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산야와 청정바다

소가야 왕족 묘원으로 추정되는 송학동고분군과 고인돌. 고인돌 위에 파인 구멍은 밤하늘의 별자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가야(小伽倻)는 6가야 중 기록과 흔적이 가장 적은 잊혀진 왕국이다. 이름부터 ‘작은 가야’인 것은 고령의 대가야에 대응한 비교명칭으로 스스로 존재감을 위축시키고 있다.

기록으로 보면, 6가야를 세운 김수로왕의 6형제 중 막내인 말로(末露)가 가락국(금관가야) 건국 15년 후인 서기 57년, 지금의 고성지방에 나라를 세운 후 9대 이형왕(而衡王) 때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532년) 475년간 존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 비화가야(창녕)에는 그나마 고분과 산성, 전설이 꽤 많이 남아 있지만 고성에 가면 고분 몇 기와 산성 한둘만 전할 뿐이다. 6가야 중 소가야와 성산가야(성주)의 유적 유물이 가장 적은 것은 그만큼 외방이고 나라 규모도 작았음을 뜻한다.

손에 잡히고 눈에 밟히는 것은 적더라도, 이 겨울 따뜻한 남해 행은 설렘부터 부른다. 소가야 당시의 유적이 얼마나 있든 지금 살고 있는 고성 사람들 상당수는 소가야의 후예 아니겠는가. 그 땅에 사람이 사는 한 그 역사, 그 전통은 면면히 온존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송학동고분군 아래로 고성읍내가 펼쳐지고, 동남쪽 외곽에는 방어산성이 있던 거류산(572m)과 통영 경계의 벽방산(650m)이 나란히 솟아 있다

송학공고분군 정상에 있는 1호분은 한때 고대 일본의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으로 추정됐으나 확인 결과 3기의 무덤이 잇달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성읍 외곽에 들어서면 멀리 거대한 고분이 보인다. 유적이 없다 해도 역시 소가야의 유산은 이 땅에 엄연하다. 대표적인 소가야 유적인 송학동고분군이다. 바로 옆에 고성박물관도 있고 주차장도 잘 되어 있어 기점으로 정한다.

야트막한 구릉지는 소가야 왕족이 춤추는 기녀와 놀았다고 해서 무기산(舞妓山)이라고 하며, 주변에는 총 14기의 고분이 분포한다. 가장 상징적이고 중심이 되는 무기산 자락의 고분 8기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조성된, 소가야 왕족과 장군들의 무덤으로 전해진다. 정상부의 1호분은 직경 33m, 높이 4.5m에 이르는 대형분으로 남북으로 길게 3기의 무덤이 모여 있다. 한때는 하나의 고분처럼 보였고 그 형태가 고대 일본에 흔했던 전방후원분으로 추정됐지만 발굴 결과 3기의 무덤이 연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최북단 고분은 돌방 내부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고 이는 전남 일부와 일본 규슈 지역에서 발견되는 양식이어서 일본과의 연계성을 보여준다.

송학동고분군 바로 옆으로 시작되는 무학마을 골목정원. 특별한 정취가 있는 소읍 뒷골목이다  

송학동고분군은 유적이라기보다 잘 가꾼 잔디밭과 고분 사이로 난 예쁜 산책로가 소공원 같다. 주민들도 편안하게 산책을 즐기고 있다. 규모로 보아 왕릉급이 분명하지만 고려, 조선과 맞먹는 475년 역년에 비하면 일단 숫자가 너무 적다. 고령과 창녕, 함안에 즐비한 수백기의 고분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고분군 북단에는 특이한 고인돌이 한 기 있다.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7.5km 떨어진 두포리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인데, 윗면에 30여개의 구멍(性穴)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가장 큰 7개는 북두칠성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고대인들이 하늘의 별을 땅 위의 바위에 새긴 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불변과 영생에 대한 소망의 반영이 아닐까 싶다. 당시 사람들에게 바위와 별자리는 한 사람의 인생으로는 눈꼽만큼도 차이를 알 수 없는, 영구불변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 옛날 소가야 지배층이 말을 타고 북방에서 내려왔다면 현대의 방랑자는 자전거를 타고 온 것만 다를 뿐  

읍내 남쪽에 있는 동외동패총. 제사 흔적이 발견된 구릉지 중턱에 길이 40m, 폭 15m 정도의 영역이 보존되고 있다

고분군 바로 동쪽에는 ‘무학마을 골목정원’이라는 현판이 붙은 아치가 서 있고 담장에는 가야의 중장기병과 왕의 행차도가 그려져 있다. 어딘가 고구려 벽화 풍인데, 가야 지배층은 북방 기마민족 출신이 확실해서 옛날의 무사가 말을 타고 왔다면 현대의 방랑객은 자전거를 타고 온 것이 다르다. 중장기병 옆에 자전거를 척 세워 본다.

주민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작은 골목을 따라 천천히 전진한다. 가장 큰 읍내지만 젊은이를 보기가 쉽지 않다. 이제 전국 어디를 가나 소읍의 뒷골목에서 활력과 생기는 난망이다.

읍내 남쪽 작은 언덕에 가야시대 유적으로 추정되는 동외동패총이 있다. 읍내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아 한참 내륙 같지만 옛날에는 읍내 남쪽이 바로 바다와 면했을 것이다. 지금도 패총에서 바다까지는 1.3km밖에 되지 않아 패총이 의외의 유적은 아니다. 조사결과 신석기시대부터 가야 초기까지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중국 한(漢)나라의 거울 조각이 발견되어 중국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구릉지 정상부에서는 주거지와 제사 유구, 4세기대 새 무늬 청동기가 발견되어 제례가 이뤄진 장소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왕궁도 이 근처 어디쯤에 있었을 텐데 아직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다른 가야 지역도 마찬가지여서, 신라 병합 이후 철저히 파괴되고 방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현 교육청 일대가 왕궁터로 적합하지 않았을까 싶다.

동외동패총에 노출된 조개 껍질들

패총 한켠에서는 야철지도 발견되었다  

여기에도 남산공원이 있다.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은 무조건 남산(南山)이나 뒷산이 되고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왕성 지근거리에 있는 이런 산을 그냥 방치했을 리가 없다. 작은 성곽이라도 있었음이 분명한데 자세히 보면 산허리에 인공적인 단축이 보인다. 읍내 남단에서 해안까지 1.7km나 길게 뻗은 산줄기에는 편안한 산책로와 체육시설, 화원 등이 조성되어 있고, 충혼탑과 6.25반공유적비도 서 있다. 그래도 100m를 넘는 산줄기여서 자전거로 올라가니 주민들이 이런 곳을 자전거로 올라왔느냐고 놀란다. 본격 산악자전거를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산줄기 남단 고지에는 남산정이 우뚝하다. 이곳에도 옛날에는 분명히 망루가 있었을 것이다. 남산정에 오르면 남쪽으로 호수 같은 고성만이 아늑하게 펼쳐진다. 기이하게도 북쪽의 당항만과 고성만 모두 아슬아슬한 지협으로 인해 호수를 겨우 면한 지중해다. 당항만의 지협은 겨우 260m, 고성만은 760m이다. 고성만 중간에는 상하 비사도, 읍도, 연도가 수평으로 도열해 만을 양분하고 있는 모습도 특이하다.

남산공원 초입에 도열한 조선조 송덕비 군. 전국 읍치에 수없이 남아 있는 송덕비들은 조선이 벼슬아치들만 행복한 시대였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남산공원에 조성된 6.25반공유적비와 기념 조형물  

남산정에서 남으로 내려와 생태육교를 지나 잠시 능선을 타면 바로 해안으로 내려선다. 남산줄기에서 단절된 똥뫼산(홀로 있다는 의미의 ‘독뫼’에서 유래했을 듯) 옆 해안은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똥뫼산 동쪽으로는 해안 산책로가 있고 내만 중간에는 예쁜 해상교량이 건넌다. 해상교량을 넘는 재미를 기대했는데 입구에 ‘자전거 출입금지’ 팻말이 길을 막는다. 폭도 넓고 경사도 심하지 않은데 자유의 두바퀴를 막다니….

고성만을 바라보는 1010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통영-거제로 이어지는 14번 국도에 합류한다. 4차로 도로지만 갓길이 넉넉해서 안전하고, ‘바다휴게소’에서 오른쪽으로 빠져 원산천을 따라 벽방산으로 향한다. 거의 해수면에서 해발 405m 안정재까지 올라야 하니 힘든 업힐이 기다리지만 고개 너머에는 또 어떤 풍경, 어떤 길이 있을지 설렘이 앞선다. 이것이 고개의 마력이다.

마지막 사계마을에서 골짜기 왼쪽길로 진입했더니 막판에 안내도 없이 철문으로 굳게 막혀있다(아마도 상수원 보호 때문인 듯). 길을 막는 것은 인체로 치면 혈관을 막는 것… 자유의 방랑자에게는 체력적, 정서적으로 치명적인 절망이다. 마을로 다시 내려와 계곡 오른편 길로 돌아서 오르는 수밖에 없다. 마을 갈림길에는 ‘백방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남산공원 남단 정상에 서 있는 남산정

남산정에서 바라본 고성만. 점점이 섬들이 떠 있는 아늑한 내만이다. 건너편 산줄기는 통영 도산면 일대  

남산공원에서 33번 국도를 지나는 구름다리

남산공원에서 해안으로 내려서면 작은 해변공원이 나온다 

지름길이고 특별한 경관인 해상교량인데 자전거 출입을 막는다

고성만 동북단인 신월리 해안에 조성된 해상 산책로

신월리 해안 데크로에서 뒤돌아본 남산정(오른쪽끝)과 구름다리. 뒤편 산줄기는 고성읍내 서편의 대곡산(531m)~천왕산(583m)  

 사계마을을 지나 '백방산' 이정표를 따라 진입해야 안정재 임도로 이어진다

편백이 뒤섞인 숲길을 꾸역꾸역 오르다 보니 어느새 바다는 저 아래로 잠기고 벽방산 정상의 암벽이 성큼 다가선다. 벽방산 어디 토굴에서 성철스님이 한때 수도를 했다고 해서 기억에 남아 있다. 의상대사 수도처인 의상암도 있는 걸 보면 성철스님이 벽방산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다까지 아우르는 천하를 발밑에 두고 있어 수미산을 방불하지 않았을까.

안정재에는 승용차 한 대와 등산객 한 명이 와있다.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 산을 오르는 측면도 있을 텐데 세속의 뉴스를 시끄럽게 틀어놓고 있다. 몸은 여기에, 마음은 딴 데 가 있으니 이 좋은 곳에서도 등산객 인상이 밝을 수가 없다. 고개 너머로는 안정산업단지의 거대한 저장 탱크와 조선소 크레인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펼쳐지고, 그 너머로는 가조도와 거제도가 중첩된다. 저 바다 역시 수평선은 산 너머로 잠복한, 거의 지중해다.

시끄러운 라디오 소리를 견딜 수 없어 곧장 다운힐이다. 업힐은 몸은 힘들어도 머리가 맑아져 생각을 정리하기 좋다면, 다운힐은 정신이 지금, 여기 바로 발밑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두바퀴와 혼연일체가 되어 지구의 중심이 당기는 대로 페달링마저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뿐이다. 일종의 자연체(自然體)가 구현되는 순간이랄까.

사계마을을 벗어나 업힐 도중 드러난 벽방산 정상부 암벽. 중간 중간 편백숲이 있다 

안정재(405m) 동쪽 조망. 발 아래로 안정산업단지가 보이고 그 너머로 가조도와 거제도가 중첩된다  

안정재에서 벽방산 동쪽을 돌아나가는 다운힐 구간

원래는 소가야 당시 방어성이던 거류산성까지 올라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다음으로 미루고 용산천 따라 들판으로 내려선다. 완만한 경사지에는 마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저마다 동네 어귀에는 마을 이름과 유래를 설명해 놓아 각별한 애향심이 느껴진다.

개울가에 팽나무 고목이 선 곳에는 특별한 돌탑 제단이 있다. 주변의 정촌, 월치, 신은, 도산촌 네 마을사람들이 1720년부터 지내온 ‘마을제사’인 동제(洞祭)의 현장이다. 270년 묵은 팽나무 고목과 돌탑, 정자와 관리동까지 갖춰 유교와 샤머니즘적 전통이 절묘하게 가미된 동제 무대는 처음 본다. 씨족에서도 어려운 이런 공간이 네 마을 공동 소유로 있다는 것은 주민들의 결속력과 자부심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다.

주변의 정촌, 월치, 신은, 도산촌 네 마을사람들이 1720년부터 지내온 ‘마을제사’인 동제(洞祭) 제단. 팽나무 고목이 전통의 깊이를 더해주는 듯 

마을마다 입구에 안내석과 지명 유래를 소개하고 있어 특별한 애향심을 엿보게 한다

용산천을 따라 읍내로 가는 들길  

용산천이 고성천과 합류하는 지점에는 고성군상하수도사업소(왼쪽)가 있다. 이제 읍내가 멀지 않다 

용산천이 고성천과 합류하는 지점에 고성군상하수도사업소가 있고 한쪽에는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둑길은 호젓하고 동쪽으로는 거류산이 우뚝, 남쪽으로는 방금 넘어온 벽방산이 서서히 거리를 벌리고 있다. 송학리고분군도 읍내 저편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읍내 일원은 한 변이 5km 정도 되는 꽤 넓은 평야로, 남으로는 복잡한 해안선의 바다를 끼고 있고 사방으로는 높은 산이 가로막아 고대에는 천혜의 거주지였을 것이다. 반면 이런 입지는 소가야가 왜 여기에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동시에, 끝내 ‘작은(小)’ 나라를 벗어나지 못한 이유도 함께 보여준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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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읍내를 벗어나면 신월리 바닷가의 관광식당가를 제외하고는 14번 국도변의 바다휴게소에 식당과 편의점이 있을 뿐이다. 사계마을에서 벽방산 안정재로 오를 때는 마을회관을 지나 ‘백방산’ 안내판을 따라 좌회전해야 하며, 마을 중간을 지나는 지름길은 상수원으로 인해 길이 막혀 있어 주의한다.

 

고성 일주 2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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