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암산에 올라 세상 조망, 유유자적 분지 방랑

대암산(591m) 정상에서 내려다본 초계분지. 고구마 형태의 긴 타원형으로 산줄기가 완벽하게 감싸고 있다. 분지 저 멀리 달성 비슬산(1084m)과 창녕 화왕산(757m)이 남북으로 희미한 운무 위에 떠 있다. 막 이륙한 패러글라이더가 분지를 향해 날고 있다  

완벽한 분지다. 산줄기는 원형을 이루며 이 기묘한 들판을 철저하게 감싸고 있다. 분지 내의 물을 가둘 수는 없었는지 북동쪽에 도수로 같은 협곡이 작게 열려 있을 뿐이다. 만약 물이 고였다면 백두산 천지를 능가하는 장관이 되었을 것이다. 

규모와 형태에서 양구 펀치볼과 많이 닮았다. 펀치볼은 대암산(1313m), 가칠봉(1242m) 같은 고산들이 에워싸서 마치 분화구처럼 더욱 깊고, 남방한계선을 끼고 있어 군사도로와 군 시설도 많아 지형적 입체감이 대단하고 드라마틱하다. 초계분지는 천황산(688m)을 필두로 미타산(663m), 대암산(591m) 등 200~600m급 산줄기가 둘러싸고 있어서 펀치볼보다 덜 입체적이지만 편안하고 정겨운 느낌마저 주는, 인문지리적 단절감이 감돈다. 어떻게 이런 지형이 생겨났을까. 화산 분화구도 아니고 달 표면에 흔한 운석충돌 크레이터도 아니라면 자연적으로 이 같은 원형 분지가 생길 수 있을까.

초계대공원.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머물던 도원수부가 재현되어 있다 

학계의 조사 결과, 펀치볼과 초계분지 모두 장구한 세월 침식으로 인해 생겨났다고 한다. 마치 분화구처럼 오목한 형태를 이룬 것은 자연이 만든 우연의 일치라고나 할까. 하지만 초계분지는 오래 전부터 운석충돌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계속해서 나왔다.

2020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초계분지를 정밀 조사한 결과 5만 년 전에 발생한 운석충돌로 인해 생겨났다고 발표했다. 연구팀은 깊이 142m 시추코어 조사와 탄소연대 측정을 통해 이를 확인했다. 충돌 당시에는 직경 4km의 크레이터가 생겨났으며 충돌 운석은 직경 약 200m 크기로 추정되었다. 충돌 에너지는 1400메가톤(MT)으로 히로시마 원폭의 8만7500배에 달했다. 이 정도 충격에너지라면 반경 50km는 초토화되고 200km까지도 열폭풍이 몰아쳤을 것이다. 당시는 빙하기이자 구석기시대로 인류는 주로 동굴에서 생활해 멸종은 면했을 것이라는 것이 연구팀의 추정이다. 어쨌든 충돌 이후 한동안은 초계분지를 중심으로 상당한 영역이 거주불가 상태였을 것이다.

초계분지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확인된 운석충돌구로 동아시아에서도 중국 슈엔충돌구와 함께 둘 뿐이다. 세계적으로는 200여개가 알려져 있다.

초계대공원을 출발해 서쪽으로 가는 길. 외곽을 향해 길게 뻗어난 농로가 원경을 과장한다. 오른쪽 두번째 전봇대 뒤가 대암산 정상

운석 충돌 당시에 생겨난 크레이터는 직경 4km라고 하는데 현재의 분지는 장경 6.5km, 단경 4.5km로 이보다 크다. 이는 크레이터를 중심으로 세월 따라 침식이 이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옛사람도 지형이 특이했는지 네 산이 에워싸고 여덟 줄기 물이 흐른다고 해서 사산팔수(四山八水)라고 평했다. 조선중기 학자 서거정은 초계분지를 보고 “사산(四山)은 군(君)을 에워싸고, 팔수(八水)는 마을을 감싸 흐르네”라고 읊었다. 이 지역은 신라 이후 ‘초팔(草八)’ ‘팔계(八溪)’라고 불렸는데 분지 내를 흐르는 여덟 개 하천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보인다. 현재의 초계(草溪)는 초팔과 팔계에서 한자씩 따온 것 같다.

분지 동쪽은 적중면(赤中面)에 속해 ‘초계적중분지’라고도 부르지만 초계면 영역이 훨씬 넓고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일대를 포괄하는 초계군이 있어서 초계분지라고 부르는 게 편하겠다. 분지 명칭조차 정리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마침 적중면 이름은 ‘운석이 적중(的中)’한 곳이라는 의미와 겹쳐 기묘하긴 하다.

들판 중간, 작은 언덕 위에 있는 서낭당터. 금줄이 신성한 장소임을 말해준다

이제부터 이 신기한 분지를 느긋하게 만유한다. 분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대암산에 올랐다가 들판 곳곳을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누빌 것이다.

출발지는 분지 북단에 자리한 초계면소재지의 초계대공원. 체육공원과 함께 한쪽은 권율장군 도원수부가 재현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군사령관(도원수)이던 된 권율 장군이 초계에 주둔한 적이 있는 것을 기념한 것이다. 하지만 주둔지는 이곳이 아니라 분지 서쪽의 율곡면 일대로 추정된다. 이순신 장군이 권율 장군 하에서 백의종군을 명받아 서울에서 걸어온 목적지이기도 하다. 당시 초계군은 지금의 초계면보다 영역이 훨씬 넓었다.

산내천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 농로를 타고 분지 내부로 향한다. 들판은 경지정리가 잘 되었지만 물길이 복잡하게 흘러 바둑판식 배열은 뒤죽박죽이다. 완전한 평지는 아니고 물이 빠져나가는 북쪽으로 향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산으로 뻗어난 길은 점진적인 사면(斜面)을 그려 아득함을 과장한다.

유계마을의 씁쓸한 벽화. 색이 바랜 것도 그렇고 주변에서 보기 힘든 아이들 모습이라 더 그렇다 

들판 가운데 작은 언덕 위 서낭당 터에는 금줄과 비석이 특별한 장소임을 말해준다. 여기에 서면 모든 것이 물러나 있다. 산도, 마을도 훌쩍 물러나 전원 특유의 적막만이 감싼다. 고속도로가 없고 도시가 없으니 무엇보다 차 소리가 들리지 않고 어디서인지, 무슨 종류인지도 모를 새 소리만 은은한 배경음으로 깔린다.

대암산으로 향하는 길에 들린 유하/유계 마을은 한때 초등학교가 있었을 정도로 꽤 크지만 빈 집이 적지 않다. 어쩌다 보이는 사람은 노인뿐이고,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담장에 그린 벽화는 색이 바래고 낡아서 서글프다. 이제는 존재 자체가 없는 아이들의 강강술래 그림도 낡은 앨범 속 추억처럼 더 쓸쓸하다.

마을 한쪽에 있는 태동서원은 근세의 유학자 권용현(權龍鉉, 1899~1988) 선생을 기린다. 선생은 평생 은둔의 삶을 살았지만 사후 그의 학덕을 기리고 계승할 서원을 세워야 한다는 학자들의 요청에 2012년 개원했다. 불과 10년 전에 세워진 서원이라니 놀라운 일이다. 전통과 일상에 발 디딘 유학의 엄청난 힘과 관성, 짙은 그림자를 실감한다.

최근인 2012년에 세워진 태동서원. 유학의 전통이 참으로 면면하다 

유계마을을 벗어나 원당마을 방면으로 대암산에 접근한다. 산불감시를 위해 예전부터 정상까지 임도가 나 있었고 최근에는 정상부에 패러글라이딩 이륙장도 조성되었다. 겨울 평일인데도 패러글라이더가 허공에 떠 있는 걸 보면 임도를 오가는 차량이 있을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 원당마을이 해발 100m 정도여서 정상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지만 이는 착각이다. 급경사 업힐이 한동안 계속되고 해발 400m 이상 북사면에는 잔설까지 남아 있으며 업힐만 4.6km에 달한다. 그래도 점점 전모를 드러내는 분지 조망은 압권이다.

주능선 안부(490m)에는 예전에 없던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는데 국내유일의 운석충돌구를 보러오는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700m로 경사는 갈수록 심해져 정상 직전에는 20%를 넘는다.

예상대로 정상에는 패러글라이더들이 모여서 이륙 준비를 하고 있고 산불감시초소에는 산불지기가 보인다. 이륙을 준비중이던 패러글라이더는 자전거로 올라온 나를 보고 대단하다고 감탄했지만 내게는 발 디딜 데 없는 허공으로 뛰어드는 그들이 더 대단하다.

대암산 가는 길목의 안내판. '운석충돌구 전망대' 표기가 눈에 띈다  

뒤편 전봇대 왼쪽이 대암산 정상이다. 원당마을을 거쳐 올라가게 된다

대암산 업힐 도중 점점 전모를 드러내는 분지 모습에 가다서다를 반복한다 

발아래 거대한 운석충돌구가 잠겨 있다. 이건 ‘합천의 풍경’이 아니라 ‘지구적 경관’이다. 옛사람들도 이 땅을 특별하게 여겨 주변에 여러 산성을 쌓고 지켰다. 지금 서 있는 대암산 정상에도 둘레 540m의 초팔성이라는 작은 성이 있었다. 조사결과 5~6세기 대가야가 처음 쌓았고 후에는 신라가 차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분지 남쪽의 미타산 정상에 있는 미타산성은 둘레 2km의 거성이었다. 백제가 호시탐탐하다 의자왕 시절 윤충 장군이 함락한 대야성(大耶城)을 합천읍내로 보는데, 대야(大耶)는 ‘크다’는 의미로 ‘큰 들’이라는 뜻의 대야(大野)와 통하고, 일대에서 넓은 들은 초계분지뿐이다. 오래 전 처음 이곳에 올랐을 때 산불지기에게 들은 얘기인데, 주민들은 초계분지 전체가 대야성이라고 본다고 했다. 일리 있는 견해라고 생각된다. 산이 둘러싸고 있는 천혜의 요지이면서 비옥한 들판인 이 분지에 거점을 두지 않을 리가 없다.

대암산 정상 조망은 대단히 탁월해서 초계분지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서쪽으로는 지리산까지, 북으로는 가야산까지 경남 서북부 산야가 훤하다. 적침에 민감했던 고대인들이 이곳에 산성을 쌓은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발아래로 푹 꺼진 분지와 하얗게 눈을 인 지리산, 가야산을 바라보며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대암산 정상석에 기대섰다. 오른쪽에는 이륙을 준비중인 낙하산들이 보인다

대암산 정상의 패러글라이더들. 초계분지를 향해 이륙하는 멋진 입지다

왼쪽 멀리 하얗게 눈을 인 지리산 천왕봉(1915m)이 보인다. 오른쪽 가까운 준봉은 황매산(1113m)

대암산 북쪽 조망. 황강을 따라 형성된 합천읍이 가깝고, 오른쪽 뒤에는 오도산(1120m)이 오똑하다. 왼쪽 멀리 덕유산(1614m)도 희미하게 보인다  

대암산에 패러글라이더들이 있을 때는 이들을 실어나라는 트럭이 오가기 때문에 특히 다운힐 때 조심해야 한다. 그나마 적막강산이라 차량소리가 미리 들려서 대비하기는 좋다.

다시 농로를 타고 분지 중심부로 향한다. 양림리에 있는 월화당(月華堂)이 들판 가운데 격조 있게 자리하고 있다. 월화당은 초계분지의 중심부로, 지질학자들이 조사한 운석의 충돌지점 일원이기도 하다. 마을에서 동떨어진 들판에 북향하고 있는 고옥은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노극복(盧克復, 생몰년 미상)이 낙향해서 머문 곳이다. 월화당 뒤편에 있는 주필각(駐畢閣)은 인조가 타고 온 말을 매어 놓았던 곳이라고 한다. 대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는 볼 수 없으나 낮은 담장 너머로 일견이 가능하다.

역시 이 터는 범상치 않다. 운석이 충돌한 핵심지여서 그럴까, 분지의 중심부여서 그럴까. 적막의 심도(深度)가 다르고, 사방으로 멀찍이 물러선 산줄기는 마치 기댈 데 없는 허무마냥 고독마저 심화시킨다. 노극복이 이곳을 택한 것이 우연인지, 원래 토지가 있어서인지 모르나 탁월한 선택이다. 보통 이름난 고옥은 산이나 언덕에 기대기 마련인데 홀로 당당하고 꿋꿋한 독립성도 빛난다. 공을 세우고도 벼슬을 마다한 채 학문에 힘쓴 그의 심성을 미루어 알겠다.

수더분한 농로를 따라 분지 중심부로 향한다. 오른쪽으로 완만한 경사가 져 계단식 논을 이루고 있다  

초계분지 한가운데 자리한 월화당과 주필각(뒤)

깊이가 다른 적막감이 좋아 월화당 앞에서 한동안을 머물렀다

월화당 뒤편의 양림1저수지에 미타산 그림자가 어렸다

미타산에 안겨 있는 두방마을 가는 길

두방마을의 반듯한 돌담 

분지를 에워싼 외륜봉 중 천황산이 가장 높지만 뒤로 살짝 물러나 있다면, 분지에 근접해서 진산처럼 느껴지는 것은 단연 미타산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안우와 안극가를 제향하는 저존재(著存齋)는 미타산 북쪽 기슭인 두방마을에 있다. 돌담이 정겨운 마을은 어쩔 수 없이 북향이나 산줄기가 에워싸 아늑한 느낌을 준다. 저존재를 지나 등산로 입구까지 올라가면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사방으로 뻗어난 가지가 풍성해서 영적인 분위기마저 풍긴다. 수령 420년, 높이 26m, 둘레 4.7m의 노거수로 임진왜란 즈음에 생명을 시작해 지금껏 생존해 있으니 경이롭다. 100년을 못사는 인간이 수백살 고목을 경배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곳에 붙박힌 고목은 100년이라도 자유롭게 사는 인간이 부러울지도 모르겠다.

심산의 그윽함이 느껴지는 저존재

높이 26m, 수령 420년의 두방마을 은행나무 노거수. 수많은 가지가 퍼져나가 위용과 영기가 느껴진다 

이제 출발지로 돌아간다. 미타산과 천황산 북사면에는 잔설이 희끗하고 들판에는 아직 봄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별개의 면사무소가 있는 적중면소재지는 들판 중에 수백가구 큰 마을이지만 숱한 빈집 때문일까, 온기는 감돌지 않는다. 여기서 초계면소재지까지는 겨우 1km. 유하천 둑방길의 느티나무 가로수가 세월 앞에서도 느긋해 보인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tip

초계면소재지에 식당과 편의점이 있고, 숙박업소는 인근 합천읍내나 낙동강자전거길이 지나는 적포교 서단의 청덕면 앙진리로 가야 한다. 분지 내에는 포장된 농로가 잘 나 있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여도 좋다. 다만 중심부에 있는 주필각 및 월화당과 두방마을의 은행나무는 들러보길 권한다. 초계분지의 전모를 보려면 힘들어도 대암산을 오르는 수밖에 없다.

합천 초계분지 2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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