 일본군의 ‘전주성’ 공략이 실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치전투’와 연계해 호남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전주와 전라도를 공략하는 일본군의 공세를 이틀 동안 지연시킨 ‘웅치전투’ 전적지. 1:10에 가까운 병력 차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어 일본군의 ‘전주성’ 공략이 실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치전투’와 연계해 호남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일본군의 전주진출을 방어해야 할 부대는 임진왜란 최악의 패전인 용인전투에서 패한 나머지, 기껏 3천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부대였다. 전라도 도절제사 권율장군은 3천명도 되지 않는 적은 병력을 나눠 두 접근로에서 일본군을 방어해야만 했다. 권율장군은 적 주력의 접근이 예상되는 이치고개에 동복현감 황진장군과 함께 1,500의 병력으로 막고, 또 다른 예상 접근로인 웅치에는 김제군수 정담장군 등 1천여 명으로 막기로 했다.

일본군 주장(主將) 고바야카 타카카게는 권율장군과 정반대의 방책을 채택했다. ‘고바야카자신은 2천여 병력으로 권율장군이 방어 중인 이치를 공격하고, 1만 명의 주력군은 웅치를 공격하기로 했다. 또한 3천여 명으로 하여금 배후기지인 금산을 지키게 했다. 일본군은 웅치를 먼저 무너뜨리면 이치도 쉽게 무너질 것으로 판단했고, 그런 다음에 합세하여 전주로 공격할 계획이었다.

이치전투는 대둔산 자락의 험준한 지형에 기댄 조선군이 지형을 십분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의 전력 또한 비등하여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권율장군은 적은 병력이지만 직접 전투를 독려하며 일본군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일본군은 많은 피해를 입고 금산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치전투’ 전적지. 웅치전투와 연계하여 일본군의 전라도 침범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이로써, 임진왜란 7년 동안 조선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량확보와 병력 충원을 보장하는데 크게 기여한 전투다. 권율이 직접 지휘한 전투로, 권율은 이치전투를 ‘행주대첩’보다 더 높이 평가했다
‘이치전투’ 전적지. 웅치전투와 연계하여 일본군의 전라도 침범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이로써, 임진왜란 7년 동안 조선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량확보와 병력 충원을 보장하는데 크게 기여한 전투다. 권율이 직접 지휘한 전투로, 권율은 이치전투를 ‘행주대첩’보다 더 높이 평가했다

웅치는 적을 맞아 싸우기에 적합한 지형이었지만, 1,500명의 병력으로 1만 명의 대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버거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군은 이곳 웅치에서 이틀간 치열한 전투를 치르느라 화살이 떨어지고 백병전까지 실시해야만 했다. 마침내, 방어선 전체가 돌파당해 많은 장졸이 전사하면서 전투에서 지고 말았다. 하지만, 1:10에 가까운 병력 차에도 불구하고 이틀간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안겨, 일본군의 다음 전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웅치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일본군 안코쿠지부대는 전주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전주성에는 이미 이 총동원되어 완벽한 방비태세를 갖춰놓은 상황이라 공략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또한, 의병장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과 전라도 관군 연합의 6~7천의 대 병력이 일본군의 배후 본영인 금산으로 접근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전주성을 공략하려던 일본군은 계획을 접고 본영 금산으로 후퇴하려 했다. 그러나 금산으로 후퇴하던 과정에서, 일본군은 웅치전투에서 퇴패한 조선군 잔여 병력과 이치로부터 증원해온 황진장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다음에야 금산으로 물러날 수 있었다(안덕원 전투).

이렇게 전주전라도를 방호하기 위한 일련의 전투(웅치이치전투-전주성의 농성-안덕원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조선군 지상군이 이긴 값진 승리로 전쟁 수행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전라도를 지켜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전라로를 점령해서 보급문제를 해결하려던 일본군의 기도가 실패하고, 일본군의 전체 작전은 더욱 어려움에 봉착하게 됐다.

이치웅치에서 거둔 지상전의 승리는 한산도 해전과 함께 임진왜란의 큰 흐름을 바꾼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또한, 그간 관군과 의병이 분리되어 별도로 전투를 실시하여 큰 성과를 내지 못했으나, 이후에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관군과 의병이 합동부대를 편성하여 싸워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후일, 권율장군은 자신이 참가한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행주대첩보다 이곳 웅치(이치)전투를 더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이 전투들이 중요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한산도의 중심 건물 ‘제승당(制勝堂)’. 1593년 8월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 받아 한산도에 통제영(전진기지)을 설치했을 때 막료 장수∙부하들과 작전회의를 했던 작전지휘소, 집무실(숙소) 공간이었다. 정유재란 때 폐허가 됐다가 이후 옛 운주당 터에 새로이 복원한 것이다. 제승당 내부에는 기둥에 2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 ‘맹산서해(盟山誓海)’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욕일보천(浴日補天)’이라는 글귀는 낯설다. 이 글귀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편지에서, 이순신장군의 업적을 ‘육일보천지공(浴日補天之功. 해를 씻어 깨끗이 하고 하늘의 허물을 메운 공)’이라 칭송했던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가히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극찬의 내용인 것이다
한산도의 중심 건물 ‘제승당(制勝堂)’. 1593년 8월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 받아 한산도에 통제영(전진기지)을 설치했을 때 막료 장수∙부하들과 작전회의를 했던 작전지휘소, 집무실(숙소) 공간이었다. 정유재란 때 폐허가 됐다가 이후 옛 운주당 터에 새로이 복원한 것이다. 제승당 내부에는 기둥에 2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 ‘맹산서해(盟山誓海)’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욕일보천(浴日補天)’이라는 글귀는 낯설다. 이 글귀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편지에서, 이순신장군의 업적을 ‘육일보천지공(浴日補天之功. 해를 씻어 깨끗이 하고 하늘의 허물을 메운 공)’이라 칭송했던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가히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극찬의 내용인 것이다

< 별지#2. 시대(時代)와 국적(國籍)을 뛰어넘어 추앙받는 이순신장군 >

우리 역사를 통틀어 누란의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했던 가장 위대했던 인물로 이순신장군이 꼽히고, 그를 기리고 뜻을 이어받기 위해 서울 한 복판에 충무공 이순신장군 상을 세웠다(1968. 광화문광장). 이보다 앞서, 6.25전쟁 중이던 1952년 전란 극복의 의지를 담아 첫 대형 충무공 이순신 상이 이승만대통령 주관으로 진해에 세워졌다(해군 정비창에서 제작). 그 후 이순신장군을 기리는 동상들이 학교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줄줄이 세워진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해군에 입대하는 장병들은 우리는 영예스러운 충무공의 후예이다라고 시작하는 해군의 다짐이란 것을 접하게 된다. 충무공의 후예가 된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며 군복무를 시작하는 것이다.

해군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기리는 의식이 많다. 그 중, 해군의 전 장병들은 훈련교육 기간 중 통영에 있는 제승당충렬사를 찾아 이순신장군을 참배하고, 해군의 일원이 된 것을 아뢰는 신고 의식이 있다.

이 의식은 1948년부터 신병을 대상으로 시작한 이래, 전 교육과정으로 확대하여 해군의 구성원이 되는 모든 장병들을 대상으로 시행해오고 있다. 그러던 중, 1974년도에 있었던 ‘YTL(예인선 : 대형 함정이 항구에 출입항할 때 함정을 끌어주거나 밀어주기 위한 특수목적 선박) 전복사고가 발생하여 한 동안 중단되기도 했으나, 다시 재개한 이래 현재까지 해군 전 장병들은 훈련(교육)과정 수료하기 전에 참배 의식을 빠짐없이 실시하고 있다.

통영 해상순직장병 위령비 : 1974년 2월 이순신장군의 후예가 되기 위한 훈련소 마지막 과정인 ‘한산도∙충렬사 참배’를 마치고 귀환하다 기상 돌변으로 예인선이 전복하면서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159명의 젊은이가 순직했다. 그런데, 추모해야 할 ‘위령비’가 이순신 공원에서 제일 외진 곳에 세워져 있어 찾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나라를 위한 ‘희생’이 오늘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어서 안타깝다
통영 해상순직장병 위령비 : 1974년 2월 이순신장군의 후예가 되기 위한 훈련소 마지막 과정인 ‘한산도∙충렬사 참배’를 마치고 귀환하다 기상 돌변으로 예인선이 전복하면서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159명의 젊은이가 순직했다. 그런데, 추모해야 할 ‘위령비’가 이순신 공원에서 제일 외진 곳에 세워져 있어 찾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나라를 위한 ‘희생’이 오늘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어서 안타깝다

* YTL 전복사고 : 19742, 통영(충무) 앞바다에서 해군 소속 항내 예인선’(YTL)이 침몰해 해군해양경찰(전투경찰) 훈련병 159명이 숨진 사고이다. 해군 역사상 최악의 해난사고였다. ‘제승당충렬사참배를 마친 훈련병들이 YTL에 승선하여 통영항에 대기 중인 전차상륙함(LST)으로 복귀하던 중 기상악화로 인해 전복하면서 발생한 사고이다.

임진왜란의 적국인 일본 내에서도 이순신장군을 존경하는 사람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보다 더 많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 중 한명이 러일전쟁 때 쓰시마해전에서 일본 해군사령관이었던 도고 헤이하지로제독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다음 군신(軍神)으로 칭송받는 영웅이 되었다. 러일전쟁 전승축하연에서 있었던 일화, 넬슨 vs 도고 헤이하지로 vs 이순신의 비교와 관련하여 도고제독이 이순신을 존경했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쓰시마 해전 당시 일본 해군이 사용한 진법인 정자(丁字) 진법학익진의 응용이었다.’라는 얘기를 포함해서 기분 좋은 이야기는 진위(眞僞)를 떠나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국내에 주둔하던 일본 해군 장병들이 이순신장군에 대한 참배행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일본인 사학자 후지이 노부오가 쓴 이순신 각서(李舜臣 覺書)에는 도고이순신장군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말한 내용이 있다. 또 하나, ‘일본 해군들은 매년 한산싸움이 벌어졌던 통영으로 갔다. 그리고 300년 전의 적장 이순신에게 ()(진혼제.鎭魂祭)를 올렸다. 이곳에서 있었던 싸움(한산도해전)이 이순신의 훈공 중에서 가장 눈부셨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또 다른 작가 시바 료타료가 쓴 가도(街道)를 가다(한국 편)에서 일본 해군은 창설 초기, 이순신에 관해 많은 연구를 했다. 연구를 통해 300년 전의 조선 적장(이순신)에 대해 존경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해군의 전통이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통영 충렬사. 1606년 ‘충무공 이순신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봉행토록 하라’는 선조의 명에 의해 지어졌다. 위패와 이순신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봄과 가을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해군의 모든 교육과정의 교육자들이 수료 전 ‘이순신장군 참배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해군사관학교 신입생들이 정식 사관생도가 되기 직전 충렬사를 참배한 후에 찍은 사진. 군기가 바짝...  = 해군사관학교 제공)
통영 충렬사. 1606년 ‘충무공 이순신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봉행토록 하라’는 선조의 명에 의해 지어졌다. 위패와 이순신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봄과 가을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해군의 모든 교육과정의 교육자들이 수료 전 ‘이순신장군 참배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해군사관학교 신입생들이 정식 사관생도가 되기 직전 충렬사를 참배한 후에 찍은 사진. 군기가 바짝...  = 해군사관학교 제공)

일본 해군들은 적국의 수장이었던 이순신장군에 대해 매우 존경했던 것 같다. 일제 강점기 때 진해에 주둔했던 일본 해군들이 진해에서 가까운 여러 전장들을 두고 먼 통영까지 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산도 해전에 대한 일본군의 평가와 그 해전을 지휘한 이순신장군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의 발로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신들의 선조들에게 수많은 피해를 안겼던 적장에 대한 태도를 보면서 오히려 섬뜩한 기분이 든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장군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갖는 존경심은 어떠한지 새겨볼 만한 일이다.

 

3차 출정(한산도 해전, 안골포 해전)의 의의와 영향

새로운 진법 학익진을 사용한 한산도에서 있었던 조선과 일본 대() 함대끼리의 결전은 조선 수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앞선 2차례 출정의 성과와 견줄 수 없는 대승을 이뤘다. 무엇보다 일본군의 본영인 부산의 코앞까지 진출하며 해상시위를 펼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일본군 수뇌부의 심리에 크나큰 타격을 줬다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보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본군의 또 다른 시도(試圖), ‘전주를 점령하여 육로로 전라도를 공략하려던 기도마저 조선 육군(관군)에 의해 전주를 향하는 요지인 웅치이치에서 막히고 말았다. 이로써, 육상을 통한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이 모두 끊긴 일본군은 평양에서 발이 묶인 나머지, ‘의주를 공략할 동력을 잃고 말았다. 이후 전쟁은 침체기에 접어들고 만다.

별지 #1. ‘이치웅치전투의 승리, 전라도 보급기지 확보를 향한 몸부림을 꺾었다.

세병관. 선조38년(1605) 7월에 준공한 통제영의 중심 건물로, 궐패(闕牌)를 모시고 매월 2회 ‘망궐례’를 올리거나 출전하는 군사들이 ‘출사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세병관(洗兵館)이라는 이름은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詩) 중에서 ‘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어 영원히 전쟁에 쓰지 않도록 할까’(淨洗甲兵長不用. 정세감병장불용)에서 빌려온 내용이란다. ‘세병관’에 이르는 중문(中門)격인 ‘지과문’(止戈門. 창∙전쟁을 그치게 하는 문)과 세병관 내부의 현판인 ‘괘궁정’(掛弓亭. 활을 걸어두는 정자)도 평화를 염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세병관’은 평소 병장기(兵仗器)를 잘 구비하고 훈련을 잘 시켜 전쟁에 대비하되 진정한 목표는 전쟁을 그치게 하는데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세병관. 선조38년(1605) 7월에 준공한 통제영의 중심 건물로, 궐패(闕牌)를 모시고 매월 2회 ‘망궐례’를 올리거나 출전하는 군사들이 ‘출사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세병관(洗兵館)이라는 이름은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詩) 중에서 ‘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어 영원히 전쟁에 쓰지 않도록 할까’(淨洗甲兵長不用. 정세감병장불용)에서 빌려온 내용이란다. ‘세병관’에 이르는 중문(中門)격인 ‘지과문’(止戈門. 창∙전쟁을 그치게 하는 문)과 세병관 내부의 현판인 ‘괘궁정’(掛弓亭. 활을 걸어두는 정자)도 평화를 염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세병관’은 평소 병장기(兵仗器)를 잘 구비하고 훈련을 잘 시켜 전쟁에 대비하되 진정한 목표는 전쟁을 그치게 하는데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산도 해전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전환점이 됐다. ‘히데요시는 해상 보급로를 뚫기 위해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의 해상 지휘관들 모두를 한산도 해전에 투입하고도 완패했다. ‘히데요시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더 이상 해전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라는 해전 금지령까지 내리게 됐다. 조선 침략 전략인 수륙병진책은 완벽하게 좌절되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 수군이 제해권(制海權)’을 완전히 장악함에 따라 일본 수군은 본거지 부산일대에 고립되고 말았다. 낙동강 이서(以西) 해역으로의 진출을 포기한 채 바다 주변의 섬과 육지를 연하여 왜성을 축성하는 등 전략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조선 수군이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함에 따라, 의주의 조선 피난 조정은 제한적이나마 나라를 운영할 수 있게 됐다. 서해 해로를 통해 한반도 서부와 제주도에 대해 피난 조정의 행정력이 미칠 수 있게 됐고, 전라도에서 생산된 각종 물자를 평안도의 피난 조정과 한반도 서부 지역에 공급할 수 있게 됐다. 마침내 선조는 '명(明)' 나라로 망명하려던 계획을 접고 국내 잔류하는 방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또한,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졌던 조선 육군에게 승리에 대한 자극제가 되고, ‘용기를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전라도를 보전해 이를 바탕으로 조선이 중흥(中興)을 이룩한 것도 한산대첩의 승리 때문이었다.’라고 한산도 해전을 극찬했다.

전쟁 없는 세상, 평화를 기리는 ‘지과문’(止戈門)과 세병관 내부에 있는 또 다른 현판 ‘괘궁정’(掛弓亭)  = 해병대 통영상륙작전기념관 제공 
전쟁 없는 세상, 평화를 기리는 ‘지과문’(止戈門)과 세병관 내부에 있는 또 다른 현판 ‘괘궁정’(掛弓亭)  = 해병대 통영상륙작전기념관 제공 

통영지역을 자전거로 답사여행을 하려면

‘3차 출정때는 두 번의 해전이 있었다. 너무나 잘 알려진 통영의 한산도 해전이고 다른 전투는 진해와 부산의 경계에서 있었던 안골포 해전이다. 안골포 해전은 전사(戰史)적 가치가 매우 큰 전투이지만 그렇게 널리 알려진 전투는 아니다.

두 해전지 간의 거리는 직선으로 40km가 넘는다. 동시에 답사하려면 거제도나 창원 쪽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두 곳을 연계하는 코스 설정은 결코 쉽지 않다.

통영지역을 자전거로 답사한다면 크게 통영 시가지, 미륵도, 한산도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임진왜란 관련 전사적지는 통영시내와 한산도에 집중되어 있다.

착량묘 : 이순신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공’을 따라 종군했던 수군과 이곳 지역 주민들이 장군의 충절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초묘’를 지었다가(1599년), 이후에 고쳐짓고 ‘착량묘’라 불렀다. ‘공’의 기신제를 처음으로 올린 ‘이 충무공’ 사당의 효시이다(이충무공을 기리는 최초의 사당으로 알려진 여수의 ‘충민사’(1601년) 보다 앞선다). 매년 음력 11월 19일 충무공이 순국한 날에 기신제(忌辰祭)를 봉행하고 있다. 착량묘에 입구에 세워진 ‘이 충무공 한산대첩비’는 통영 남망산 공원의 ‘이순신 장군 동상’ 옆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착량묘 : 이순신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공’을 따라 종군했던 수군과 이곳 지역 주민들이 장군의 충절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초묘’를 지었다가(1599년), 이후에 고쳐짓고 ‘착량묘’라 불렀다. ‘공’의 기신제를 처음으로 올린 ‘이 충무공’ 사당의 효시이다(이충무공을 기리는 최초의 사당으로 알려진 여수의 ‘충민사’(1601년) 보다 앞선다). 매년 음력 11월 19일 충무공이 순국한 날에 기신제(忌辰祭)를 봉행하고 있다. 착량묘에 입구에 세워진 ‘이 충무공 한산대첩비’는 통영 남망산 공원의 ‘이순신 장군 동상’ 옆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통영 시가지에서 널리 알려진 곳은 세병관과 충렬사이다. 그 외의 장소로는 이순신공원, 한산대첩광장, 남망산 공원, 착량묘(해저터널) 정도가 될 것이다. 한산도에서는 제승당(운주당)과 충무사(사당), 한산정(활터), 수루 등이 있다. 한산도와 추봉도를 연결하는 코스 역시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한산도에 가기 위해서는 통영 항에서 배편을 이용해야 한다.(이번 취재 여행 때 한산도를 방문하지 않고 과거 방문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미륵도에는 당포해전이 있었던 당포항()’이 있다. 미륵도를 일주하는 코스는 어느 한곳도 그냥 질주해 지나가기엔 너무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미륵도 일주는 적절한 업-다운이 있는 약 50km 코스로 하루가 즐거울 정도이다.

‘통영 운하’는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를 관통하는 약 1.5km의 물길이다. 원래 이곳은 썰물 때 도보로 왕래가 가능했을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한산도 해전’에서 패한 왜군들이 도망가다 퇴로가 막히자, 이곳을 파서 물길을 뚫어 사용하면서 ‘판대목’(착량, 鑿梁)이라 불렀다고 한다.일제강점기 때 큰 배의 왕래를 위해 다리를 없애고 해협을 넓히는 운하공사를 실시하여 1932년 완공됐다. 통영 운하의 완공과 때를 같이 하여 통영해저터널도 개통되었다. 이후 1970년대 여수와 부산을 ‘날아 다녔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쾌속여객선 ‘엔젤호’가 바로 이 물길 ‘통영운하’를 이용하여 오갔다. 뒤편으로 두 개의 다리 충무교(1967년), 통영대교(1998년)가 보인다  = 해병대 통영상륙작전기념관 제공 
‘통영 운하’는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를 관통하는 약 1.5km의 물길이다. 원래 이곳은 썰물 때 도보로 왕래가 가능했을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한산도 해전’에서 패한 왜군들이 도망가다 퇴로가 막히자, 이곳을 파서 물길을 뚫어 사용하면서 ‘판대목’(착량, 鑿梁)이라 불렀다고 한다.일제강점기 때 큰 배의 왕래를 위해 다리를 없애고 해협을 넓히는 운하공사를 실시하여 1932년 완공됐다. 통영 운하의 완공과 때를 같이 하여 통영해저터널도 개통되었다. 이후 1970년대 여수와 부산을 ‘날아 다녔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쾌속여객선 ‘엔젤호’가 바로 이 물길 ‘통영운하’를 이용하여 오갔다. 뒤편으로 두 개의 다리 충무교(1967년), 통영대교(1998년)가 보인다  = 해병대 통영상륙작전기념관 제공 

통영시내에는 그 외에도 동피랑 마을, 통영케이블카(미륵산), 박경리기념관, 중앙어시장, 해병대통영상륙작전기념관(최초의 한국군 단독 상륙작전) 등을 연결하면 더욱 알찬 자전거 답사 여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여건이 좀 더 가용하다면 견내량(거제대교)을 건너 거제도로 넘어가면 더욱 풍성한 볼거리가 있다거제도 자전거 여행은, 앞선 여행기 메멘토벨로 시즌2 / 불멸의 전승, 이순신 ’2323의 바다를 가다(4)’ 불멸의 전승 신화의 시작, ‘옥포 대승첩(2022. 11. 19)을 참고하면 좋다.

< 참고 자료 >

*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8

*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7

* 황현필, <이순신의 바다>, 역박연, 2021

* 제장명, <이순신 백의종군>, 행복한 나무, 2011 

* 박종평, <난중일기> 글 항아리, 2018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